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상 2 #
“예. 하지만 궁으로 돌아오란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일단 지켜보시는 쪽을 택하신 것 같습니다.”
요세인에 남아있던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에비뉴 수도 분위기를 모아온 페트릭은 최대한 좋은 소식을 번에게 전하고 싶었지만, 상황은 그리 이쪽에 유리하게 돌아가지 않았기에 마음이 무거웠다.
“또한 대현자께서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집정관이 꿈쩍도 하지 않는다 합니다. 아마 폐하의 명이 있었겠지요.”
“군사는?”
“딱히 수가 보이지 않는지, 이쪽으로 돌아오고 있답니다.”
“으음..”
번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대현자의 딸인 그녀가 직접 갔는데도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면, 아주 윗선에서 개입했다는 얘기가 된다.
“그나마 신전 쪽은 형편이 좀 나은 것 같습니다.”
성녀 가루비는 꽤 선전하고 있었다. 벨버른의 서민들을 위해 모금활동을 벌이는 한편, 질병과 기아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돕고자 대규모 사제단을 파견하기로 했단다. 뭐, 신전으로서도 나쁠 게 없는 조건이긴 했다. 신을 그리 탐탁지 않게 여기는 황제가 떡 버티는 에비뉴보다는 벨버른이라면 새롭게 영역을 확장할 수 있는 주인 없는 떡으로 여겨질 수도 있었으니까.
“가이아 신전의 움직임에 다른 교단도 영향을 받았는지 연락을 취해오는 곳이 있었답니다. 그들을 만나보시는 것도 도움이 될 겁니다.”
“그러지.”
번은 페트릭과 함께 영주성으로 갔다.
박쥐를 잡고, 에비뉴 귀족들에게 구걸하는 것만으론 근본적인 대책이 안 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뭔가 더 획기적이고, 기발한 구제책이 필요했다.
‘엘프들이 아무리 유능해도 곡물이 자라려면 시간이 걸려.’
당장 몇 달이 문제였다. 그 몇 달에 벨버른의 미래가 달렸다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결정적으로 번은 800명 수준의 엘프가 수십만, 수백만의 벨버른 전체를 먹여 살릴 수 있다곤 생각하지 않았다. 더 확실한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그런.
“흐음..”
영주가 쓰던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턱을 괸 채 번은 계속 생각했다.
‘뭐가 좋을까? 뭐가..’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이생, 전생을 통 털은 지식과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보고 배웠던 기억을 총동원해야 했다.
‘통념을 깨는 신박한 거.’
당장 큰돈을 벌 수 있어야만 한다.
지금 벨버른에 남아도는 게 뭐지?
‘인력..’
하지만 남은 인력이라곤, 전쟁 후의 잔류로 남은 여자, 아이, 노인, 불구가 전부.
‘이들로 할 수 있는 거라면..’
자본도 없고, 지원이라곤 쥐꼬리만큼밖에 오지 않는 환경에서 단기간에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사업이..
“으음?”
번의 머릿속에 뭔가가 스쳐 지나갔다.
“왜 그러십니까?”
앞에 있던 페트릭이 물었지만, 번은 대답 대신 더 깊은 생각의 늪으로 빠져 들어간다. 아주 달콤하고 위험했지만, 희망적이고 매력적인 늪으로..
.
.
.
“흐아아아아압!”
창이 돌풍을 일으켰다. 그러자 그 앞에 있는 적 아홉이 동시에 가랑잎처럼 나부꼈다. 갑옷이나 방패도 소용없다. 창이 찌르는 그 순간, 모든 것은 그저 벌집이 될 뿐.
“하아, 하아.”
자타공인 에비뉴 제일 창이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무력을 지닌 사내. 딘딘이었다.
“끝이 없구나..”
조금 전의 한 수 덕분인지, 주변의 적이 후욱 물러나는 게 느껴졌다. 감히 딘딘의 창에 덤벼들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적군. 과연 대단한 기세였다.
하지만 이 자체가 문제다.
딘딘은 대장군의 직책에 있는 사내다. 그런 그가 직접 전투에 참가하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기막힌가? 적은 다가오지 못하고, 딘딘 역시 나서지 않는 기이한 대치 상태가 이어질 때, 저 멀리서 북소리가 울렸다.
둥- 둥-!
-후퇴다!
-가자! 빨리!
-흐이이익! 죽는 줄 알았네!
적들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장장 29시간이나 이어진 전투가 잠시 소강을 맞는 것이다.
고작 인구 60만의 작은 나라 후단.
길어야 1년이면 깰 수 있을 줄 알았던 이 소국에 철鐵의 군대가 3년이나 막혀 있었다. 이건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고, 소모전은 계속되었다.
“대장군!”
“대장군!”
딘딘이 복귀하자, 여기저기서 그에게 예를 취했다.
"으음.."
하지만 그는 인사도 받는 둥 마는 둥. 입에선 낮은 신음이 새어나왔다.
앞니 두 개가 다 부러진 병사가 경례를 한다. 오른손이 없는 병사, 어깨부터 통째로 잘려나간 병사까지. 절로 한숨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멀쩡한 이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철의 군대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폐하께선 안에 계시느냐?”
“그렇습니다!”
딘딘은 병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곤, 황제가 있는 막사로 들어갔다.
후욱-!
휘장을 걷자마자, 피부에 닿는 무겁고 우울한 분위기에 딘딘은 진저리를 쳤다. 벌써 6개월 이상 이어진 이 짜증을 어찌할꼬? 그간 왕국을 황국으로 키우고, 주변국을 점령하며 끝없는 싸움을 해왔지만, 이렇게 몰렸던 적은 처음이었다.
“폐하.”
“대장군, 왔는가?”
황제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의 옆쪽으로 앉아 있던 스캇이 말했다.
“시간을 벌었으니, 지원군이 도착하면 숨통이 트일 것입니다.”
이 진저리나는 싸움.
제국은 아주 대놓고, 후단 왕국을 지원했다. 에비뉴의 군대가 오스트롤랄 산맥을 넘는 것을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듯 고급 기사단까지 파견했고, 중앙대륙의 소문난 용병대도 고용했다. 하지만 불덩이를 날리는 마법사도, 오러를 뿜어내는 기사도 큰 문제는 아니었다. 수만, 수십만이 붙는 전선에서 개인의 무력은 전세를 뒤집지 못한다. 결국, 싸우는 것은 병사들이고, 그들의 사기와 투지가 모든 것을 결정하니까.
무엇보다 그 부분에선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던 에비뉴의 철鐵의 군대다. 전승의 행보를 걸으며 그 어느 때보다 사기가 높았던 그들. 그런 이들이 지금 밀리고 있었으니, 가히 기막힌 노릇이었다.
“시간을 번 건, 저쪽도 마찬가지겠지.”
황제는 입이 쓴지, 입맛을 다셨다.
“더 독하고, 많은 약을 가져올 거고.”
그랬다. 약.
그 빌어 처먹을 마약!
“으음..”
“하아..”
장수들의 한숨이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왔다.
“정녕 해독제는 없는 건가? 스캇?”
황제의 말에 스캇은 고개를 푹 숙였다.
지금 이 말도 안되는 상황이 되어버린 이유. 그것은 질병도 아니었고, 마법 같은 것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해독이라는 개념 자체도 무용지물이다. 그냥 집어삼키면 순식간에 몸에 녹아들어, 반응하는 약! 그런 것을 스캇이라고 어떻게 막나.
“..죄송합니다.”
처음 후단의 국경에 도착했을 땐, 전투가 이리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두어 달쯤 지났을까? 후단의 수도 공략만 남겨놓았을 때, 제국에서 지원군이 왔다. 근데, 숫자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이 보인 투지가 괴상하리만치 뛰어났다.
아니, 그건 광기였다.
고통과 공포를 느끼지 않는 그들은 팔이 잘리든 다리가 떨어져 나가든, 그저 피와 살육만을 탐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희망이 보이긴 합니다. 오늘 본 상당수의 적이 금단현상과 부작용에 떨고 있었습니다. 곧 사람 구실도 못하겠지요.”
딘딘의 말에 황제가 쯧, 혀를 찼다.
아무리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쟁터라고 해도 몸을 망칠 게 뻔한 약을 쓰다니. 조금이라도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려는 말단병사들이나 하급용병은 그렇다 쳐도, 그걸 용인해주는 지휘관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전쟁에서 이기면 뭘 하나? 약쟁이들만 가득 남아 더 큰 피해를 입힐 것인데.
그래서 에비뉴의 병사들은 절대 약에 손을 대지 못하게 엄명을 내려놨다. 소지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사형이다.
“솔직하게 말해봐. 우리에게 승산이 있나?”
스캇이 턱을 만지며 대답했다.
“반반이라고 봅니다. 약의 후유증이 우리 예상보다 크다면 이길 것이고, 아니라면 어렵겠지요.”
스캇도 약의 존재를 파악한 직후, 연구에 돌입했다.
마약은 이제까지 세상에 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복용도 쉽고, 효과도 강력했으며 심지어 가격도 쌌다. 조금만 흡입하면 세상 근심 걱정 다 날려주니, 이보다 더 좋은 것이 또 있을까? 제국에선 이미 전쟁터의 병사뿐 아니라 귀족들과 일반 백성들에게도 널리 퍼지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슬슬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약을 하지 않으면 심한 무기력증에 시달리고, 어제의 쾌락을 느끼려면 더 많은 양을 써야만 했다. 일상생활은 재미가 없어지며 밥도 먹지 않아 기력이 상한다. 그런데도 한번 중독되면 죽을 때까지 약에 취할 수밖에 없었다. 보통은 그렇게 되기까지 5년 이상을 보았지만, 여기 전쟁터에선 소모가 더 빨랐고, 다수의 제국 병사와 용병은 24시간 약에 쩔어 있었다.
“그 세이프 레인보우는.. 확보했나?”
약은 철저하게 멀리했던 황제였지만, 단 한 가지만큼은 인정했다. 기존의 하급 마약과는 전혀 다른 세이프 레인보우. 부작용도 없고, 후유증도 없으며 이성을 잃지도 않는 최상의 물건! 심지어 과다복용해도 몸에 흡수되는 양은 일정하다니, 이보다 좋은 것이 또 있을까?
대체 어느 대마법사나 연금술사가 만든 것인진 모르겠으나, 스캇조차 세이프 레인보우는 흠잡을 수 없다며 혀를 내둘렀을 정도였다
“노력 중이지만.. 많진 않습니다.”
“쯧.”
전세를 뒤집으려면 우리도 미쳐야 했다. 물론 최악의 상황까지 몰려야만 쓸 방법이긴 했지만, 그래도 비장의 한 수는 준비해두는 편이 좋지 않겠는가?
하지만 워낙 귀하고 비싸 구경하기도 힘든 것도 문제였다. 제작자가 누구인진 몰라도 알았다면 억만금을 줘서라도 모셔왔으리라. 중독과 부작용이 없는 마약은 이미 마약이 아닌, 전사들의 신약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것이었으니까.
“..회군하신 뒤, 시간을 두고 다시 준비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입니다.”
딘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황제의 긴 한숨이 늘어졌다.
그런데 그때,
“폐하!”
막사로 은사가 급히 들어왔다.
그의 얼굴이 무척 흥분한 듯 보였다.
“찾았나?”
황제는 은사에게 세이프 레인보우의 제작자를 찾아보라 명령했었다.
“그건 아니지만, 희소식입니다!”
황제의 고개가 갸웃할 때, 은사가 외쳤다.
“익명의 누군가가 세이프 레인보우로 추정되는 물건을 보내왔습니다!”
황제가 벌떡 일어났다.
“확실해?”
적이 수작을 부렸을 수도 있다. 안에 독을 탔을지도 모르고, 저주를 담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은사의 목소리는 그런 불안을 한 방에 날려버리기에 충분했다.
“제가 직접 확인해보았습니다! 진품입니다! 그것도..!”
은사가 이리 흥분한 것은 이 소식이 전해졌을 때, 이 자리 모두 놀랄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빨리 말해봐! 사람 답답해 죽겠다!”
스캇이 빼액 외치자, 은사가 말했다.
“5천 명이 동시에 복용할 양입니다!”
“뭐, 뭐?”
“뭐야?”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어지간해선 놀라지 않는 황제의 입이 떡 벌어지는 순간이었다.
.
.
“후후후..”
번이 즐거운 듯 웃음을 흘렸다.
“꼬릴 밟히거나 하진 않았지?”
“당연하죠! 제가 누군데요! 그들은 지금쯤 인근에 나이 먹은 할머니는 모조리 이 잡듯 뒤지고 있을 거예요! 호호호호!”
그의 옆에서 융도 깔깔 웃는다.
하지만 다른 여자 하나는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이마를 찌푸렸다.
그녀가 참지 못하고 묻는다.
“비싼 값에 팔 수도 있었지 않나요? 그걸 왜 공짜로 줘요?”
허리에 찬 검이 제법 어울렸다. 재능도 있고, 노력도 사내 못지않아 이젠 싸움판에서 어지간하면 물러서지 않게 된 미루였다.
지난 2년여의 세월은 그녀를 크게 바꾸어놓았다. 번의 친위대로서 당당하기 위해 그녀가 흘린 땀과 열정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육체적으론 컸을지 몰라도 아직 이런 정치놀음엔 미숙할 수 밖에 없다. 어리둥절한 미루에게 융이 친절하게도 설명을 해준다.
“먹어봐야 맛을 알지.”
물론, 그녀답게 간결하게!
“그게 뭐예요..”
“몰라? 계집질도 그렇게 시작하는 거라고! 치마폭에 한번 맛 들이면 절대 헤어나올 수 없는 거야!”
융의 말에 미루가 화르륵 볼을 붉혔다.
뭘 상상했는지 힐끔 번을 바라보는 눈길이 부끄럽다. 그 눈을 마주 보며 피식 웃은 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굴에서 나온 지 2년.
번은 이제 청년이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자랐다. 어머니의 고운 선을 그대로 딴 윤곽은 아름다웠고, 아버지의 강인한 이목구비를 박아 넣어 부드러움과 남성미가 공존했다.
“융.”
그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숲에 연락해. 제대로 판을 키울 때가 됐다고.”
그의 말에 융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쾌활하게 대답했다.
“네!”
-크크크! 놀아보자!
번의 머릿속에서 악마가 날뛴다.
여기 요세인에서 숨죽이며 살아온 2년. 이제 기다림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