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폭풍속으로 #
“이 달 물건은 준비해 뒀습니다. 바로 가시는 길에..”
번은 이제 슬슬 마무리하려 했다.
줄 거 주고, 받을 거 받기로 했으니 더 지체할 필욘 없다.
“황자님.”
떠나려던 번을 부르는 필립 공작.
“예? 더 하실 말씀이라도.”
“잠시 시간을 더 내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필립 공작이 푸근한 미소로 말한다. 이제 어차피 한배를 타기로 한 사이. 더 굳을 필요가 없었다.
번은 고개를 잠깐 갸웃했지만, 흔쾌히 끄덕였다. 이때, 구름에 가려있던 달이 반짝 나와 대지를 환하게 밝힌다. 워낙 어두웠던 터라 작은 빛에도 시야가 좋아졌다. 앞서 걷기 시작하는 필립 공작. 번이 찬찬히 뒤따랐다.
5분쯤 걸었을까? 어느새 모닥불이 꽤 멀어졌다.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느낀 필립 공작이 번을 돌아보며 운을 뗐다.
“음..외람되지만, 황자님께서도 이제 혼사를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번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이 능구렁이가..’
번은 이제 열넷이었다. 21세기 설명우가 살던 세상이라면 고작 중학생이나 될 법한 나이. 하지만 이곳은 사내가 열네 살이면 가정을 이루기 시작하거나 전쟁터에 나가도 이상할 게 없다. 심지어 귀족이나 황족은 더 빠르게 혼인하기도 했으니까. 조선 시대에도 조혼은 일상다반사 아니었는가?
‘발목을 잡으려 하는군.’
번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필립 공작에겐 두 명의 부인과 여섯의 자식이 있었는데, 그 중 막내딸이 아마..
“제 얼굴에 금칠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가문 정도라면 폐하께서도 흔쾌히 반기시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다. 에비뉴 3공작 정도라면 어디라도 꿀리지 않을 테니까.
“그리 좋은 기회를 만들어주신다니, 그저 고마울 뿐입니다.”
번이 활짝 웃었다.
그 말에 오히려 놀란 것은 악마다.
-웬일이래? 여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놈이?
그건 악마가 몰라서 하는 말이다. 번이 여자를 멀리하는 이유는 간단하지 않은가? 단지 필요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필립 공작가의 ‘그녀’라면 충분히 쓸만하다.
‘거저 준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지.’
-이런 나쁜 새끼! 캬캬캬! 넌 진짜 마음에 드는 놈이라니까!
번의 생각을 들은 악마가 좋다고 깔깔댔다.
그래, 나쁜 새끼. 그의 속을 알게 된다면 세상은 번을 그리 욕할지 모른다. 여자들이 좋아하는 나쁜 남자와 나쁜 새끼는 분명 다른 거니까. 하지만 번은 양심의 가책 따위는 없다. 어차피 공작가에서 태어난 이상 그녀도 정략결혼을 해야 할 팔자일 거고, 이왕이면 이쪽이 좋지 않겠나?
“거, 시원시원하셔서 참 좋습니다!”
필립 공작이 만족한 듯 크게 웃었다.
“하지만 지금은 시국이 좋지 않으니, 일단 폐하께서 한숨 돌리신 뒤..”
“아무렴요!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필립 공작은 번에게 손을 내밀었다.
번이 마주 잡자, 두 손으로 감싸더니 흔들어댔다. 그만큼 기분이 좋은 거다. 거래처와 혈연으로 묶이는 것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겠는가?
-아주 밑바닥까지 탈탈 털어먹을 생각이구나! 저 자는 너를 구속했다 생각하겠지만, 내가 보기엔 네 놈이 인질을 잡은 셈이나 마찬가진데? 크큭.
악마가 지껄이는 말이 다 번의 속마음은 아니었지만, 뭐가 어찌 될진 아무도 모르는 것 아니겠는가? 필립 공작이 어떻게 생각하든, 번은 당장 그의 힘만 쓸 수 있으면 되었다. 어차피 한 치 앞도 못 보는 게 사람이니까.
그것도 모르고 필립 공작은 세상을 다 얻은 듯 번을 이끌었다.
"자, 앞으로 잘 해봅시다!"
필립 공작이 번의 등을 두드리며 돌아섰다.
자, 이제 진짜 돌아갈 시간이다.
동상이몽.
각자의 미래를 위한 꿈속으로.
.
.
.
에비뉴 황제가 이끄는 철鐵의 군대와 후단 왕국의 전쟁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격렬해져 갔다. 이제는 서로 시체를 치우는 틈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하루하루가 치열했다. 적을 하나라도 더 죽여야 이 지긋지긋한 악몽이 끝날 거로 생각했고, 약에 취해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구분하지 못하는 이들도 많았다.
그 전장의 한복판.
“이제 좀 해볼 만합니다.”
막혔던 숨통이 트인 것 같다는 표정으로 전장을 바라보는 딘딘이 말했다. 그의 옆에서 황제가 쓰게 웃는다. 이렇게 궁지에 몰리는 경험 자체가 생소했으니 어처구니가 없을 수밖에.
“병사들의 사기도 오른 것 같습니다. 3차 지원군이 내일쯤 도착하면 바로 승부를 걸어봐도 되겠습니다.”
딘딘은 무서운 얼굴로 팔짱 낀 황제가 조금이라도 표정을 풀길 바라며 말했다. 얼마 전, 1차, 2차 지원군이 합류하며 열세였던 병력의 차가 좁혀졌고, 제국도 슬슬 지치는지 인력충원이 이전보다 원활하지 않아 보였다.
“그러면 뭘 해. 저 빌어먹을 마약이 도는 이상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반복될 것인데.”
산 넘어 산이라는 말이 이렇게 깊게 와 닿은 적이 없다.
-뚫었다!
-약쟁이들을 죽여버려!
-와아아아아아!
-가자!
에비뉴의 병사들은 최선을 다했다. 이제 막 전선에 합류한 지원군은 체력도 좋았고, 투지도 높았다. 하지만 황제가 짜증을 부리는 이유는 이 전장을 뚫고 후단의 수도로 가도 이 상황이 재현될 거라는 불길함 때문이었다.
마약.
이 거지같은 상황을 만드는 이것은, 죽음조차 별거 아니게 느끼게 해버리는 통에 저쪽 병사들은 공포가 없었다. 반면, 그들이 그렇게 행동할수록 철의 군대는 녹슬고 지쳐간다. 제국이 이걸 노렸다면 정말 완벽하게 먹혔다 할 수 있었다. 황제는 지난 수십 년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던 ‘회군’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니까.
“역시 제국인가.”
쉽지 않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런 방식의 소모전을 걸어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었다. 무식하지만, 인구수가 상대보다 월등할 때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도 하다.
“은사의 말에 의하면 마약의 출처가 에비뉴의 어딘가 일수도 있다고 합니다.”
황제의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뭐?”
네가 아는 걸, 나는 왜 듣지 못했지? 라는 표정으로 노려본다.
“아, 확실하지 않아, 좀 더 조사해보고 폐하께 말씀드린다 하여..”
꾸욱 다물리는 황제의 어금니.
마약이 에비뉴에서 나왔다?
“..허..!”
기막혀 말도 안 나왔다.
“어떤 개잡놈의 새끼가..”
딘딘은 황제가 이렇게 분노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그와 참 오랜 시간 함께 했는데도 말이다. 누가 보고 있는 자리에서 저렇게 주먹을 부들부들 떨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다가 번뜩 떠오르는 게 있는지, 딘딘을 노려보며 묻는 황제.
“집정관도 알아?”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면 그가 처리했어야 했다.
“아직 모를 겁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그 녀석..”
“흐음.. 그렇지. 그래, 집정관이 알았다면 이렇게 놔뒀을리가 없지.”
황제가 분노를 삭이며 차분해진 목소리로 묻는다.
“얼마나 걸릴 것 같아?”
“네?”
“그 정보 말이야. 확인되는데, 얼마나 걸리느냐고.”
“아, 십위 전부가 에비뉴로 떠났다고 하니,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번뜩, 황제의 눈이 마치 독사처럼 가늘어졌다. 흡사 쥐를 앞에 둔 것 같다.
그러다 문득,
“어떻게 생각해?”
묘한 표정으로 딘딘에게 묻는 황제.
“이용하시려는 것입니까?”
딘딘의 말에 황제가 씨익 웃었다.
대체 이 빌어먹을 마약을 누가 만들고 제국에 뿌렸는진 모르겠지만, 만약 이것이 에비뉴 독점 생산이라면 어떻게 할까? 그 파괴력을 누구보다 절실하게 실감하는 중이 아닌가? 철의 군대가 몇 번이나 부러질 뻔했으니 말이다.
“알잖아.”
황제의 섬뜩한 미소가 점차 더 진해지는 것을 보며 딘딘은 머리를 흔들었다. 이기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이 사람. 하지만 마약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것이 통제하지 못하게 될까 두렵습니다.”
딘딘은 무장이다. 평생 창 하나만 보고 살아온 사내. 그래서 이런 쪽은 어렵다. 또한 염려도 된다. 용병이나 병사가 아닌, 여자, 노인, 아이들까지 전부 이것에 중독되어 거리에 쓰레기같이 널브러지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는게 아닐까하고. 그가 본 마약은 충분히 그럴만한 파급력을 지녔으니 말이다.
“아니지. 아니야.”
“네?”
황제는 큭큭 웃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잘 생각해봐. 마약이 에비뉴에서 나왔다면, 이 모든 게 말이 되지. 세이프 레인보우까지 말이야. 어떤 빌어먹을 새끼가 지금 전쟁을 이용해서 판을 벌이고 있다는 거라고.”
“아.. 설마?”
“그래, 우리에게 세이프 레인보우를 보낸 그놈.”
이제 좀 알겠다.
빠드드득. 황제의 이가 갈렸다.
누군가 자신을 가지고 놀았다는 생각에 분노로 소름이 돋았다. 감히 대 에비뉴의 황제를!
“이리될 걸 알았든지, 아니면 이리되게 만들었든지 란 말이군."
“······.”
딘딘은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황제의 눈이 원하는 것은 대화가 아닌 것이다.
“어느 쪽이든..”
그는 지금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죽여버릴 거야. 반드시 죽여버릴 거라고. 알겠어?”
“예..”
이럴 땐 그저 장단을 맞춰주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순간, 딘딘은 생각했다. 제발 아니길 바란다고. 마약의 출처가 에비뉴라면 아주 끔찍한 피바람이 불 것이 확실하니까. 후단과의 전쟁도 버거운데, 그리되면 황제가 어디로 튈지 모른다.
“······.”
잠시 전장을 바라보며 황제가 진정하길 기다리던 딘딘.
“······?”
미세한 기척을 느꼈다.
아무리 그가 경지에 접어든 사내라 해도 이건 아주 이상한 일이었다. 은사가 이목에 잡힐 사내가 아니었으니까.
“폐하..!”
황제의 앞에 급하게 나타난 은사.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 무슨? 너..?”
딘딘은 머리칼이 송두리째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은사.
그가 누군가? 에비뉴 최고의 암살자이며,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의 권력을 쥐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람 아니던가? 그런 그가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것도 바닥에 진득하게 고일 정도로 심각한 부상을 입고서 말이다.
“떠나셔야 합니다!”
은사가 무작정 황제에게 말했다.
“······.”
황제는 잠시 은사를 내려보았다.
장기까지 상했는지 손으로 배를 틀어막고 있는 꼴이 심상찮다.
“무슨..?”
“당장 가셔야합니다!”
핏기 하나 없는 은사의 입술. 표정만 봐도 알겠다. 몸은 괜찮은 것이냐?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느냐? 내가 왜 피해야 한다는 말이냐?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런 대화를 나눌 여유 따위가 없다는 뜻이었으니까.
“으음.”
황제가 망설이자, 딘딘이 은사를 보며 끄덕였다. 내가 모실 테니 너는 몸을 돌보라는 눈빛이다.
그러나..
-우와아아아아아!
-더러운 에비뉴의 잡것들을 죽여라!
-단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마라!
막 움직이려던 찰나, 그가 멈춰 서서, 저편 언덕을 보았다.
“······.”
-황제를 잡아라!
-오늘 이 전쟁이 끝날 것이다!
마치 모래 폭풍이 밀려오는 것 같다. 얼추 보아도 1만이 넘어가는 대군이 일제히 깃발을 들었다. 푸른 기, 붉은 기, 황금색 기, 독수리, 드래곤, 사자, 늑대. 참 많이도 모였다.
“죽여주십시오! 크윽!”
은사가 치를 떨었다.
“놈들이 교묘하게 위장하여 사방에서 접근하고 있었습니다.”
"······."
뭐, 대충 알겠다. 최근 지원이 뜸해졌다 느낄 정도로 적의 기세가 약해지더니, 이걸 노리고 병력을 빼돌렸던 것인가?
소모전..? 아니다.
“..허어..!”
스트레이트 한방 크게 치려고, 잽을 날리고 있었을 뿐.
“제국의 모든 용병단이 동원되었고, 산맥 전체를 포위하며 올라왔습니다.”
은사의 말에 딘딘이 흠칫 주변을 돌아본다.
저기 언덕뿐이 아니었다.
동서남북 사방에서 개미떼처럼 접근하는 것들. 모두가 전장에 집중하고 있을 때, 덫이 옥죄고 있었던 것이다.
“하! 참... 이거 되는 일이 하나도 없구나.”
황제가 혀를 차며 둘러보았다. 그러면서 내뱉듯 말한다.
“도망도 못 치겠는데?”
어이없다는 듯 웃는 황제.
1, 2차 지원을 받아 아군은 약 3만으로 늘어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방에 흩어져 있다. 이런 상황에서 병력을 모아 퇴로를 만든다는 게 쉽진 않을 것이다.
“제가.. 어떻게든 뚫겠습니다.”
딘딘이 창을 단단하게 쥐며 황제의 앞에 섰다.
물론, 그를 믿지만.
당연히 딘딘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지만.
“..아니야.”
황제는 머리를 흔들었다.
무리다. 그리 튀어봐야 포로로 잡히면 꼴만 우습다.
“싸운다.”
황제의 말에 딘딘이 급히 외쳤다.
“안됩니다!”
은사도 마찬가지.
“후일을 기약하십시오!”
병력 차이가 3배가 넘는다. 심지어 저쪽은 약에 미쳤다. 이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 아닌가? 아무리 철의 군대라도 못하는 건 못하는 거다.
“내가 가면, 여기 우리 애들은 다 죽어.”
황제가 허리춤의 검을 손에 쥐었다.
“폐하께서 계셔도 다 죽습니다!”
은사가 외쳤지만, 황제는 씨익 웃었다. 그러면서 말한다.
“그래도 내가 곁에 있으면 죽어도 덜 억울하겠지.”
황제가 말에 올랐다.
“이랴!”
“폐, 폐하!”
“안됩니다! 폐하!”
은사와 딘딘이 필사적으로 말렸지만, 황제는 전장의 한복판을 향해 질주했다.
'간다.'
되지도 않는 싸움이라도 여기서 도망칠 순 없다.
-저기! 에비뉴의 황제다!
-황제만 잡으면 돼!
-우와아아아! 죽여라!
기존에 있던 적이 약 2만5천. 거기에 새롭게 나타난 녀석들이 5만은 되어 보인다.
“더럽게도 많구나.”
두두두두두-!
황제는 말을 몰고 질주하며 적군으로 가득 찬 능선을 보았다.
“더럽게도..”
이거, 힘들겠다.
저들이 보통 병사라면 몰라도 약에 미친 것들이 어떤 괴력을 보이는지 아니까.
“폐하-!”
딘딘의 말이 황제를 빠르게 따라붙었다.
안된다. 죽는다! 감히 적이라도 황제를 상하게 하진 않겠지만, 지금은 그것도 장담하기 어렵다. 저 약에 취한 것들은 이성을 유지하지 못하지 않은가!
“폐하---!”
여차하면 강제로 끌고 이 자릴 벗어나려고 마음먹은 딘딘이 입술을 물어뜯을 때,
“어?”
이히히히히히힝!
황제의 말이 갑자기 멈춰 섰다.
“..폐하!”
딘딘도 덩달아 말을 세웠다.
“······!”
황제는 딘딘의 부름에 멈춘게 아니었다. 황제의 입꼬리가 묘하게 뒤틀리는 것을 보며 급히 뒤를 돌아보는 딘딘. 오싹오싹 등줄기에 전율이 올라왔다.
“하, 하하..”
황제가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하하-! 저놈!”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그의 웃음소리는 전장에 넓게 펴졌다.
“······!”
딘딘이 침을 꿀꺽 삼켰다.
남동쪽 동산 하나.
새로운 인파가 모습을 드러냈다.
당연히 적이리라 여겼다. 하지만 그들이 든 깃발은 에비뉴 사람이라면 모두가 아는 것이었고, 그 선두의 백마. 거기에 탄 은빛 갑옷의 사내가 무섭게 달려오며 앳된 목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아버님---!”
번이었다.
“레드 와이번은 폐하가 계신 곳까지 길을 뚫어라!”
“충!”
“충!”
번은 검을 높이 들고 명령했다.
은빛 갑옷과 투구. 그리고 그 속에서 번뜩이는 눈빛은 모든 사람의 이목을 단숨에 모았고,
“솔개 부대는 좌로!”
“충!”
“충!”
번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페트릭!”
“예! 황자님!”
“엄호하라-!”
질주하는 번의 말 옆으로 페트릭이 바짝 따라붙으며 날아오는 화살을 쳐내기 시작했다.
이때, 번은 본다.
-으하하하하! 이놈! 이노옴!
저 앞. 자신을 바라보며 광소를 터뜨리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돌격하라! 돌격-!”
번은 발가락부터 정수리까지 관통하는 전장의 소름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외쳤다.
“도망치면 내 검에 죽으리라! 싸워라! 폐하는 내가 모시겠다!”
-오라! 와하하하!
팔을 활짝 벌리고 아들을 맞는 황제의 웃음이 더욱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