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장에서 온 사신 2 #
“그 건은 녀석에게 맡겨두고, 우린 우리 일이나 계속하지.”
앞에 있을 때는 태자라고 부르며 추켜세우더니, 나가자마자 녀석이란다. 정말 못 말리는 군주다.
“후단에서 몇 달이나 버틸 수 있을 것 같나?”
황제의 말에 스캇이 답했다.
“보급만 끊기지 않는다면 6개월 이상 가능할 것입니다.”
“6개월이라..”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구기는 황제.
“우리와 동맹을 맺을만한 인접 국가는 없고?”
“제국을 등지는 것이 쉽진 않을 것입니다. 다들 눈치 보느라 바쁘겠지요.”
“하긴..”
쓰읍, 입맛을 다신 황제는 길게 숨을 내쉰 뒤 주변을 둘러본다.
“여기까지 온 이상 물러설 순 없다. 후단은 무조건 점령한다.”
-옳습니다!
-당연합니다!
-명확하신 판단이십니다!
뒷일은 일단 생각하지 말자.
변수가 너무도 많았고, 어쩌면 이 후단 왕국 자체가 거대한 국경이 되어 변경백을 두고 지켜야 하는 땅이 될 수도 있으니까.
‘그것만 내 손에 들어온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
황제는 번의 말을 떠올렸다.
‘시간 싸움이라.’
그 말이 딱 들어맞는 상황 아닌가?
“허! 그놈 참!”
그는 그렇게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
.
.
‘금의환향이란 말이 있지.’
비단옷 입고, 고향故鄕에 돌아온다는 말인데, 설명우가 살던 대한민국에선 아주 다양하게 쓰이던 말이다.
-그게 뭔데?
하지만 이 세상은 이런 사자성어가 없다.
‘출세해서 집에 돌아온다는 거야.’
-오! 지금 자랑하는 거냐?
‘그래. 크크크!’
번은 부정하지 않았다.
저 앞. 에비뉴 수도가 보인다.
비록 레드 와이번 500명은 전장에 두고 왔지만, 솔개부대 500과 친위대는 고스란히 그의 곁에 남았다. 게다가 권한까지. 이 정도면 남는 장사 아닌가? 사실 박박 우기면 레드 와이번도 데려올 수 있었겠지만, 번은 그리하지 않았다. 필립 공작과 어찌 될지 모르는 일이고, 레드 와이번이 자신들의 주군에게 칼을 들이밀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통제하지 못하는 폭탄만큼 무서운 것도 없으니 생색이나 낼 겸 통 크게 전력이 부족한 전장에 기부하고 왔다.
‘지금쯤 박터지게 싸우고 있겠군.’
번이 전장에서 떠난 지도 시일이 꽤 흘렀으니 후단 성을 함락했거나 공성에 한창일 것이다. 3차 지원군까지 가세했고, 적도 비리비리하니 따내는 것은 어렵지 않을 터. 어차피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궁으로 갈 거냐?
‘아니, 며칠 분위기 좀 보고.’
번은 집으로 향했다.
오매불망 아들 소식 기다리고 있을 어머니께 버선발로 달려가는 착한 아들은 아니었지만, 수도 분위기도 봐야 하고, 이곳에서 얻은 가족이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 아버진 빼고.
“형아아아아아아-!”
마당에 들어서자, 놀고 있던 샨이 기절할 듯 놀라며 반겼다. 다리에 매달리는 녀석을 보니 세월이 훌쩍 지나간 걸 알 수 있다. 벌컥 안에서 문이 열리며 어머니도 나오신다.
“번..!”
“어머니.”
그녀는 담담한 척했지만, 번을 안은 품 전체에서 가는 떨림이 전해졌다.
“그래, 폐하께선 강녕하시더냐?”
“그럼요.”
전쟁에 미친 아버지가 뭐 그리 생각나시는지.
“밥은? 먹었고?”
“예.”
어머니는 번의 뒤를 둘러보았다.
“혼자 왔니?”
“예.”
거짓말이다. 사람이 너무 많아 수도에 흩어놓았다.
“그래! 들어가자! 따듯한 차라도 한잔 하렴.”
번은 거실에 앉아 새삼스러운 눈으로 나고 자란 곳을 훑었다.
이젠 여기가 낯설다. 새가 둥지를 떠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그 역시 어른이 되어간다는 증거이리라.
그리고 이제는 가장家長이 되려 한다.
“얼굴이 많이 상했구나.”
딸칵. 찻잔 접시를 내려놓으며 어머니가 앉았다. 옆에서 샨이 궁금한 게 한 무더기라는 표정으로 몸을 흔들어댔지만, 차마 끼어들진 못한다.
“밥은 제때 챙기고 있는 거니?”
세상 모든 엄마들은 다 이렇다. 아들이 아무리 큰일을 하고, 대단한 사람이 되어도 늘상 끼니 걱정, 건강 걱정뿐이다. 그렇다고 이게 싫다는 건 아니었다. 이런 생각 해주는 것은 세상에 어머니 말곤 없으니까.
푸근하게 웃으며 찻잔을 손에 드는 번.
“맛있네요.”
“뜨겁지도 않니. 데겠다. 천천히 마셔.”
“하나도 안 뜨거워요.”
이것보다 몇 배는 뜨거운 전장의 피를 마시고 돌아왔지만, 이곳에선 그저 열네 살짜리 철부지 아들일 뿐.
잠시만 있자. 잠시만. 이런 사치쯤은 잠시 누릴 자격이 있을 만큼 열심히 살아왔으니까.
10분쯤 지났을까?
샨의 이런저런 질문에 농담처럼 답해주던 번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이제 다 비었다. 여유로운 시간은 끝났다.
“어머니.”
“응?”
“할아버지를 봬야겠어요.”
어려운 일은 아니다. 람보르로 찾아가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번이 이렇게 말을 했다는 게 심상찮다.
“그분께선.. 큰일을 하기엔 너무 나이가 많으시단다.”
우려하는 목소리에 번은 팔을 뻗어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그렇기에 뒤를 보지 않고 더 달리실 수 있을 거예요.”
“얼마나..”
위험한 일을 벌이려고 그러니? 라고 묻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그녀는 입을 꾸욱 다물었다.
대신 질문했다.
“샨을 지켜줘야 한다.”
“그럼요.”
번은 샨의 머리를 헝클며 웃었다.
밤이 왔다.
방에 틀어박혀 한걸음도 나오지 않던 번이 슬며시 밤이슬을 밟았다.
람보르 외곽 작은 술집엔 고된 일과를 마친 건장한 열댓 명의 사내들이 진탕 술을 마셔대고 있었다.
번이 들어서자, 수많은 시선이 잠깐 쏟아졌다가 다시 사라진다.
“할아버지.”
구석 자리엔 할아버지가 이미 와 계셨다.
“번, 놀랍구나. 이렇게 크다니. 설마 그새 10년이나 지난 게냐?”
“하하! 그럴 리가요.”
눈을 비비며 번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다가 허탈하게 웃는 할아버지.
“소식은 들었다. 전쟁터에 나갔었다지? 무섭진 않던?”
“무섭긴요.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었는 걸요. 저보다 어린 친구들도 싸워요.”
“하아, 그럴 게다. 이젠 젊은이 찾기가 힘들 정도야. 어서 이 전쟁이 끝나야 할 것인데. 이러다 씨가 마르겠어.”
그랬다. 오는 길에만 보더라도 멀쩡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이미 전국에 내려진 징집령에 한 집에 한 명은 전쟁터로 끌려갔고, 남편이나 아들을 보내야 하는 아낙의 가슴은 미어졌다. 게다가 예전엔 그나마 둘 중 하나는 돌아왔었는데, 지금은 승전보는 커녕 좋지 않은 소식만 연달아 전해오니, 다시 얼마 남지도 않은 집안 남자를 끌고 가지 않을까 노심초사였다.
맥주를 홀짝이는 할아버지를 보며 번이 입술에 침을 발랐다.
“할아버지.”
“왜 그러느냐?”
“힘이 필요해요.”
“······?”
이제까지 번은 단 한 번도 가족에게 손을 벌린 적이 없었다. 막 걷기 시작할 때도 자빠지면 제힘으로 일어났고, 다시 넘어져도 울지 않았다. 그 뿐인가? 누구도 짐작할 수 없었던 대 에비뉴의 후계자 자리까지 홀로 올라간 대견한 녀석. 그런 번이 오늘 처음으로 할아버지에게 부탁한다.
“누군가는 황실을 쥐어야 해요.”
“폐하께서 계시다.”
“아니요. 다른 쪽으로요.”
번은 2황비를 제거하면 평화가 찾아올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번이 아직 경험이 부족하다는 증거였다. 잡초는 계속 자라는 법이고, 그리되지 않게 하려면 그 자리에 나무가 심어져야 했다.
“조만간 궁에 폭풍이 올 거예요. 황궁뿐 아니라 람보르나 수도 전역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도 있고요.”
번의 기세에 할아버지는 으으음, 길게 신음했다.
“네가 관련된 일이더냐?”
“예.”
번은 7황비를 제거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다른 황비들이 자랄 기회를 줄 뿐. 변하는 건 없다.
그래서 마음먹었다. 남 줄 바에 내가 가지기로!
“어머니를 황후皇后로 만들 거에요.”
“뭐, 뭣..?”
할아버지가 벌떡 일어났다.
망국 출신의 그로선 상상도 하지 못할 말. 아니, 이런 모의를 했다는 것 자체로도 알려지면 목이 잘릴 거다. 하지만 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그 어떤 여자도 범접하지 못할 절대적인.”
짐승으로 몇 번이나 살아왔다.
“모든 황비가 머리 숙일.”
마침내 얻은 이 삶.
낳아주고 길러주신 그분께 효도 한 번 해보련다.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이자, 여인천하의 지위로 제가 올려드릴 겁니다.”
아들이 후계자가 되었지만, 어머니의 삶은 변한 것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전엔 2황비가, 이젠 7황비가 견제하는 통에 변변한 파티 한 번 가보지 못하셨다. 본래 천성이 조곤조곤하고 나서지 않는다 할지라도 누릴 건 누리게 해드려야 한다. 그것이 백수의 왕이자, 여기 에비뉴의 절대자가 되기로 마음먹은 아들의 선물이다.
“말만.. 들어도 기쁘구나.”
할아버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라를 잃을 때 세상을 잃었고, 구차한 목숨 부지하고자 딸을 적국의 왕에게 바쳤다. 한데 이젠 그 딸애가 낳은 아들이 이렇게 장성하여 포부를 밝히니, 어찌 감개무량하지 않을까.
“그런데 말이다. 번아.”
할아버지는 처연한 표정으로 웃었다.
“네 어미는 그리하지 않을 거다.”
딸애를 안다. 그 애는 지금처럼 언제고 뒤에서 지켜보는 것을 택할 거다. 그게 아들의 앞길을 막지 않는 가장 현명한 길임을 아니까.
“그래서 제가 할아버지를 뵙자 한 거에요. 도와주세요. 할아버지가 나서면 어머니도 어쩔 수 없을 거예요.”
“허어..”
할아버지는 걱정 한가득한 눈빛으로 번을 바라보았다.
안다. 저 마음. 세상이 발아래 있는 것 같겠지.
그도 예전엔 그랬다. 왕국이 하루아침에 망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인생무상人生無常에서 깨달은 것이라면 같은 길을 걸으려는 이에게 조언을 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할아버지가 맥주잔을 놓고, 탁자 위로 손을 뻗었다.
“우리는 신경 쓰지 말거라. 이미 여기로 올 때, 삶의 미련은 모두 버렸단다. 언제 죽어도 후회는 없어. 네 앞길만 생각하려무나.”
어머니도 할아버지도 오직 번의 미래만 위했다. 어떤 권력도 부귀영화도 원하지 않는다. 그저 아들이, 손주가 무탈하여 잘 지내면 그뿐인 것이다.
“예.”
번이 활짝 웃으며 할아버지의 손을 잠깐 잡았다 놓고 일어섰다.
“지켜봐 주세요.”
내 앞길에 피만 가득할지라도 어머니에겐 꽃길을 깔아 드릴 것이니.
번의 마음을 읽은 듯 할아버지는 속없이 훌훌 웃었다.
그래, 도와주마. 뭐든 해보려무나.
세상을 향해 뛰다 자빠져도 일어서면 되지 않겠느냐? 아무리 뛰어도 하늘에 닿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 또한 나이를 먹어간다는 뜻일 테니.
할아버지는 아직도 번을 아이로 보고 있었다. 하지만..
돌아선 번이 옆으로 오른 손을 촤악 뻗었다.
그때였다.
“부대 차려-!”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술집 안이 살기로 가득 찼다. 조금 전까지 웃고 떠들며 술을 마시던 사내들은 온데간데없고, 두 눈 부리부리한 짐승들만 가득했다. 아니, 이들은 야생의 맹수가 아니었다. 잘 훈련된 개다. 오직 한 사람만 따르는 충견忠犬!
“검劍!”
처억.
번의 손에 검이 잡혔다.
“갑鉀!”
누군가의 외침에 사내들이 식탁 아래나 짐에 숨겨 두었던 번의 갑옷을 한 파츠씩 들고나와 번의 몸에 맞춘다.
마지막으로 투구가 씌워지고,
“휘揮-!”
마지막으로 번의 등에 망토를 둘러주었다.
펄럭!
핏빛 붉은 망토엔 거대한 문장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건 황제가 전장에 나설 때 가장 앞선 깃발을 뜻하는 것이었고, 지금은 번이 그 권한을 승계했다.
전장에서의 모습 그대로 화化한 번이 뒤를 잠깐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친 할아버지가 부르르 떤다.
“부대..”
번이 머리를 돌려 술집 밖으로 나서며 말했다.
“출出!”
“충!”
“충!”
전율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