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청천 #
청천벽력靑天霹靂.
하늘이 무너진다는 말이 딱 이럴 때 쓰이리라.
-황비님!
-꺄악!
아비규환이 따로 없다. 하지만 이내 바람 빠진 애드벌룬처럼 축 늘어진 7황비는 무력하게 십위의 손에 어딘가로 사라졌고, 루퍼스 또한 번의 발치에서 벌레처럼 기다가 질질 끌려갔다. 기사들이 몇 있었지만 무기도 없었고, 번의 기세에 눌려 대항할 엄두도 내지 못한다.
어느새 장내는 정리되고,
“…….”
오연히 서있는 번.
수도 전역에는 이 시각 동시에 수색작업이 펼쳐지고 있을 것이다. 솔개부대는 번의 명령을 제외하면 그 어떤 위압에도 굴하지 않을 것이고,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가 모두가 이들처럼 당황할 거다. 관련된 자들은 두려움에 벌벌 떨며 안절부절 못할 것이고, 아니라면 그저 해프닝으로 받아들이고 협조할 거다. 무려 황명皇命 아닌가!
“본.. 태자는.”
번이 발길을 돌리며 말했다.
“그리 꽉 막힌 사람이 아니외다.”
스윽 사람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며 씹어뱉듯 그렇게.
“할 말이 있거든, 언제든 찾아오시오.”
씨익 웃는 번.
따라 웃는 이는 없다. 방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조차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아..!”
문턱을 넘으려던 번이 멈춰 서서 돌아본다.
“발이 저리거든, 자수하시길 바라오. 부하들이 워낙 과격해서 말이지. 녀석들이 찾아가면 좋은 꼴은 못 볼 거외다.”
술에 취해 깜빡 잠이 들었을 때 꾼 꿈처럼 현실감 없는 일. 그제야 번이 파티장을 완전히 벗어나고,
“와..”
털썩 주저앉는 처녀의 드레스가 풍성하게 벌어졌다.
“무서워 죽는 줄 알았어..”
“저분께서 진짜 그 번 황자님이시라고? 정말?”
다시 처녀들의 목소리가 정적을 깨웠다.
“멋있어..”
“얘! 좀 전엔 무섭다면서!”
공포와 사랑을 혼동하는 이도 있고,
“7황비님은 어떻게 되시는 거지?”
“파티는 끝난 건가?”
“마약이 뭘 말하는 거야? 설마 우리도 잡혀가는 건가?”
“자네 뭐 켕기는 거 있나?”
“아니, 이 사람아! 내가 무슨! 우리가 마신 술에 약을 탔을지도 모르지 않나? 아까부터 알딸딸한 게 이상하다고!”
긴장이 풀려 아무 말이나 내뱉는 사람도 있었다.
그 사이, 한 사람이 튀어 나갔다.
전력질주로 번이 나간 곳을 따르는 그.
“태자님! 태자님..!”
저 앞. 백마에 막 오르려는 번이 보였다. 하지만 그는 더 접근하지 못했다. 스윽. 언제 다가왔을까? 십위 중 하나의 칼이 그의 목에 겨눠졌기 때문이다. 그 섬뜩한 감촉에 온몸을 떠는 바티산 황자.
“괜찮다.”
번은 말에 오르며 십위를 저지했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바티산을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본다.
“4황자께서 어쩐 일이신가?”
“저를 아십니까?”
놀랐다는 듯 묻는 바티산을 보며 번이 피식 웃었다.
어찌 모르겠는가? 번의 비밀지하엔 궁의 모든 주요인물의 프로필이 전부 기록되어 있는데. 버려진 거나 다름없어 눈에 띄지 않았다곤 하지만, 4황비의 셋째 아들 역시 번의 이목에 걸려 있었다. 그걸 모르는 바티산이 감격해서 침을 꼴깍 넘겼다.
“저를 거두어 주십시오!”
"하하.."
이때만큼은 번도 헛웃음이 나왔다.
누가 누굴 거두나? 서로 같은 황자인데. 후계자라곤 해도 언제 바뀔지 모르는 거고, 나이도 저쪽이 더 많지 않은가?
“오래전부터 태자님을 흠모해 왔습니다! 저를 곁에 두신다면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온갖 잡놈 다 겪어본 번으로서도 이런 부류의 사람은 처음 봤다. 자존심도 없나?
아니, 아니다. 이 사내는 다르다. 2황비가 죽은 이후로 황자들은 거의 교류가 없었다. 아들을 황제로 만들려는 어미에겐, 다른 황제의 아들은 모두 적이나 다름없으니까. 특히 7황비는 더욱 그러했고. 한데, 그런 파티에 기어들어와 있는 바티산. 이 자도 확실히 정상은 아니다.
“..닮았어.”
“예?”
눈을 동그랗게 뜬 바티산의 표정에 번은 쓰게 웃으며 머릴 흔들었다.
언제였더라? 참새로 태어났을 때던가?
처음 6개였던 알이 2개만 남아 부화했다. 뱀이 물어가고, 뭐가 약탈하고, 이런 일이 다반사기에 어린 새들의 생존율은 그리 높지 못했다. 어쨌든 둘만 남아 열심히 빽빽 대며 살아보고자 노력했는데, 옆에 놈이 자꾸 엄마가 먹이를 물어오면 대가리를 들이밀지 않겠나? 조금 전에도, 그전에도 제 녀석이 먹이를 처먹었으면서 말이다.
번은 필사적으로 놈과 몸싸움을 했지만, 태생부터 녀석의 몸집이 두 배는 더 컸다. 심지어 번은 지병까지 안고 태어났다. 뭐, 병이 있다고 누가 돌봐주거나 응급실을 갈 처지는 아니었으니 그저 열심히 살아보려 발악할 수밖에. 그렇게 그는 버텼고, 간신히 살아갔다. 번이었으니 살았지, 아니었다면 열흘도 못 넘기고 아사했으리라.
시간은 흘러 두 새끼 새는 장성했고, 비상飛上 할 수 있게 된 그때. 번은 이전에도 새로 살아본 경험이 있었기에 단박에 훨훨 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놈은 둥지 끝에 매달려 그 얇은 다리를 바들바들 떨어대는 것 아니겠는가? 그간 당한 것도 있고 하니 확 밀어버릴 심산으로 다시 둥지로 가는데, 놈이 대가리를 번의 가슴팍에 부벼 댔다. 이걸 영리하다 해야 할지, 약삭빠르다 해야 할지. 새대가리로 잔머릴 굴려봐야 닭 수준일 텐데 말이다.
아마 이런 걸 본능이라 할거다. 그래, 본능.
짧은 생. 그 삶에서 번은 왠지 그 녀석만 기억에 남아있었다. 바티산도 아마 그 새처럼 제 살길을 찾는 능력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쁜 것 하나 없는데도, 가식이 없이 성큼 다가오는 모습에 왠지 싫지 않은.
“아닙니다. 호의는 감사하나 저는 다른 곳에 정신을 팔 여유가 없습니다. 훗날 기회가 닿는다면 볕 좋은 날 차 한잔 하십시다.”
번의 냉정한 거절에 바티산이 움찔했지만, 곧장 표정을 풀고 외쳤다.
“사내답게 술로 합시다!”
“그러시지요.”
번은 웃으며 말을 몰았다.
그런 그의 뒤에서 바티산이 가슴을 떵떵 치며 고함쳤다.
“내, 반드시 태자께서 탐내는 사람이 되어 있겠소! 그때! 거하게 한잔 얻어 마실 터이니 기다리시오!”
웃기는 놈이다.
번은 그리 생각하며 머리를 흔들고 말허리를 찼다.
“이랴-!”
그에게 한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지금부턴, 단 1초도 허비할 수 없었다.
적들이 우산 따위를 준비할 틈 없이 폭우를 몰아쳐야만 한다.
두두두두두!
번이 탄 말이 황궁의 심장을 두드렸다.
.
.
.
날이 밝았다.
어제와 같은 해가 떴지만, 그걸 맞이하는 사람들은 전혀 다른 기분을 맛보고 있었다.
특히 이 남자.
“..그래도 제겐 귀띔이라도 하셨어야 했습니다.”
집정관이다.
번은 지금 황제가 궁에 있을 때 쓰는 대청에서 황좌皇座의 바로 아래 의자를 두고 앉아 있었는데, 집정관이 못마땅한 듯 번의 앞에서 노려보고 있었다.
집정관과 대립할 생각은 없었기에 번이 히죽 웃었다.
“그 점은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밤말은 쥐가 듣고, 낮말은 새가 물어간다 하지 않습니까? 일에 신중을 기하기 위한 처사였으니, 너그러이 양해 부탁합니다.”
번이 넉살 좋게 말하자, 집정관의 이마가 구겨졌다. 그런데 여긴 번 혼자 있는 게 아니었다.
“허허.. 태자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집정관께서도 지켜보시지요. 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번이 바라보는 방향으로 대청엔 두 줄로 사람들이 서 있었는데, 대현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까지 나서자, 집정관은 하아, 한숨을 푹 내쉬었다. 생각 같아선 엎어버리고 싶은데, 폐하의 명이라니 어쩌겠는가?
“크흠! 지켜볼 것입니다.”
집정관이 팔짱을 끼고 번의 옆에 섰다.
“아무렴요! 제가 경험이 미천하여 실수하거든 많은 도움 부탁합니다.”
'흐음..'
아주 제 세상이다. 눈에 뵈는 게 없는 태자를 보며 집정관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이어진 번의 외침.
“죄인을 들여라-!”
번의 명에 줄에 엮인 사람들이 대청으로 줄줄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이 간밤에 어떤 고초를 당했는진 행색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본래 고급스러웠을 의복은 누더기나 다름없었고, 올마다 관리했을 머리는 오뉴월 비 맞은 개새끼 같았다.
-캬캬캬! 살판났구나!
악마가 미친 듯이 떠들어댔다.
그러나 죄인들을 바라보는 번의 눈은 차분했고, 진지했으며 무서웠다.
여기 황제가 없다 하여 마음껏 설치면 곤란하다. 집정관이 보고 있었고, 일 처리를 어떻게 하는진 황제의 귀에 모조리 들어갈 것이다.
이 또한 시험무대.
번은 마음속 빨간 펜을 들었다.
“심문관.”
번의 목소리에 죄인을 끌고 온 여자가 앞으로 나섰다.
“네!”
다루다.
아무래도 십위는 내 사람이 아니기에 그녀에게 맡겼다.
“자백하더냐?”
“그렇습니다! 이 자 루퍼스는 19개의 농장에서 원료原料를 키우고, 수도 곳곳의 공장에서 만든 마약을 유통한 모든 일련의 사건을 7황비가 시켜 했다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번이 손을 가볍게 들자 대청이 싸늘하게 식었다.
번은 손으로 턱을 괴며 물었다.
“그자의 말을 믿을 수 있겠느냐?”
“양쪽의 변을 들어봐야 하겠지만, 다른 죄수들도 이자와 같은 말을 하는 자가 다수 있었다는 것을 볼 때 거짓은 아닌 듯합니다!”
다루는 아주 야무지게 말했다. 꼭 21세기 활동하던 변호사나 검사 같이 말이다. 이런 쪽에도 소질을 보이는 걸 보면 참으로 재능 넘치는 자매다.
“좋다, 죄인 루퍼스.”
번의 목소리에 루퍼스가 고개를 들었다.
이미 그의 눈엔 삶의 희망이라곤 없었다.
“네 죄를 네가 알렸다?”
“저는.. 그저.. 억울할 뿐입니다.”
“마약을 키웠고, 팔았으며 그것으로 이득을 취했다 네 입으로 자백했는데, 무엇이 억울하단 말이냐?”
“저는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애초에 루퍼스는 여기 사람이 아니었다.
2황비와 주크버그처럼 몸정肉情이 붙은 사이도 아니었다.
“흐음..”
-뭘 뜸 들이냐? 그냥 죽여버려!
악마다운 외침이 들린다.
번 역시 마음 같아선 작두를 대령하라! 외치고 싶었지만, 무작정 다 죽인다고 금이 나오나? 쌀이 나오나? 이미 7황비를 잡은 시점에서 1차 계획은 끝났다. 이제 다음으로 넘어갈 차례인 거다.
“본 태자는.”
번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울렸다.
“무죄추정無罪推定을 원칙으로 한다.”
집정관이 놀란 듯 살짝 뜬 눈으로 번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번은 아랑곳하지 않고 진중하게 말했다.
“모든 상황이 너를 죄인으로 지목해도 네가 억울하다면 그것은 다시 살펴봐야 할 것이다. 열 명의 죄인을 놓친다 하여도 한 사람의 억울한 이는 없어야 하지 않겠느냐?”
-엥? 무죄.. 뭐? 그냥 죽여! 너 답지 않게 뭔 수작이야!
악마가 무슨 개소리냐는 듯 물을 때, 대현자가 감탄하며 크게 끄덕였다.
“과연 태자께선 총명하시고, 현명하십니다! 뼈에 새겨야 할 만큼 고명高明 하신 말씀이십니다!”
뭐, 이 정돈 헐리우드 영화나 법정 드라마 몇 편 보면 절로 빠삭해진다. 몇 조 몇 항, 무슨 무슨 법 따위는 세세하게 몰라도 지금 필요한 건 그럴듯함 아니겠는가?
“네가 허심탄회하게 진실만을 말한다면, 본 태자 또한 감정에 치우치지 아니하고 죄를 판별할 것이다. 신神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거짓말!
번의 삼안三眼이 있던 자리가 욱신거렸다. 죄다 발끈한 모양. 하지만 번은 개의치 않는다.
게다가 무슨 뜻인진 정확히 모를지 언정, 번의 말에 루퍼스의 썩은 동태눈깔 같던 동공이 생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그의 손을 보라. 손가락마저 덜덜 떨리고 있지 않은가? 저건 절망의 징조가 아닌 희망의 전조였다. 좀 더 당근을 줘볼까?
“대현자께 질문 하나 드리겠소.”
번의 말에 모두가 대현자를 바라보았다. 냉큼 반기는 오그마리온.
“얼마든지요!”
“본 태자가 저자를 손으로 후려치면 저자를 아프게 한 손이 잘못 한 게요? 그리하게 시킨 머리가 잘못 한 게요?”
휘익!
짜 맞춘 것처럼 번을 향했던 시선이 대현자에게 박힌다.
이 질문엔 집정관 또한 관심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