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상 1 #
“체리티.”
번의 음성에 뒤쪽에서 여자가 다가왔다.
‘체리티..?’
미루는 사내에게 맞은 입이 아픈 와중에서도 갸웃했다.
“예, 황자님.”
“근처로 퍼져.”
끄덕이는 체리티. 그녀의 손동작에 맞춰, 다크 엘프들이 숲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아직은 사람들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없다. 그리고 번 역시 그렇다. 지금 하려는 일은 그리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으니까.
사내의 목을 잡고, 뒤로 후욱 잡아당기는 번.
“크흑..!”
미루의 위에서 떨어져 나온 사내는 옴짝달싹 못 했다. 목에 파고든 번의 손톱이 살갗을 찢고, 독을 밀어 넣었기 때문이다. 번은 이제 마나를 언제든 신체 어느 부위든 머물게 할 수 있었다. 굳이 송곳니가 아니라도 된다는 거다. 독이나 약 또한 마찬가지. 무형의 마나도 되는데, 유형의 물질이 안 될까?
「대상이 중독되었습니다.」
사내는 그저 하찮은 벌레처럼 사지를 벌벌 떨 뿐. 어떠한 저항도 못 한다.
그러다가,
“끄윽.”
신경이 마비되었는지 눈을 하얗게 까뒤집기 시작하는 걸 보며 번이 콧등을 찡그렸다.
-나 줘! 나!
그래, 너나 먹어라.
번이 손을 뿌리치자, 사내가 저쪽으로 철퍼덕 쓰러지더니 미친 듯이 몸을 긁어 대기 시작했다. 번의 몸에서 쑤욱 빠져나간 검은 기운이 그에게 달라붙은 것이다.
“사, 살..려.. 으아아아아악! 끄으으으으..윽!”
목구멍을 긁는 듯한 소리는 멀리 퍼져나가지도 못한다. 혀와 목젖부터 시작해 모든 장기와 기관이 녹아내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맹독!
거기에 더해진 악마의 힘은 빠르게 사내에게 죽음을 선물한다. 그렇게 사내는 너무도 무력하게 악마의 식사로 전락했다. 조금 전까진 한 사람의 생명줄을 쥐고 농락하던 이가 말이다.
“…….”
번은 바닥을 구르는 사내를 잠깐 보더니, 머리를 돌려 상체를 숙였다.
“다쳤구나.”
미루에게 손을 내미는 번.
“황..장..닝..”
입술이 퉁퉁 부어 피가 흐르고, 잇몸과 뼈까지 상했는지 미루는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래도 번이 내민 손을 잡고 힘겹게 상체를 일으켰다. 온몸은 흙투성이고, 얼굴과 머리칼은 피와 눈물에 범벅이었다.
이런 모습 보여 주기 싫은데. 분명 미울 텐데. 그녀의 축 처진 시선이 바닥을 향했다. 그런 그녀의 턱에 번의 손가락이 닿았다.
“……?”
미루의 얼굴이 다시 번을 향해 들렸다.
“황자님! 황자님!”
이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마녀 융이 후다닥 달려오고 있었다. 메카에서 지상으로 내려온 다크 엘프들이 숨을 곳을 알아보는 것은 그녀 몫이었다.
“평소에도 사람들이 꺼리는 곳이니 여기라면 터를 잡기 쉬울..”
말을 하며 다가오던 융의 발걸음이 우뚝 멎었다.
“……!”
미루 역시 벼락을 맞은 듯 발끝을 바르르 떨었다.
번이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춘 것이다.
「오색마나가..」
「투약..」
「재생을 돕습..」
입술과 입술 사이로 번의 몸에서 농축되고, 정화된 약이 흘러갔다. 그게 그녀의 고통을 사라지게 하고, 함께 따라간 마나가 상처를 치유했다. 비록 완벽하진 않지만, 붕어처럼 퉁퉁 부었던 입술이 어느 정도 사그라 들었다.
“…….”
“..하아..!”
둘의 얼굴이 떨어졌다.
“미안하구나.”
번은 일종의 책임을 느꼈다.
그때 조금 더 단호하게 대처했다면, 2차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인데.
“아, 아니에요. 저는 괜찮아요. 정말이에요. 황자님.”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키, 키스?’
진짜야? 정말이야?
미루는 입을 열어 대답하긴 했도 자기가 무슨 말을 쏟아내고 있는지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쳇..”
융이 뒤에서 혀를 찼다.
못 볼 걸 봤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자긴 그렇게 노력했는데, 눈길 한번 못 받고. 누군 저렇게 쉽게! 나도 한대 처맞아야 하나? 혹시 쟤가 어려서? 뭐가 됐든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아니다. 앞으로 이런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할 것이다. 이건 분명 잘못된 일이니까.”
번은 미루의 몸을 부축해 일어서게 했다.
자상한 그의 목소리에 미루는 살면서 가장 큰 안도감을 느꼈다.
이때, 둘 사이를 쏘옥 파고드는 몸 하나.
“여기서부터는 제가 치료 할게요!”
마녀는 사제처럼 신성력으로 한큐에 환자를 낫게 할 순 없지만, 다양한 지식을 기반으로 약초나 동물의 부산물을 이용해 약을 만들 수 있었다.
번은 미루의 몸을 안는 융을 보며 끄덕였다.
“최대한 빨리 부기를 빼. 사람들이 동요하지 않게.”
“맡겨만 주세요! 가자! 우선 몸을 좀 닦아야겠어.”
미루가 얼떨떨한 얼굴로 끄덕이다가 번을 바라보았다. 아련하지만 부끄러움 가득한 그녀의 시선이 저쪽으로 사라지자, 번은 그제야 몸을 돌렸다.
추욱 늘어진 사내의 흔적 하나.
빠르게 부패하여 시체조차 보전하지 못하고, 불쾌함만 남았다.
-좋구나! 끌끌끌! 아주 더럽고 추해서 더 맛나!
식사가 만족스러웠는지 악마가 기뻐했다.
번이 쓰읍 입맛을 다시는데, 인기척이 느껴졌다.
“숨어 있으래도.”
번의 책망어린 말투에 체리티가 번의 그림자에서 스윽 옆으로 나왔다. 확실히 ‘다크’가 붙어서 그런지 귀신같이 움직인다. 어둠을 감지하는 번이 아니었다면 사전에 기척을 잡아내지도 못했을 거다.
“양분이 있으니, 씨앗이 잘 자랄 거에요.”
체리티가 사내의 흔적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더니 노랫말 같은 것을 흥얼거리며 두 손을 모아 흙을 만졌다.
“조그만 씨앗 개울가에서 가져와~ 한 주먹~ 두 주먹~.”
읊조리듯 터지는 그녀의 가성은 아름다웠다.
다른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는 마력을 지녔다.
“꼬옥~ 꼬옥~ 흙 이불 덮으면~.”
그녀는 씨앗 하나를 사내의 흔적이 있던 곳에 심는다. 반딧불처럼 반짝이는 녹색 빛 하나가 그녀의 손을 떠나 땅속으로 깊이 숨었다.
“하룻밤, 이틀 밤. 뽀드득 뽀드득~ 두근두근~.”
씨앗이 들어간 자리를 손으로 꾹꾹 누른 체리티가 일어나 번을 보며 노래를 마무리했다.
“싹이 났어요~.”
엘프의 축복을 받은 씨앗은 며칠이 지나지 않아 무럭무럭 자라날 것이다. 그녀는 이곳에 오자마자 느꼈다. 비록 여기가 메카의 영향인지 일반 숲보다는 어둠의 농도가 강했지만, 그런 것 따위는 그녀가 본래 있던 곳에 비하면 충분히 비옥한 땅이었다.
바람에 실려 오는 이 충만한 생명력.
대지 가득한 정령의 흔적은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를 것 같고, 세상에 다시 태어난 기분을 주었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내가 돌아올 때까지 숨어 있어.”
“그럴게요.”
언제 클로가 나타날지 몰라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는데, 여기선 흔들리는 나무와 돋아나는 풀만 봐도 며칠은 순식간에 지날 것 같았다.
“고마워요.”
배시시 웃는 체리티를 보며 번은 끄덕이곤, 저쪽 모닥불 빛 아른거리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서라! 누구냐! 어엇? 화, 황자님?
불침번이 번을 발견했다.
-황자님이라고?
-그분이 돌아오셨어?
-황자아니이이이이임! 번 황자님!
페트릭이 모두를 다 깨울 셈인지 버럭버럭 외치며 번을 맞았다.
이렇게 시끌벅적한 밤이 지나간다.
숲에 새로운 식구를 잔뜩 맞이하고서.
.
.
돌아오기 전, 다시 육체변형을 통해 이전 모습을 회복한 번. 이마에 난 눈은 감고자 하면 감쪽같이 사라졌고, 그 자리에 눈이 있었는지 남이 보면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이렇게 외형은 전과 달라진 게 없었지만, 페트릭은 느끼고 있었다.
사아아악.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햇살 내리쬐는 아침. 기온 차가 만들어낸 안개가 숲 전체를 자욱하게 덮고 있었다. 그런데도 번은 그 속에서 존재감을 드러낸다. 수많은 사람이 모여있어도 모두가 본능적으로 번을 바라볼 정도. 이건 그가 황자의 신분을 가져서가 아니다. 보다 근본적이고, 원초적인 어떤 것을 품었기 때문이리라.
“잠시 잊고 살던 것을 되찾았을 뿐이야.”
번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페트릭은 혀를 내둘렀다.
강자는 강자를 알아볼 수 있다. 얼마 전의 번은 그 독기와 정신력은 인정하지만, 육체적으론 한계가 보였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것일까? 이제는 전사의 기세가 물씬 풍기지 않는가? 묘한 것은 고된 훈련으로 정제된 기사의 그것이 아니라, 긴 시간 전장에서 굴러먹은 용병의 느낌이 난다는 거였다. 생을 황궁에서 자란 열두 살짜리 황자가 말이다.
분위기만 변한 게 아니다. 묵직한 시선에선 세월의 깊은 흔적이 느껴졌고, 그건 지진이 나거나 벼락이 떨어져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뿐인가? 전신에서 은은하게 풍기는 기세는 ‘마나’를 다루는 자들의 특징이다.
“페트릭.”
“예, 황자님.”
“몇 가지 해야 할 일이 있다.”
“암요! 말씀만 하시면 뭐든 따르겠습니다!”
그 듬직한 번의 모습에 페트릭은 충성심이 치솟는다.
번은 이날부터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발목에 묶인 쇠사슬을 끊어낸 사람처럼 빠르고 쉴 새 없이 몰아쳤다. 박쥐 작업을 마무리하고,준비된 사람들을 요세인으로 보내는 한편, 일반인을 대상으로 지원자를 모았다. 번이 이전부터 계획한, 또하나의 시도가 출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
페트릭이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 채 모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33명.
열흘간의 고된 작업으로 인해 꾀죄죄한 몰골의 그들은 새끼 오리들처럼 번을 똘망똘망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어떻게든 더 모았어야 하는데..”
민망한 듯 페트릭이 말을 얼버무린다. 윽박질러서라도 지원자를 늘렸어야 했나 싶다. 고작 이 인원이라니.
하지만 번은 흐뭇하게 웃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다. 충분하다.”
녹봉도 약속하지 않았다. 뭘 해야 하는지도 구체적으로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시키는 일은 무조건 수행해야 한다며 최소 2년의 시간을 바치라 했던 것이다. 그런 악조건임에도 33명이나 모였다. 21세기 대한민국이였다면 열정페이니, 노동착취니 난리가 났겠지만, 여기선 이 모든 게 ‘존엄’이란 말로 퉁쳐진다.
“리켄스..”
번의 목소리에 저쪽에서 사내가 웃으며 끄덕였다. 고물 대신 검을 맞기고자 왔던 리켄스. 그때보다 훨씬 표정이 좋아졌다.
“미루..”
며칠 사이 많이 회복된 미루가 예쁘게 웃어 보였다. 옆엔 그녀의 동생도 함께다. 남여를 구분하지 않는다 하였다. 이들의 용기에 감사할 뿐.
황제가 하사한 패를 사용한다면 언제든 1천의 병사를 동원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번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완벽하게 나만 보고 따르는 사병이었다. 물론 솔개부대가 있지만, 쓰임이 달랐다. 페트릭은 고작 33명이라고 했지만, 그건 잘못 생각한 거다. 이들은 일당백이 되어, 3,300명의 몫을 충분히 해낼 테니까!
“잘 와주었다. 너희의 선택이 훗날 결코 후회가 되지 않게 할 것이다.”
번 친위대는 미약하지만, 이렇게 조직되었다.
그리고 그는 이 33명의 친위대와 함께 융을 숲에 남겨 둔 채, 솔개부대를 이끌고 요세인을 향했다.
아무도 오지 않는 죽음의 숲.
하지만 지난 경험과 번에 대한 믿음은 그들을 기다리게 할 것이다.
-오셨다! 오셨어!
-우와아아아!
수많은 환영 인파가 성 밖에까지 나와 환호했다. 비록 벨버른을 침략한 에비뉴의 황자였지만, 요세인을 위해 발 벗고 나서준 은인. 모두가 포기하고, 할 수 없을꺼라 했던 그것을 끝내 해내고야만, 어린 황자에게 마음을 연 거다.
-와아아아아! 번 황자님!
-번! 번! 번!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우리 애가 덕분에 살았어요!
-고생하셨습니다!
박쥐 고기와 에비뉴에서 온 곡식이 그리 넉넉한 양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들에겐 가뭄의 단비 같은 것이었고, 그들의 진심이 모여 번에게 자극을 준다.
「성원을 흡수합니다.」
「흡수한 성원이 마나에 영향을 끼칩니다.」
아이들이 두 팔 번쩍 들고, 번을 보며 웃는다. 그 미소 하나하나가 번의 몸속에 흐르는 기운에 영향을 주었다.
「응원을 흡수합니다.」
「응원은 전투 시 투지로 변환할 수 있습니다.」
비록 작지만, 이 마음이 모여 훗날 거대한 태풍을 만들어내리라.
번은 사람들을 보며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러며 묻는다.
“폐하께선 기별이 있으신가?”
페트릭의 턱이 무겁게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