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극딜 #
필립 공작은 번을 바라보았다.
겉으론 미소 짓고 있었지만, 그 속은 아주 매섭게 말이다.
‘소문보다 훨씬 크군. 고작 열넷이라고? 스물은 되어 보이지 않는가. 아무리 발육이 좋아도 어찌.. 기이하군. 기이해.’
세간에 알려진 번 황자에 대한 평가는 아주 극과 극으로 갈렸다. 벨버른 반군을 제압한 공을 높이 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는 반면, 시기 질투가 팽배한 황궁에선, 벨버른 거지들이 허약한 거였다며 깎아내리기에 바빴다. 풀죽도 못 먹은 반군이 자빠지기 직전이었다는 거다. 그걸 운 좋게 번 황자가 주워 먹은 거고.
하지만 필립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무슨 짓이든 다 하는 법이고, 반군 역시 바짝 독기가 올라 대단했을 것이다. 그런 반군을 제압한 것도 모자라, 벨버른을 구제하고 있다지 않나? 책상머리에 앉아 탁상공론만 하는 머저리들은 모르는 진짜 현실.
‘정말 의외군. 내 예상과는 아주 달라.’
전에 경연을 할 때나 궁에서 멀리 스치듯 본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따로 가까이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놀랍다. 애송이라고 난 소문과는 전혀 다르지 않나? 카이사르의 불알을 차던 그 꼬마가 언제 이렇게 자랐나?
‘이거 이거, 7황비 조차도 한참 잘못 생각하고 있구나.’
필립 공작이 그리 생각할 때, 번이 말했다.
“초대해 놓고, 대접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하하, 아닙니다. 돌아가야 하니 빈속이 좋습니다.”
두 사람은 모닥불을 보며 나란히 섰다.
밀회密會.
그렇다. 7황비나 그녀의 측근이 알면 발칵 뒤집힐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다.
‘관운장처럼 생겼군.’
-그게 누군데?
악마에게 삼국지를 설명할 생각 따윈 없었기에 필립 공작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전장으로 직접 가신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예. 그렇게 됐습니다.”
번의 담담한 얼굴에 필립 공작이 묻는다.
“차라리 그 시간에 황궁에서 기반을 잡는 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 곧 어느 쪽으로든 전쟁은 끝날 거고, 그리되면 폐하께서 돌아오실테니 말입니다.”
전장에 나가봐야, 아버지 등쌀에 기 한번 못 펼수도 있다. 그러니 지금 세를 불려야 하는 것 아니냐는 정치적 조언이었다. 하지만 번은 웃으며 머릴 흔들었다.
“온실에서 따스한 햇살에 꾸벅꾸벅 졸다가 목이 잘리는 닭이 되고 싶진 않습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밖으로 뛰쳐나갔다간, 여우에게 물려가는 법이지요.”
필립 공작은 지금 번을 떠보고 있었다.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평가하려는 거다.
“하지만 여우를 만날지, 지렁이를 만날진 나가봐야 아는 것 아니겠습니까?”
필립 공작. 이자를 대할 땐, 단테 공작관 달라야 했다. 아주 이성적이며 직설적인 사람이었고, 속을 숨기는 것을 경멸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사내라면 사내답게! 한마디로 마초의 전형이랄까? 같은 칼도 그 쓰임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듯, 번 역시 사람을 대할 때 그에 맞는 화법과 분위기를 쓰려고 노력했다.
오늘은 남자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치기나 객기는 아니군.’
필립 공작은 오랫동안 칼을 쥐어왔다. 그래서 안다. 전투에 임하는 사람이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오래 살아남는지.
흥미롭다. 이 어린 황자의 눈빛엔 많은 것들이 담겨 있는 듯 하다. 절대 소홀히 할 수 없는, 꼭 필요한 것들 아닌가? 투지, 집념, 자만이 아닌 자존감 같은 것들 말이다. 그래서 신기하다. 고작 몇 년의 벨버른 생활로 이러한 것들을 얻었다? 평생 전장에서 굴러먹어야 가능한 것들인데 말이다.
‘확실히 그쪽보단 나아.’
일단, 7황비의 두 아들보단 높은 점수를 매기는 필립 공작이었다.
“그래.. 어쩐 일로 보자 하셨습니까?”
“보내드린 물건은 어떻게 마음에 드셨습니까?”
“그랬으니 이리 나왔겠지요.”
얼마 전, 번은 사람을 시켜 아주 은밀하게 필립 공작에게 세이프 레인보우를 보냈다. 시중에 유통하는 것이 아닌 ‘진짜’를 말이다. 번의 인맥에 어떠한 사람이 있는지 알기에 필립 공작은 궁금함을 참을 수 없었다.
복용하면 잠시지만, 몇 배의 힘을 끌어낼 수 있는 강력한 약. 7황비가 유통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마약이라곤 하지만, 부작용이 없었으니 이것은 기사들에겐 보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번은 웃으며 끄덕였다.
“저와 거래하시겠습니까?”
“조건을 들어봐야겠지요. 물건의 에비뉴 유통 독점권을 주시겠다는데, 그게 거저는 아닐테니까요.”
그랬다. 번은 필립 공작에게 앞으로 1년간 매달 5kg의 세이프 레인보우를 약속한 것이었다. 이것은 엄청난 양이어서 요즘같이 세이프 레인보우의 값이 천정부지로 뛰었을 때는 돈으로도 환산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또한 돈뿐만 아니라 비상용이나 호신용으로 소지하고 다니면 든든하기도 해서 기사들도 원하는 것이다.
7황비 앞에선 모른 척했지만, 오늘 번을 만나본 필립 공작은 확신했다. 어떻게 연결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번이 세이프 레인보우와 관련이 확실히 있고, 그걸 유통하고 있다는 것을.
‘대현자나 스캇이겠지.’
짐작 가는 곳이 있기에 절로 믿게 된다.
‘슬쩍 떠볼까?’
싶다가 아직은 때가 아니란 생각에 관둔다. 지금은 거래를 확정하지도 않았으니까.
“제 조건은 간단합니다.”
번이 모닥불로 시선을 옮겼다.
“이번 파병에 참여하시지요?”
“지고하신 폐하의 명령이니 그래야죠.”
“어차피 보낼 병력이라면 제게 힘을 실어 주십시오.”
필립 공작이 번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대충 이 어린 황자가 그리는 그림을 알겠다.
‘정치 수완도 있는 건가?’
폐하는 지금 곤경에 처해있었다. 이럴 때 발 벗고 돕는다면, 그 도운 사람을 당연히 기억하지 않겠는가? 부자간이라 할지라도 폐하께는 많은 아들이 있었기에 눈도장을 받으려면 노력을 해야 했고, 번 황자는 지금 그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 확실하게 쾅쾅! 시선을 받으려 말이다.
“그거면 되는 겁니까?”
7황비가 뒤통수 맞은 표정을 하겠지만, 그녀와 미래를 약속한 건 아니었다. 언제나 대세를 따르는 것이 장수하는 지름길이 아니던가?
“아니요. 제가 원하는 건 어중이 떠중이 몇 천이 아닙니다.”
“……?”
영지에서 한 3천 명 모아, 번에게 넘기려던 필립 공작의 표정이 가볍게 굳었다.
“세이프 레인보우 5kg면 많은 기사를 키울 수 있는 돈이 됩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 안다. 그래서 나왔다.
기사는 그저 숨만 쉬어도 돈이 든다. 그들이 타는 말부터 시작해 봉급과 주거, 식생활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신경 써야 했다. 심지어 콧대 높은 기사다. 어디 용병 나부랭이처럼 빵 쪼가리나 씹겠는가?
“1년입니다. 유통권이 유지되는 기간동안..”
번은 고개를 돌려, 필립 공작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러면서 말했다.
“오백만 빌려주십시오.”
“……!”
필립 공작의 눈이 커졌다.
번이 말하는 숫자가 뭘 칭한 것인지 파악한 거다.
“레드 와이번을 부리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번은 자신에게 허락된 일천 명을 최대한 정예로 구성하고 싶었다. 아무나 천명 모아 전장으로 달려가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 도움은커녕 발목을 잡을지도 모른다. 그래선 안되기에 세이프 레인보우를 노출하면서까지 필립 공작을 만났다. 물론 여기에도 그의 숨은 전략은 녹아있었다.
‘1년이면 충분한 시간이지.’
필립 공작가가 세이프 레인보우 없인 못 살겠다고 아우성치기까지 걸리는 기간. 담배나 술 같은 해로운 것이 아니라도 건강식품이나 보조제에 맛 들이면 끊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다. 아직까지 어떤 연금술사와 마법사도 세이프 레인보우는 못 만든다. 결국, 번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 속에 그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깊이 파고들려는 번. 필립 공작은 아직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한 듯하다.
‘나쁘진 않아. 기사들을 죽이려고 데려가는 건 아닐 테니까.’
필립 공작은 좀 더 깊이 생각한다.
‘황자 옆이라면 오히려 더 안전할 수도 있고.’
전쟁통이래도 황족을 막 죽이진 않는다. 포로 인도조약이나 암묵적인 룰이 있으니까.
‘1년이면 지금보다 두 배로 키울 수 있다.’
게다가 황자의 곁엔 페트릭이 있었다. 그의 능력 덕택에 반군을 제압했다고 보는 사람들도 많은 만큼, 유능한 그가 있으니 무작정 불 속으로 뛰어드는 짓은 하지 않을 터.
“흐음.. 여쭐 것이 있습니다.”
필립 공작의 눈빛에 번이 선수를 쳤다.
“물건의 출처를 밝힐 순 없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아아, 당연하겠지요. 제가 궁금한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혹시.. 집정관과 끈이 닿아있으신지요?”
에비뉴의 세 공작은 황제와 그리 유대가 강하진 않았다. 그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 딘딘, 스캇, 집정관, 은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현 황제 집권 이후 나라는 커졌지만, 묘하게 중앙권력에서 밀려난 듯한 기분을 받았는데 서운했지만 그걸 표현했다간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기에 그저 참고 살아왔다.
그런데 기회가 오고 있다.
아직 미흡하긴 해도 후계자로 인정받은 황자가 먼저 손을 내민 것 아닌가? 망국의 왕이나 대현자쪽 연이 있다곤 하지만, 황제의 사인방 같은 막강한 이는 없었으니 비집고 들어갈 틈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확인해야 했다. 무엇이 어디로 박혀 있을진 모르는 거니까.
필립 공작의 속셈이 눈에 보이자, 피식 웃어버리는 번.
“폐하를 제외한 그 누가 집정관을 흔들 수 있겠습니까. 괜히 어설프게 악수를 청하다가 손목이 잘릴 수도 있습니다.”
집정관이 쉬운 사내였다면 진즉에 몇 번이고 누군가에게 회유되었을 것이다.
번은 빙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7황비님이 마약을 유통하고 있다는 것은 진즉에 알고 있었습니다.”
“…….”
필립 공작이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그 표정을 보면서도 번은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사람들을 상하게 하는 마약을 집정관께서 마냥 두고 보진 않으시겠지요. 괜히 침몰하는 배에 탈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침몰하는 배라..”
필립 공작이 번을 노려보았다.
아직 필립 공작은 선택하지 않았다. 바로 되돌아가 7황비에게 번 황자가 세이프 레인보우와 관련이 있다고 밝힐 수도 있다. 그러나 그도 느끼고 있다. 이 어린 황자의 매력에 빠져들고 있는 자신을. 하지만 돌 다리도 두드려보는 그다.
“누구나 그럴듯한 계획은 가지고 있지요. 허나, 어떤 배가 침몰할진 모르는 겁니다.”
생각대로만 되면 세상에 망하는 사람이 왜 생기겠나.
필립 공작의 비아냥거리는 말에 번이 더 환하게 웃었다. 그러면서 내민 손을 채근하듯 흔들었다.
“이 배는 아닐 것입니다.”
"……."
필립 공작은 이마를 찡그리다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번의 손을 잡았다.
“1년입니다.”
“예, 제가 보여드리겠습니다. 어디까지 닿을 수 있는지.”
필립 공작은 황자의 저 눈빛이 계속 거슬렸다. 마치 모든 것을 손바닥 위에 올려두고 내려다보는 것 같은.
‘재미있겠어.’
필립 공작의 입가에 드디어 미소가 걸렸다.
일단 보자. 아니면 그때 가서 선장을 바꿔도 되는 것이니까.
물론, 7황비가 제시했던 비전도 꽤 가능성이 높았다. 어쩌면 번 황자가 하려는 것보다 훨씬 안전하고, 탄탄할지도 모른다고. 그런데도 필립 공작은 번의 손을 잡았다.
그도 안 거다.
어미의 치마폭 아래에서 황제가 되어보려는 이와, 그런 것 없이 당당하게 앞길 개척하는 이의 차이를.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고 웃을 때, 번의 머릿속에서 악마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 자가 꼭 필요할까?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아. 내가 저런 인간을 여럿 봤는데, 딱 뒤통수 칠 상이라고.
‘알아.’
-안다고? 알면서 왜 해?
‘크크크..’
번은 속으로 웃었다.
아무도 모른다. 심지어 내 안의 악마조차도.
‘퍼즐이 완성되려면 모든 조각이 다 있어야 하는 법이지. 하나라도 빠지면 그림이 안 되거든.’
-그게 무슨 소리야?
‘몰라도 돼.’
곧 세상이 알게 될 것이니까.
“하하하하!”
번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감사합니다! 아주 좋은 선택을 하신 겁니다!”
어찌 웃지 않을 수 있을까.
내 손안에 일국을 뒤흔들 수 있는 장기 말이 모두 모였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