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미 2 #
‘과연, 은사!’
번은 쓰게 웃으며 잠시 은사와 눈을 맞추곤, 다시 몸을 돌렸다.
수상한 놈이 누군진 몰라도 그 짧은 사이 놈의 도주로를 파악해 제거하다니, 은사는 은사다. 뭐, 운이 좋았을 수도 있었겠지만, 어쨌든 후환 하나는 제거했다.
“계속 간다! 저기 놈들의 깃발이 있는 곳까지!”
번은 고개를 돌려, 다루에게 외쳤다.
적의 지휘부는 그리 멀리 있지 않았다. 놈들은 이 싸움에서 이겼다 생각했는지 본진을 크게 앞당겨놓았는데, 번에겐 기회이자, 활약할 수 있는 최종목적지이기도 했다.
-힘을 더 써!
악마의 외침에 번은 크게 끄덕이며 약기운을 모조리 끌어올렸다.
기이이이잉-!
어차피 쓰면 쓰는 족족 다시 흡수할 수 있었다. 남아도는 게 약쟁이라 저 뒤쪽 놈들까지 포함하면 상당히 오랜 시간 이 수준을 지속할 수 있을 것이다.
“차아!”
번의 검에 또 하나의 적이 목을 잃었다.
순간적인 기습에 발목을 잡힐 뻔했지만, 이미 상처는 아물고 있었고, 사내의 검에 발린 독 따위는 번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아니,
「맹독을 저장했습니다.」
오히려 도움이 됐달까?
이렇게 번이 활약하고 있을 때, 아까부터 전선에 흐르던 묘한 기운이 시시각각 발현되고 있었다.
“으으으.. 추워..”
사내가 침을 줄줄 흘리다가 방패를 떨어뜨린다. 벌벌 떨리는 그의 손은 방패를 다시 주울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푸학-!
그 틈을 노려 에비뉴 병사가 그의 빗장뼈 아래에 검을 쑤셔 박았다.
“커헉..”
죽는 순간까지도 그는 생각한다.
약이 조금만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
.
.
“너무 늦지 않았을지 모르겠습니다.”
사내의 말에 노신사는 으음, 신음만 흘렸다.
벌써 저쪽에서부터 불어오는 이 냄새는 피냄새였다. 실로 오랜만에 나오는 전쟁터.
“공작님, 속도를 올릴까요?”
“그리해라.”
“예!”
아인타인 공작.
에비뉴 3공작가 중 하나이며, 대현자에 비견되는 지식과 인망을 가졌다 평가되는 이였다. 하지만 그는 방구석에 처박혀 탁상공론만 하는 자들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전쟁이 벌어지면 참전하길 꺼리지 않았고, 에비뉴가 황국으로 올라서는 데 큰 역할을 한 사람 중에 하나다.
하지만 언제까지 젊음을 유지할 순 없었다. 아마도 이번 지원군이 그가 이끄는 마지막 부대가 될 것이다. 갑옷 대신 수트를, 검 대신 지팡이든 그는 오랜 행군에도 수염 한 올 흐트러지지 않았는데, 그의 이런 결벽에 가까운 차림을 두고 호사가들은 전장의 젠틀맨이라 불렀다.
‘이만하면 병장기 소리가 들려야 하거늘..’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하다못해 비명이라도 들려와야 하는데, 지나치게 조용하다. 번 황자가 부대를 이탈해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떠났을 때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부대 통솔을 맡은 자신이 반대함에도 무려 일천을 데리고 떠난 황자.
‘저기 오는군.’
뒤따라 보냈던 척후斥候兵가 돌아왔다.
“그래, 어찌 되고 있느냐?”
아인타인 공작의 말에 척후병은 밝은 목소리로 답했다.
“휴전 중입니다!”
“휴전?”
“그분은 어찌 되었고?”
“건강하십니다!”
“음..”
자세한 얘기는 직접 가서 보고 듣는 편이 나으리라.
“이랴-!”
그가 말허리를 박찼다.
두두두두두-!
잠시 후, 도착한 전장.
듣던 대로 고요함이 가득했다. 사체를 뒤적이는 병사들을 제외하면 움직임은 없다. 철鐵의 군대 진영으로 말을 몬 아인타인 공작은 병사들에게 물어 황제가 있는 막사를 향했다.
“폐하-!”
휘장을 걷고 들어서자마자, 우렁차게 외치는 그의 모습에 사람들이 고개를 돌렸다.
“오-! 아인타인 공작! 소식은 들었다! 어서 오게!”
손을 흔드는 황제를 보며 아인타인은 성큼성큼 걸어 막사의 중앙으로 갔다. 막사 안엔 열댓 명이 앉아 있었는데, 회의 중이었는지 후끈한 열기가 아직 남아있었다.
그가 느낀 첫 번째 감상은,
“······.”
황제 옆에 나란히 앉아 있는 번 황자의 모습에서 보인 위화감이었다.
“공작은 은퇴한 거 아니었나? 하하! 벨버른 전을 마치고 쉬겠다 들은 것 같았는데?”
황제가 웃으며 농을 걸자, 아인타인 공작은 꼬장꼬장한 목소리로 답했다.
“주군이 위험에 처했는데, 신하 된 도리로 어찌 가만히 있겠습니까!”
“내, 공작의 충심이야 익히 알지. 말려도 소용없었을 거고. 앉게.”
“예, 폐하.”
빈자리를 찾아 이동하는 아인타인 공작은 이 순간에도 번 황자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
뭐지? 이 분위기는?
마치.. 모두가 황자를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상석에 앉아 있는 열네 살 애송이를! 물론 그의 신분이나 후계자로 책봉된 일화는 알고 있었지만, 여긴 전장이었다. 그가 아는 폐하께선 절대 능력 없는 자를 지휘 막사에 들이지 않으셨지 않은가?
그가 살짝 미간을 찡그리고 자리에 앉자, 황제가 말했다.
“공작. 자네가 데려온 지원군이 정확히 몇인가?”
바로 답한다.
“병자와 부상자를 제외하면 만팔천이 조금 넘습니다!”
“만팔천이라..”
턱을 만지며 끄덕이던 황제. 스윽 옆을 보며 묻는다.
“태자는 어떻게 생각하나?”
"······!!"
황제의 물음에 아인타인 공작의 눈이 커졌다.
지금 폐하가 황자에게 의견을 묻고 있는 건가? 은사, 스캇, 딘딘이 아닌? 게다가 황자가 아니라 태자라고? 잘못들은 겐가?
‘수도에서 알면 뒤집어 지겠구나.’
공작쯤 되는 위치에 있다 보면 알게 모르게 여러 소식이 들려오는 법이다. 당연히 다음 세대 황제가 누가 될 것인지는 모두의 관심사였으니 아인타인 공작도 나서진 않았지만, 흥미롭게 지켜보는 중이었다.
소문은 꽤나 많이 퍼져있었다. 후계자로 책봉되었지만, 별 힘도, 권력도, 배경도 없는 번 황자라고. 벨버른에서 공을 올리고 있다지만, 그래봐야 별게 아닐거라는 것이 대부분의 의견이었다.황자가 한 일이 아니라는 소문까지. 또한 몸이 멀면 마음도 멀어지는게 아니겠는가? 그래서 최근에 떠오른 게 7황비와 그녀의 두 아들이었다.
그녀는 어느새 2황비의 자리를 완벽하게 메웠고, 어디서 돈이 났는지 연일 파티를 개최해 인맥을 넓히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황제가 번 황자를 친근하게 대하지 않는다는 소문까지 나돌며, 아직도 황궁으로 돌아오지 않고 벨버른에 체류한 것이 그것 때문이지 않겠냐며 돌아선 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제가 예상한 바에 의하면 놈들은 하루가 갈수록 더욱 지쳐갈 것입니다. 3차 지원군 만팔천이 합류하면 충분히 자웅을 겨뤄볼 수 있을 것입니다.”
번의 말에 모두가 귀 기울인다.
황제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스캇을 보며 되묻는다.
“그렇다는데?”
“뭐, 제 생각도 비슷합니다. 아까 낮에 잠시 사람을 시켜 놈들을 정찰했는데, 좀비처럼 비틀거리기까지 하더랍니다.”
일당백 광전사들은 온데간데없었다. 제국군은 금단증세에 시름시름 앓는 병자나 다름없었고, 그건 여러 각도에서 확인되었다.
싸우면 이길 수 있다.
이건 여기 모두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회의가 길어지는 이유는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싸울 것이냐, 아니면 회군할 것이냐.
“놈들도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도 후퇴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 버릴 생각인 거죠.”
스캇이 말을 이었다.
“숫자를 하나라도 줄이려는 속셈입니다. 우리가 지쳤을 때 놈들은 다시 싱싱한 놈들로 보내면 그만이니까요.”
그랬다.
여기서 이기면 에비뉴 군대는 후단의 수도로 진격할 것이다. 하지만 거기까지 간다 한들, 그다음이 그리고 그다음이 캄캄했다. 마약을 처리하지 않고서 계속 전쟁을 이어가면 결과가 너무 뻔했기 때문이었다.
“여기 놈들은 버린 패라 이건가?”
황제의 말에 스캇이 쓰게 웃었다.
“버려진 자식들이 더 포악할 수도 있는 겁니다. 곱게 죽어줄 것 같진 않습니다. 만팔천이 합류했다곤 해도, 정면으로 부딪치면 우리 측 피해 역시 무시하지 못할 거고요.”
“흐으음..”
황제가 고민에 접어들자, 막사엔 정적이 흘렀다.
슬쩍 눈치를 보던 아인타인 공작이 옆의 사내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된 게요?”
“아, 그게..”
번 황자가 일천의 부대를 이끌고 합류한 뒤 3시간 정도 흘렀을 무렵, 제국군이 후퇴했다. 아마도 맥을 못 쓰는 병사가 늘어난 것을 감지한 모양이었다. 하루만 버티면 3차 지원군이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에비뉴 측에서도 무리해서 싸울 이유가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휴전 상태가 된 것.
‘황자가 전세를 엎었단 말인가?’
아주 위험한 상황이었다, 황자께서 제때 합류하지 않았다면 철의 군대가 처음으로 패배의 오명을 남길 수도 있었다 등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아인타인 공작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번을 바라보았다.
'언제 저렇게 자랐단 말인가?'
시선을 느낀 것인지 번도 아인타인 공작을 잠시 바라보다가 빙긋 웃었다. 그러면서 말했다.
“폐하.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번의 말에 황제가 끄덕였다.
“하라.”
번은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들의 중심으로 걸어갔다. 큰 지도가 하나 펼쳐져 있다. 에비뉴와 후단, 제국의 일부를 대충 그려놓은 것이었는데, X표시가 여기 이 전장을 의미했다.
“후단 왕성이 있는 이 지점은 고지가 높아 따내기만 한다면 제국 쪽에서 오는 병력을 손쉽게 막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렇겠지.”
황제가 끄덕이자, 스캇이 끼어들었다.
“하지만 우리 역시 공략하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후단 성이 가진 이점은 반대로 말하면 적에겐 단단한 방패란 뜻이 된다.
번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다소 출혈을 감수하고서라도 이 후단성을 따내는 것이 유리한가, 아니면 버리는 것이 옳은가입니다.”
“계속 하라.”
황제의 말에 번은 지도에 올라서 허리를 숙였다. 그의 손가락이 한곳을 짚었다.
후단 성이다.
“후단 왕국을 함락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싸움은 제국과 우리의 싸움이니까요.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여긴 전초기지로 활용하기에 아주 적합합니다.”
“그걸 알기에 후단 정벌에 나선 것이다.”
“예, 처음 계획대로 가시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마약이 계속 유통되는 한 전쟁은 가면 갈수록 힘겨워질 것이 분명합니다. 철의 군대가 일당백이라 한들, 저들은 수천, 수만을 계속해서 보낼 수 있는 제국이니까요.”
이미 숱한 전쟁을 치르며 병사의 수가 감소한 에비뉴완 달리, 제국은 근 50년간 계속해서 힘을 축적해왔다. 보통 이런 경우 경험 많고 숙련된 에비뉴의 병사들이 훨씬 잘 싸우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그것도 엇비슷할 때의 얘기지 수만 명이 어울려 싸우는 전장에선 머릿수를 따라잡기 어렵다. 게다가 병사의 실전경험이 미천하다 하더라도 수백 년 제국으로 군림한 노하우 역시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 어찌하면 좋겠느냐?”
이번 활약의 공로를 인정받아 지휘 막사에 참여하게 된 번은 처음 회의가 시작될 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잠깐잠깐 드러나는 그의 기지가 어느덧 많은 이들의 관심을 사게 되었고, 지금은 황제까지 귀 기울이고 있었다.
“아까 은사 대장군이 했던 말이 사실이라면..”
번은 지금 그의 모든 삶을 샅샅이 뒤져 써먹고 있었다. 중학교 때 잠깐 빠져 살았던 삼국지와 역사 시간에 배웠던 세계사. 만화로 배우는 조선왕조실록이나 삼국유사까지. 물론, 중국의 병법서 삼십육계三十六計 같은 것을 줄줄이 읊을 순 없겠지만, 역사를 알면 미래가 보이고, 인간은 언제나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법이다.
“이 전쟁은 시간 싸움이라 봅니다.”
“시간 싸움이라?”
황제가 재미있다는 듯 실소하며 번에게 턱짓했다. 뜸 들이지 말고 계속해보란 거다.
“이 전쟁은 우리 황국이 해왔던 그 어떤 전쟁보다 중요합니다. 이긴다면 제국으로 발돋움할 것이며 중앙대륙의 패권을 노려볼 수 있게 됩니다.”
번이 아인타인 공작을 스윽 돌아보았다.
흠칫.
아인타인 공작은 이 순간 묘한 소름이 돋았다. 어떤 불길함 때문이다.
번의 목소리는 계속된다.
“이리도 중요한 전장에 지고하신 폐하께서 나와계시는데, 신하들이 손가락이나 빨고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이건 국가의 존망이 걸린 아주 중대한 일전입니다.”
말을 하며 몸을 일으킨 번의 발끝이 지도의 후단 성을 강하게 내리찍었다.
쿠웅-!
“제게 군사 삼천과 그 누구라도 즉결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주신다면, 3개월 이내에 이 간악한 마약의 유통을 완전히 끊어내고, 4차 지원군 10만을 징병해 오겠나이다!”
번의 말에 모두의 얼굴이 굳었다.
-캬캬캬캬! 이게 네가 원했던 그림이구나! 이 영리한 놈! 황궁을 싹 털어먹을 생각이지?
악마의 음성을 들으며 번은 황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되면 적은 지금보다 더한 금단에 시달릴 것이고, 후단에서 문을 걸어 잠그면 제국도 어쩌지 못할 것입니다!”
번이 마지막 퍼즐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