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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좌의 게임-79화 (79/177)

# 나쁜 놈 #

하나 상단은 벨버른 전역으로 퍼져있었다.

이들이 하는 일은 타국의 곡물을 필요한 사람에게 판매하면 되는, 겉으로 보기엔 아주 간단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사실 그 속을 찬찬히 들여다 보면 전혀 다른 식으로 흘러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추세라면 올해가 가기 전에 벨버른 인구의 약 51%가 하나 상단의 물건을 쓰고 있다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벨버른 전체 인구보다 적은 증서의 숫자는 가장이거나 가족을 책임지는 사람이 대표로 곡물을 빌렸기 때문이었다. 대가족이 당연하다시피 되어 있는 시대. 당연히 증서의 숫자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혜택을 보고 있다 할 수 있었다.

리켄스의 말에 번이 끄덕이며 물었다.

“생필품 조달은 잘 되고 있나?”

상단의 규모가 늘어나자, 번은 곡물 외에도 판매품목을 늘려갔다. 그 중에서도 인간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들을 우선으로 배정했다. 21세기 대한민국과는 다르게 유통엔 시간이 오래 걸리고, 마차에 실을 수 있는 공간의 제약도 있기에, 초기엔 그저 곡물 가득 수레에 불과한 몰골이었지만, 이젠 ‘황금 마차’ 수준의 만물상 정도로 인식되어가고 있었다.

“네. 잘 처리될 것 같습니다. 다만, 물건값을 다소 비싸게 부르는 에비뉴 상인들은 거르고 있습니다. 초반 기 싸움을 해볼 생각인 것 같은데, 그들을 빼도 우리와 거래하겠다는 상인들이 많아 어렵진 않을 것 같습니다.”

“에비뉴 상인들이 발이 넓고, 인맥도 좋아 적당하다 하지 않았었나?”

전에 분명 그렇게 들은 것 같은데? 번이 갸웃하자, 리켄스 대신 우리아가 말했다.

“최근 벨버른에 상인이나 용병, 유통업자들이 늘고 있다고 해요. 이들의 특징은 마진을 거의 남기지 않는다는 것이죠. 새것은 아니지만, 각종 물건을 구하기 쉬워서 저렴하고요.”

지금이야 발목 잘려 주저앉은 말 같다고 하더라도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벨버른 역시 잘 굴러가던 하나의 국가였다. 상업, 농업, 유통, 장사를 하던 이들 대부분 전쟁터로 끌려가 죽었다곤 하지만, 그들에겐 아내와 자식, 친척과 부모가 있었다. 이들의 경험 역시 무시하지 못하는 것이어서 최악의 기아를 면하자, 다시금 머리를 치켜들기 시작한 거다.

“그렇군.”

“밑바닥까지 추락해본 사람들은 큰 걸 바라지 않으니까요.”

전쟁과 기아로 벨버른의 많은 사람이 죽었다. 누군가 죽었다는 것은 그가 쓰던 모든 것들의 주인이 사라졌다는 의미와 같고, 상인들이 그 물건을 구하러 다니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마을 사람들이 수거해 상인들에게 싼값에 넘겼다. 곡물을 팔아 빈 수레가 된 마차는 바로 이런 물건들을 다시 태워 에비뉴나 요세인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시간이 넉넉하지 않으니 세부적인 건 군사와 상의하고, 내겐 핵심만 하지. 이윤이 나고 있나?”

“간신이 버틸 정돈 됩니다.”

“그럼 됐어.”

번이 웃으며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리켄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하나 상단.

고작 2년 만에 벨버른 전 국민의 젖줄이 되다시피 성공했다. 직접 참여해 일을 하고 있지만, 이렇게 빨리 성장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체계적인 조직관리와 선진화된 시스템을 기반으로 착착 진행되는 일은 마치 짜맞춘 것 같은 기분까지 들 정도였다. 왜, 일이 너무 잘 되면 이상하고 불안한 그런 거 있지 않나? 그 정도로 술술 풀렸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식이면 해가 갈수록 적자로 전락하고 말겁니다. 증서를 받고 있다곤 하지만, 그들은 지불 능력이 없지 않습니까? 심지어 이젠 익숙해져서 뻔뻔하게 더 많은 양을 요구하고 있는 이들도 있습니다. 의심쩍어하던 이들도 손을 벌리고 있고요.”

문제는 이것이었다.

장사를 하면 남는 게 있어야 하는데, 쓸모없는 종이쪼가리만 쌓여가니 이렇게 상단이 유지되는 것만 해도 거의 기적적인 일이었다.

대체 이런 장사를 왜 하는 걸까?

“그건 지금 단계에서 신경 쓸 필요 없다. 조금만 버티면 돼. 조금만. 다른 생각은 하지 말도록.”

“예..”

대답을 하긴 했지만, 리켄스는 여전히 의문을 풀지 못했다. 그래도 주어진 일은 열심히 할 것이다. 전에 비하면 지금은 하루하루가 사는 것 같았으니까.

번의 고개가 돌아갔다.

시선을 받은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리켄스와 교대한다.

“훈련은?”

허리에 짧은 단도를 두 개 찬 여자. 쌍둥이 자매 중 하나인 다루였다.

“막바지에 접어들었어요.”

교육은 페트릭이 직접 하고, 24시간을 중점적으로 실전을 위해 수련하고 있는 정예 중의 정예. 그 모델은 은사의 십위十衛를 가져왔지만, 훨씬 더 방대한 지식으로 무장한 번이 대륙 최고의 호위대로 육성하고 있었다. 뜻밖에 다루가 그 수장을 맡았는데, 그녀의 자질은 놀랍다고 말하기에도 부족할 정도였다.

“좋아. 그럼 실전에 대비한 마지막 훈련이라 생각하고, 이번에 내가 에비뉴로 갈 때 함께 하지.”

“전달할게요.”

몇 가지 일을 더 보고받은 번은 이내 마굴에서 나왔다. 오늘 하루 이곳에서 일을 보고, 내일쯤 에비뉴로 갈 계획이었다.

그 뒤를 체티리가 잽싸게 따라붙었다.

“당신은 정말 이걸로 된 건가요?”

체리티 역시 리켄스가 가진 의문과 동일한 것을 품고 있었다. 대체 번은 왜 이런 일을 하고 있나? 굶주린 사람들을 구제한다고? 그가 왜? 체리티가 지켜본 번은 악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내 배 곪아가며 남을 돕는 성인도 아닌 것 같기 때문이었다.

“무슨 생각인진 아는데, 걱정 마. 오래 안 걸려.”

번은 우리아와 함께 벨버른 전역을 손바닥처럼 들여다 보고 있었다. 첫해는 그저 퍼주기만 해야 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지만, 작년부터는 땅에 심은 씨앗이 트고, 발등의 불을 끈 이들이 힘차게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올해엔 그것들이 결실을 맺어, 조금이지만 자급자족하는 곳도 생기고 있었던 것이다.

‘길어야 2년이면 돼.’

번은 아주 길고, 넓게 보고 있었다. 누가 봐도 답이 없을 정도로 망한 것이나 다름없는 왕국이었지만, 성능 좋은 산소호흡기가 골든타임을 버텨내게 해준 거다.

‘아직 누구도 예상할 수 없을 테지. 증서가 가진 파급력을..’

물론, 번이 이것을 빌미로 여자들을 팔아먹고, 악독하게 빚을 받아낼 생각은 없었다. 이건 일종의 정치기반을 다지는 거다. 벨버른 전역에 ‘번’이라는 이름을 각인시키기 위한 밑 작업.

“휴.. 알겠어요. 생각이 있으시겠죠.”

체리티는 예쁘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 눈치를 보던 그녀가 운을 뗐다.

“생각..해보셨어요?”

그녀는 번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었다.

엘프는 인간과 다르다. 심지어 언제 죽을지 모르는 혹독한 환경에서 살아왔던 다크 엘프는 더더욱 달랐다.

“아무래도 나는 아닌 것 같군.”

단호한 번의 답에 체리티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세상으로 나온 다크 엘프. 이들은 꿈을 이뤘다. 하지만 늘 그렇듯 하나를 이루면 또 하나가 생기는 법. 일족을 책임져야 하는 체리티는 모든 다크 엘프에게 말했다.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일족의 숫자를 늘려야 하는 것이라고. 생물이면 당연히 해야 하는 번식에 관한 문제였는데, 일족의 숫자가 워낙 적기에 인간과 섞이는 하프도 고려해야 했다.

그녀는 자신부터 실행하기로 마음을 먹었고, 그래서 청했다. 당신의 아이를 가지고 싶다고.

“왜요?”

그런데 오늘 거절당한 거다.

“나는 황자야.”

황실의 핏줄이 가지는 의미는 특별했다.

“알아요. 하지만 제가 그걸 이용할 생각 따윈 없다는 거 당신도 알잖아요.”

“네가 생각하는 것 따윈 중요하지 않아. 세상이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하지. 나는 후환을 남기고 싶지 않아. 다른 적당한 남자를 알아보도록 해.”

“나는 당신이 아니면 안 되는 걸요!”

체리티도 오래 고민했다. 그러나 번만한 사내가 없었다. 강하고 유능하며 똑똑하고 어리다. 수컷으로 갖춰야 할 건 다 있지 않나? 그녀는 이걸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있다고 자조했지만, 글쎄.

“미안하지만, 그건 들어줄 수 없다.”

번이 냉정하게 말하며 돌아섰다.

‘성’에 대해 하는 대화치곤, 남자나 여자나 참 어처구니없는 분위기.

“..기다릴 거예요.”

“그러지 마.”

“엘프는 인내심이 아주 많답니다.”

번이 피식 웃었다. 여자와 이런 얘길 하고 있다는 것이 그가 생각해도 이상했다. 하지만 딱 자르는 게 좋을 것이다. 그는 정말 이런 쪽으론 관심이 없었으니까.

“내가 황제가 되면 생각해보지.”

번은 농담처럼 던진 그 말을 끝으로 성큼 걸어갔다.

황제.

아직은 멀고 멀게만 느껴지는 단어. 하지만 체리티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것만 되면, 된다 이거지?’

번은 아직 몰랐다.

그녀의 시간이 아주 느리지만, 빨리 흘러간다는 것을 말이다.

.

.

.

에비뉴.

과거엔 그저 많고 많은 왕국 중 하나였지만, 현 황제가 즉위한 뒤 벌인 정복전쟁으로 거대한 영토와 인구를 소유하게 된 강대국. 주로 황실이 있는 수도에 많은 것들이 집중되어 있었지만, 이런 큰 나라가 어디 도시 하나로 굴러가겠는가? 특히 제국으로 확장하기 전부터 있던 대도시들은 오래 다진 기반과 인맥, 축적한 부로 이전보다 더 큰 재산을 보유하기에 이르렀으니..

에비뉴와 벨버른의 중간쯤 위치한 이곳 윈드밀. 예로부터 비옥한 토지를 기반으로 한 넓은 평야와 두 산맥에서 몰아치는 바람 덕분에 딱히 뭘 심지 않아도 들판에 먹을 것이 널렸다는 말이 돌 정도로 풍요로웠는데, 지금은 수도에 필적할 정도로 도시가 확장되어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60대 후반의 노인이 아주 반갑게 손님을 맞았다. 왜 아니겠는가? 이 젊은 황자 덕분에 지난 2년간 큰돈을 벌었는데 말이다.

“단테 공작님.”

“황자님.”

두 사람은 손을 맞잡으며 환하게 웃었다.

단테 샤틴 베르나르 공작.

무려 400년이나 이어져 내려온 공작가이며 호사가들이 에비뉴 명문가를 꼽을 때, 첫 번째 손가락에 올릴 정도로 대단한 집안이었다. 오래전엔 영지가 벨버른 국경과 닿아있어 변경백 역할을 했지만, 최근엔 윈드밀의 통수권자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신수가 훤하십니다. 어째 볼 때마다 더 젊어지십니까?”

번의 넉살에 단테 공작이 껄껄 웃었다.

“다 황자님 덕분 아니겠습니까? 앉으십시오! 윈드밀 최고의 진수성찬을 준비하라 일렀습니다.”

의자에 앉으며 번은 빙긋 웃었다.

한국에서 설명우로 살 때, 늘 궁금했었다. 세계 최고의 부자가 누구인가? MS의 빌 게이츠? 셀 수도 없는 검은 돈을 가졌다는 시진핑? 혹은 푸틴이나 중동의 만수르? 정답은 몰랐지만, 이러한 건 늘 대중의 관심을 끄는 것이었이리라. 그런데 여기선 의외로 간단했다. 수도에 가서 아무나 붙잡고,

-에비뉴에서 누가 가장 부자냐?”

물어보면, 다들 이런 대답을 할 것이다.

-단테 공작!

돈은 권력.

설명우가 살던 그때완 약간 다르긴 해도, 이곳 역시 돈과 권력은 샴쌍둥이처럼 한몸이다.

“그래, 사업은 잘되십니까?

“그저 입에 풀칠이나 간신히 합니다.”

“허어..! 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씀 좀 해주십시오. 이거,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다리만 걸친 것 같아 부끄럽습니다.”

“예. 꼭 그리하겠습니다.”

단테 공작의 말에 번이 미소 지으며 답했다. 타인이 보기엔 참으로 사이좋은 할아버지와 손자쯤으로 보일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지만.

2년 전.

아무리 번이 세이프 레인보우라는 획기적인 물건을 만들었다곤 해도, 당장 6개월이 문제였다. 사업이란 게 하루아침에 되는 것도 아니고, 종잣돈도 있어야 하지 않겠나? 당장 마차와 말을 살 돈도 없었으니 말이다. 그때, 번은 무작정 여기 윈드밀로 왔었다. 그 뒤로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어쨌든 번은 단테 공작과 손을 잡았고,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그리고 오늘.

번이 윈드밀을 찾은 것은 사업때문이 아니었다. 안부는 이 정도면 됐다. 피차 바쁜 사람 아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음식을 나르는 사람들이 바삐 오갈 때, 번이 단테 공작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으음..”

단테 공작이 번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꼭 가셔야겠습니까? 폐하의 신임을 위해서라면 다른 방법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단테 공작이 번을 말려본다.

하지만 이게 소용없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는 듯하다.

“아버님이 위기에 처했는데, 자식 된 도리로 어찌 따스한 방에서 호의호식하겠습니까? 날마다 가시방석입니다. 뭘 먹어도 바늘을 씹는 기분입니다.”

번의 말에 단테 공작이 신음했다.

‘참으로 깊은 효심이군. 하지만..’

전장의 아비가 힘겨워한다는 소식에 그곳으로 가겠다는 아들. 하지만 그렇게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님을 단테 공작은 알고 있었다.

“도와주십시오! 비록 제가 큰 도움이 되진 않을지 모른다 하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이 반드시 있지 않겠습니까?”

호소하는 번.

그는 지금 전쟁터에 가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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