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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좌의 게임-92화 (92/177)

# 응, 너, 사형 #

-답이 뭐야? 궁금해! 궁금하다고!

악마는 궁금증을 참지 못해 소리친다. 다른 인간 구슬릴 때 폼 잡으며 써먹기도 좋겠다 싶은가보다.

하지만,

‘나도 몰라.’

-에엥? 모른다고?

‘그래. 크크크!’

대현자니, 뭐든 답을 내놓으시지 않겠나?

“으음, 참으로 난해한 질문이십니다. 하지만 이것이 곧 태자님의 집법 철학이시기도 하겠지요.”

대현자는 잠깐 고민하다가 결정한 듯 답했다.

“소신이라면 머리를 부수고, 손을 자르겠습니다.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이미 맞은 사람이 있다면 그 자체로 죄인 것이니까요.”

번이 감탄한 얼굴로 크게 끄덕였다.

“과연 대현자란 이름이 아깝지 않습니다. 우문현답愚問賢答에 본 태자의 눈이 개안한 기분입니다.”

“우문이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번은 대현자가 혹시라도 태자님께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묻기 전에 재빨리 얼굴을 돌렸다.

“죄인 루퍼스.”

“예..”

“사람이라면 머리가 터지고 손이 잘린 상태론 살 수 없겠지만, 네 경우는 다르다. 네가 이번 사건과 관련해서 누군가에게 직접적으로 피해를 준 적이 있느냐?”

“……!”

곧 죽을 것 같던 루퍼스의 얼굴에 혈색이 돌아오기 시작하며 급히 외친다.

“어, 없습니다!”

“사람을 상하게 한 적도, 부정하게 누군가의 재물을 약탈한 적도 진정 없느냐?”

“그렇습니다! 절대 없었습니다!”

번은 눈을 지그시 뜨고, 얼굴을 돌려 말했다.

“재갈을 풀라.”

죄인들 사이에 꿇어앉아 있던 7황비의 입이 봉인 해제되었다.

“파하..”

번은 그녀가 쉴 틈을 주지 않았다.

“다 들으셨을 테니, 간단히 하겠습니다.”

죄인이라곤 하나 황비다. 지켜보는 사람도 많고 하니, 예를 갖추는 번이었다.

“죄인 루퍼스의 말이 모두 사실입니까?”

“…….”

7황비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다시 묻겠습니다.”

물론, 역시 보통내긴 아니다.

“아들을 후계자로 올리기 위하여 자금이 필요했고, 그 목적으로 마약을 키워 적국에 유통한 사실을 인정하십니까?”

7황비의 머리가 벌떡 들렸다.

“..그 무슨 망발을..!”

번은 지금 그녀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렸다.

내 아들은 아무 관련이 없다! 외치려던 그녀. 번의 이어진 말에 입을 헙! 다물었다.

“아니면 그저 순수하게 본인의 욕심을 위해 돈을 벌고자 했던 겁니까?”

그녀는 선택에 기로에 선 것이다.

“연일 파티가 벌어졌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폐하께서 저 위험한 전쟁터에 몸소 나가시어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 병사들을 독려하며 고군분투하고 있는 이때!”

7황비의 얼굴에 죄책감이 어렸다.

이 생각은 못 했던 거다. 철鐵의 군대는 항상 이겨왔으니까. 이번에도 당연히 쉽게 이기리라 여겼으니까. 하지만 번의 말대로라면 누가 봐도 천인공노할 일을 벌인 꼴이 아니겠는가?

“백성을 보듬고 나라를 살피어야 할 비妃께서 흥청망청 재물과 시간을 탕진했습니다! 혹 비께선 벨버른의 백성들이 어찌 살고 있는지 아십니까? 자식 먹일 젖이 나오지 않아 뭐라도 먹어야 하는데, 먹을 것도 없어 몇 날 며칠을 물로 허기를 때우는 그 어미의 심정을 아느냔 말입니다!”

번의 호통에 7황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정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대청이 침묵했다.

서릿발 같은 번의 눈을 바라볼 수 있는 죄인은 아무도 없었다.

이제 마약은 뒷전이었다. 죄의 경중을 떠나서 7황비는 전장에 나간 남편을 나 몰라라하곤 춤추며 놀아 재낀 나쁜 년이었으며 그에 가담한 사람 모두 반역자다.

-이걸 노렸구나! 이놈!

악마가 자지러질 때,

“..하아.”

7황비는 손톱만한 쥐구멍이 닫히는 걸 느꼈다. 살아날 길은 없다.

“..죽여주세요.”

초연한 목소리로 말을 하는 7황비를 보며 번이 놀란 듯 말했다.

“어머니나 마찬가지신 분을 제가 어찌 감히 그리하겠습니까!”

급 태세를 돌려 말하는 번. 누가 보면 효자라도 난 줄 알겠다.

-허허..

악마조차 말을 잃었다.

“저는 그저 죄만 물었을 뿐입니다. 행하시는 것은 지고하신 폐하께서 하실 일이지요.”

부르르..

7황비는 좌르륵 떠오른다.

차라리 지금 죽는 게 낫겠다. 황제가 돌아오면..!

“다 시인하겠습니다. 이년이 죽일 년입니다! 다 내가 했어요! 예! 내가 재물에 눈이 멀어, 해서는 안 될 일을 벌였습니다!”

그녀는 지금 죽어야만 했다. 그리하지 않으면 두 아들에게 불똥이 튈지도 모른다. 저번에도 그리되지 않았나? 그녀가 판단할 때, 카이사르는 죄가 없었다. 그런데 어미와 함께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앞에서 비참하게 죽었다.

그리되선 아니 된다. 절대 아니 된다!

7황비가 죄를 시인하자, 번은 침통한 얼굴로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의자에서 일어났다.

“본 태자는.”

모두가 그의 말에 귀 기울였다.

죄인들조차 무심코 머리를 들어 번을 본다.

“불과 얼마 전까지 폐하를 모시고 전장에 있었습니다.”

생각하기 싫은 기억을 떠올리듯 흠칫흠칫 굳어지는 그의 이마를 보며 사람들은 아! 참으로 끔찍한 일을 겪었구나! 여겼다.

-또 속네! 또 속아! 뭐? 신의 이름으로 어쩌고 어째? 너 그러다 진짜 천벌 받는다?

물론, 아닌 놈도 있었지만.

“전쟁은 우리가 예상했던 대로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큰 피해를 입었고, 내일을 기약할 수 없을 지경까지 내몰렸습니다.”

번은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이윽고 대현자 옆을 지나친다.

“그래도 철鐵은 굽힐지언정, 부러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아끼고 염려하는 백성들을 떠올렸기 때문입니다. 사흘 밤낮을 싸우느라 잠을 자지 못해 눈꺼풀이 천근만근 내려와도 칼을 휘둘렀고, 기력이 없어 칼을 놓치면 이로 적의 발목을 물어뜯었습니다. 예, 우리는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텼습니다.”

-아아.. 폐하..

-아...

감동한 이들이 눈시울을 붉혔다.

번과 눈이 마주친 대현자가 다 안다는 듯 눈을 지그시 감으며 끄덕였다.

“무패의 군대라는 위명도, 무적의 전사들이라는 명예도 버리고 그저 다시 일어설 날만을 기다리며 철鐵을 두드렸습니다. 그런데..”

번의 발치가 7황비의 앞까지 닿았다.

“왜 그러셨습니까..?”

안타깝다는 듯 내려보는 번의 눈에 7황비는 무너졌다.

“끄윽.. 끅.. 끄윽.. 미안.. 합니다..”

펑펑 우는 그녀를 딱하다는 듯 보다가 위를 올려보며 눈을 감는 번의 모습은 실로..

-미친..

악마의 말이 틀리진 않았다.

다른 이들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으니까.

‘이렇게 성장하시다니!’

대현자가 감탄하고,

“흐음..”

나설 자리 사라진 집정관이 쓴 입안을 혀로 헹궜으며,

“흐흐흐흐흐흐흑..! 죽여주세요! 이년이 죄인입니다!”

7황비는 벼락 맞은 사람처럼 떨어댔다.

“…….”

모두가 말이 없다.

오직 번의 입을 바라보고 있었다.

과연 저 어린 태자는 어떤 판결을 내릴 것인가!

-죽이라잖냐. 깔끔하게 죽여! 뭘 질질 끌어!

머릿속이 지끈거릴 정도로 악마가 발악했지만, 번은 굴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행동에 모두가 웅성거렸다.

“……!”

7황비조차 돌처럼 굳었다.

한쪽 무릎 꿇어앉은 번이 7황비의 가녀린 몸을 감싸 안은 거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했습니다.”

“……!”

“……!”

집정관과 대현자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과거의 잘못을 이리 뉘우치시는데, 어찌 돌을 던지겠습니까.”

“아니에요.. 흐흐흑! 아닙니다.. 이년은..”

그녀의 설움이 번의 품에서 폭발했다. 참 이상하지.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는데, 이제 그녀를 안아주는 사람은 번이 유일했다.

“죽어 떠나기는 쉽습니다. 감옥에서 하릴없이 허송세월 보내는 것 또한 쉽습니다.”

번의 말에 울음을 멈춘 7황비가 얼굴을 들었다. 시선을 맞춘 번이 인자하게 웃었다.

“하지만 진정 과오를 생각하신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국가와 백성을 위해 헌신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

그녀의 눈엔 마치.. 번의 온몸에서 후광이 비추는 듯했다.

“그것이 국모妃의 역할이 아니겠습니까.”

"..!"

아들을 황제로 만들어야 하는 것만이 일생의 목표였던 그녀, 이 순간 뭔가가 안쪽에서부터 빠지직-! 깨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나, 나는..”

번은 다 안다는 듯 눈웃음지으며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러면서 외친다.

“여봐라! 밖에 오셨는가?”

그의 말에 다루가 힘껏 대답했다.

“예!”

“모시거라!”

굳게 닫혔던 대청 문이 열렸다.

-어머니!

-놔라! 이놈들이 감히!

-어머니! 소자 여기 있습니다!

7황비의 두 아들이 문밖에서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그들 말고도 수많은 이들이 밖에 있었는데, 사람들을 헤치며 한 여인이 다소곳한 걸음으로 들어선다.

성녀 가루비.

“오랜만에 뵈어요. 태자님.”

그녀의 인사에 번은 푸근한 웃음으로 대신했다. 그러면서 7황비에게 말했다.

“감옥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참회하시다 보면 백성을 위할 길이 보이지 않겠습니까?”

7황비의 앙상한 손가락이 번의 옷깃을 붙잡고, 바르르 떨었다. 갑자기 가슴속에 쿠웅! 돌덩이가 내려앉은 기분이다. 일이 왜 이렇게 흘러가는 걸까? 신전으로 가라고? 가면? 돌아올 수는 있는 건가?

망설이는 그녀에게 번이 따스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녀분 걱정을 덜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했습니다. 다 내려놓으시고, 주변부터 살피시지요.”

일단 가족부터 챙기란 말이었다.

-협박 한번 기가 막히는구나!

어차피 7황비는 번이 죽일 수 없다. 황제가 오기 전까지 감옥에 가둬두는 것도 나쁘진 않으나, 번은 더 넓고 멀리 보고 있었다. 싹을 잘라 쳐내지 않고, 잘라낸 것을 내 밭에 심을 심산이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성녀님.”

“걱정하지 마세요. 언제나 신께서 함께하실 것입니다.”

성녀가 7황비를 부축해 나가자, 한바탕 여우비가 지나간 기분이 들었다.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지만, 이 순간 가장 가슴 졸인 이는 루퍼스다. 7황비가 구명 받은 걸 똑똑히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잘하셨습니다. 태자님의 은덕을 모두가 칭송할 것입니다.”

대현자의 말에 번이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본 태자가 정에 약하고 모질지 못해 차선책을 쓴 것뿐입니다. 아직 많이 배워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허어.. 뭐 이런.. 허허..

정신적으로 대미지를 받고 있는지 악마가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끝으로 의식에서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번은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 의자에 앉았다.

“심문관.”

“예!”

다루가 냉큼 달려왔다.

“이들에게 기회를 주기로 했다. 사흘간 다시 구금하고, 얼마나 죄를 뉘우치는지 보겠다. 심문관은 죄인들이 협조하는지 그렇지 않은 지 기록해 두었다가 소상히 본 태자에게 보고하라.”

살아날 수 있다는 걸 보여줬으니 이들은 사흘 동안 자신들이 아는 모든 것을 줄줄 읊어 댈 것이다. 농장과 공장의 위치, 마약의 제조 방법, 유통망에서부터 관련된 모든 이들까지. 지금까지 잡아들인 자들은 극히 일부에 불과할 뿐이었다. 이제 손에 잡은 꼬리를 힘껏 당길 차례다.

“태, 태자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루퍼스가 버럭 외쳤다.

꼭꼭 숨겨둔 비밀이라도 있나 보다. 하지만 번은 웃으며 말한다.

“내게 직고할 필요 없다. 심문관이 친절하게 들어 줄 것이다. 그렇지?”

“예!”

번의 물음에 다루가 예쁘고 경쾌하게 대답했다.

.

.

.

사흘 후 성벽.

291개의 머리가 곶감처럼 내걸렸다.

그러나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다음날 88개가 추가되었고, 그 다음 날은 무려 344개가 더해졌다.

루퍼스의 머리통도 그사이에 껴 있었다. 그의 눈은 배신감에 감지도 못하고, 아직도 말하고 있다.

-살려준다면서!

그러나 번은 충실했다.

겉으론 참으로 안타까워하며 관련된 모두를 처단하라는 황명을 지켜야 한다고 했다.

어쩔 수 없지 않나?

어느 분께서 내리신 명인데. 까라면 까야지.

“크크크크.. 꼬우면 신을 저주하라고. 아니면 황제도 좋고.”

노을져 가는 성벽을 내려보는 번의 뒷모습이 참으로 즐거워 보이는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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