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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좌의 게임-90화 (90/177)

# 정면돌파! #

물론, 번은 춤 따위를 추러 온 것이 아니다.

-어머! 어머! 번 황자님께서 저리 늠름해지시다니!

-벨버른에 있다고 하지 않으셨나?

-아니야! 폐하가 계신 전쟁터로 갔다고 들었는데?

번이 처녀들 무리를 응시했다.

“······!”

“······!”

그러자 그녀들은 속도 없이 얼굴을 붉히며 꺄악 어쩔 줄 몰라 한다.

그럴 만도 하다. 갑옷을 벗은 번의 모습은 남자가 봐도 엄지를 척 추켜세울 만큼 빠지는 구석이 없었다. 고작 열네 살. 그러나 번의 모습은 열여덟이나 스물 정도로 봐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고, 어미를 닮은 우아함이 자연스레 배어나오고 있었다.

‘이건 뭐..’

번이 속으로 쓰게 웃었다.

예상은 하고 왔지만, 동물원 원숭이나 다름없었다. 대한민국에서 설명우로 살 때, 그때가 중학교 3학년이었나? 수학여행을 가서 장기자랑을 하는데, 반 남자아이들이 단체로 여장을 하는 공연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내기에 진 명우가 뽑혔고, 한창 사춘기였으니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를 정도로 창피했는데, 지금 기분이 그때와 딱 비슷했다. 사정은 아주 달라졌지만.

성큼. 번이 걸었다.

걸음조차 사내다움이 물씬 풍겼고, 떡 벌어진 어깨는 처녀들의 애간장을 녹인다.

“······.”

7황비는 다가오는 번을 보았다.

‘여기에 왜..?’

도통 감을 잡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녀는 억지로 볼에 미소를 만들어냈다.

“어서 오세요. 황자님. 수도에 오셨다는 얘기는 못 들었는데.. 이런 누추한 곳까지 어인 일이신가요?”

그의 걸음이 멈추자, 커튼처럼 살랑거리는 번의 앞 머리칼 사이로 서늘한 눈빛이 7황비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흠칫.

쥐를 앞에 둔 뱀 같다. 본능적으로 7황비의 옆에 있던 루퍼스가 한 걸음 황비 쪽으로 이동할 정도. 세명의 시선이 잠시 엉키고, 번이 입술을 뗀다.

“태잡니다.”

“네?”

번의 말에 7황비는 다시 한 번 움찔했다.

“황자가 아니라 태자라 했습니다.”

“······.”

7황비는 자신을 위해 사람들을 모았다. 그런데 한순간에 이 자리가 지금 번의 위치를 모두에게 각인시켜주는 무대로 쓰여버린다. 죽 쒀서 개 준다는 게 딱 이럴까?

“뭐..”

하지만 역시 7황비는 노련했다.

번의 기세에도 주눅이 들지 않고, 빙긋 웃어넘겼다.

“그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죠. 안 그런가요?”

그녀가 사람들을 보자, 모두가 웃었다.

파티장엔 80여 명의 사람이 있었는데, 전부가 7황비와 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 중엔 4황비의 셋째 아들도 참석해 있었다. 위로 두 형이 정체 모를 병에 걸려 죽고 난 뒤, 어머니마저 시름시름 앓아누워 2년 만에 죽은 비운의 황자.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황자라는 유명무실해진 지위는 사람들의 관심에서 밀려났지만 그는 꿋꿋이 버텨내 혼자 힘으로 이 파티의 초대장을 손에 거머쥘 정도로 노력한 자였다.

17세 바티산.

그런 그의 눈에 번의 거대한 등이 다가왔다.

‘어찌..’

바티산은 몇 해 전, 열린 경연에 참가하지 못했었다. 하필 그때 지독한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기도 했지만, 어차피 찾는 이도 없었다. 그래도 머리가 어질어질 한 상태에서 비틀거리며 꾸역꾸역 집을 나가 경연을 어떻게든 관전했었는데, 그때 번 황자를 처음 보았다.

카이사르 황자의 불알을 깨버릴 때 얼마나 통쾌하던지!

그가 알기로 자신과 마찬가지로 번 황자는 쥐뿔도 없었다. 비슷한 처지라 괜히 정이 갔는데, 몇년이 지난 지금. 그의 앞에 있는 번 황자는 그가 알던 그 꼬마가 아니었다.

‘저렇게 변했지?’

기막혀 말이 안 나온다. 하지만 놀람은 이 정도로. 머리를 굴려야 한다. 이 삭막한 황궁에서 거지 같은 황자가 살아남으려면 1분 1초도 헛되게 쓸 수 없다는걸 누구보다 잘 아니까.

‘7황비 눈 밖에 나서 좋을 게 없을 텐데?’

자신도 중앙권력에 접근하기 위해서 이 파티에 참가하려고 얼마나 애썼던가? 하지만 거물에게 접근할 땐, 기회를 잘 봐야 하는 법이다. 저렇게 무턱대고 나타나선 경계심만 심어주지 않겠나?

‘좋지 않아. 아주 좋지 않아..’

괜히 번 황자가 걱정되는 그였다.

하지만 상황은 그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은 어떤 지점부터 시작된 거다. 아니, 이 자리의 누구도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시작점.

“네가 루퍼스인가?”

번은 7황비를 싹 무시하며 얼굴을 돌렸다.

“······?”

기막힌 듯 7황비가 째려보았지만, 번은 신경 쓰지 않고 루퍼스에게 되묻는다.

“대 에비뉴의 태자가 묻고 있지 않으냐. 네가 루퍼스인가?”

루퍼스가 7황비의 오른팔이란 건, 여기에 있는 모두가 아는 사실. 작위를 받은 건 아니었지만, 대감집 개는 목소리도 크다고 루퍼스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번은 그런 루퍼스를 시종 부르듯, 완전히 아랫사람 대하는 말투로 말한 거다.

“그..렇소.”

루퍼스도 어이없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고깝게 대답했다.

“허어.. 그놈 참, 혀가 짧구나. 내가 뽑아주랴?”

“······!”

“······?”

-혀? 잘못들었나?

-어머!

-뭐야? 방금 황자님께서 뭐라 하셨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기겁했다.

단언컨대, 최근 10년 이내에 수도에서 열린 파티에서 이런 저급한 말이 나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화, 황자는 말을 가려 하세요!”

7황비가 뾰족하게 외쳤지만, 번은 무섭게 입가를 비틀어 그녀를 본다.

“태자라 했습니다.”

당신이나 말을 가리시지요? 라는 눈빛에 7황비는 기막혀 말도 못이었다.

번은 다시 루퍼스를 보며 성큼 거리를 좁혔다.

“흡..”

루퍼스가 자기도 모르게 한걸음 물러났다가 실책을 깨닫고 다시 자세를 잡았다. 본성은 피하라 시키지만, 황비의 곁을 떠나면 안 된다는 이성이 그를 붙잡았다. 꿈틀! 루퍼스의 손이 무의식중에 허리춤으로 간다. 하지만 걸리는 게 없다. 당연하다. 무기 소지가 금지된 파티장이니까.

그걸 본 번이 씨익 웃었다. 이제 팔을 뻗으면 닿는 거리.

“좋아, 루퍼스. 내가 누구더냐?”

번은 지금 80명이 넘는 사람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소름이 돋았고, 침이 넘어간다. 루퍼스 또한 그걸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이건 단지 신분의 격차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무인이 쓰는 존재감. 마나를 활용한 압력이라는 거였다!

“..태자이십니다.”

체념한 듯한 루퍼스의 말에 만족한 번. 끄덕이며 웃었다. 그러면서 상체를 불쑥 루퍼스의 얼굴 아래에 들이밀자, 아래에서 위를 올려보는 형태가 된다.

“그래, 너는 눈이 제대로 박혔구나. 어젠 바로 앞의 범을 몰라봐 어떤 놈이 하나 죽었지. 참으로 멍청하지 않으냐? 시커먼 아가리를 쩍 벌리고 제 앞에 있는데, 어찌 모를 수가 있지?”

그 말을 하며 힐끔 7황비를 노려보는 번.

그녀가 이를 악물고, 바들바들 떨고 있다.

“황실의..”

루퍼스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법도가 있습니다. 더 이상의 무례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감히 7황비의 면전에서 이 무슨 발칙한 짓거리란 말인가? 루퍼스의 말에 정신을 차린 사람들도 하나둘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번은 그저 웃는다.

“무례라?”

"······?"

루퍼스는 그 웃음을 보며 일이 아주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지금 무례라 하였느냐?”

“······.”

뚫어지게 자신을 바라보는 번의 시선에 살짝 눈을 피하는 루퍼스.

그때였다.

철썩-!

“흡!”

루퍼스의 얼굴이 홱! 돌아갔다.

얼마나 세게 후려쳤는지, 그의 몸이 바닥 쪽으로 휘청거릴 정도였다.

-꺄아아악!

-화, 황자님?

-이 무슨!!

여자들은 비명을 지르며 난리가 났고, 남자들은 눈을 크게 뜨고 가까이 모여들었다. 여차하면 황자의 몸에 달라붙어 말려야하나 싶다.

“······!”

7황비는 이 상상을 초월한 사태에 기절초풍하기 직전이었다. 사람이 너무 놀라면 아무것도 못 한다. 그녀가 지금 딱 그 상태. 그러나 번은 이 와중에도 제 할 일만 했다.

후욱-!

다시 루퍼스에게 손찌검을 한 거다.

터억.

하지만 루퍼스 역시 무인이다. 아깐 방심해서 당했다지만, 두 번은 없다.

“잡아?”

번이 잡힌 팔목을 보며 비웃었다.

“왜.. 이러십니까?”

루퍼스의 말에 번이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 눈은 독사처럼 번뜩이고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소름 돋게 했다.

“무례는 이게 무례란 거다. 태자께서 몸소 알려주겠다는데, 감히 막아?”

“······?”

“코크란 사내를 아느냐?”

느닷없는 질문.

“······!”

루퍼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보통 농장 관리자의 이름을 다 알진 못한다. 하지만 1년 전쯤, 뒷골목에서 제법 이름 좀 날린다는 녀석을 소개받았었다. 만나보니 싹싹하고 뚝심도 있어 몇 가지 일을 시켜봤는데, 아주 잘했었다. 그래서 기억한다. 자신이 직접 농장을 맡기며 잘해보라고 등까지 두드려 줬으니까.

그놈 이름이 코크였다.

“크크크..”

번의 웃음소리가 악마처럼 퍼져나갔다.

갑자기 닥친 서늘함에 처녀들은 손으로 팔뚝을 비볐고, 루퍼스는 아찔함을 느꼈다. 번의 얼굴이 더 바짝 다가왔기 때문이다.

“감히 대 에비뉴의 지고하신 황제 폐하를 능멸하고..!”

번이 팔을 뿌리쳤다.

“악독한 마약을 길러, 백성들의 몸과 마음을 좀먹은 죄!”

후우우욱-!

번의 손이 다시 루퍼스를 향했다.

하지만 루퍼스는 막지 못한다. 조금 전 들은 엄청난 말 때문이었다.

철썩-!

강하게 뺨을 맞은 그의 상체가 아래로 곤두박질치고, 번의 말은 이어진다.

“사리사욕을 위해 타인의 생명을 경시하며, 뒤룩뒤룩 돼지같이 배를 불린 죄!”

철썩!

“이는 국가를 배척하고, 황실을 등진 역모와 반역에 해당하는 중죄다!”

철썩!

연달아 이어진 번의 폭력에 루퍼스의 머리가 결국 바닥으로 처박혔다.

“으으..”

루퍼스는 얼굴의 고통보다 정신적 충격이 더 컸다.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역모? 반역? 영혼이 송두리째 튀어 나간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가 어떤 기분이든 번은 상관하지 않는다. 성큼 걸어 쓰러진 루퍼스에게 가서 발로 그의 머리를 지그시 밟았다.

“무례는 이런 걸 두고 무례라 하는 거다. 너는 황제 폐하와 에비뉴를 등졌다.”

“아, 아닙..”

번은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발에 힘을 주고 비볐다.

“끄으으윽..”

고통에 몸을 비트는 루퍼스.

번은 씨익 한쪽 볼에 보조개를 만들고, 옆을 돌아보았다.

7황비가 말뚝처럼 서 있다.

“본 태자太子는 에비뉴의 가녀린 백성을 힘들게 하고, 간악한 적국에게 도움을 주는 마약상을 처단하라는 명을 지엄하신 황제 폐하께 하달받았다!”

쩌렁쩌렁한 번의 목소리.

모두가 다리에 힘이 풀릴 지경이었다. 말의 내용도 그렇고, 쏟아지는 박력이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전부 들으라 외치지만, 눈은 똑바로 7황비에 고정되어 있었으니 그녀가 느끼는 심적 부담은 말하지 않아도 알리라.

“죄인 루퍼스는 사설 마약 농장을 양성하여 개인의 영달을 위해 사용한 바!”

“그, 그것이.. 끄으으으..!”

억울하다는 듯 번의 발밑에서 신음하던 루퍼스.

콰직!

번이 힘껏 발에 힘을 주자, 혀끝을 이로 씹어버렸다.

“크허허허헉..!”

“크크큭, 더 길게 잡아 뽑아야겠구나.”

-꺄아악!

-어흑!

“히이익..!”

피가 튀는 잔인한 광경에 여자들이 짧은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감았고, 우연히 번과 눈이 마주친 처녀 하나는 뒷걸음치며 찔끔 오줌을 지렸다. 드레스 아래 기저귀가 있어 천만다행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번이라는 강력한 교권을 가진 선생님에게 묶인 학생들처럼.

이때,

“웃기지 마! 네가 무슨 권리로 이런단 말이냐! 썩 멈추지 못할까!”

7황비가 폭발했다.

이 정도로 기죽을 그녀가 아니었다. 폐하의 명은 무슨? 사전에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설령 그런 움직임이 있다고 해도 집정관이나 다른 누군가에게 맡겼겠지, 이런 애송이에게 그랬을까?

“여봐라! 호위! 게 누구 없느냐! 어서 이 오만방자한 황자를 끌어내라!”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분기탱천한 표정으로 버럭버럭 외치던 7황비. 그녀는 곧 파티장 주변을 지키는 병사들이 우르르 들어와 상황을 매듭지을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곧 이어진 번의 목소리에 그녀의 가느다란 다리가 휘청였다.

“십위十衛.”

슈슈슈슈슈슉!

천정에서도, 벽 틈에서도, 커튼 뒤에서도,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림자들이 나타나 번의 주변을 감싸기 시작했다.

“충-!”

“충-!”

이들을 모르는 사람도 있겠으나, 7황비쯤 되면 안다. 십위라 불리는 자들이 누구의 명에 움직이는지.

“대 에비뉴의 황제 폐하의 이름으로 명命한다. 받들라.”

“충-!”

열 명이 한쪽 무릎을 땅에 붙이며 동시에 외친다.

검은색 복면 차림의 그들은 이미 밖의 호위 따위는 모조리 정리하고 온 뒤였다. 몇몇 옷깃에 들러붙은 마르지 않은 핏물이 그걸 증명하고 있다.

“죄인 루퍼스를 구금하고, 범죄에 가담한 정황이 포착된 7황비님을 모셔라-!”

“아아아..”

7황비가 결국 털썩 쓰러지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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