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장에서 온 사신 1 #
“허나, 무작정 다 잡아온다고 좋은 것만은 아니다. 나라가 유지되려면 최소한의 조건이 필요한 법이다.”
황제가 우려의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스캇까지 끄덕이며 거들었다.
“그렇습니다. 이곳도 사정이 급한 건 맞으나, 건장한 사내들이 필요한 곳이 있습니다. 그들이 다 전장으로 나오면 자칫 사회를 구성하는 기반이 무너질 수 있을 겁니다. 10만이면 전쟁엔 유리해도 나라엔 부담되는 숫자입니다.”
아무리 머릿수로 싸우는 전쟁이라지만, 훈련을 할 최소한의 시간이 필요한 법. 더군다나 경험도, 의지도 없는 잔챙이들만 많아 봐야 놈들 뒤처리 하는 것에 애를 더 먹을 수도 있다는 것. 하지만 반대의견에도 번은 기죽지 않고 끄덕였다.
“맞습니다. 우선, 지금 당장 에비뉴의 사내들을 전부 데려오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그것에 관해서도 드릴 말씀이 있었습니다.”
“해보아라.”
번은 주변 장수들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자리엔 여자가 없습니다. 훈련만 한다면 충분히 제 몫을 해낼 수 있음에도 예로부터 이어진 편견 때문에 남자들만 전쟁터로 나옵니다.”
황제가 피식 웃었다.
“그건 태생적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힘의 격차를 무시할 순 없지 않느냐. 또한, 남자는 하나만 있어도 여럿의 자손을 볼 수 있지만, 여자는 아니다. 후일을 기약하기 위해서라도 여자들은 남겨두는 것이 좋다.”
다른 장수 하나도 거든다.
“옳습니다. 여자들이 전쟁터에 나와봐야 겁간이나 당하지. 갑옷을 입으면 거동조차 못 하는 것들을 예가 어디라고 들이겠습니까?”
-군기만 해칠 뿐입니다.
-막사가 문란해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두통이 오는군요.
-달거리는 어떡하고요. 피 냄새에 맹수나 꼬이겠지요.
-득보다 실이 큽니다.
모두가 반대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번에도 번은 묵묵히 듣다가 조용해지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
확신이 찬 눈빛.
황제는 고개를 갸웃하며 입술을 비틀었다.
“묘수라도 있느냐?”
“네! 에비뉴가 아닌 벨버른. 그곳엔 지금 수만, 수십만의 잉여 인력이 있습니다. 그들을 이용할 수만 있다면 전세를 완전히 뒤집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으음..벨버른의 여자들을 말이냐?”
“그렇습니다. 벨버른엔 자식을 둔 어미나 노쇠한 자들을 빼더라도 신체 건강한 여자들이 아주 많습니다.”
번의 확고한 목소리에 여기저기에서 신음이 터졌다.
-황자께서 저리 강심장인 줄은 몰랐소이다. 어찌 여자들을 전쟁터에..
-그야말로 개죽음 아니오이까?
-허허.. 전장에 치맛바람이라니.
-제국이 알면 얼마나 웃을지!
모두가 비웃는다.
하지만 번은 생각이 달랐다.
물론 전쟁터에 여자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용병대나 마법사 집단은 여성 비율이 높은 경우도 있었고. 하지만 그녀들은 일종의 별종으로 취급될 뿐, 전쟁은 언제나 남자들의 것이었다. 마치 여자란 그저 번식을 위한 도구나 꽃같은 것이라는 사상. 현대를 살아봤던 번에겐 당연한 것이지만, 그것이 이들에겐 말이 안되는 소리였으니 쉬울 거라 생각하진 않는 번. 지금 그 사고의 틀을 깨려한다.
“네 말대로 한다 치자. 너는 정녕 그들이 도움이 될 거라 보느냐? 저 약에 미친 것들을 보면 오줌이라도 지리지 않을까?”
-낄낄, 혼이 쏙 빠지겠지요!
-오줌은요! 똥을 지릴 겁니다!
-어디 아녀자가..!
팔이 잘려도 이로 물어뜯고, 다리가 부러져도 질질 기어와 종아리를 물어뜯는 놈들이었다. 여자들이 이걸 버텨낼 수 있을까?
“소자에게 시간을 주신다면 반드시 이롭게 해 보겠습니다.”
황제는 흐음, 숨을 내쉬더니 스캇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네 생각은 어떠냐는 뜻이다.
“뭐.. 밑져야 본전이니, 맡겨 보시는 것도 좋다 봅니다. 그렇지 않아도 먹을 것 없어 고생하고 있다지 않습니까? 이래 죽나 저래 죽나..”
스캇의 말처럼 번이 벨버른의 여인을 데리고 뭘 하든 그건 에비뉴에겐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지독히도 이기적인 말. 하지만 입이 하나라도 줄면 그것도 나쁘진 않을 거다.
“그래, 그건 네 뜻대로 한번 해보아라.”
“절대 실망하게 해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번의 우렁찬 목소리에 황제가 끌끌 웃었다.
하긴 이 녀석이 어디 실패한 적이 있었던가? 이번 일도 어떻게 해결할지 묘한 기대가 벌써부터 들었다.
“그건 그렇고, 마약은 어떻게 단언하느냐? 은사 대장군의 십위가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지만, 출처가 에비뉴가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황제의 말에 번이 망설이는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괜찮다. 이들은 나와 오래전부터 전장을 떠돌던 자들이다. 절대 이 막사 밖으로 단 한마디도 흘러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황제가 사람들을 둘러보자, 우렁찬 대답들이 터졌다.
-당연합니다!
-제 입엔 오래전부터 칼을 물고 있었습니다!
-태자께선 걱정하지 말고 허심탄회하게 말씀해보십시오! 나는 홀몸이라 어디 가서 떠벌릴 데도 없소이다!
모두가 호언장담할 때, 번의 눈은 한 사람에게서 멈춰 고정되었다.
“······.”
아인타인 공작이었다.
“커험..!”
시선이 불편했는지 헛기침을 하는 아인타인 공작. 그를 대신해 황제가 말한다.
“괜찮다. 그는 내 오랜 전우이며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다. 태자는 말하라. 무엇이기에 그리 뜸을 들이는 것이냐?”
번은 몸을 돌려 황제에게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소자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아니다. 괘념하지 마라.”
번이 속으로 웃으며 겉으론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소자가 우연히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공작가 중 한 곳이 마약에 연관이 있다는 증거가 있었습니다.”
“뭐라?”
황제의 눈이 크게 뜨이고, 여기저기에서 고함이 터진다.
-이런 쳐 죽일!
-그 간악무도한 놈이 대체 누굽니까?
-당장 가서 멱을 따버려야 합니다!
-그놈 때문에 우리가 이 지경이 된 거 아닙니까!
아인타인 공작의 얼굴도 하얗게 질렸다.
공작가가 마약을 키워 제국에 팔았다? 이건 반역이나 역모에 준하는 범죄아닌가? 마약이 아니었다면 지금 전쟁은 어땠을까? 철鐵의 군대는 진즉에 후단을 점령하고, 산맥을 넘어 중앙대륙 인근에 도달했을 것이다.
이때, 은사.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태자께선 말씀을 가리셔야 할 것입니다. 지레짐작으로 이야기하기엔 사안이 너무 큽니다.”
은사의 말이 맞다. 자칫, 모함 하나가 대대로 에비뉴에 공헌한 유서 깊은 가문을 통째로 사라지게 만들 수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번은 이미 머릿속에 모든 계획이 다 들어 있었다.
품에서 작은 주머니 하나를 꺼내 조심스럽게 황제에게 다가가 내미는 번.
“이것이 무엇이냐.”
“세이프 레인보우라 불리는 것입니다.”
번의 말에 주변이 싸늘해졌다.
“······.”
“······.”
황제가 말없이 주머니를 풀어본다.
그리 크지 않은 주머니. 하지만 그 안에 수북이 쌓여있는 콩알만한 것들은 수천 명이 복용할 수 있는 양이었다.
“..벨버른은 아닐 터, 수도에서 구했더냐?”
“그렇습니다.”
황제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주머니를 꼭 쥔 그의 손이 가늘게 떨린다.
“누구더냐.”
대답은 바로 나왔다.
“필립 공작입니다.”
-캬캬캬! 이런 악독한 놈!
악마가 미친 듯이 웃었다.
손잡기 꺼림칙하던 필립 공작과 밀회할 때 다 이유가 있다고 하더니, 여기까지 내다본 것인가?
-사돈 될 생각에 덩실덩실 춤추고 있을 그놈이 이 사실을 알면 까무러치겠구나!
악마가 뭐라 지껄이든, 번은 진중한 표정으로 황제와 마주 보며 말했다.
“하지만 그가 진원지인지는 밝히지 못했습니다. 해서, 소자에게 전권을 주신다면 샅샅이 발본색원拔本塞源 하겠나이다!”
근본根本을 빼내고, 원천源泉을 막아 버린다는 뜻인데, 한마디로 탈탈 털어버리겠단 거다.
이때, 은사가 미심쩍단 눈으로 번에게 묻는다.
“필립 공작이 이만한 양의 세이프 레인보우를 태자께 주었다고요?”
쥐뿔도 없는 황자에게?
“제게 레드 와이번을 맡겼으니까요.”
“으음.. 공을 얻으려 했다는 것이군요.”
황제가 위기에 몰렸다는 것은 모두가 알았을 것이니 이 기회에 크게 생색이나 한번 내볼까? 라는 의중이 들어있을 것이다. 만만한 황자를 내세워 써먹고 훗날 계속 바지사장으로 앉힐 수도 있는 것이고.
-허.. 이런 간악한 인간이!
-당장 잡아들여야 합니다!
-인의를 져버렸구나! 사람 가죽을 벗어버렸어!
모두는 이제서야 번이 레드 와이번을 지휘할 수 있었던 것도, 3차 지원군에서 이탈할 때 레드 와이번이 번을 순순히 따른 것도 이해가 되었다. 물론 그리 생각하도록 번은 이 와중에도 침통한 표정을 풀지 않았고.
-참으로 뻔뻔하다! 뻔뻔해! 이렇게 교묘하게 거짓말을 하다니!
‘본래 거짓은 진실에 섞는 거야.’
딱 한 방울만 떨어져도 물통 전체를 오염시키는 잉크처럼.
‘이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도록.’
-너는 잘못한 게 없다?
‘딱히?’
-크하하하! 요물이구나! 정말 요물 덩어리야!
전장터로 떠나오기 전, 벨버른을 떠나 수도에 도착한 번은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은밀한 개구멍을 통해 이미 싹 염탐을 했었다. 그 과정에서 7황비와 필립 공작의 유착을 파악했고, 황궁의 절반 이상을 집어삼킨 7황비를 한 번에 제거하려면 아주 강력한 한방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작전을 짰다. 필립 공작과 접선을 시도하고, 거부할 수 없는 먹이를 던져놓고 말이다.
“필립..”
까득, 황제의 어금니 갈리는 소리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게슴츠레하게 뜬 그의 눈은 마주 보기도 겁날 정도다.
“내, 이 일은 절대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는 황제.
“태자!”
분노로 포효하는 외침에 번의 피부가 오싹하다.
“예! 폐하!”
“너에게 마약에 관련된 모든 이들의 생살여탈권生殺與奪權을 주겠노라!”
번이 한쪽 무릎을 쿠웅! 소리가 나도록 꿇었다.
“삼천이 아니라 오천을 동원해도 좋다! 가로막는 놈들이 있으면 전부 목을 잘라 성벽에 걸고, 주동자는 옥에 가두라! 내가 직접 처리할 것이다!”
“그리하겠나이다!”
황제는 머리를 돌려 은사를 한번 보곤, 다시 번에게 말했다.
“당분간 십위 또한 네가 부리도록 하라. 그들이라면 충분히 도움이 될 것이다!”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이 순간, 막사의 모두의 눈앞에 훤히 그려졌다.
살리고 죽일 수 있는 권리와 주고 빼앗을 수 있는 권리를 손에 쥔 태자. 그가 수도로 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말이다.
‘됐어!’
고개 숙인 번의 눈이 번뜩일때,
“단!”
황제가 말했다.
‘단?’
번은 움찔하지만 고개를 들진 않는다.
“관련된 놈들만 처리하되, 시설물이나 농장 같은 것들이 있다면 그대로 보존하라.”
황제의 외침에 뒤쪽에 있던 딘딘이 이마를 구기며 머리를 흔들었다. 결국, 황제는 이 마약을 이용할 속셈인 거다.
‘역시 쉽지 않군. 단물만 쏙 빼먹을 심산인가?’
번 역시 의도를 바로 파악했다.
입꼬리가 살짝 욱신거렸다가 거짓말처럼 사라지며 바로 답한다.
"예, 폐하!"
번이 벌떡 일어나자,
“가라-!”
황제가 외쳤다.
“가서 나를 속이고, 국가를 속이며 이윤을 착취한 그들을 징벌하도록 하라!”
“믿어주시옵소서! 소자! 최선을 다하겠나이다!”
번이 그 말을 끝으로 돌아서 성큼 막사를 나섰다.
그가 휘장 밖으로 사라지자, 막사 안은 기이한 분위기만 흘렀다.
이어 황제가 착석하자, 스캇이 쪼르르 다가와 물었다.
“태자는 아직 어립니다. 너무 막중한 책임을 지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은사 대장군을 보내는 편이 나았을 것입니다.”
의자 팔걸이에 한쪽 팔꿈치를 대고, 얼굴에 주먹을 괸 황제. 그의 눈이 뱀처럼 스캇을 힐끔거렸다.
“아니야.”
“네?”
“내 사람이 나서면, 그건 내 의도가 된다.”
“······!”
“누가 연관되었을지 모르는데, 내 자식을, 내 아내를 내 전우를 내 손으로 잡아 죽일 순 없지. 저 녀석이 적격이야.”
황제의 말에 저쪽에 있던 아인타인 공작이 침을 꿀꺽 삼켰다.
목덜미가 서늘하다. 만약 자신도 여기 와 있지 않았다면 마약을 색출하는 태자에게 어떤 험한 꼴을 당했을지 모르는 일 아닌가?
“개 잡을 때 쓰는 칼은 따로 있는 법이니까.”
휴전은 없다.
이미 여기도, 태자가 향한 수도도 전쟁터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