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색출 #
번이 술집을 나서자,
21세기 캘리포니아 해변을 뛰는 여자의 차림처럼 몸에 딱 붙은 까만 옷을 입은 여자가 따라붙었다. 봉긋한 가슴과 볼록한 엉덩이가 보는 사내의 가슴을 쿵! 철렁하게 하겠지만, 그녀는 조깅 따위로 다져진 몸이 아닌 수준급 무사.
“준비는?”
“끝냈어요. 바로 움직이시면 돼요.”
쌍둥이 자매 중 동생인 다루였다.
“반대하는 놈은 없던가?”
“감히 누가 폐하의 엄명을 무시하겠어요?”
그녀가 예쁘게 웃자, 번은 쓰게 웃으며 끄덕였다.
“조용히 처리했지?”
“네! 소문은 나겠지만, 하루 이틀은 괜찮을 거라고 봐요.”
“그래, 그 정도면 돼.”
번의 서늘한 미소를 본 다루가 물었다.
“필립 공작의 영지로 가시나요?”
“아니.”
무장한 번은 천천히 도시를 걸었다.
하나둘 어둠 속에서 그림자들이 모여들었다. 흩어져 있던 솔개 부대가 합류하는 거다. 이십이 백으로, 백이 다시 이백으로 불다가 어느새 삼백이 넘어갔다. 길을 가득 메운 그들의 위압감에 사람들은 숨을 죽인다.
-뭐, 뭐지?
-무서워!
-큰일이 일어나려나 봐!
“증거부터 잡는다.”
번의 말에 다루가 응? 눈을 크게 뜨고 묻는다.
“증거라면 이미 필립 공작을 엮을 만큼은 있지 않아요?”
“그자가 목표는 아니니까.”
번의 출정 소식은 솔개부대원들에게 빠르게 전파되었고, 도시 밖으로 나가자 하얀 백마가 준비되어 있었다.
말에 오르며 번이 다루에게 말한다.
“도시 외곽의 모든 마약 농장을 색출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 농장의 위치를 모르는 걸요?”
십위와 접선하기로 한 날은 내일 아침이었다. 당연히 마약을 어디서 키우고, 제조하는진 아직 듣지 못했다.
“······.”
그러나 이 남자가 누구인가.
“흐으으으.”
숨을 크게 들이쉬는 번.
살랑 바람에 실려 오는 작은 입자가 그의 콧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오감을 극도로 끌어올린 상태로 모래알보다 작은 알갱이의 흔적까지 놓치지 않는다. 물론 모든 것을 파악할 순 없겠지만, 그게 레인보우라면 다르다. 익숙하기도 하거니와 어제 이 도시에 접어들 때부터 이미 지긋지긋하게 맡고 있었다.
개코가 있는데, 무슨 정보가 더 필요한가?
“가자-!”
번이 말을 박찼다.
두두두두두!
500필이 넘는 말이 지축을 울리자, 웬일인가 싶어 휘둥그레한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는 성벽 위의 병사들이 몇 보였지만, 오늘 낮 동안 솔개부대가 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수도의 모든 지휘계통을 돌며 태자께서 황제 폐하께 어떤 지위를 받았는지 알렸고, 만반의 준비를 갖춘 것이다.
아직 대중엔 알려지지 않았지만,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이 심상찮은 기류를.
두두두두!
말이 지나간 길에 모래 폭풍이 일었다. 그리고 그 폭풍의 중심엔 번이 망토를 펄럭이며 질주하고 있었다.
2시간쯤 지나, 이들이 도착한 곳.
“있어요! 레인보우 립이에요!”
울창한 숲 인근에서 다루가 뾰족하게 외쳤다.
솔개부대는 벨버른의 회색 숲 메카에서 다크 엘프들이 레인보우 립을 재배하는 것을 보아왔기에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포위해! 한 놈도 도망치지 못하게 하라-!”
번의 우렁찬 외침에,
“충!”
“충!”
솔개부대가 넓게 퍼져나갔다.
4월의 제주도 유채꽃밭처럼 아름답고 낮게 조성된 레인보우 립 농장은 축구장 하나 크기의 규모였는데, 밤이 깊어 일꾼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인근에 일꾼들이 주거하는 작은 오두막을 이내 발견했고, 점거하는 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에그머니나!
-네놈들은 누구냐!
-히이이익!
-살려주십시오! 나으리!
꿇어앉은 17명의 사내.
레인보우 립을 정제하고 물건으로 만드는 공장은 따로 있는 듯하다.
번은 그들 앞에 서서 내려보다가 물었다.
“책임자가 누구냐.”
하지만 답대신 사내들의 눈알 굴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자, 번은 시선을 들어 꿇어앉은 사내들의 뒤편에 서 있는 솔개 부대원을 보며 끄덕였다.
그 즉시,
푸악-!
머리 하나가 떠올랐다.
“히이이이익!”
“사, 살려주십시오!”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요!”
바로 옆에서 동료가 죽자, 기겁한 사내들이 바들바들 떨었지만 딱 한 놈은 얼굴을 시뻘겋게 붉힌 채 악을 썼다.
“감히! 이곳이 누구 소유인 줄 알고 이러는 것이냐! 경을 치고 싶으냐!”
대부분은 농장주의 정체를 모르는 듯 했지만, 이자는 아는 것이다.
-큭큭큭. 간이 배밖으로 나온 놈이 다 있네? 어느 안전이란다. 어쩔래?
악마가 조용히 있는가 싶더니, 도저히 참지 못하겠는지 키득키득 웃었다. 번 역시 어처구니가 없다. 사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어앉으며 손을 뻗어 그의 턱을 와락 움켜쥐는 번.
“네 이름이 무어냐?”
“······.”
“이름이 무어냐 물었다.”
“코크..”
“너는 내가 누군지 아느냐?”
번의 섬뜩한 목소리에 코크란 사내가 발작처럼 외쳤다.
“모른다! 상관없다! 이 일을 그분이 아시면 네놈들의 목은 개밥이 될 것이다! 그리되기 전에 썩 물러가라! 도적놈들아!”
뭐, 솔개부대 행색이 기사답지 못한 것은 인정한다. 잘 봐줘야 어디 용병쯤으로 보이겠지. 번의 모습도 몇 년 전에 비하면 엄청나게 성장해서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러다보니 도적떼쯤으로 오해하는 모양. 하지만 대가리가 달렸다면 이런 상황에서 분위기 파악은 해야 하지 않겠나?
“그분이 누구신데?”
재미있다는 듯 피식 웃으며 묻는 번.
“내 입에 올릴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네놈 귓구멍으로 감당할 수 있는 분은 더더욱 아니시고! 후회하기 전에 이쯤 하는 게 좋을 거다!”
제법 강단은 있어 보인다. 이 정도 되니까 농장 관리를 맡겼으리라. 하지만 그는 딱 우물 안만 보았다. 그 밖엔 어떤 세상이 펼쳐져 있는지 짐작도 못 하겠지.
찰싹-!
번의 손이 그의 뺨을 쳤다.
"······!"
홱! 돌아간 얼굴. 붉어진 뺨.
번이 다시 그의 멱살을 잡고 끌어왔다.
“내 귓구멍으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으니까 말해봐.”
“허읍...”
번이 얼굴을 더욱 가까이 들이밀며 으르렁댔다.
“말해보래도?”
사내는 흔들리는 동공으로 주변을 훑으려 해보았다. 그러나 칠흑같이 어두운 밤, 보이는 것이라곤 정체불명의 습격자들이 뿜어내는 안광뿐이었다.
“그.. 그분이 아시는 날엔..”
찰싹-!
다시 사내의 뺨이 돌아갔다. 아까 맞은 곳과 같은 부위다.
“커흑..”
번은 다시 그의 멱을 잡아끈다.
“그러니까 그분이 누구시냐고.”
-낄낄, 뭐가 저리 어려울꼬.
-7황비 그 계집이거나 필립 늙은이겠지.
-그놈들 부하일 수도 있고.
-개돼지들이 입단속은 잘 시킨 모양이야?
웬만해선 감정표현을 하지 않는 솔개부대가 기막힌 듯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
"그..."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사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감히 7황비님을 저렇게 상스럽게 입에 담다니? 혼란스럽다. 이 사내의 입장에선 솔개부대의 목표가 7황비와 필립 공작이라는 것을 까맣게 모르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 분께선..”
“됐다.”
번은 한계가 온 듯 코웃음을 치며 일어났다. 그러면서 부대원에게 말했다.
“열은 남아 농장을 지키고, 접근하는 놈은 모조리 구속하라.”
“충!”
“충!”
번이 몸을 돌리자, 그의 망토가 펄럭였다.
“..어? 어어어?”
사내는 그제야 본다. 어렴풋이 먼 기억 속 어떤 화창한 날 오후. 저 남쪽 왕국을 정벌하러 가신다며 위풍당당하게 대군을 이끌고 수도를 떠나시던 황제 폐하를 먼발치에서나마 가슴 졸이며 바라보던 그 날. 그때! 확실히 두 눈에 각인되었던 문장을! 그것이 번의 등에서 펄럭이고 있는 것을 말이다.
부르르..!
“서, 설마..”
그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푸학!
뒤에서 솔개부대원이 검을 휘둘렀으니까.
도르르 땅을 구르는 그의 허망한 시선이 붉은 망토 끝자락에서 멈췄다.
.
.
.
7황비 처소.
매주 주말에 열리는 파티가 오늘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수많은 마차가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밤새워 먹어도 모자라지 않는 음식과 마르지 않는 술이 풍요로움을 돋궜다.
수도에서 방귀깨나 뀐다는 사람은 모두 초대받은 자리. 아비가 오지 않으면 그 아들이, 아들도 시간이 안 되면 누이가 참석해 자릴 빛냈다. 그만큼 7황비의 위세가 대단하다는 증거이자, 두루 인맥을 넓힐 수 있는 사교의 장으로 활용되니 마다할 이유가 없기도 하다.
-어머, 저분은 존슨 기사님?
-와아, 정말 소문대로 키가 크네.
-아아아, 한번 안겨봤으면.
-까르르! 못하는 소리가 없니!
예쁜 드레스를 입은 처녀들이 삼삼오오 모여 파티장에 들어서는 사람들을 품평 중이다. 파티는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친목 도모로 쓰이기도 하지만, 이렇듯 혼기 찬 명망가의 자제들이 만남의 장소로 여기기도 했다.
모두가 각자의 이유를 가지고 모인 자리. 어느덧 밤이 야물게 익어간다.
“호호호! 후작께서 이리 추켜세워주시니, 본 비妃가 부끄럽습니다.”
파티의 개최자이자 주인공. 7황비 곁엔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는데, 오늘 이들의 주제는 그녀의 큰아들에 대한 것이었다.
“아닙니다! 제가 그제 우연히 람보르에서 황자님을 마주쳤는데, 그 기개가 어찌나 늠름하던지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호호! 과찬이세요. 나라를 이끌기엔 아직 배울 것이 많은 아이랍니다.”
깎아내리는 것 같아도 황제의 뒤를 이을 거라는 확신을 깔아두는 그녀다. 당연히 듣는 사람도 계속 있다 보면 절로 그리 생각하게 되고. 그래서 두 아들이 참석하지 않아도 황비는 꾸준히 파티를 열어 사람들을 모았다.
“후작님께서 많은 지도편달 해주셔야 합니다.”
“그럼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하하하!”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계속되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7황비의 눈꼬리가 살짝 일그러졌다. 저쪽에서 그녀의 심복 루퍼스가 눈짓을 주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잠시 실례 하겠습니다. 후작님.”
“예! 얼마든지요!”
파티엔 막대한 돈이 든다. 그것도 입만 고급인 수도의 여우들의 비위를 맞추려면 어지간해선 이리 모으기도 쉽지 않았다. 당연히 들인 돈이 있으니 그만큼의 값어치를 해야 하지 않겠나?
무조건 흥겨워야 하고, 무조건 즐거워야 했다.
그러나 루퍼스가 전해온 소식은 간신히 가려놓았던 그녀의 주름을 여과 없이 드러나게 했다.
“뭐라고요?”
와장창! 가면이 깨졌다.
뾰족한 그녀의 목소리에 주변에서 시선이 모였다.
“험험..!”
루퍼스가 주먹을 입으로 가져가며 헛기침을 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자리를 옮기시지요.”
루퍼스를 따라 발코니로 이동한 7황비.
“말해봐요. 농장이 어떻게 됐다고요?”
다급한 그녀의 표정에 루퍼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직 확실하진 않지만, 연락책이 끊겼습니다. 뭐, 중간 관리자가 일이 생겼을 수도 있고, 병에 걸려 알아 누웠을 수도 있으니 너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일 아침 날이 밝는 대로 제가 직접 다녀오겠습니다.”
“휴우.. 놀랐잖아요!”
가슴을 쓸어내리는 7황비.
요즘 한창 장사가 잘 되는 중인데, 여기서 차질이 생기면 곤란했다. 제국 쪽 유통책에서 지난달의 2배를 주문했는데, 그걸 맞추는 것도 빠듯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파티도 계속되어야 하고, 여기저기 뇌물도 뿌려야 하며 농장도 늘려야 해서 돈줄이 막히면 아주 곤란해진다.
“일단, 보고는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언제부터 그랬는데요?”
“오늘 와야 할 보고가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뭐, 사정이 있을 수도 있으니.. 혹시 그자, 전처럼 진탕 취해 곯아떨어진 건 아니겠죠?”
“하하! 확인해보겠습니다!”
“그 사람 짜르라니까!”
“술고래긴 해도 일은 똑 부러지게 잘하는 친굽니다.”
“으이그..”
7황비는 머리를 흔들었다.
레인보우 립 쪽의 인력관리는 전부 루퍼스에게 일임하고 있었기에 그녀로선 믿고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얼마든지 개입할 순 있었지만, 그녀는 참는다. 이게 2황비와 그녀가 다른 점이었다. 전문성이 필요한 일은 전문가에게. 그녀는 파티를, 루퍼스는 루퍼스의 일을 한다. 각자 잘하는 곳에서 최선을 다하면 모든 일은 술술 풀려가게 되어 있다 믿는 그녀.
이때,
“······?”
발코니에 섰던 황비가 뒤를 돌아보았다. 소란이 느껴진 거다.
“뭐죠?”
“글쎄요. 누가 왔나 봅니다.”
7황비의 화려한 귀걸이가 기우뚱했다.
‘올 사람이 없는데?’
명단에 있는 사람은 이미 진즉 다 도착했다. 게다가 이제 파티 막바지가 아닌가? 이 시간에 누가? 혹여나 싶어 파티장으로 급히 들어서던 그녀.
우뚝 섰다.
“······!”
-어머, 저분..?
-맞아! 황자님이셔!
-정말? 그분이 저리 장성하셨다고?
-에엑? 나보다 어릴 텐데?
처녀들의 소곤거림이 7황비의 귀를 팠다.
꿀꺽, 절로 침이 넘어갔다.
파티장 입구.
저쪽을 보고 있던 불청객이 7황비 쪽으로 그림처럼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버, 번..?”
말쑥한 연미복을 갖춰 입은 청년.
번 황자가 사교계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