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리블 2 #
“후우..”
페트릭의 한숨이 깊다. 막상 꺼내려니 여러 회한이 교차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미 내놓기로 했던 일. 마음먹었을 때 미련은 빨리 떨치는 게 좋다.
“저희 벨버른 왕가에서는 달의 축복을 받아 태어난 여자아이의 몸에 레터링이 새겨집니다. 물론, 그 아이가 태어나면 이전 소유자의 몸에선 지워집니다. 오직 한 육체에만 깃드니까요.”
“문신 같은 건가?”
“비슷하지만, 다릅니다. 매달 보름달이 뜨면 레터링의 위치가 바뀌니까요. 문신은 새긴 자리에 영원히 남지 않습니까?”
“아.. 그런가? 그럼 여자아이에게만 계승되는 이유가 있나?”
“달의 여신이 내리신 은총이니, 아무래도 여자아이가 음기를 품기 쉬워 그렇다고 알고 있습니다.”
쓰게 웃던 페트릭은 이내 괴로운 듯 창가로 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전쟁통에 대가 끊어졌지만, 그래도 레터링을 지닌 아이만은 지켰습니다.”
그는 본래 에비뉴의 황제와 일전을 벌인 뒤 패하면 죽으려 했다. 그러나 왕국은 잃었어도 대대로 받들던 신의 은총은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이제와 생각해보면 유명무실해지긴 했어도 그건 일종의 사명이자,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라 해도 좋았다.
“으음..”
번은 갑자기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9살 때였나? 10살 때였나? 아버지가 벨버른을 정복하고 돌아왔을 때, 두 여자를 데려왔었다.
그럼, 그때 그 중 하나?
하나는 아이를 안고 있었으니..
“라일락?”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워낙 어린 나이에 끌려온 망국의 공주였지만, 그의 비밀지하 황실 가계도에 추가했었으니까.
“그렇습니다. 라일락 드 오리온 살룬. 이제는 에비뉴의 24황비라고 불리는 그 아이지요.”
아버지와 약속한 10만의 군대.
그 무모했던 약속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
.
.
꿔다 놓은 보릿자루는 식구들이 배를 곯아야 거들떠라도 본다. 하지만 에비뉴엔 너무도 많은 황비가 있었고, 기러기 아빠나 마찬가지인 황제가 돌아오면 동침전쟁이 벌어지니, 그쪽으로 관심이 없는 황비는 자연히 도태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그러했다.
14살 어린 나이에 잡혀 와, 이제 내일모레면 스물이 된다. 꽃다운 사춘기를 오직 여기 비妃궁에서만 갇혀 지내다 보니, 그녀는 언제나 외롭고 고독했다. 시녀라곤 고작 하나. 처소엔 언제나 침묵과 정적만이 가득했고, 취미를 붙여보려 해도 마땅한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권력에 뜻이 있어 황제의 씨를 받고자 노력하는 것도 아니었다. 볼모나 다름없는 삶. 그녀에겐 꿈도 희망도 없었다.
“아..”
그나마 이렇게 볕 좋은 시간에 정원을 거니는 것이 유일한 낙이라면 낙일까? 한데, 어제까지만 해도 파릇파릇 예쁘게 피었던 돌담의 꽃이 완전히 시들어버린 게 아니겠는가?
“너도 나를 떠나는구나..”
어릴 땐 왕국의 공주로 남부럽지 않게 자랐는데, 이제 그녀에게 남은 거라곤 아버지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태자란 사람을 따라다니며 바빠 얼굴 볼 시간조차 없었으니, 그녀는 기댈곳 하나 없었다.
“여름이 벌써 가네.”
벨버른과는 달리 에비뉴의 여름은 선선하다. 대신 겨울이 춥고 길다. 그래서일까? 벨버른의 그 여름이 아스라이 떠오를 때면 가슴이 쿡쿡 쑤시는 기분이 들었다.
자박.
그녀의 작은 발이 집 밖을 향했다.
오늘은 울적해 인근을 한 바퀴 돌아볼 요량이다. 물론 그런다고 해도 마주치는 사람은 없겠지만, 추워지면 이마저도 힘들 테니.
“······.”
막 집과 밖의 경계를 이루는 담을 지나 옆으로 도는데,
코옹!
“아앗-!”
그녀의 이마가 뭔가에 닿았고, 반탄력에 그대로 벌러덩 넘어가려는 순간,
“이크!”
누군가의 손이 그녀의 손목을 그림처럼 잡았다.
덕분에 바닥을 구르는 꼴을 면한 라일락. 하지만 고맙다곤 할 수 없다. 그 때문에 넘어질 뻔한 거니까.
“누구..”
비궁은 대체로 황궁 내에서도 인적 드문 외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따금 필요물품을 주러 오는 마차가 아니면 일반인은 여기까지 올 수도, 오지도 않는 거다. 그럼 이 사람은?
“괜찮으십니까?”
사내는 잘생겼다. 그래,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 수년간 그녀가 본 또래의 남자는 이 사람이 처음이었으니까.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그녀의 고개가 갸웃할 때, 사내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가녀린 라일락의 몸이 훅 딸려왔다. 자세는 바로잡을 수 있었지만, 그 덕에 둘의 거리는 더욱 가까워졌다.
“아, 으음.. 고마워요..”
깜짝 놀란 라일락이 뒷걸음질 치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 부주의였습니다. 길을 잃어 급한 마음에 헤매다 보니..”
사내의 눈이 라일락의 전신을 스윽 훑었다.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그런 것 같아요.”
다행이라는 듯 한숨을 내쉰 사내가 묻는다.
“혹시 저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아십니까?”
“저쪽은 23황비님 거처로 가는 길이고, 저기 저 방향은 수도에요.”
“아..! 그렇군요! 이거, 큰일 날 뻔했습니다. 저는 이쪽으로 가려고 했거든요!”
사내의 넉살에 라일락은 하마터면 속없이 풋! 웃을 뻔했다.
‘귀여워..’
낯선 남자와 이렇게 얘기해본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경황이 없어 이제야 눈치챘는데, 사내의 옷차림이 허름하다. 신발도 더럽고..
‘일하는 자인가?’
궁엔 엄청나게 많은 일꾼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때 문득,
-호호호호! 얼마 전에 내가 시종을 새로 들였는데 말이지. 그자가 어찌나 힘이 좋던지! 아침에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고생 좀 했다니까? 밤에 천국을 몇 번이나 오갔던지!
오래전 에비뉴에 처음 왔을 때, 2황비가 주최한 사교모임에 초대받아 간 적이 있었다. 그때 어떤 후작가의 귀부인이 했던 말이 갑자기 떠오르는 건 왜일까?
“괜찮으십니까?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아, 아니에요.”
2황비가 남의 자식을 키우고 있었다는 소문이 돌고 한바탕 뒤집어진 뒤론, ‘애인’을 자랑하는 귀부인은 없었지만, 그래도 알음알음 누가 어떻고, 누가 어떠네 하는 소식들은 시녀들을 통해 돌아다니기 마련이었다.
화르륵..
그녀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솨아아아.
그녀의 볼만큼 붉은 나뭇잎들이 바람에 휘날리고, 그 상쾌함과 약간의 서늘함에 정신을 차린 라일락.
“그럼..”
아차한 그녀는 외간남자와 이러고 있으면 안 되겠다 싶었는지 급히 돌아서 종종 뛰어가 버렸다.
남겨진 사내는 잠시 그 자리에 머물다 걸음을 옮겼다.
-봤냐? 봤어?
그의 머릿속에 악마의 음성이 울렸다.
“아니.”
-쳇. 아무래도 옷 속에 감춰진 것 같은데?
그렇다. 사내는 번이었다.
“흐음..”
골치 아프게 됐다. 처음엔 물건이라 생각하고 쉽게 생각했건만.
페트릭은 번에겐 믿을 수 있는 충신 중 하나이자, 쓸모가 많은 사람이었다. 당연히 그의 딸을 함부로 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이 ‘레터링’ 또한 훔쳐오려면 까다로운 조건이 붙었다. 게다가 그녀의 신분만 아니라면 다양한 방법을 구사할 수 있겠지만, 라일락은 24황비다. 즉 아버지의 여자란 거다. 서로 죽고 죽이는 암투 가득한 황실에서 그녀를 어머니로 대할 필욘 없다곤 해도, 추문이 나서 좋을 것도 없었다.
“그래도.. 향수는 효과가 있는데?”
번은 똑똑히 느꼈다. 이렇게 대면한 건 오늘이 처음이었지만, 그녀의 눈동자에서 읽은 것은 분명한 호감이었다.
-그러면 뭐해? 강제로 벗길 수도 없고. 이제 어쩔 건데?
목, 팔, 발목, 얼굴, 정수리까지. 그녀와 일부러 부딪히며 얻어낸 정보엔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위치에 레터링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안쪽 어딘가에 있다는 건데, 황비의 은밀한 몸을 어떻게 보나?
“생각해봐야지.”
이거 생각보다 쉽지가 않다.
-그냥 밤에 침입해서 확! 해버리면 안 되나?
“그녀의 진심이 필요하다 잖냐.”
-에잉! 답답해! 그거 갖다 뭐할라고 이 고생인데?
불도저 같은 악마는 모를꺼다. 이 중요한 실마리를.
이건 결정적인 순간에 써먹을 수 있는 무기이기도 하다. 군주 입장에서 민심을 움직일 수 있는 수단은 억만금을 들여서라도 보유하는 것이 좋으니까.
“보자고. 라푼젤께서 언제 또 탑에서 내려오실지.”
-라푼.. 뭐?
번은 대답 없이 뒤를 한번 돌아보곤 걷는다.
어차피 한번에 얻을꺼라 생각하진 않았다. 차근차근 계단을 밟고 올라가듯 나아갈 것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수도에 온 김에 여러 가지 해야 할 일들을 마쳐야 했으니까.
다음날.
라일락은 눈 밑이 새카만 상태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은 깼지만, 머엉- 침대에 걸터앉아 움직일 줄 몰랐다.
“황비님! 일어나셨어요?”
예의상 묻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곧 문이 열린다. 사라다는 30대 후반의 시녀인데, 벌써 애가 다섯이었다. 푸짐한 몸으로 어찌나 빠르게 움직이며 정리정돈을 잘하는지, 그녀를 보고 있으면 왜 살이 안 빠지나 의아할 정도였다.
“에구머니나? 황비님 얼굴이 왜..”
함께 한 지 5년이 훌쩍 넘어서 이젠 엄마와 딸 같다.
“악몽이라도 꾸신 거에요?”
“아니야. 잘 잤어.”
“잘 잔 사람 안색이 아닌데요? 무슨 고민 있어요?”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이리 변하니 놀랄 수밖에. 황비의 건강에 이상이 생기면 바로 황궁에 보고해야 하는 것도 그녀의 소임 중 하나였다.
“누우세요. 일단 한숨 주무셔보고, 그래도 컨디션이 나아지지 않으면 사람을 불러야겠어요.”
“괜찮대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시녀의 손길을 거부하진 않았다.
그녀가 다시 침대에 눕자, 시녀가 두툼한 이불을 그녀의 턱까지 덮어주었다.
“계절이 바뀌려 하니, 감기가 오려나 봐요. 오늘 아침은 따듯한 버섯 스프로 준비할게요. 조금만 더 쉬세요.”
손으로 이마를 짚어 열이 있나 확인한 시녀가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방에서 나갔다. 라일락은 시녀가 나간 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새우처럼 몸을 웅크렸다.
‘내가 왜 이러지?’
잡생각이 너무 많아, 간밤에 한숨도 못 잤다. 아니, 조금 잔 것 같긴 한데, 언제 잤는지 느끼지도 못했다.
‘자꾸 생각나.’
그가 손을 잡았을 때. 그때, 그 순간이 잊히질 않는다.
“아우..”
잊으려는 듯 베개에 얼굴을 비비며 돌아눕는 라일락.
그런데,
“······?”
닫혔던 문이 다시 열렸다.
“황비님!”
“우웅..?”
시녀가 커다란 상자를 들고 들어오는 게 아닌가?
“이것 보세요! 방금 제가 올 때까지만 해도 없었는데, 나가보니 이런 게 있지 뭐에요?”
거의 어른 몸만한 상자는 베테랑 시녀가 감당하기에도 버거워 보였다.
낑낑대며 겨우 침대 앞에 상자를 내려놓자,
쿠웅-!
바닥에서 들리는 그 소리가 라일락의 뛰는 심장과 겹쳤다.
“예뻐..”
“그렇죠? 이게 뭘까요?”
상자는 리본으로 매듭이 지어져 있었고, 시중에선 흔히 볼 수 없을 만큼 고급스러웠으며 좋은 향까지 풍기고 있었다.
“..잘못 온 걸까? 23황비님 물건이 이쪽으로 왔다거나 말야.”
그러면서도 라일락은 침대 가장자리로 기어가서 앉았다. 호기심 가득한 초롱초롱한 눈. 선물을 앞에 두고 침착할 수 있는 여잔 없다.
“확인해보면 알겠죠. 우선 열어볼까요?”
“그럴까?”
귀여운 표정으로 끄덕이는 라일락을 보며 시녀는 푸근하게 웃곤 상자의 리본을 풀었다.
사르르륵.
“어머나-!”
시녀의 감탄이 터졌다.
상자 안엔 드레스가 있었다. 그것도 너무 아름답고, 눈처럼 새하얀. 뿐인가? 머리 장식과 귀걸이, 팔찌와 반지까지 투명한 보석함에 따로 들어 있었다.
“어쩜 이렇게 예쁠까!”
시녀가 빨간색 구두를 들고 라일락에게 내밀었다.
“누가 봐도 황비님 거에요. 발에 꼭 맞을 것 같지 않나요?”
“으, 으응..”
23황비는 그녀보다 키도 크고, 몸집도 퉁퉁해서 이런 구두와 드레스는 못 입을 거다.
“여기요! 이거! 편지가 있어요!”
시녀가 호들갑을 떨며 상자의 안쪽 옆면을 가리켰다. 떨어지지 않게 붙여놓은 큼지막한 편지봉투가 보인다. 에비뉴에 와서 처음 받아보는 선물에 라일락의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다.
“내가.. 읽어도 될까?”
“그럼요! 이건 황비님 거라고요!”
“아니면 어떡해?”
“그럼 잘 접어서 다시 붙여놓죠. 뭐. 빨리 보세요! 어서요!”
흥분한 시녀를 보며 풋, 웃던 라일락이 편지를 뜯어 안의 내용물을 꺼냈다.
사각형의 얇은 양피지엔, 그리 많은 글자가 쓰여 있진 않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그녀의 가슴을 흔들어대기에 충분했다.
「초대장
6월 4일 오후 7시. 황궁 내 알렉산드로 정원 연못 남쪽.
가이아 신전 주최 모금 가면무도회.
당신을 초대합니다. - 당신의 은혜에 고마워하는 V가.」
“어머머머! 어머머!”
시녀가 말이 안 나오는지 어버버 거릴 때, 라일락이 상자 구석에서 가면 하나를 꺼냈다. 이마부터 콧등 아래까지만 덮는 형태. 너무도 앙증맞은 흰토끼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