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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좌의 게임-78화 (78/177)

# 좋은 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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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세인 중심부로 향하는 번.

영주성 밖으로 나오며 사람들을 둘러본다.

-아하핫! 거기 서랏!

-꺄하! 잡아봐라!

아이들은 뛰놀고, 그런 아이들을 바라보는 아낙들의 표정이 곱다.

-황자님.

-번 황자님!

번을 발견한 사람들이 환하게 웃었다.

모두가 아는 것이다. 그 지옥과도 같던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일등공신이 누구인지를 말이다.

“제시카, 작은애 배탈은 나았나?”

“네! 보내주신 약 덕분에 이제 아주 건강해요! 정말 고맙습니다! 황자님!”

먹을 것뿐만이 아니었다. 요세인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번에게 도움을 받고 있었다. 아이가 아프면 치료해주고, 가정에 문제가 생기면 해결해주려고 노력했다. 모르면 모를까, 안 이상 절대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었고, 처음엔 에비뉴의 황자씩이나 되는 사람이 서민들의 대소사에 이렇게 관심을 가지는 게 어색했지만, 지금은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그렇게 번은 모두의 삶에 깊이 파고들고 있었다.

-황자님! 우리랑 술래잡기해요!

감히 황자와 놀자 청하는 아이들. 하지만 말하는 쪽이나, 듣는 쪽이나 부담이 없다. 철부지 아이들의 목소리를 웃어넘기며 번은 계속 걸었다. 그런 그의 뒤로 말 한 마리가 빠르게 따라붙었다.

끼히히히힝-!

번이 잠시 멈춰 돌아보자, 말에서 우리아가 내렸다.

“군사.”

“황자님.”

번이 끄덕이며 다시 걷기 시작한다. 우리아가 번과 보폭을 맞추며 말했다.

“푸욜 지역으로 떠났던 상단이 돌아오고 있어요.”

푸욜은 벨버른의 남부 지역이다. 2년 전까지만 해도 가장 상황이 좋지 않았던 곳. 물론 최근까지도 다른 지역에 비해 낙후되고, 가뭄까지 덮쳐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었다.

“문제는 없었나?”

“그럼요. 잘 해결했다고 해요.”

“다행이군.”

벨버른의 상황을 풀고자, 번은 2년 전부터 한가지 은밀하고 굉장한 일을 계획했다. 단기간에 큰돈을 벌 수 있는 확실한 방법! 바로 마약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번에겐 이미 레인보우 립은 떼놓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친근하고 가까운 것이기도 했고.

물론, 번이 초기에 생각했던 것은 그의 몸에서 뽑아낸 순도 높고, 안전한 것을 귀족이나 기사들에게 유통하는 것이었는데, 시장 상황을 알아가다 보니 이미 제국 쪽에는 급속도로 확산하는 마약이 있다는 걸 알아냈다. 그리고 그걸 입수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워낙 싼 값에 팔리고 있었고, 구하는 것도 용병시장 같은 곳에서 어렵지 않았으니까.

그걸 쥔 번은 보자마자 알았다.

레인보우 립. 자신이 아는 그것이라는 걸.

당연히 출처 또한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7황비 소행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가장 유력한 것은 그쪽이었고, 번은 이때부터 황궁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궁의 동태는 어때? 7황비가 움직이고 있다던데.”

“아직 눈치챈 것 같진 않아요. 우릴 의심한다기보다는 주변 모두를 경계하는 것 같은데, 농장 몇 개를 이주했다고 해요.”

“이럴 때일수록 더 조심해야 해. 꼬리란 게 한번 밟히면 몸통은 금세 발각당하기 십상이니까.”

“그렇지 않아도 단계를 더 점조직화하고, 정보 접근 단계도 높였어요. 아무리 7황비라도 사람 몇 잡아선 밝혀낼 수 없을 거예요.”

“그래. 그렇게 하는 거야. 대비라는 건 아무리 흘러넘쳐도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부족하다 느끼는 거니까. 집정관이 움직이는 순간, 모든 게 한방에 다 날아갈 수도 있어. 거기에 휘말려선 안 돼.”

우리아가 배시시 웃으며 끄덕였다.

번 역시 그녀를 믿음직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확실히 대현자에게 오래 수학한 그녀는 이해도가 높았고, 말이 잘 통했다. 번이 이 사업을 준비하고 시행할 때, 가장 큰 도움을 준 것 역시 그녀였고.

“아, 점심은?”

“먹었어요. 황자님은요?”

“나도. 그럼 바로 가지.”

“예!”

둘은 요세인을 빠져나갔다.

마차는 경쾌하게 질주한다.

2년간 모두가 다져온 길은 그들의 속도를 높여주었고, 전보단 훨씬 편하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기괴함 물씬 풍기는 회색 숲.

마굴魔窟이라 불리며 사람들이 출입을 꺼리던 바로 그곳에 번의 ‘아지트’가 있었다.

스윽. 스으윽.

숲 경계에 다가서자, 몇 개의 나무 뒤에서 시선이 느껴진다. 일반인은 알 수 없을 것이다. 번만이 알아챌 만큼 미세한 것이니까.

‘잘하고 있군.’

번은 속으로 웃으며 끄덕였다.

다크 엘프.

저들은 보초다. 인간보다 월등히 높은 침착함과 차분함을 기반으로 숲을 드나드는 사람을 감시하고 보고한다. 피부색도 어두워 저렇게 숨어 있으면 나무그림자와 구분도 어려웠다.

두두두두두두-!

마차는 이제 숲 안쪽으로 들어섰다. 마굴까진 좀 더 가야 했는데, 갑자기 달리는 마차의 문이 벌컥 열렸다.

“체리티.”

아슬아슬한 복장의 미녀가 날렵한 동작으로 마차에 올라 문을 닫았다.

“황자님.”

빙긋 번에게 웃어 보이는 여자. 마냥 예쁘게만 보여도 다크 엘프 일족의 수장이다. 시골 처녀 같은 그 순박한 미소에 수작이라도 부려볼라 치다간 그녀의 섬뜩한 단검이 심장에 박힐 거다.

“특이사항은?”

“한 달 만에 보는데, 바로 일 얘기에요?”

체리티가 입술을 삐죽였지만, 대답을 미루진 않았다.

“별다른 일은 없어요. 수상한 움직임도 없었고요.”

마차는 계속해서 질주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불어오는 바람에 향긋한 냄새가 섞여 있었다. 이 냄새. 사람들은 갸웃하며 지나치겠지만, 번에겐 너무도 익숙하고 친근한 것이었다.

일곱 가지 색 꽃잎을 가졌다는 그 꽃.

“수확량은 일정하고?”

“오히려 더 많을 걸요.”

이 회색 숲 안쪽으로 대규모 레인보우 립 경작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처음 다크 엘프와 함께 메카를 나설 땐, 이들을 밀이나 보리, 쌀을 키우는는 농사꾼 정도로 부리려던 번이었지만, 이젠 생각이 달라졌다.

일반 곡물보다 수십 배 비싼 값으로 팔리는 꽃. 심지어 이게 번의 손을 거치면 수백 배 이상 뛰는 걸 아는데, 굳이 다른 걸 할 이유가 없었던 거다. 이런 좋은 사업을 알면서 하지 않을 수 없지 않나? 이 특별한 사업은 고작 830명 수준의 다크 엘프가 벨버른 전 지역의 기아를 해결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 만든 것이다.

물론 이것만으론 해결되지 않았다. 물건이 있어도 판로와 유통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닐 테니까. 그래서 번은 상단을 만들었다. 그가 21세기 사회에서 알고 있던 몇 가지 시스템을 조합해, 이 세상엔 없는 체계적이고 독립적이며 혁신적인 ‘기업’형 상단을 조직한 것이다.

“적당히 하라고 해. 너무 많아 봐야 팔 수 없으면 쓰레기만 될 뿐이니까.”

“알아요. 노력하고 있어요.”

정령을 부리고, 자연에 친화적이며 존재 자체로도 충분한 능력을 가진 다크엘프들은 레인보우 립을 키우는데 무서울 정도로 뛰어났다. 예를 들어, 보통 사람이 1년에 10kg 정도의 수확량을 얻는다면, 다크 엘프는 그 100배 이상의 효율을 보였달까?

뿐인가, 800명이 80,000명의 노동생산성을 보이는 것도 모자라, 작물의 가치 또한 엄청나니 일반 곡물 따위완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익을 창출하고 있는 것이었다.

“최근 숲 근처를 지나는 상인이 늘었다고 하니, 더 몸 사리고.”

“그럴게요.”

체리티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거의 다 왔군.”

번이 밖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마굴.

2년 전과 지형 자체는 변한 게 없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천지 차이라 말할 수 있었다.

-황자님!

-황자님께서 오셨다!

마굴 외부엔 수많은 건물이 지어져 있었다. 다크 엘프가 주거공간으로 쓰기도 하고, 상단 사람들이 머물기도 하며 작업공간으로 마련되기도 하는 유동적인 쓰임의 건물들이다. 2년 전, 저 바닥에 철퍼덕 궁둥이 깔고 박쥐 해체하던 아낙들이 있던 이곳은 이제 효율을 중시하는 공장지대처럼 변해 있었다.

번의 마차는 건물과 건물 사이를 가로지른다.

이 건물들은 두서없이 막 지어진 것 같아도 사실 이건 방벽防壁이나 마찬가지였다. 우리아와 번이 머리를 맞대고 혹여 외부의 공격을 받았을 때, 적은 인원으로 효과적 방어를 할 수 있도록 설계한 일종의 도시공학적 개념이 들어간 지역이었다.

이제 마차는 마굴의 입구에 접어들었다.

예전, 박쥐들이 집으로 쓰던 음침한 곳은 없다. 조금만 접근해도 코를 막고 구토를 참아야만 했던 불결한 이곳은 여전히 악취는 남아 있었지만, 그나마 견딜 수 있는 수준으로 바뀌어 있었다.

번은 마차에서 내려 마굴로 들어갔다.

딱히 이름을 바꾸기도 그래서 여전히 마굴로 부르고 있었지만, 그 쓰임은 놀랍다.

‘하나 상단’의 총본부이자, ‘33인의 번 친위대’의 훈련장+사업장인 동시에, 제국과 몇 개의 왕국을 진동시키는 세이프 레인보우의 발원지인 것이다. 뭐, 누군가가 보기엔, 그저 눈살 찌푸릴 기괴한 곳이겠지만 말이다.

“여전히 냄새는 안 빠지는군.”

마굴에 들어서는 번이 콧등을 찡긋하자, 체리티가 호호호! 웃었다.

“더는 못 뺀다고요. 악취를 완전히 없애려면 마굴을 새로 지어야 할 걸요?”

흙과 돌, 이끼 하나하나에까지 박쥐 구린내가 스며있었으니, 체리티의 말처럼 다 때려 부수고 다시 만들거나 이주하는 방법밖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것 자체가 외부인의 접근성을 낮출 거라고 봐요. 우린 적응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니잖아요?”

그도 그렇다. 지금도 여기 오래 있으면 악취에 두통을 호소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니까.

“배트맨이 되겠다는 건 아니었는데 말이지..”

번이 중얼거리자, 체리티가 얼굴을 갸웃했다.

“예?”

“아니야. 가지.”

체리티에게 투덜거릴 일이 아니긴 하다. 바닥을 가득 채웠던 박쥐 똥을 다 퍼낸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을 한 것이었으니까.

처음 사업을 시작하기에 앞서 번이 레인보루 립을 키운다 했을 때, 체리티는 말했다. 숲의 토양이 비옥하지 못해 정령의 도움을 받아도 꽃의 성장이 더딜 거라고. 게다가 키 큰 나무도 많아 일조량도 좋지 않았고, 비도 잘 오지 않았다. 아무리 엘프의 존재감이 드높다 한들, 모든 걸 신처럼 바꿀 순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걸 해결할 묘수.

바로 마굴 바닥에 두껍게 깔린 박쥐 똥이었다.

이 얼마나 좋은 비료인가! 그저 부패하고, 썩어빠진 똥이 아니었다. 안쪽은 쉐이크처럼 수분도 많았고, 벌레도 엄청나게 살고 있었다. 그것들을 옮겨 숲 전역 15곳의 지정구역으로 퍼트렸다.

똥을 퍼 나르는 것만 근 6개월.

엄청난 노동이 소모되었지만, 결국 다크 엘프는 해냈고, 이듬해부터 15개의 농장에서 그 효과는 톡톡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퍽퍽하고 삭막하던 땅이 축축하고 생기있게 변하자, 레인보우 립 뿐 아니라 잡초까지 쑥쑥 자랄 정도가 된 거다.

“앉지.”

30명 이상 앉을 수 있는 기다란 테이블. 이것은 엘프들이 숲에 널린 키 큰 나무로 만들었다. 다크 엘프들은 이런 쪽에도 솜씨가 좋았는데, 나무와 식물로 하는 모든 일에 능수능란한 그들은 이래저래 쓸모가 참 많았다.

번이 착석하자, 핵심인물들이 각자의 자리에 앉았다.

“황자님.”

번을 부르는 목소리.

“리켄스. 보고해.”

33인의 친위대중 하나이며, 하나 상단의 ‘장로’급 인사를 겸임하고 있는 그는 사람들을 부려 엄청난 양의 상자를 테이블 쪽으로 옮겼다.

상자의 내용물을 간략하게 정리해둔 파일을 번에게 건네며 설명하기 시작하는 리켄스.

“정기보고 하겠습니다.”

하나 상단은 말이 좋아 상단이지, 사실 마약 판 돈을 세탁하는 창구였다. 제국에서 돈을 벌고, 그것으로 곡식을 사서 벨버른 전역에 유통한다. 일자리 창출 효과도 대단해서 관련된 사람만 수만에 달했으며, 수백 개의 작은 지부를 두고 있었다. 이게 불과 2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제국이나 에비뉴에서 곡식을 사 왔다곤 해도, 벨버른 사람들이 그걸 사 먹을 돈이 없으면 무슨 소용인가? 언제까지 그냥 대책 없이 퍼줄 수도 없었고, 번이란 사내 또한 공짜로 일할 사람은 아니지 않나? 그래서 번은 벨버른 전역에 상단을 보내 곡식과 바꿀 수 있는 ‘증서’를 발급하기 시작했다.

이 곡식에 상응하는 재화로 갚거나 여의치 않다면 노동력으로 그걸 대신해야 한다는 일종의 채무각서였는데, 80만이 넘어가는 사람들이 서명한 그 증서가 여기 마굴에 빼곡하게 보관되어 있는 것이었다.

“한 달 사이 약 2.3%의 증서가 늘었습니다. 같은 사람이 곡식을 또 빌리며 다시 쓴 증서는 포함하지 않았습니다.”

그랬다.

번은 지금 벨버른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사채업을 하고 있었던 거다. 물론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성행하던 그것과는 달랐지만, 어쨌든 핵심은 ‘내가 지금 이걸 줄 테니, 너는 나중에 갚아라’였다.

‘이게 바로 벨버른 러시지. 크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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