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터닝 포인트 #
기이이이이잉-!
번의 머릿속에 공명음이 울려퍼진다.
비행기가 이륙할 때처럼, 흡사 놀이공원의 바이킹을 타는 것처럼 그런 기분! 이건 빠르게 달리는 말 위에 있어서가 아니었다. 외적 요인이 아닌, 내부의 폭풍이 휘몰아쳐서다.
「아드레날린이 폭주합니다.」
이건 그가 극도의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증거이자, 능력을 모두 개방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심장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 미친 듯이 펌핑했고, 번은 이를 아득 물었다. 그리곤,
"으아아아아아!"
함성을 내질렀다. 쩌렁쩌렁-! 그의 음성이 사자후獅子吼처럼 전장 멀리까지 울려 퍼졌다.
지금 번의 몸속에선, 내부로 들어오는 산소는 피를 강하게 채찍질했고, 불끈불끈 솟은 힘줄은 두꺼운 고무처럼 질기고 단단해져 안전하게 혈액 일꾼들을 보호해 나갔다.
「독소를 배출합니다.」
「폐활량이 최대치로 오릅니다.」
“속도를 높여라! 감히, 황제 폐하께 대항하는 놈들의 말로가 어떤지 오늘 똑똑히 보여주어라!”
번은 우렁차게 고함을 치며 검을 크게 휘둘러 나아갔다. 오늘을 위해 벨버른의 일류 장인이 특수하게 제작한 그의 30kg짜리 대검이 후웅- 옆에서 접근하는 적의 몸을 날려버린다.
“아아악!”
“피, 피해!”
날이 닿지 않아도 상관없다. 말의 가속도와 함께 이런 검에 그대로 맞으면 뼈가 박살 나고, 대가리가 터지니까. 어떤 적은 말의 무릎에 차여 이마가 박살 났다.
「고통을 차단합니다.」
보통 이런 식의 충돌이 생기면 검을 휘두른 사람도 데미지를 받게 된다. 몽둥이로 바위를 후려쳐보면 알 거다. 하지만 번은 시큰한 손목도, 뻐근한 어깨도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은 오직 주변으로 모여드는 적과 몸속에서 폭주하는 세포 하나하나의 비명만이 천둥처럼 전해져왔다.
「상처를 재생합니다.」
「오색마나가 세포를 보듬었습니다.」
찢어진 근육이 아물고, 자잘한 외상이 지혈된다.
-캬캬캬캬캬! 좋구나! 가라! 가라! 가라!
악마가 노래하듯 흥을 돋우고, 번은 저 멀리 황제를 보았다. 약 3km의 거리. 평지긴 하지만, 그 사이엔 엄청나게 많은 적이 두꺼운 벽처럼 바글바글하다.
-버러지들이 득실득실하는구나! 쓸어버려!
번의 눈이 번뜩!
말하지 않아도 그리할거다!
“하아아아압-!”
번의 검이 다시 날았다. 기마대가 쓰는 긴 창의 그것과 같은 리치를 가진 번의 검은 가까이 다가오기만 해도 적을 가랑잎처럼 쓸어버렸다.
후웅-!
이걸 한 손으로 휘두른다는 것 자체가 어처구니가 없다. 관운장의 청룡언월도가 팔십 근이라 하던가? 50kg의 그것관 비할 바가 못 되겠지만, 고작 열넷의 힘이라 하기엔 압도적이었다. 그야말로 괴력!
두두두두두두-!
피와 공포, 광기에 흥분한 말이 더욱 가속도를 낸다. 번은 그 위에서 쏜살같이 황제를 향해 나아갔다. 팔 벌린 아비의 품으로 포옹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이 짧은 거리, 그에게 확실히 각인시키려는 거다.
“하아아압!”
나를 보라고.
“비켜라! 잡것들아!”
내가 이렇게 컸다고. 온몸으로 아버지에게 외친다.
그런데 그때!
“······?”
-위험..!
악마의 경고가 다 끝맺기도 전, 번의 머리에 뭔가가 닿았다.
화살이었다.
석궁에서 발사한 것 같은 그것은 정확하게 왼쪽 귀 위를 찔러 들어왔고, 관통마법이 깃들었는지 푸르스름한 촉은 너무도 쉽게 투구를 찢고 밀어닥쳤다.
“잡았다!”
“흥! 설치더니, 꼴 좋다!”
“근데, 저놈 대체 누구야?”
“몰라! 죽었으니, 됐지! 어서 황제나 잡아!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끝내자고!”
황색 두건을 쓴 용병들이 말에서 떨어지는 번을 보며 시시덕거릴 때,
「위기를 감지한 머리가 더욱 단단해집니다.」
번의 몸은 반응했다.
다소 웃긴 능력일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꽤나 높은 방어력을 지녔다. 박치기 따위의 공격용으로도 쓰이지만, 투구 아래 성능 좋은 방탄헬멧을 하나 더 쓰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 화살이나 마법에 헤드샷을 당할 위험을 줄여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번은 벌떡 다시 일어섰다.
“젠장..”
물론, 기분이 더러운 건 어쩔 수 없다.
히이이이이이잉!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저 앞까지 간 말이 구슬프게 울었지만, 부르르 머리를 털고 일어난 번은 두 손으로 검을 움켜쥐며 어금니를 악물었다.
방심?
아니다. 이건 경험부족이라 할 수 있었다. 수많은 생물로 생사를 건 전투를 경험해봤지만, 이런 대규모의 싸움방식은 처음이었으니까.
-너 괜찮냐?
악마가 급히 물었지만, 번은 코를 찡긋했다.
‘당연!’
고작 이 정도로 쓰러질 거였다면 선봉에 서지도 않았으리라.
‘이제 시작이라고! 준비해!’
-캬캬캬! 그럼 그래야지!
번은 다시 말에 오르지 않았다.
아무래도 눈에 잘 띄면 표적이 되기 쉬웠다. 그래서 그냥 뛴다. 축 늘어진 검이 주변을 쓸고, 우람한 허벅지는 중심을 잡아준다.
“어엇? 저놈? 어떻게 살아있어?”
“분명! 명중했는데?”
“다시 쏴! 빨리!”
슈슈슈슉!
또 다시 마법 먹인 화살이 석궁에서 발사됐다. 하지만 이미 번은 잔뜩 경계한 상태.
「위기를 감지한 뼈가 더욱 단단해집니다.」
「오색 마나가 몸을 보호합니다.」
「호신護身기가 작동합니다.」
피부에 얇게 마나가 코팅된다.
이것은 얇디 얇아 별 게 아닌 것 같아도 카이사르가 전력을 다한 창을 막았던, 그 방패와도 같은 방어력을 지녔다. 마굴에서 마나를 깨우치고 난 뒤에 얻은 힘! 뿐인가? 지난 14년간 이것저것 주워 먹으며 몸속에 녹였던 여러 성분이 세포와 기관, 근육이나 모든 관절에 녹아 인간이란 종種에게 허락된 리미트를 아득히 풀어버렸다.
거기에,
-맛있다! 맛있어! 더! 더더더! 더!
번의 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그의 몸에서 어둡고 불길한 기운이 사방으로 팍팍 튀었다. 중단전을 얻은 이후 더 농밀하고 은밀해진 이건, 눈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었지만 당하는 이에겐 세상이 암흑으로 덮이는 충격을 주고 있었다. 작은 상처도 비집고 들어가 썩어 문드러지게 하는 끔찍한 기운.
악마가 가진 부패의 힘이자, 번에겐 자연스럽게 펼쳐지는 적을 향한 디버프인 것이다!
“이놈들!”
석궁을 들고 있던 용병들에게 번이 황소처럼 달려들었다. 놈들은 열심히 석궁을 쏘다가 기겁하여 도망치려 했다.
"어허헙! 튀자!"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번은 말에서 떨어졌고, 무거운 갑옷과 큰 검을 들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번을 몰라도 너무 몰라서 하는 착각이었다.
번들.
번의 눈동자에 붉은 광망이 스쳐 갔다. 그건 곧 일곱 가지 빛깔로 바뀌더니, 뇌에 빠르게 스며든다.
까득, 까드득.
약 기운이 퍼져간다.
“······!”
“..저, 저..!”
순식간에 두 배는 빨라진 번의 속도에 적들이 입을 떡 벌렸다. 경량 가죽 갑옷을 입어도 저렇겐 못 뛰겠다.
'놀라긴 이르지!'
번의 몸속에 녹은 레인보우 립의 성분과 양은 저들이 복용한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게다가 치사량은 아득히 넘었지만, 어릴 적부터 적응해 온 번의 몸은 세포가 쩍쩍 분열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끝까지 흡수하고, 결과물을 토해낸다.
광기를..
“흐아아압-!”
분노를..
“죽어!”
파멸을..!
번의 검이 적의 등을 갈랐다.
예리하게 베이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그저 철퇴에 맞은 듯 철푸덕 자빠진다. 물론 그렇게 되면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 척추가 부러졌을 테니까.
‘칫.’
그러나 번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차고 몸속 기운을 하나 더 끌어올렸다. 그러자,
후우우우웅!
푸르기도 하고, 얇은 우윳빛까지 감도는 신비로운 빛이 아주 얇게 번의 검에 맺혔다.
“오, 오러?”
“설마!”
이 세계 사람들은 모두가 마나의 존재를 안다. 하지만 그걸 무기에 불어넣고, 활용하는 경지는 꿈이나 마찬가지다.
“비켜라!”
번의 검이 지그재그로 움직이며 앞을 막는 모든 것들을 토막토막 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후두두둑- 잘린 팔다리가 떨어진다.
“커헉-!”
검을 피하려다 자빠진 사내의 등을 번의 발이 밟는다. 우둑, 등을 이루고 지탱하는 뼈가 박살 나고, 번은 그의 몸을 디딤판 삼아 더 높이 뛰어올랐다.
“놀자! 이것들아!”
피피피핏-
개의 청각, 맹수의 동체 시력, 야수의 야성과 고통을 모르는 육체. 이 순간, 번은 이 땅의 가장 강력한 포식자가 되었다.
콰앙-!
앞을 가로막는 것들에겐 검을 쓸 필요도 없었다. 그저 몸으로 받아버린다.
트럭에 받힌 듯 사방으로 처박히는 적들.
“괴, 괴물!”
“어디서 이런 놈이?”
하지만,
-이대론 힘들어! 그걸 써!
적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어느 골목길에서 벽을 끼고 1:1로 상대하면 지진 않겠지만, 이렇게 탁 트인 곳에서 한 사람이 수천, 수만을 막을 순 없는 거다. 아니, 체력이 있는 한 당장은 버틸 수 있겠지만, 나아가질 못할 거다. 게다가 저들 사이에 고수가 숨어있다면 그 또한 위험한 일.
‘몸이 버틸까?’
-해보면 알겠지! 캬캬캬캬! 죽기밖에 더하겠냐!
악마도 미쳤다. 전장의 피와 흥분에 견딜 수가 없는 거다.
“······.”
번의 눈이 주변을 훑으며 빠르게 상황파악을 했다. 아버지에게 가는 것이, 이 싸움의 끝은 아니다. 그때부터가 시작일 것이다. 3차 지원군이 도착하려면 하루는 버텨야 할 것이고, 한눈에 봐도 병력의 차이는 3배 이상! 레드 와이번과 솔개 부대가 합류했다곤 해도 뒤집긴 힘든 전력 차였다.
-폐하를 보호하라!
-전군 밀집 대형으로!
-모이라고, 새끼들아!
저 멀리서 깃발을 들고 외치는 사내가 보인다. 스캇이다. 그가 철의 군대의 진형을 조율하고 있는 것이다.
‘3만 정도인가?’
이 인원이 한 곳에 모이고, 그 중심에 황제를 둔다면 하루는 버틸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대론 힘들겠지만 말이다.
‘방법이 없군.’
-하자! 어서! 어서!
번은 쓰게 웃으며 진저리를 쳤다. 벌써 몸이 반응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입안에는 철퍽철퍽 침이 잔뜩 고이고, 목구멍으로 꿀럭꿀럭 절로 넘어갔다. 시야는 핑- 돌고, 가벼운 편두통과 함께 머리가 어질어질.
그래, 이건 확실히 금단현상이었다. 금연하던 사람이 못 참고 길바닥의 담배꽁초 주워 한 모금 빤 것보다 100배 이상 강렬한 전조!
「기운을 흡수합니다.」
뇌의 뉴런이 팝콘처럼 탁탁! 터지며 번을 새로운 세계로 이끌었다.
시간과 공간이 의미는 없어진다. 투구 속에서 그의 3번째 눈이 뜨이며 오감五感을 넘은 그 이상을 선물한다. 단단한 머리 덕에 투구를 쓸 필요가 없었지만, 이건 이 눈을 가리기 위한 위장막!
「이로운 효과를 수집합니다.」
「레인보우 립의 성분을 끌어옵니다.」
「흡수한 기운을 농축합니다.」
「농축한 기운을 사용합니다.」
스스스스스스..!
사람들은 보지 못하지만, 번에겐 보였다. 이 주변 적들의 몸에서 아지랑이처럼 뿜어나오는 기류. 그건 바람처럼 흩날리더니 번에게 다가왔다.
「외부의 기운이 육체의 한계치를 높입니다.」
이 세상에 번보다 더 많은 레인보우 립을 경험한 이는 없을 것이다. 또한, 번보다 기이한 능력을 소유한 이도 없다. 이제 그의 모든 것들이 시너지를 발휘할 때다. 약 기운을 잃은 적에겐 재앙을, 그것을 빨아먹는 번에겐 축복을.
「경고, 육체가 버틸 수 있는 양이 아닙니다.」
물론, 고작 약쟁이 몇 명 근처에 있다면 효과가 미미하겠지만, 지금은 무려 수만이다.
“원기옥!”
-그게 뭔데?
‘몰라도 돼.’
악마와 수다를 떨 여유는 없었다. 그럴 기분도 아니었고.
번의 눈빛이 섬뜩하게 빛났다.
“뭐, 뭐야..?”
“으, 으으.. 추워..”
주변 적들은 알 수 없는 무력감에 치를 떨어대기 시작한다. 갑자기 온몸에서 힘이 쑤욱 빠져나간 것 같은 기분. 약에 취해있던 육체가 다시 약을 채우라며 지르는 비명에 갈증과 초조함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어른 셋은 어깨에 올라탄 것 같이 몸은 처지고, 손발이 부들부들 떨렸다. 감이 좋은 자들은 품에서 급히 약을 뒤져 입에 덥석 넣었다.
그 사이,
쿵! 쿵! 쿵!
번은 계속해서 달리고 있었다.
인파의 벽에 정면으로 돌진하는 멧돼지처럼 말이다! 아무리 무식해도 벽에 막힐수록, 충돌할수록 기세는 줄고 발은 무거워져야 할 터인데, 지금 번은 오히려 더 빠르고 강해져만 간다.
「경고, 경고, 경고..」
“계왕권이다-! 개새끼들아! 흐아아아아압!”
-그건 또 뭔데?
“몰라도 된다고!”
주변에서 모은 기운을 한방에 터뜨린 번이 땅을 박찼다.
후웅- 후웅!
대검은 휘둘러지고, 번의 몸은 마치 불도저처럼 적을 쓰러뜨렸다.
두두두두두두!
말이 질주하는 것처럼 번은 달리고, 달렸다. 아니, 고작 말 따위가 아니었다. 누구도 막아설 수 없었고, 누구도 그 앞에서 버텨낼 엄두를 내지 못할 기세! 위에서 보면 나뭇가지로 흙바닥을 주욱 그어놓은 것처럼 번이 지난 자리가 길이 났고, 그럴수록 번의 온몸엔 적의 붉은 피가 흘러넘쳤다.
“······.”
“..미친..”
적이지만, 그들은 전율했다.
“저, 저..”
“대체 누구야? 저놈?”
번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계속해서 달렸다. 등으로 화살 따위가 계속 날아왔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 그의 눈엔 오직 한 사람.
“하아, 하아..”
드디어!
번과 황제의 사이에 놓여있던 벽이 깨졌다.
“······.”
그가 바로 앞에 서있다.
“하아, 하아, 하아.”
번은 어느 지점까지 오자 뜀을 멈추고, 칼을 바닥에 힘차게 꼽았다. 그러며 한쪽 무릎을 꿇고 외친다.
“폐하-!”
아버지.
“소자! 번 리갈 드 요르간드 바야흐!”
저 왔습니다.
“3차 지원군에 합류하여 이제 막 도착했사옵니다!”
적들이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멍하니 바라본다.
“강녕하시옵니까!”
묵직한 울림 가득한 번의 목소리는 모두의 심장을 때렸다. 그들의 귀엔 번 리갈 드 요르간드 바야흐라는 이름이 가시처럼 박혀 들었다.
“······.”
그런 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황제.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더니, 피 칠갑한 번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래..”
그의 손이 번의 등을 두드렸다.
“강녕하다! 강녕해! 으하하하하-!”
수많은 적들 속에서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황제의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리고 그의 옆에 선 딘딘이 황당하지만 흐뭇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