소설리스트

황좌의 게임-97화 (97/177)

# 월광 소나타 1 #

“와... 이쁘다. 근데..내가 여길 어떻게 가.”

라일락의 풀죽은 목소리에 시녀가 빼액 소리쳤다.

“왜 못 가요? 누가 황비님 가둔 것도 아닌데!”

“하지만..”

“게다가 보세요. 좋은 취지의 행사잖아요. 마침 가면무도회니까 황비님을 알아보는 사람도 없을 거고요! 어머어머, 이 가면 너무 귀엽다!”

남편은 전쟁터에서 고생하는데, 연일 파티나 벌였던 7황비의 허물이 알려지자 수도 전역에서 개최되던 사교파티가 뚝 끊겼었다. 그래도 신전에서 주관하는 행사나 예식 같은 건 열렸는데, 평소라면 참석할 엄두도 내지 않았을 라일락이지만, 이번엔 좀 흔들린다. 이렇게 예쁜 드레스도 있으니까.

“..그럴까?”

“그럼요! 엄청 예쁠 거라구요! 이 레이스 좀 보세요. 어쩜 좋아! 보통 솜씨가 아니죠? 아주 비쌀 것 같아요!”

왕가에서 자란 라일락이 보기에도 이 드레스는 아주 수준이 높은 것이었다. 여자가 가장 비참할 때가 언제던가? 새 드레스가 생겼는데, 입고 갈 곳이 없을 때 아닌가?

“그런데 V가 누구죠? 짐작 가는 사람 있으세요?”

“모, 몰라.”

라일락은 미소 지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떠오르는 게 있긴 하지만, 무조건 모른다고 잡아뗄 거다.

혼자 간직한 비밀에 괜히 부끄러움이 양 볼로 올라오는 라일락. 그녀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

.

.

-남의 여자를 탐하지 말라.

‘미친놈.’

-천벌을 받을 것이니! 심지어 아버지 여자 아니냐? 케케케. 너 진짜 지옥 간다.

‘좀 닥쳐! 집중 좀 하게!’

파티 준비가 한창이었다.

기아에 시달리는 벨버른 백성들을 돕고자 열린 모금행사는 오늘을 마지막으로 끝난다. 이제 모금한 돈을 들고 사제들이 파견되면 몇 해는 그곳에 머물게 될 것이었다.

“..그래서 가면무도회를 선택했답니다. 세상엔 내가 한 일을 감추고 싶은 이들이 아주 많거든요. 어떤 이는 가족 눈치도 봐야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부자라는 걸 주변에서 모르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종알종알 설명하는 가루비.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신전 관계자들은 손님처럼 화려하게 꾸미지 않지만, 그녀는 단출한 사제복만으로도 천사의 날개를 걸친 것 같았다. 물론, 이 남자에겐 그녀가 뭘 입든 관심 밖이었지만.

“그래서 얼마나 모일 것 같아?”

돈 좀 벌었냐? 라는 표정에 가루비가 흠칫 물러났다.

“저도 몰라요.”

왠지 말했다간 번에게 뜯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녀가 번을 돕는 쪽이라 해도 아직은 신전이 우선이었다.

“쳇.”

머릿속이 복잡해서 완벽한 연기가 안 됐나 보다.

-그냥 확! 막! 자빠뜨려서 그 레터링인지 뭔지 빼내! 이미 너에게 호감은 있는 것 같던데? 일단 벗겨 먹어!

다 이놈 때문이다.

이랬다저랬다 놀리는데 재미 붙였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벗겨 먹..”

“네?”

아차,

“아닙니다.”

말이 헛나왔다. 성녀의 눈이 게슴츠레하게 변하자, 번은 주먹을 입에 대고 헛기침했다.

“크흠! 아니라니까요.”

태자긴 해도 이런 신전 공식행사에선 성녀를 높여주는 게 좋다.

“······.”

두 팔로 가슴을 가리며 슬금슬금 물러나는 가루비를 번이 씁쓸하게 바라보았다. 하필 그건 또 정확히 들었나 보다.

“..바빠서 이만!”

후다닥 저쪽으로 뛰어가 버리는 가루비를 보다가 번은 품에서 가면을 꺼냈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작은 유리병도 꺼낸다.

포옹, 마개를 따고, 벌컥! 원샷!

「매혹 성분을 추출합니다.」

「확인되지 않은 마력이 육체에 스며듭니다.」

“하아..”

'융의 향수가 효과가 있어야 할 텐데..'

-아, 그냥 쓰러트리래도!

'넌 좀 조용히 좀 해! 도움이 안되요. 도움이..'

-내가 뭘! 돈 주고 못사는 금쪽같은 조언을 해주고 계시는구먼! 하여간 인간들은 도와줘도 고마운 줄을 몰라요! 에잉! 배은망덕한 자식 같으니라고!

"쯥.."

이놈은 당분간 차단해야겠다 생각한 번이 사람들을 훑었다.

파티장은 아직 좀 이른 시간임에도 북새통이었다. 최근 파티가 뚝 끊어진 터라 즐길 거리가 사라진 파티중독자들이 전부 참석했나 보다. 설명우 식으로 말하자면 서울 쪽 나이트클럽이 전부 막혀서 지방으로 원정 뛰러 온 느낌이랄까? 아무튼, 삼삼오오 모여 친분을 과시하는 그들 덕에 분위기는 좋았다.

-신전에서 주최하는 파티라 고리타분할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괜찮네요?

-그렇죠? 저도 와서 놀랐어요.

-어머, 저기 바이오 남작님 마차 아닌가요?

-맞아요! 어서 가봐요!

아이러니하게도 7황비 덕분에 이번 모금행사는 대성황을 이뤘다.

-음, 아니네?

-가까이에서 보니, 다르네요. 말도 후줄근하고. 바이오 남작님 마차는 더 고급스러워요.

아이돌 따라다니는 사생팬이라도 되는듯한 여자들을 잠깐 지켜보던 번. 막 도착한 마차를 본다. 가문의 문장도 없고, 말도 비리비리하다. 보통 저런 마차는 돈으로 잠깐 빌려 쓰는 것인데, 일종의 흔한 렌터카라 보면 된다.

그러나 마차에서 내리는 여인은 흔하지 않았다. 갑자기 주변이 화악-! 밝아지는 기분이 들 정도로 아름다움을 물씬 풍기는 그녀. 토끼 가면으로 얼굴의 반을 가렸음에도 미인 특유의 아우라가 풍겼다.

-누구죠?

-모르겠네요. 저런 사람이 있던가?

수도의 셀럽은 다 꿰고 있는 그녀들이었지만, 저 여자는 그녀들의 기억창고에 없었다. 오로지 한 남자만 여자를 알아보았다. 마차에서 내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가만히 서 있는 여자에게 다가서는 사내.

“부디 에스코트할 수 있는 영광을 제게 주시겠습니까?”

번은 벨버른을 떠날 때 고민했었다.

신분을 까고 만나는 것이 수월할까? 숨기고 만나는 것이 나을까? 어느 쪽이든 자신은 있었지만,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마음속은 모른다고 조금이라도 확률이 높은 쪽을 선택하는 것도 중요했다. 그렇게 고민하던 그때, 기억 저 구석에 찌그러져 있던 추억이 하나 불쑥 솟았다.

-형! 왜 똥차 타고 다녀요? 망했어요?

추석에 할아버지 댁으로 친척들이 모여들었다. 늦은 밤 마당에서 놀던 어린 명우가 이제 막 도착한 사내에게 물었다. 친척 중에 아주 잘 나가는 형님이 한 분 계시는데, 어른들은 그 형을 압구정 날라리라고 불렀다. 뭐라 하든 명우눈엔 수입 오픈카를 타고 다니는 멋진 형님일 뿐이었다. 만날 때마다 용돈도 듬뿍 줬으니까. 완전 산타클로스와 동급 아닌가!

그런데 그날은 무슨일인지 한눈에 봐도 멀쩡히 굴러가는 게 의심스러울 낡아빠진 조그만 차를 타고 온 것이었다.

-하하! 아니, 망하긴! 땍! 재수 없는 소릴!

-근데 왜..

-소개팅 끝나고 바로 왔거든.

-에엥? 여자 만났어요?

-그래.

-그럼 더 멋진 차를 타야 하는 거 아니에요?

-후후.. 그건 네가 아직 어려서 그런 거야. 진정한 고수는 말이지.

초반에 모든 패를 다 까면 안 된다 했다. 까면 깔수록 양파처럼 매력이 계속 나와야 홀딱 빠진다든가? 눈이 매워 어디로 끌려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뭐, 이런 수법은 드라마만 봐도 자주 등장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어린 명우는 그날 형님이 세상에서 제일 멋졌다.

“부..탁할게요.”

잠깐 망설이던 라일락이 번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

자박 자박.

둘은 말없이 정원을 거닐었다.

“······.”

“······.”

조용한 정원.

하지만 번의 예민한 귀엔 콩닥콩닥 그녀의 주체할 수 없는 심장이 그대로 전해져왔다.

라일락 또한 번을 한눈에 알아봤다.

정체불명의 사내 V.

대체 이 사람은 누굴까? 라는 눈빛으로 힐끗힐끗.

“알렉산드로 왕께서 이 정원을 만들 때, 처음엔 이런 용도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

느닷없는 이야기에 그녀가 번을 바라보았다.

“저 미로에 죄수들을 가둬두고, 맹수를 풀어놓았다고 하죠. 빠져나오면 살려준다는 조건을 내걸고.”

정원은 엄청나게 넓었다. 축구장 4개 정도 합친 크기였는데, 호수까지 있으니 시골뜨기가 자칫 길이라도 잃으면 낭패를 볼 거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한쪽엔 벽을 쌓아 미로까지 만들어뒀다. 나무 덩굴로 덮인 초록의 벽을 까보면 아직도 그때의 죄수들이 흘린 핏물이 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번의 이야기와 함께 잔잔히 밤이 깊어간다.

곳곳에 횃불과 마법 전등이 비치되어있다고 해도 모든 곳을 밝히진 못했다. 그래도 다른 날보단 시야가 밝다. 오늘은 보름달이 휘영청 떠 있으니까.

“악취미긴 해도 성군으로 알려진 알렉산드로 왕이 그리했던 이유는.”

번이 잠깐 말을 멈췄다가 빙긋 웃었다. 여우 가면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하관의 웃음이 참으로 매력적이다.

“죽는 순간까지도 희망을 잃지 말라는 뜻이 아니었을까요?”

아직도 지식인들 사이에선 의견이 분분하지만, 알렉산드로 왕이 그저 정무에 시달리며 받은 스트레스를 풀고자 벌인 일은 아니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제게..”

라일락의 걸음이 멈췄다.

“왜 이러세요?”

열넷 어린 나이에 끌려와 독수공방 5년째.

에비뉴 황제는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놀랍게도 24황비라는 직위를 가졌지만, 아직도 그녀는 처녀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맘 얼마나 허하겠는가? 한데 느닷없이 나타난 사내 하나가 막을 틈도 없이 비집고 들어와 빈 곳을 채워갔다. 그제도 못 잤는데, 어제도 한숨을 못 잔 라일락. 이리 움직이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

그녀를 잠깐 바라보던 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정월 대보름처럼 동그랗고 환한 달이 은은한 빛을 뿌려주고 있었다.

“예뻐서..”

번의 중얼거림에 라일락이 움찔했다.

“달이 예뻐서 그런데 한 곡 추시겠습니까?”

꽤 걸어와서 그런지 주변에 인적은 없다.

달빛이 있다지만, 사방이 어두우니 멀리서 봐도 잘 보이지 않으리라.

“무례하군요..”

그녀의 눈이 엄하게 변했다.

“나는 당신이 누군지도 몰라요.”

번은 아무렇지도 않게 바로 대답했다.

“여우입니다.”

“······?”

손가락으로 자신의 가면을 가리키는 그 모습에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어이없다는 듯 입을 벌리고 멍하니 서 있는 그녀에게 손을 내미는 번.

“당신은 토끼 아닌가요?”

알렉산드로 대왕의 미로에 갇힌 듯 답답한 삶. 그런 그녀의 일상에 작은 뒤틀림이 생겼다. 그 틈을 잡아 벌리려는 듯 본능적으로 뻗는 손.

“걱정 마세요.”

닿자마자 그녀의 몸이 후욱-! 번에게 끌려갔다.

“잡아먹지 않을 테니.”

여우와 토끼가 발을 맞춰 움직인다.

귓가를 간질이는 숨결에 그녀의 솜털이 곤두섰다. 불어오는 바람도 황홀한 주변 풍경도 좋았다. 누군가에겐 무섭게 느껴질 이 밤이 지금 그녀에겐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무대였다.

그래, 토끼와 여우가 어울려 춤 한번 추는 게 죄는 아니지 않나?

-느껴지는 게 없냐?

‘전혀.’

-너한테 홀딱 빠졌는데? 근데 왜 아무 징조가 없냐?

‘다른 조건이 필요한 건가?’

이쯤 되니 이젠 페트릭을 의심할 지경이 되었다. 어렵지 않을 거라 했지 않은가? 근데 이게 뭔가? 차라리 전쟁터에 나가서 싸우는 게 더 쉽겠다.

번이 라일락의 허리를 감싼 손에 힘을 주고 빙글 돌아섰다. 그녀의 드레스가 넓게 벌어지며 풍성하게 펄럭였다. 그에 맞춰 드러난 종아리.

-다리에도 없네. 쳇, 속바지까지 입으셨어!

달빛이 내린다.

달의 여신이 내린 은총이라 했으니, 어떤 특징이나 변화가 있어야 하건만. 설마 더 은밀한 곳까지 뒤져봐야 하는가?

‘좀 떠봐야겠어.’

번의 목소리가 듣기 좋게 울렸다.

“죽을 날을 기다리며 감옥에 있는 것이 나을까요? 맹수에게 잡아먹히더라도 탈출할 수 있는 저 미로가 나았을까요?”

자박자박 걷는 두 사람은 느리지만, 흥겹게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 음악 따윈 필요 없다. 가끔씩 불어오는 바람, 풀벌레 찌르르 우는 소리, 저 멀리 무도회장에서 간간이 터지는 웃음소리가 전부 리듬이 되었으니까. 거기에 더해 라일락의 심장이 비트를 준다.

콩, 닥, 콩, 닥.

“세상일이 다 그렇게 이분법으로 흘러가진 않아요.”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대입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번의 이야기가 꼭 그녀를 두고 하는 것 같았으니까.

우뚝.

춤이 멎었다.

번의 여우 눈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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