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한 놈 #
“흐음.. 하지만 황자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황자님의 그 마음은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하지만, 황자님이 그리하시면 다른 분들도 가만있지는 않을 겁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누군가의 효심도 누군가에겐 정치질로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요.”
에비뉴 영주들에겐 지금 대대적으로 동원령이 내려져 있었다. 극심한 소모전이 길어지자 병력이 부족해졌고, 다시 군대를 모으기 전까지 공백이 생겼다. 보통은 이러면 휴전하거나 잠시 물러서서 시간을 벌어야 하겠지만, 황제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해서 영주와 귀족들의 가용범위에 있는 사병을 징집해 전선으로 보내라는 것이었는데, 당연히 영주들은 탐탁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거절할 수도 없었다. 만약 황제가 전쟁에서 진 뒤 수도로 복귀했을 때, 그 분노를 누가 감당할까? 그렇게 단테 공작 역시 영지에서 사병을 모으고 있었는데, 그 지원군에 번이 참여하겠다고 조르고 있는 거였다.
“누가 어떻게 보든 상관없습니다. 어찌 그런 편협한 시선들 때문에 인의와 도리가 묻혀야 한단 말입니까? 이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따위의 문제가 아닙니다. 무조건 해야 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닙니까? 저는 그분 아들입니다.”
번을 아는 측근이 들었다면 참으로 황당한 말이었겠지만, 번은 효심 깊은 아들의 역할을 아주 잘 수행하고 있었다. 적어도 단테 공작이 보기엔 말이다.
“으음..”
단테 공작에게도 많은 아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리도 부모를 위하는 자식은 없다. 한편으론 황제가 부럽기도 하면서, 또 한편으론 이런 사람이 훗날 에비뉴를 이끌면 얼마나 좋을까? 여겨지기도 했다. 단테 공작이 본 번 황자는 황자라고 거들먹거리지도 않았고, 나이 많은 이들에게도 깍듯했으니까.
사실 이게 뭐 대수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21세기 대한민국과는 다르게 이곳은 철저한 신분사회다.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귀족에겐 말 한 마리의 가치도 없는 것이 평민이며, 연륜에 대한 대우는 커녕 사람 취급이나 받으면 다행이었다. 갑질의 정석이랄까? 그런데 번은 그게 없었다.
뭐, 물론 번은 을의 정석을 누구보다 깨닫고 살아오기도 했으니, 그럴만도 하지만.
“그렇다 해도..”
목숨 걸고 싸우러 가는 이들이다. 그런 이들 사이에 황자가 끼는 것 자체가 고깝게 보는 이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한순간에 황자의 들러리로 전락해버릴 수도 있는 거니까. 그걸 누가 좋아하겠나. 지휘관들 역시 눈엣가시 같은 게 박혔다고 싫어할 거고.
“아시지 않습니까. 병사들의 사기란 게..”
단테 공작이 염려하는 것을 가만히 듣던 번이 크게 끄덕였다.
“이해합니다. 하지만 꼭 부탁드립니다. 저는 정말 신경 쓰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저를 따르는 인원만 모아, 조용히 뒤따르겠습니다. 숙영도 함께하지 않을 것이며, 그 어떤 간섭도 없을 것입니다. 그저 명분만 만들어 주십시오. 그 정도는 부담 없지 않습니까? 먼 길도 아니고요.”
번 황자가 대략 1천 명 정도를 동원할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아마 그걸 믿고 가려나 본데···.
‘글쎄..’
세상일이 그리 쉬울까? 이제 고작 열네 살 된 황자의 군대. 그깟 오합지졸들의 군대에 진심으로 기대하는 이가 누가 있겠나? 병정놀이라고 비웃기나 하겠지.
‘확실히 이런 부분에선 아직 어리단 말이지.’
세이프 레인보우라는 획기적인 물건을 가져왔을 땐, 단테 공작 역시 그 상품성을 한눈에 알아보고 황자와 거래를 했다. 그 후 2년간 사업하는 황자가 보여준 성실함과 유능함은 익히 알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건 그거고.
‘그래도 어쩔 수 없나.’
단테 공작은 번 황자를 좋아한다 말할 수 있었다. 아직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건 아니었지만, 다른 황자보다는 그가 황위를 이어받았으면 했다. 그래서 이번 일 역시 사내라면 어릴 적 경험해보아야 하는 쓴맛이라 생각하기로 한다. 패배를 해봐야 승리의 성취감이 더 큰 법이고,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니.
“후.. 좋습니다. 제가 한번 힘써보도록 하지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일은 결코 잊지않을 것입니다.”
“뭘 그렇게 까지요.”
기뻐하는 번의 모습에 단테 공작이 흐뭇하게 웃으며 손사레를 쳤다. 하지만 속으로 생각한다. 이 어린 황자도 머잖아 알게 될 거라고. 전쟁터란 것이 책이나 이야기로만 듣던 것과 얼마나 다른 것인지를. 피, 비명, 고함, 긴장, 죽음, 그런 것들을 가감 없이 직면하게 되면..
‘군주가 되겠다는 사람이니, 미리 겪어보는 것도 좋겠지.’
단테 공작은 이렇게 생각을 정리했다.
'됐군.'
번 역시 마음으로 쾌재를 부르며 나름 생각한다. 그가 한다고 했으니, 이 일은 성사된 거나 다름없을 것이다. 비록 윈드밀에 있지만, 수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이제 자연스럽게 참전할 수 있다.’
-캬캬캬캬! 피가 부른다! 피가!
악마 역시 오도방정을 떨고 있었고.
사실 전쟁이 길어지고 있는 것은 번 때문만은 아니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대량의 마약을 유통한 7황비와 그걸 방관한 제국 수뇌진의 콜라보였다. 하지만 그 사이에서 확실한 이득을 보는 것은 번이 맞았다. 상대적으로 위험한 마약이 널려 있어야 그의 세이프 레인보우가 빛을 발하는 것이니까.
2년 전.
번은 단테 공작의 힘을 십분 활용하여 그가 가진 인력과 인맥, 유통망으로 하나 상단을 조직했다. 이미 단테 공작이라는 든든한 배경이 뒤를 받치고 있었기에 순식간에 확장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가 아니었다면 아무리 번이었다고 해도 지금 수준으로 만들려면 몇 년 더 걸렸으리라.
물론 이게 공짜는 아니다. 단테 공작은 하나 상단이 보는 이윤의 30%를 가져가고 있었고, 그건 천문학적인 금액이었다. 그의 지분을 줄여야 한다는 말도 나오긴 했지만, 체리티나 리켄스가 그리 말할 때마다 번은 그저 웃었다.
이건 뇌물이니까.
그와 한배를 타기 위한 포석이나 다름없었다.
‘정경유착이 얼마나 무서운지 내가 보여주지.’
설명우가 살던 21세기엔 글로벌 그룹이나 대한민국 대기업들이 막강한 위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들은 국가를 움직일 수도 있고, 전쟁도 벌일 수 있었다. 기업 하나가 나라 하나보다 훨씬 더 많은 재화를 보유한 경우도 있었고, 마음만 먹으면 세계를 지배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여긴 아직 그 정도로 거대한 기업이 없다. 번은 지금 그걸 만들려는 거다. 단테 공작은 그것에 필요한 조건을 모두 가지고 있었고, 여기 윈드밀 역시 적절한 위치와 인구를 보유했으니까 말이다.
‘벨버른엔, 값싼 인력이 있고.’
윈드밀엔 돈이 있다.
이제 이 두 가지가 번의 머릿속에서 합쳐지면.
‘전쟁은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저주이자, 기회라 했으니.’
찻잔을 드는 그의 눈이 무섭게 반짝였다.
맞은 편의 단테 공작.
그는 모른다.
맞은 편의 손주마냥 해맑게 웃고 있는 이 황자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를..
.
.
.
“참.. 이해할 수 없는 놈이에요. 그렇죠? 저만 이렇게 생각하는 거 아니죠?”
7황비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의 맞은 편엔 노인이 앉아 있었는데, 에비뉴 3명의 공작 중 하나인 필립이었다.
단테 공작이 압도적인 재력으로 유명하다면 필립 공작은 대대로 이름난 기사를 배출하기로 유명했다. 그의 레드 와이번 기사단은 검의 손잡이에 붉은 수실을 달아놓는 것으로 존재감을 알렸는데, 황실 근위기사단에 버금가는 수준의 기사를 오백 이상 보유하고 있어 귀족계에선 명실상부 최고의 무력집단이라 할 수 있었다.
"흐음.."
그도 지금 골치였다.
황제 폐하의 명령은 내려졌으니 사람을 보내야 하는데, 레드 와이번 기사단을 쏙 빼고 징집한 남자들만 보내기엔 찝찝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보내자니, 애써 공들여 키운 기사를 개죽음만 당하게 할 것 같고.
“어려서 그런 겁니다. 어려서. 그 또래 아이들은 어떻게든 아비의 눈에 들려 하는 법이니까요.”
필립 공작의 말에 7황비가 쩝, 입맛을 다셨다.
그녀의 최대 정적이자, 장애물을 꼽으라면 두말할 것 없이 번 황자였다. 한데, 그 녀석이 전장으로 가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었다. 요즘 단테 공작과 어울리는 것이 엄청나게 거슬렸는데, 도통 종잡을 수 없는 일을 벌이니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 질 모르겠다.
“단테 공작에겐 많은 조력자가 있어요. 그가 아무 생각 없이 일을 추진했단 생각은 못 하겠는데요.”
7황비의 말에 필립 공작이 웃었다.
“허허, 누구나 애가 떼쓰는 것을 당해내는 건 쉽지 않습니다. 단테 공작께 떼라도 썼나보죠.”
필립 공작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듯하다. 그리곤 더는 이 일로 말하기 싫었는지 말을 돌렸다.
“그런 어린 아이의 일에 신경 쓸 데가 아닙니다. 지금 중요한 건, 철없는 황자의 행보가 아니라 세이프 레인보우가 어디서 나왔느냐를 밝혀내는 겁니다. 집정관이 심상치 않아요. 이거 잘못하면 제 목이 날아갑니다.”
“알아요, 저도. 걱정마세요. 그런 일은 없을 테니.”
살짝 삐친 듯 새침한 그녀는 뾰족하게 말했다.
지난 2~3년간, 7황비는 죽은 2황비가 거느렸던 세력의 대부분을 흡수한 것도 모자라, 레인보우 립으로 벌어들인 돈을 바탕으로 무섭게 인맥을 넓혔다. 필립 공작도 그중 하나였고.
“어떻게 장담하십니까? 혹시 줄이 닿았습니까?”
필립 공작의 눈이 살짝 커졌다.
7황비는 끊임없이 집정관과 손을 잡고자 노력하고 있었는데, 그게 성사되었느냐 묻는 거다.
“그건 아니지만, 이번 파병에 우리 입지를 확실히 다지면, 폐하께서도 생각이 바뀌실 거에요. 그게 되면 집정관도 우릴 건드리지 못할 거고요.”
집정관은 황제의 머리나 다름없는 사람이다. 어떤 뇌물이나 혈연 지연도 통하지 않는 일 중독자 괴물. 이런 자를 상대할 땐, 회유하기보다는 그 윗선을 공략해야 하는데, 위라고 해봐야 한 사람밖에 없다.
“크흠.”
좋다 말았다는 듯 아쉬움을 표하는 필립 공작.
“이번 일에 제 가문의 전부가 걸렸다는 걸 명심하셔야 할 겁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7황비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공작님께서 도와주신다면, 제 아들은 반드시 황좌에 오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주세요.”
“…….”
잠시 눈을 맞추던 필립 공작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곤, 오늘의 만남을 마무리했다.
황궁을 나와 에비뉴를 떠나는 마차에 오르는 그를 50인의 호위대가 말을 타고 따랐다. 그 유명한 레드 와이번 기사들이다.
마차는 계속 달렸다.
다섯 시간, 여섯 시간.
이윽고 깊은 밤이 오고, 사위가 완전한 어둠으로 잠겼지만, 마차는 멈추지 않았다. 올빼미도 이런 밤엔 나무 위에서 부엉부엉 쉬어가는데, 앞도 잘 뵈지 않는 길을 마차는 질주했다.
그렇게 얼마나 더 갔을까?
-불빛이 보인다!
-속도를 늦춰라!
선두의 기사들이 외치자, 마차 창문의 휘장이 걷혔다. 필립 공작이 밖을 내다보는 것이다.
에비뉴 서남쪽 8시간 거리의 이름없는 동산. 그 정상에 모닥불이 활활 타고 있었다. 모닥불이라곤 하지만, 나무를 얼마나 썼는지 불길이 거의 집채만큼 치솟고 있었다. 멀리서도 잘 볼 수 있게 말이다. 그런데 그 불길은 마차가 접근하자, 급격하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누군가 불을 조절하고 있다는 뜻이리라.
마차는 모닥불에서 10m쯤 떨어진 곳에 멈춰 서더니, 기사 둘이 먼저 가서 확인한 뒤 사인을 보내자 마차의 문이 열렸다. 필립 공작은 굳은 얼굴로 마차에서 내려 천천히 걸어갔다.
“…….”
한 사내가 모닥불을 바라보며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필립 공작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가까이 다가갔다. 기사들이 일정 거리를 두고 멈췄고, 눈에 보이진 않지만 사방에서 시선이 느껴진다. 아마도 저 어둠에 많은 이들이 숨어 있으리라.
‘훈련이 잘됐군.’
필립 공작 역시 수준급의 무력을 갖추고 있었기에 인근의 기척이 잘 정돈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동요하거나 흐트러지는 느낌이 전혀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는 이제 모닥불 가의 사내와 세 걸음을 남겨놓았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황자님.”
그러자, 부름에 답하듯 사내가 빙긋 웃으며 돌아섰다.
“사석에서 처음 뵙는 것 같습니다. 공작님.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는 남자. 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