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될성부른 나무 #
잠시 시간이 정지한 듯 했다.
하지만 여긴 전쟁터. 그것도 적에 둘러싸인 한복판이었다.
“폐하..”
딘딘의 목소리에 황제는 끄덕이며 턱짓했다. 그러자,
“전군! 모이라-!”
딘딘의 큰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흩어진 병사들이 차츰 대형을 꾸리기 시작했다. 황제를 중심으로 동그랗게 뭉치려는 거다. 하지만 그걸 적들이 가만히 두고 볼 리 없었다.
-놈들을 찢어놔!
-황제에게 가지 못하게 하라!
-쫓아가라!! 막아!
-와아아아! 죽여라!
하지만 그렇게도 날카롭게 울려대는 외침과는 달리, 그들의 움직임은 눈에 띄게 굼뜨고 있었다. 참 이상도 하지. 물먹은 솜처럼 몸은 축축 늘어지고,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순간에도 집중이 안 되었다.
‘이놈들이 왜 이러지?’
깃발을 흔들며 병사를 지휘하던 스캇은 고개를 갸웃했다.
전장엔 흐름이란게 있다. 바람처럼 떠도는 눈에 보이지 않는 기류처럼, 승리의 여신이 한쪽 등을 밀어주듯 떠밀리면 그 무엇도 그걸 엎을 수 없었다. 그래, 그 흐름. 분명 그 손은 저쪽을 밀어주고 있지 않았는가?
근데, 갑자기 모든 것이 변했다.
-으으으..
-추워..
-내가 왜 이러지?
이를 딱딱 부딪치는 사내부터 눈 밑이 퀭한 것도 모자라 이 전쟁통에 심지어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것 같은 남자까지. 사지가 잘려나가도 좀비처럼 싸워대던 광기는 사라지고, 무기력한 노숙인들만 한가득 남은 것 같았다.
“우측을 집중해 뚫어라! 저기 폐하가 계신다!”
스캇의 깃발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병사들 또한 느끼고 있었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이다. 이들의 몸이 가뿐해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적이 굼뜨니, 내가 힘이 나는 기분이랄까?
‘이놈들.. 약빨이 떨어진 건가?’
그랬다. 스캇의 생각이 맞았다.
번이 지금 이 순간에도 주변의 기운을 쪽쪽 빨아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흡수한 이로운 기운을 정제합니다.」
「정제된 기운을 저장합니다.」
‘내 예상보다 훨씬 더 쩔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해일같이 덮치는 약 기운은 끝이 없었다.
-인간이 다 그렇지. 준다고 좋다고 처먹으면 뒤룩뒤룩 살찐 돼지밖에 더 되겠냐? 결국, 그러다가 걷지도 못하게 되는 줄도 모르면서!
물론 악마의 말이 모두에게 적용되는 건 아니었다. 실제로 적 중엔 약에 손을 대지 않는 이들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다수는 약을 먹었고, 싼값에 죽음의 공포와 전장의 두려움을 억누를 수 있다면 이보다 좋은 게 없었다.
그게 지금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발목을 잘라 걷지 못하게 하고, 어깨에 떨어져 축 늘어지게 한다.
“내일쯤 도착한다 들었거늘..”
황제의 목소리에 번이 생각에서 깨어났다.
“묘한 기분이 들어, 소자, 군의 일부를 통솔하여 걸음을 빨리하였습니다. 다른 이들은 예정대로 내일쯤 도착할 것입니다.”
“묘한 기분이라?”
“모르겠습니다. 그래야.. 할 것만 같았습니다.”
황제가 푸근하게 웃었다.
그가 이런 얼굴을 할 수 있다는 걸 아는 이가 있을까?
“널 하늘이 돕는구나. 아니, 나를 돕는 겐가?”
황제는 번의 몸을 일으켜 팔등을 손바닥으로 툭툭 쓸어주었다. 아직도 마르지 않은 핏물이 그의 손길에 바닥으로 핏핏 떨어진다.
“싸울 수 있겠느냐?”
황제의 말에 번은 우렁차게 대답했다.
“이 몸! 가루가 된다 한들, 싸울 것입니다!”
아들의 대견한 모습에 황제는 피식 웃으며 저편을 보았다. 번의 뒤로 엄청난 광경이 펼쳐지고 있다.
일천一千.
솔개 부대 오백과 레드 와이번 오백이 적을 도륙하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는데, 마치 거대한 몬스터가 바닥에 거치적거리는 것들을 쓸어내는 듯했다. 특히, 레드 와이번 기사단의 위용이 가히 압도적이라 할 수 있었는데, 말 위에서 훅훅 내지르는 그들의 검엔 반드시 목 하나가 떨어져 나갔다. 괜히 에비뉴의 3공작가 중 하나로 불리는 게 아니니까.
‘레드 와이번은 또 언제 구슬렸는가..’
번의 재주가 참으로 놀랍기만 하다. 심지어 번의 체격은 못 본새 다 큰 어른이 되어버렸지 않나?
“저들은 네가 데려왔으니, 끝까지 책임져 보아라.”
“맡겨 주신다면 모든 적을 섬멸할 때까지 검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얼추 일천의 숫자가 뭘 의미하는지 알 것 같다. 요 영리한 녀석은 이 와중에도 지킬 건 지키려 하는 거다. 허, 거참, 어디서 이런 게 나왔누? 어려서부터 특이하다 여겼지만, 이젠 특별함을 넘어서고 있었다.
황제는 번의 어깨에 손을 올리면서 옆을 돌아보았다. 딘딘이 다음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에게 말한다.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싸운다.”
“예, 폐하.”
딘딘 또한 느끼고 있었다.
적들이 갑작스럽게 굼떠졌다는 것을.
“뭉쳐 버티되, 각 장군들은 독립적으로 부대를 이끌어도 좋다.”
방어만 하자는 게 아니다. 기회가 생기면 언제든 적의 목줄을 물어뜯으란 얘기였다.
“그리 전하겠습니다.”
“그리고..”
황제의 머리가 다시 번을 향했다.
“태자 또한 그리하라.”
부르르..
번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태자太子!
아버지의 입에서 마침내 이 단어가 나왔다. 지금까지 당한 설움이 한 번에 가시는 기분.
“네! 폐하! 놈들의 뼈에 폐하의 이름을 새기겠습니다!”
백골난망白骨難忘.
몸이 썩어 흰 가루가 되더라도 잊지 못한다는 말처럼 하겠다는 번이다. 물론, 겉으론 아비의 이름을 널리 퍼뜨리겠다며 충성심이 충만한 듯 말했지만 , 그 속은..
-가자! 가자고! 피가 모자라다! 피가!
눈도장만 제대로 찍고, 사리사욕을 채울 뿐!
“흥분하지 마라. 적의 눈은 네 등에도 있고, 뒤통수에도 있다. 각별히 주의하거라.”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피식 웃은 황제가 끄덕였다.
“그래, 너무 멀리 가지 말고.”
“예! 폐하!”
마치 뒷산에 놀러 나가는 아들을 바라보는 것 같이 뒷짐 지고 선 황제는 번이 레드 와이번 기사단이 오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입맛을 다셨다.
“허.. 다 컸군. 다 컸어.”
대견하긴 한데, 묘하게 허탈한 건 왜일까.
-폐하를 지키자!
-개 잡것들아! 한 발자국만 다가오면 저승행 마차를 타게 될 것이다!
-이놈들! 풀죽도 못 먹은 것 같구나!
주변으로 기세가 오른 병사들이 모이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쉽게 뚫리진 않을 것이다.
딘딘이 그의 옆으로 다가와 말한다.
“괜찮겠습니까? 태..자가 아직 어립니다. 큰 부상이라도 당한다면..”
호기 있게 여기까지 온 것은 칭찬할 만하지만,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하루를 버텨야 하는 상황에서 미숙한 태자가 흥에 겨워 날뛰다 다치기라도 하면.. 아니, 죽을 수도 있다.
하지만 황제는 그저 웃었다.
“아까 못 봤어?”
“물론 태자가 일취월장한 모습을 보였다곤 하나..”
운이 좋았던 거다. 너무도 무모했다. 적들 사이엔 고수高手가 상당히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런 자들이 기습하면 대항도 못 해보고 목이 잘릴 수도 있지 않은가?
“아니, 그걸 말하는 게 아니야.”
“예?”
“저놈.”
황제가 끌끌 웃었다.
“신을 데려왔다.”
스캇이 느낀 그 기분.
황제도 똑같이 느끼고 있었다.
“승리의 신을 멱살 잡고 끌고 왔다고. 하하하!”
성녀가 한 말이 진짜인지 아닌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오늘은 틀림없다.
이 싸움. 지지 않으리라.
“근처에 있다가 적당히 돌봐줘.”
“예.”
“너무 개입하진 말고. 녀석도 경험을 쌓아야지.”
군주는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감정의 폭풍을 견뎌내며 뿌리를 땅에 박아 넣어야 한다. 태풍이, 해일이 밀어닥쳐도 굳건히 버틸 수 있어야 한다.
뿌리가 굵어지는 양분은 오직 하나. 경험이었다.
단것도, 쓴 것도, 신 것도, 짠 것도 먹어봐야 하고, 눈물 쏙 빠지도록 매운 것도 삼켜야 한다. 그것이 제왕의 숙명! 이 전장은 녀석에게 좋은 밑거름이 되어 줄 것이다.
“그리하겠습니다.”
딘딘이 끄덕이는 걸 본 황제는 걸음을 옮겼다. 네 걸음 떨어진 곳에서 은사가 상처를 돌보고 있었다. 피가 멎은 걸 보니, 고비는 넘긴 듯하다.
“어떻게 된 거야?”
오늘 겪은 일 중에 가장 황당한 것. 은사가 지금 이 몰골로 있다는 것이었다. 전쟁을 하다 보면 엎치락뒤치락하기도 하고 수세에 몰릴 때도 종종 있겠지만, 은사가 치명상을 입었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누가 이랬어?”
벌어진 상처를 꿰매고 있던 은사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피범벅 된 손가락이 분노로 가늘게 떨렸다.
“모르겠습니다.”
“몰라?”
은사가 입술을 깨물었다.
짐작 가는 놈들은 있었지만, 확실히 본건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은사의 말에 황제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네가 죄송할 일이 아니야. 널 이렇게 만든 그 죽일 놈이 나한테 죄송해야지. 그렇지 않나?”
“예..”
황제는 저편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은사를 이렇게 만들 수준이라면.. 제국의 육호기가 움직였나?’
은사가 상대를 파악조차 하지 못했다 한다. 물론 싸움이란 게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변하겠지만, 은사 정도 되는 자는 아무리 극한의 상황에 처했다고 해도 기본은 할 것이다.
‘아니야. 제국의 황제가 움직였다는 말은 없었어.’
황제의 수호신 육호기.
제국의 무장 중에 가장 강하다는 그들이 여기 와 있었다면 진즉 전쟁이 끝났을지도 몰랐다. 위험에 처했던 순간들을 그놈들이 놓쳤을 리 없었을 테니까.
‘용병 쪽인가?’
대륙엔 해변가 모래알처럼 많은 용병들이 있었고, 그들 중엔 경지를 가늠할 수 없는 강자들도 많았다. 어느 쪽이든 경계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몇이나 돼?”
“셋이었던 것 같습니다.”
“특징은 없고?”
“뒤에서 잡혔습니다. 인식하는 순간, 허리가 뚫렸습니다. 놈들을 확인할 틈도 없었고요. 몇 가지 수법이 쓰인 것 같은데, 단언하긴 어렵습니다.”
“쯧.”
그랬을 테지.
당하는 순간 은사는 어떻게든 소식을 알리려고 했을 것이니까.
“…….”
은사를 물끄러미 내려보던 황제.
“괜찮겠어?”
묻는다.
“피만 멎으면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이 터프한 사내는 벌써 다 나았다는 듯 이를 갈았다.
면목이 없다. 하지만 자책하고, 괴로워할 시간에 하나라도 적을 더 죽이면 된다. 철鐵의 군대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여기까지 왔다.
“충분히 쉬도록 해.”
물론 그러라 해도 안 그러겠지만.
“…….”
황제는 입맛을 다시며 돌아서려다가, 문득 떠오른다.
“아, 십위十衛 보냈다면서?”
이 개 같은 마약이 에비뉴에서 나왔을 수도 있다던 얘기.
“..그것은 확인 중에 있습니다.”
“왜 이래?”
황제가 은사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러고 있으니 마치 저잣거리 불량배 같다.
“애들 보냈다며? 어딘지 아니까 보냈다는 말 아니야?”
쓸데없이 예리한 황제.
“증거가 명확해지기 전에 말씀드리면 괜한 오해나 선입견이 쌓일 수도 있다 생각하여..”
황제는 은사의 말을 잘랐다.
“은사.”
“예, 폐하.”
“생각은 내가 한다니까?”
황제와 마주친 은사의 눈동자가 부르르 흔들렸다. 과거의 어느 지점이 겹쳐 그의 심장을 후벼 판 거다.
그의 시선이 바닥을 향했다.
“정보가 입수되어, 7황비 쪽을 수색하라 일렀습니다.”
“7황비라고?”
“그렇습니다.”
은사를 빤히 보던 황제가 크게 끄덕이며 일어났다.
그 이후. 전장을 바라보는 황제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본다.
저 앞. 용맹하게 싸우는 한 전사戰士를.
-물러서지 마라! 우리가 이긴 싸움이다! 나를 따르라! 레드 와이번! 우현을 뚫라!
-충!
-충!
아들의 목소리는 활력과 패기가 가득했고, 그 외침에 적은 떨었다.
그래, 고작 열네 살.
에비뉴 황태자는 전쟁터 한복판에서 이리 커가고 있는 거다.
‘뉘 집 자식인지, 참 잘 컸단 말이야.’
황제가 쓰게 웃으며 번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상관없이 당사자의 머릿속은 경고 음성이 울리고 있다.
「경고, 기운 흡수가 간섭받고 있습니다.」
「경고, 흡수하지 못한 기운이 대기로 흩어집니다.」
-조심해! 근처다!
악마도 외치고,
-셋이야!
누군가 있었다!
그것도 아주 가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