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냥 1 #
“크르르르..!”
번의 의도를 알아챈 듯 으르렁대는 녀석.
“크아아아아!”
녀석의 아가리가 한껏 벌어지며 번에게 달려든다.
타앗!
달려드는 놈을 보며 번은 옆으로 훌쩍 뛰었다. 그러면서 지난 과거의 기억들을 빠르게 수집했다.
닭. 그것도 아주 큰 닭.
딱 그것부터 시작하자.
이족보행 조류의 움직임은 극히 제한적이다. 이놈들의 몸통은 사람처럼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통째로 돌아가야만 한다. 내가 새였을 때를 떠올려보자. 나는 어떻게 움직이고, 어떻게 공격했지?
‘옆으로 돌아, 아래로 들어가면!’
이놈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대가리를 아래로 숙여 부리로 쪼는 것이나 발로 밟는 것밖에 못 한다. 머리가 늑대라고 다를 건 없다. 그 아가리에 물리지만 않으면 되는 거니까. 따로따로 생각하자. 대가리는 늑대, 몸통은 닭!
“차아-!”
슬라이딩하듯 주륵 미끄러지며 클로의 가슴팍으로 접근하는 번!
-다리를 노려!
‘알아!’
그의 팔이 후욱! 휘둘러졌다.
클로의 거구를 지탱하는 두 발은 나무기둥처럼 튼튼해 보였지만, 번의 손에 들린 것은!
수아아악-!
신성력 덩어리였다.
“······!”
불에 달군 젓가락이 솜사탕을 가르고 지나가듯, 그렇게 창은 클로의 오른쪽 다리를 너무도 쉽게 훑었다.
“캬아아아아악-!”
콰당-!
중심을 잃고 자빠지는 녀석의 거구를 피해,
“이크!”
옆으로 데굴데굴 굴렀다가 힘차게 땅을 박차고 다시 튀어 오르는 번이다.
"크르르르..훅훅.."
거친 클로의 숨소리가 들리지만, 녀석도 불의의 일격을 당했다고 해서 싸움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사람과 동물의 다른 점. 인간은 코피만 나도 싸움을 포기하는 경우가 있지만, 동물은 죽을 때까지 싸운다. 당연히 이 상처받은 다리 잘린 동물은 고통에 발광하면서도 몸을 바닥에 미친 듯이 비비는 듯하더니, 순식간에 채찍 같은 것을 번의 얼굴로 강하게 날렸다.
꼬리였다.
탁!
하지만 너무도 쉽게 놈의 꼬리를 막는 번.
"크르르!"
그게 더욱 화가난 클로는 번의 팔을 돌돌 휘감기 시작했다.
"멍청하군."
놈의 꼬리는 뱀의 그것처럼, 차갑고 섬뜩한 감촉을 주었다. 하지만 번에겐 아무렇지 않다. 뱀으로도 살아봤고, 닭으로도 살아봤다. 그저 확실하지 않은 한 가지는 이놈이 닭대가리의 지능을 가졌는지, 생긴 것처럼 늑대의 그것을 가졌는진 모르겠다는 것뿐.
뭐, 어느 쪽이든,
“내가 옛날에 말이야.”
인간보단 한참 멍청하다는 것엔 변함이 없다.
수아아악-!
번이 창을 휘둘러 단번에 녀석의 꼬리를 뚝 끊어버렸다. 그 두꺼운 다리가 잘렸는데, 꼬리라고 배길까?
"크아아아아!"
무식한 놈이다. 당연할 수밖에 없다. 동물은 그런 걸 계산할 능력이 없었으니까.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번이기에 이런 식의 싸움은 무조건 유리할 수밖에 없다. 나는 너를 아는데, 너는 나를 모르니까!
“..맙소사..”
“클로가.. 저렇게 쉽게..”
“말도 안 돼..”
나무 위, 나무 뒤, 풀숲 같은 곳에 숨어서 지켜보는 다크 엘프들은 그저 입만 떡 벌렸다. 번은 그들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으며 쓰게 웃었다.
“가장 답답한 게 뭐였는지 알아?”
번은 쓰러진 클로의 몸뚱이에 바짝 접근하며 계속해서 말했다.
-뭔데?
녀석에게 말한 게 아닌데, 악마가 궁금한지 호기심을 보였다.
“날개든, 다리든, 이빨이든. 뭐든 하나만 잃어도 삶이 끝장난다는 거야.”
이빨 빠진 호랑이, 날개 잘린 독수리, 다리 부러진 사슴에게 남은 것은 죽음뿐이었다. 어떻게든 불구로 꾸역꾸역 살아가는 인간과는 너무도 다른. 안타깝고도 가혹한 현실이었다. 하지만 이제 반대로 말하면, 이걸 이용했을 때 백전백승 할 수 있다는거 아닌가?
“캬아악-! 캬악!”
아직 체력이 남은 클로는 사력을 다해 번에게 저항했지만, 영리하게 일정 거리를 두고 창으로 툭툭 쑤셔대는 번을 막긴 역부족이었다.
번은 서두르지 않았다.
사자는 얼룩말의 목덜미를 물고 늘어지면 완전히 숨이 끊어질 때까지 턱에 힘을 주고 기다린다. 늑대 무리는 사냥감이 지칠 때까지 주변을 맴돌며 위협하고, 바닷속 물고기도 주변 환경처럼 위장하여 먹이가 입가로 바짝 접근할 때를 노린다.
기다림.
인간의 전투에선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이 방식이 번에겐 가장 큰 무기이자 특징이었고, 지켜보는 사람들은 그 치밀함과 여유에 몸이 부르르 떨릴 지경이었다.
“크르륵! 크륵..! 크르르르..”
클로는 이제 번이 다가오면 대가리만 휙휙 본능적으로 틀며 아가리를 벌릴 뿐 다른 위협적인 행동은 하지 못했다. 아니, 할 기력이 없다고 해야겠지. 몸엔 수십, 수백 곳이 인두로 지진 것처럼 구멍이 숭숭 뚫려 버렸고, 바닥엔 녀석의 피로 흥건해졌으니까.
사방엔 피와 흙이 범벅이 되어, 그로테스크한 광경이 펼쳐졌다.
-잔인한 놈! 넌 어떻게 된 게 악마보다 더 악마같이 싸우냐? 그냥 끝내! 몸의 목줄을 뚫어!
‘웃기시네. 저 눈을 봐라.’
-눈?
‘그래.’
클로의 눈동자는 죽음의 공포와 고통에 마비되고 있었다. 하지만 가끔씩 번뜩이는 섬광은 녀석이 아직 회심의 일격을 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허어..! 그런 것까지 계산하고 있었다는 거냐?
‘당연.’
성녀도 없는데, 다치면 무슨 고생인가. 확실한 길이 있는데, 서두르는 건 하수나 하는 거다. 이런 목숨을 건 생존 싸움에 있어서 번은 그 누구보다 고수라 할 수 있었다.
이윽고, 10분쯤 더 흘렀을까?
추욱-!
클로의 몸이 완전히 늘어졌다.
지켜보는 다크 엘프들도 누구 하나 입 열어 말을 하는 자가 없다.
물론 악마는 입이 닫힌적이 없다.
-대단하다. 대단해. 멋들어지진 않아도 정말 효율적으로 싸우는구나.
뻔한 소릴 왜 해?
야생에선 늘 뒤를 대비해야 한다. 이 싸움에서 이겼다고, 삼박사일을 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다른 맹수가 바로 싸움을 걸 수도 있고, 내가 잡은 사냥감을 빼앗으려고 노리는 놈이 튀어나올 수도 있는 거다. 힘은 아낄 수 있을 때 최대한 비축하는 것!
‘끝났군. 근데, 이걸 통째로 먹어야 하는 거냐?’
번이 클로의 거대한 몸뚱이를 보며 물었다.
-아니지. 클로는 늑대의 머리, 닭의 몸통, 뱀의 꼬리와 함께 다른 하나를 가지고 있다.
‘심장?’
-그래. 녀석들은 거기에 어둠의 마력을 모으는데, 드래곤 하트의 하위호환이라고 할 수 있지. 그걸 찾아 흡수해라.
‘드래곤? 그런 게 정말 있긴 한 거냐?’
-당연하지! 다크 엘프와 클로도 있는데! 보고도 모르겠냐?
그거랑 그거랑 같냐?
순간적으로 기가 막혔지만, 번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클로의 가슴팍을 뒤지기 시작했다. 어렵진 않았다. 창이 닿은 부위가 사르륵 녹아내렸으니까.
‘확실히 신성력이 효과가 좋군.’
-이곳 한정해서만 그런 거다. 신의 영향이 미치는 곳에선 반대로 이렇게까진 강하지 않아. 여긴 어둠만 가득해서 작은 빛이 더 환하게 보이는 것 같은 원리지.
‘그럼 여기는 신이 없나?’
-있지. 단 한 분만!
아아, 대충 알겠다. 어둠을 관장하는 어떤 분만 계시겠지. 더 알고 싶지도 않다. 신이란 것들이 내 인생을 주무르고 있다고 생각하면 절로 이가 갈렸으니까. 번은 입맛을 다시며 계속해서 심장을 찾았다.
‘이건가?’
-그래. 그거다! 느껴지지 않냐? 농축되고, 순수한 어둠이!
클로의 심장은 녀석의 덩치에 비해 그리 크진 않았다. 사람의 심장이라더니, 정말 딱 어른 주먹만 하다. 오징어 먹물에 푹 담가놓은 것처럼 새까맸는데, 아직도 꿈틀거리는 것이 누가 봐도 아주 불쾌하게 생겼다. 하지만 번에겐 아니다.
냠.
샤냥에 성공했으면, 당연히 뒤에 이어지는 것은 포식이다. 번에게 이 행위는 아무런 거부감이 없는 것이었다.
스스스스스..
제철 복숭아를 베어 문 것 같은, 그것도 아주 말랑말랑하고 달콤한 보상인 것이다. 게다가 보기와는 달리, 맛이 좋다! 여기 와서 온갖 잡것을 다 먹어봤지만, 단연코 이렇게 황홀한 맛은 없었다.
「클로의 하트를 흡수합니다.」
「다량의 어둠을 흡수합니다.」
「새로운 어퍼 홀이 반응합니다.」
「몸속의 모든 기운이 반응합니다.」
「새로운 성분 2종을 흡수했습니다.」
명치 아래 뭔가 꿈틀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걸 중中단전이라고 해야 하나? 뭔가 묵직하고 묘한 게 자리 잡은 것 같은데, 아직은 그게 뭔지 확신할 순 없었다.
-어둠의 정수가 씨앗을 잉태하는 거다. 아직 멀었어. 그게 완전히 발아하여 네 몸에 똬리를 틀어야만 힘을 끌어낼 수 있다!
‘얼마나?’
-글쎄. 클로마다 품고 있는 마력이 다르니, 부지런히 사냥을 해야겠지.
번이 끄덕이는데, 저쪽에서 융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자님! 황자니이이임! 괜찮으세요?”
번은 씨익 웃으며 그녀를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다크 엘프들이 하나둘 튀어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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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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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엘프’란 이름을 쓰는 종족이라 그런지 삶의 베이스는 나무에 두고 있었다. 이들은 수백 년 된 큰 나무 아래를 파서 집을 만들거나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두었다.
“흐음.”
번은 지금 그런 나무 중에 하나에 들어와 있었다. 여기서 가장 큰 규모의 집이라 한다. 그래 봐야 나무 속을 파냈는데, 크면 얼마나 크겠나? 노량진에 널린 8평 정도 되는 원룸 같았다. 가구도 별로 없고, 칙칙하다. 이런 곳에 더 칙칙한 피부와 표정을 가진 다크 엘프들이 옹기종기 앉아 있으니, 이건 뭐 탄광이 따로 없었다.
“그렇게 된 거에요.”
클로를 사냥한 뒤, 다크 엘프들의 안내를 받아 이곳으로 온 번은 여왕이란 여자에게 하나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래서 당신을 믿기 힘들어요.”
여왕은 다른 다크 엘프와 비슷했다. 사실 섞어놓으면 누가 여왕이고, 누가 경비병인지 구분하기 힘들것 같았다. 다 예쁘고, 다 까맸으니까.
자신을 체리티라고 소개한 그녀는 일족의 비사를 풀어놓았다.
본래 엘프였던 이들은 악마의 속임수에 당해 여기로 끌려왔고, 살다 보니 환경에 적응해 이렇게 까맣게 되었단다. 하긴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먹거리라곤 죄다 어둠 듬뿍 품은 것들 뿐이었으니, 흰 우유가 초코 우유로 변하는 것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설엔 다크 엘프가 사악하고, 악마나 다름없는 몬스터처럼 비유되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라며 억울해했다.
어찌 됐든, 번에겐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기 때문에 본론을 꺼냈다.
“믿든, 안 믿든 나는 클로만 잡으면 돼. 너희에게 피해를 주려고 온 게 아니다.”
“..그건 들었어요. 클로의 심장을.. 드셨다죠?”
체리티는 번을 악마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기행도 그저 그러려니 했다. 다른 엘프를 잡아먹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는 표정이랄까?
“그래.”
“얼마나 계실 예정이시죠?”
“그건 아직 몰라. 때가 되면 가겠지.”
체리티는 번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했다.
“여기서.. 나갈 수 있다는 건가요?”
그녀의 표정을 보니, 원하는 걸 딱 알겠다.
‘가능하냐?’
-안될 건 없지. 네가 온 길을 이용하면 되니까. 통로를 열긴 어려워도, 있는 걸 쓰는 건 쉬우니까.
“흐음.”
번의 입가가 묘하게 뒤틀렸다.
“여기서 탈출하고 싶나?”
번의 목소리가 아주 달콤하게 체리티의 귀에 파고들었다.
“당연하죠. 하지만.. 당신을 믿을 순 없어요.”
그럼 어쩌라고?
번이 노려보자, 체리티가 복잡한 눈동자로 시선을 피했다. 그녀도 지금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거다.
“좋아, 거래하지. 악마가 약속을 지킨다는 건 알지?”
“······?”
“나를 도와. 나는 클로의 심장이 필요하고, 너흰 여길 나가고 싶으니 서로 좋잖아?”
-이놈! 이제 아주 본격적으로 악마행세를 하는구나!
본래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그건 이 엘프들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생각.. 해 볼게요.”
체리티의 갈등하는 모습을 본 번이 피식 웃으며 일어났다.
“마음대로 하라고. 나는 손해 볼 게 없으니까.”
악마의 말에 따르면 클로를 50여 마리는 잡아야 할 것 같은데, 그놈들을 하나하나 찾다간 끝이 없을 것 같다. 이 엘프들이 도와준다면 시간을 대폭 단축할 수 있으리라.
밖으로 나오자, 융이 바닥에 쪼그려 앉아 나뭇가지로 뭔가 복잡한 도형을 끄적거리고 있었다.
“뭐해?”
“아! 얘기는 잘 됐나요?”
“잘되고 말고 할 게 있나.”
그래 봐야 아프리카 원주민 같은 것들인데, 이들이 돕든 말든 사냥꾼은 계속 초원을 누비면 그뿐인 것을.
번이 바닥의 그림을 빤히 바라보자, 융이 벌떡 일어나서 말했다.
“여기라면 가능할 것 같아요!”
“뭐가?”
번의 물음에 융이 결심한 듯 외쳤다.
“저주요! 그 어떤 마법보다 무시무시하고 강력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