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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좌의 게임-85화 (85/177)

# 케미 1 #

‘확실히..’

메카에서 힘을 쓸 때와는 여러 가지가 달랐다. 그땐 보는 사람이 없어 어떤 형태와 능력도 사용할 수 있었고, 세상 가득 퍼져있는 어둠의 기운이 등을 떠밀어주는 기분이었지만, 지금은 버거운게 많았다. 물론 그때와 같은 기능도 있다. 예를 들어, 이마의 세 번째 눈은 사물을 인식하는 방법 자체가 달랐으니까.

‘뭔가 있긴 있는데.’

고수高手는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다지만, 아직 번은 그러한 경지까지 가지 못했다.

“아아아악!”

“내 팔! 누, 누가 좀 도와줘!”

“사, 살려..!”

주변은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이런 혼돈 속 난전에선 내 근처에 누가 있느냐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레드 와이번과 너무 떨어지지 마! 수상한 놈들이 아무래도 심상찮다! 힘을 더 모아!

메카에서처럼 어둠 증폭은 없었지만, 여긴 레인보우 립을 잔뜩 머금은 먹이들이 가득했다. 그것을 흡수하고, 몸에 비축해 다시 활력으로 터트리는 일련의 작업은 이제 번이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펼쳐지고 있었다.

‘보는 눈이 많아서 답답하긴 하지만.’

번은 최대한 능력을 뽑아 올리고 있었다.

그래야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 온 보람은 있어야 하지 않겠나?

“차아! 얼쩡대지 말고, 꺼져라!”

후웅-!

휘두른 검을 막을 적은 없다. 워낙 무겁기도 하거니와 겉에 두른 마나는 누가 얘기했듯 오러의 속성을 지녀 아주 날카롭고 파괴적이니까.

이게 어떤 의미냐면,

서걱-!

“히이익!”

적이 번의 검을 막으려고 철방패를 들어도 그냥 깔끔히 썰려버린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일류 기사만으로 이뤄진 레드 와이번 기사 500명. 거기에 가혹한 환경에서도 살아남았던 베테랑 솔개 부대 500명이 번을 지키고 있다.

‘놈들의 기척을 놓치지 마. 이쪽으로 올 가능성이 크다.’

-알면 주의좀해! 적당히 날뛰던지!

후우욱!

번의 검이 다시 움직인다. 악마의 경고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셈인가보다.

그때, 번의 뒤로 빠르게 붙는 하나의 호리호리한 인영.

“황자님!”

번의 귀가 쫑긋했다.

돌아보진 않는다. 적의 허리를 자르는 중이었으니까.

“다루.”

그랬다. 번 친위대도 솔개부대에 섞여 근처에서 날뛰는 중이었다.

“상황이 좋지 않아요! 일단 시간을 두고 다시 맞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사방이 온통 적이다. 번의 등장으로 기세가 조금 기울긴 했다고 해도, 여전히 수적으로 부족하고 전체로 보면 에비뉴 군대는 풍전등화나 다름없었다.

“아니.”

그러나 번은 믿는다.

「기운을 흡수했습니다.」

「충분한 양이 모여 외부로 배출합니다.」

비타민처럼 많이 먹어봐야, 몸이 흡수할 수 있는 양이 정해진 것들이 있다. 레인보우 립 역시 마찬가지. 이렇게 막대하게 흘러들고 있다는 건, 반대로 적들은 그만큼의 약 기운을 잃어가고 있다는 뜻 아닌가?

“갈 곳은 없다. 싸워-!”

시간 싸움이라 생각한 번이 약기운을 폭발시키며 앞으로 튀어나가자, 콰앙! 그의 어깨에 닿은 적 하나가 쭈욱 뒤로 날아갔고, 다루는 칼끝을 혀로 핥으며 미간을 찡긋했다.

“지독히도 말 안 듣는 황자님이시라니까.”

근데 어쩌나. 까라면 까야지.

“차아!”

그녀가 제자리에서 텀블링하며 양손을 펼쳤다. 등을 노리던 적 하나가 목덜미에 검이 박혀 눈을 까뒤집었다.

“친위대! 황자님을 놓치지 마!”

그녀의 음성에 그림자가 번을 바짝 따른다.

한편,

번이 있는 곳에서 약 400미터 떨어진 제국군 진영.

“저거 뭔데?”

“황자라는 군.”

다른 곳보다 약간 높은 지형.

주변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이 곳엔, 세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너무 설치는데?”

“황자니까.”

“그게 뭐? 큭큭.”

여자가 입을 가리고 웃자, 남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저놈도 아는 거지. 남들이 자신을 죽일 수 없다는 걸.”

“근데 우리가 받은 명령은 아니잖아? 포로를 두지 말라지 않았나?”

“그랬지.”

제국은 에비뉴를 완전히 엎어버릴 생각이었다. 철鐵의 군대를 이끌고 급부상하고 있는 남동쪽 작은 나라가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었으니까. 가만히 있으면 놔두려 했는데, 감히 싸움을 걸어? 확실히 보여줄 생각이었다. 분수도 모르는 쥐뿔도 없는 것들이 위대한 제국에 덤비면 어떻게 되는지.

“그럼 답 나왔는데?”

여자의 말에 남자가 피식 웃었다. 그러면서 그녀에게 검을 내밀었다.

“황제의 목에 그 아들내미 목까지 더해지면 우리에게 떨어지는 보수가 늘어나겠지? 저 애송이 대가리도 그리 싸진 않을 거야.”

사내는 암살자였다. 그런데 보통의 암살자와는 다르다. 그는 절대 홀로 움직이지 않으며, 단 한 번의 공격으로 공격을 끝낸다. 그야말로 일격필살!

부우우웅.

여자가 사내의 검에 마법을 부여했다.

이것이라면 어떤 마법보호나 갑옷도 뚫을 수 있었다. 그리 지속시간이 길진 않았지만, 효과가 사라질 때까지 대상이 살아있다면 사내가 실패했다는 뜻이다.

“또 허탕 치는 건 아니지?”

고깔모자에 망토를 두른 사내가 다가오며 말한다.

평소 말수가 적고, 꼭 필요한 말만 하는 그가 이리 말한다는 것에 기분이 상한 사내.

“아까 그놈은 강했다고! 저런 애송이와 비교하지 마. 뒤를 잡은 것 자체가 운이 좋았어. 뭐, 정확히 들어갔으니, 지금쯤 저 어딘가 구르고 있을 거다. 살 확률이 적다고! 엄밀히 따지면 실패는 아니야.”

자존심이 긁혔는지 고깔모자 사내를 노려보았다.

“..시간 간다.”

끄덕인 고깔모자 사내가 주문을 걸었다.

“사랑스러운 나의 정령 페리에게 명하노니.”

정령사는 아주 드물다. 노력이 아니라 타고난 친화력이 있어야만 가능한 직업이니까. 게다가 이 남자처럼 특정 정령과 오랜 친분을 쌓으면 일반 마법사와는 전혀 다른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

“문을 열어라.”

그의 목소리를 끝으로 칼을 든 사내의 발밑이 부글부글 끓더니, 묘한 구덩이 하나가 생겨났다. 이건 일종의 워프 홀이다. 기습할 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상대가 눈치챌 수 있다는 것인데, 이들은 그런 단점을 전부 제거했다.

“다녀오지. 기다리고 있으라고. 저놈 머리를 가져올 테니까.”

칼을 든 사내의 말에 고깔모자의 사내가 비릿하게 웃으며 끄덕였다. 그러면서 얼굴을 돌렸다.

그의 시선에 따라 땅속으로 사라진 동료가 목표지점에서 솟아오를 거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대상의 등을 찌르겠지. 아주 깊이 말이다.

그렇게 한순간!

-위험! 뒤다!

악마의 외침과 동시에 번은 등허리에 섬뜩함을 느꼈다.

뭔가 비집고 들어온다.

분명 사방 3미터 이내엔 아무도 없었는데!

“흐읍!”

이미 찔러 들어오고 있는 놈의 무기를 쳐내거나 피할 틈은 없었다. 몸을 돌리는 것조차 여의치 않았으니까.

“잡았다.”

낯선 목소리가 귓가에 들릴 때, 번은 어금니를 악물고 오른발을 바닥에 디디며 무게중심을 바꿨다.

“늦었어.”

칼을 든 사내는 헛수고 하지 말라는 투로 말했다. 흥분 따위는 전혀 없는 건조한 목소리. 이런 일은 밥 먹듯 해왔던 숙련된 암살자에게서 나오는 여유였다.

이미 칼날은 절반이나 들어갔다.

아래에서 위로 찔렀기에 폐를 뚫었고, 조금 더 박은 다음 손잡이를 비틀면 내부는 완전히 망가지리라.

그가 성공을 예감한 듯 웃었다. 그러나 그는 한 가지를 모르고 있었다.

-됐어! 잡아!

악마가 다급하게 외치고, 번의 머릿속엔 계속해서 메시지가 폭죽처럼 터졌다.

「장기 이동이 완료되었습니다.」

「상처를 복구합니다.」

「다량의 독을 해독합니다.」

「독소를 배출합니다.」

호신기를 어떻게 뚫었는진 모르겠지만, 칼끝이 비집고 들어오는 그 짧은 순간, 번은 몸속 장기를 움직였다. 비록 살짝 늦긴 했지만, 이 작은 차이가 치명상을 피하고, 번에게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이놈인가?’

-그래, 아까 그 셋 중 하나야! 확실하다!

등에 구멍이 뚫리든, 팔이 잘리든 번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이 정도 상처에 노출되는 즉시 쇼크가 오겠지만, 그는 달랐다.

“······!”

문득, 칼을 든 사내의 눈이 큼지막하게 뜨였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감지한 거다.

“늦어!”

번의 팔꿈치가 그의 머리를 향해 날아오고 있다. 관절과 관절을 잇는 부분의 갑옷이 뾰족하게 처리되어 있기에 이것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다.

“..흐읍!”

‘분명 먹혔는데?’

사내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급히 상체를 뒤로 피했다. 과연 노련하다. 위기를 감지한 순간, 공격을 멈추고 검을 뽑았다.

후우우웅-!

그의 코끝을 스치며 지나가는 번의 팔꿈치.

저걸 맞았다면 대가리가 터졌으리라.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날랜 사내가 뒷걸음질 치기 전, 번은 머리를 불쑥 내밀었다.

"······!"

황소처럼 돌진하는 번의 모습에 사내가 혀를 찼다. 뭐 이런 무식한 놈이 다 있나? 민첩한 몸놀림이라면 대륙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그였기에, 후욱! 떠올라 몸을 띄운 뒤 번의 어깨를 발끝으로 토옥 차며 도움닫기를 했다. 이 한 수만 봐도 그가 얼마나 대단한 암살자인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허점은, 번이 이런 타입과 싸워 보았다는 거다.

‘가젤 같은 놈이군.’

심지어 비슷한 동물과도.

-놓치지 마! 거리가 벌어지면 따라잡기 힘들다!

‘알아! 너나 잘해!’

슈슈슈슈슉-!

번의 몸에서 악마가 튀어나갔다. 그게 사내의 전신에 달라붙어 무기력을 선물하고, 귓가에 속삭였다.

-포기해. 죽으면 편해. 날 믿으라고.

“뭐, 뭣..?”

이때, 사내의 뒤로 빠르게 다가서는 한 사람이 있었다.

“감히 황자님을..!”

다루였다. 그녀가 무섭게 날아들며 검을 쥔 손을 휘둘렀다.

이제 사내는 선택해야 했다. 둘러보지 않아도 몇 개의 기척이 빠르게 모여드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칫, 호위인가?’

황자라더니 수준급 인력이 붙어있나 보다.

하지만,

“어림없다!”

그가 이런 일이 어디 한두 번이었겠는가?

“윈드 디랙터!”

그의 부츠가 빛을 뿜어냈다.

암살자는 언제나 도망갈 구석을 마련해놓는 법. 비록 기습은 실패했지만, 살아만 있으면 복수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생각하는 그다.

쑤욱-!

엿가락처럼 몸이 늘어난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할 만큼 사내는 순식간에 자리를 벗어났다. 그가 새처럼 날아 착지할 때엔 이미 번과 8미터 이상이 벌어진 후. 저 멀리서 황자가 멍하니 닭 쫓던 개처럼 이쪽을 바라보았다.

“크크크, 조만간 다시 보자고.”

이미 검에 부여한 마법 지속시간도 지났고, 놈들의 수준도 알았으니 다음번엔 실패하지 않으리라. 놈의 목을 가져가지 못한 탓에 핀잔 좀 듣겠지만,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섀도 워킹.”

부츠의 마법은 계속해서 쓸 수 없기에 그는 은신술을 이용해 주변과 동화하려 한다. 워낙 사람이 많으니 어렵지 않게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 터.

그런데.

“······!”

그의 뒷덜미를 누군가 잡아챘다.

그렇게 느낀 그 순간, 이미 허리를 파고들어 오는 섬뜩함.

“쿠훕..!”

목구멍에 핏물이 차올랐다. 벗어나려고 몸을 뒤틀어보지만, 단단히 잡혔다.

“하아..”

그의 귓가에 나른한 숨소리가 들려온다.

허리에 칼을 맞은 탓에 하체는 굳었고, 본능적으로 얼굴을 돌린 탓에 그의 목에 닿았던 칼날을 따라 빨간 금이 갔다.

“네놈이었구나.”

그 싸늘한 목소리가 사내가 들은 이승의 마지막 음성이었다.

서걱-!

순식간에 잘려나가는 목.

풀썩, 몸뚱이는 쓰러지고, 머리는 누군가의 손에 잡혔다.

“한심한..”

쓰러진 사내의 몸을 보며 남자는 머리를 흔들었다.

고작 이런 놈에게 뒤를 내주었다는 것이 짜증이 난 건지, 아니면 나도 이제 늙었나? 드는 회한 때문인지.

-은사!

저쪽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은사는 피식 웃으며 황자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주먹을 들었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번의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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