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장통 #
“엘리베이터 같군.”
스르륵 떠오르는 몸.
번이 짧게 지금 기분을 평가했다.
“엘리베이터? 그게 뭐예요?”
융이 물었지만, 번은 입을 다물었다. 설명한다고 아나?
이동을 하는 것 같긴 한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 어디론가 가고 있다는 느낌은 있는데, 안대를 차고 고속열차에 타서 그저 나아가는 그런?
‘오래 걸리나?’
-아니, 잠깐이면 된다. 여긴 시공간의 개념이 없는 곳이야.
‘그렇군.’
21세기 상식으로 생각하면 머리만 아프다. 그래서 번은 기다린다.
기이이이잉-!
쭉쭉 올라가던 그의 몸이 어느 순간, 멈췄다.
“······?”
그리고 거짓말처럼 발이 땅에 닿았다.
"에엣?”
융도 놀랐는지 뒤를 돌아보았지만, 검은 기둥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두 사람은 난생처음 보는 낯선 곳에 서 있었다.
“으음..”
울창한 숲이 사방으로 펼쳐져 있었다. 끝을 알 수 없을 정도. 아까 있던 그 칙칙한 숲은 오히려 밝게 느껴질 정도로 이곳은 모든 것이 어두웠다.
‘이제 뭘 하면 돼?’
악마에게 물었다.
-여긴 태초의 어둠이 만들어진 장소다. 그래서 이곳의 모든 것들이 어둠 속성을 띄고 있지. 흡수해! 정수가 만들어질 때까지!
그리 어렵지 않은 주문.
번은 끄덕이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토옥.
우선 손에 잡히는 나뭇잎부터 입에 넣고 씹어본다.
「새로운 성분 2가지를 흡수했습니다.」
맛은 더럽게 없었다.
“우엑!”
융도 번을 따라 잎사귀 하나를 입에 넣어보더니, 퉤퉤 바로 뱉어버렸다. 뭐랄까? 시궁창보다 더 쓰고, 텁텁한 맛이랄까? 하지만 번은 계속 씹어 삼켰다.
「어둠의 기운을 흡수했습니다.」
악마의 말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너무 적은데?’
이래선 수백 년이 걸려도 정수란 걸 만들 수 있을지 모르겠다. 몸으로 흘러드는 어둠의 기운은 극히 미량이었고, 순도도 그리 높지 않아 보였다.
-서두르지 마라. 기다리면 복이 올 것이니. 케케케
우두둑.
나뭇가지 하나를 부러뜨려 통째로 씹으며 번은 끄덕였다.
조급할 필요 없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지 않나? 하루아침에 나이를 먹을 순 없는 거고, 작은 몸이 자라려면 반드시 세월이란 녀석이 도와줘야 한다.
“오오오! 이건! 광대버섯!”
번을 따라 걷던 융이 급히 몸을 숙이더니, 나무 아래 자라있는 버섯을 조심스럽게 갈무리했다.
“귀한 건가?”
“네! 아주 보기 힘든 버섯이에요! 이거 한 송이면 족히 수천 명을 정신착란에 빠뜨릴 수 있거든요!”
신경작용을 하는 독버섯이란 건가?
“하나 줘봐.”
“네에? 설마 이것도 먹으려고요?”
번은 대답 없이 손을 내밀었다.
“하, 하지만..”
망설이는 융에게서 버섯 하나를 낚아채, 아그작 그대로 씹어 삼키는 번.
「혼란 내성이 올랐습니다.」
「정신교란 효과를 중화합니다.」
「어둠의 기운을 흡수했습니다.」
“별거 없군.”
번이 입맛을 다시며 앞서 걷자, 융이 혀를 내둘렀다. 대체 이 사람은 어떻게 이럴 수 있지? 한입만 삼켜도 사지를 벌벌 떨며 자빠져야 할 버섯을 통째로 먹고도 멀쩡하다니! 알면 알수록 더 모르겠는 인간이었다.
“같이 가요!”
물론 그래서 더 흥미롭고 재미있었지만 말이다.
2시간쯤 걸었을까?
뱀, 각종 벌레, 이끼, 나무뿌리 같은 것들을 모조리 한 번씩 먹어보며 숲을 헤치던 번. 처음으로 주변에 변화가 생긴 것을 감지했다.
“여기에도.. 사람이 사나?”
강원도 깊은 곳, 저녁 무렵 가면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딱 그런 광경이 저 멀리 보이고 있었다.
-사람은 아니고, 여기 메카의 주민이라 할 수 있지.
“대륙의 어딘가로 이동한 거야?”
-아니, 여긴 완전히 다른 세계다. 이쪽과 저쪽의 틈에 낀 곳이라 해야 할까? 정령계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번이 끄덕일 때, 융이 급히 말했다.
“누가 와요!”
융이 말하지 않았어도 번 역시 보고 있었다. 저 앞 굵은 나무 옆으로 뾰족하고, 까만 커피색 귀가 보인다. 딴엔 숨는다고 노력한 것 같은데, 은신엔 소질이 없어 보였다.
“어머나!”
융이 반색했다.
“다크 엘프에요! 다크 엘프!”
책에서만 보던 신비로운 종족의 등장에 융이 어찌할 줄을 몰랐다. 그녀 역시 오래도록 어둠의 마법이나 주술을 탐구하던 학구열 높은 지식인이었기에, 전설로만 전해지던 대상을 실제로 마주한 것에 대해 무척 놀라워했다.
-아부디바! 요함마! 요르요르! 요리!
뭐라는 걸까.
머리를 삐죽 내밀고 외치는 꼬마를 보며 번은 예닐곱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저 꼬마의 삿대질이 무얼 의미하는 걸까 고민했다.
-내가 통역해주지.
악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실시간으로 꼬마의 말이 해석되었다.
“가까이 오지 마! 악마!”
살랑거리는 꼬리 때문인가?
녀석은 번을 악마라 불렀다.
“쩝..”
기분이 묘하다. 악마취급이라니.
“내가 소리치면 금세 어른들이 달려올 거라고! 험한 꼴 보기 싫으면 어서 가!”
꼬마는 귀여웠다. 귀만 뾰족할 뿐, 동유럽 혼혈 아이처럼 이목구비가 또렷하니 이쁘다 할 정도였다. 피부색은 번이 이제까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주 특별한 것이었고, 흑인과 동양인의 중간쯤이라 봐야 하나? 어쨌든 21세기 대한민국 아줌마들이 봤다면 당장 껴안고, 얼굴을 부비부비했을 거 같다.
“저래 보여도 전설에 의하면 다크 엘프는 아주 호전적이고, 사납다고 해요. 전투력도 뛰어나고요. 조심하는 게 좋아요.”
귀엽건 말건, 번에겐 관심 밖의 이야기다. 껍데기에 영향을 받지 않는 남자였으니까.
“저것도 먹어봐야 하나?”
무심코 중얼거린 말에 융이 움찔!
-저것들은 별 도움이 안 될 거다. 네가 찾아야 할 건 따로 있어.
‘그게 뭐지?’
-이곳에서만 자생하는 일종의 몬스터다.
‘몬스터?’
황궁에서 태어나 수도에서만 살아와서 그런지 번은 몬스터를 마주친 일이 없었다. 몇 번의 삶 속에서 경험해보긴 했지만, 그땐 그 역시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 구분조차 모호했고.
-클로를 찾아. 근처에 있을 거다. 저 꼬마에게 물어봐도 되고.
“클로?”
번의 말에 융이 갸웃했다.
“클로라고요? 그게 여기에 있대요?”
“아는 거야?”
“그럼요! 클로는..!”
늑대 머리, 닭의 몸통, 뱀의 꼬리에 사람의 심장을 가진 신화 속에만 등장하는 괴수.
-클로!
번과 융의 대화에 저쪽에서 꼬마가 버럭 외쳤다. 악마녀석이 제대로 통역은 하고 있는 걸까? 의심부터 든다. 어쨌든 뭘 어떻게 오해한 건진 모르겠지만, 꼬마는 이제 숨지 않고 이쪽으로 뛰어와 말했다. 가까이에서 보니 여자아이였다. 나무줄기 따위를 꼬아 그물처럼 만들어서 대충 중요부위만 가린 녀석. 이곳의 의복양식이 어떤지 대충 알만하다. 저런 건 일본 야동에서만 보던..
“크흠!”
번이 헛기침하자, 꼬마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그런데 이때.
슈슈슈슈슈슉!
사방에서 늦가을 밤송이처럼 후두둑 뭔가가 여럿 떨어져 내렸다. 얼추 이십은 넘어 보인다. 죄다 손엔 활을 들었고, 화살촉은 번의 몸을 겨누고 있었다.
부릅뜬 눈. 경계심 가득한 시선.
“악마!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썩 물러서지 못할까!”
“한 발자국만 더 접근하면 죽여버리겠다!”
그들의 강렬한 적의에 번은 입맛을 다셨다.
“······.”
아까 꼬마가 말했던 어른들인 모양이다. 오해가 쌓이기 전에 선수를 쳐야 할 것 같다. 이 녀석들과 싸우려고 여길 온 게 아니니까.
“나는 클로를 찾아왔다.”
“거짓말!”
“우릴 속이려 하지 마! 간사한 악마!”
‘설명 좀 해주지?’
번이 속으로 악마에게 말했다.
-알아서 해. 내가 하나부터 열까지 도와줄 순 없다고.
심드렁하게 말하면서 한 가지 팁을 알려준다.
-드넓은 초원에서 사자를 찾으려면 어디로 가야 할까?
‘얼룩말의 흔적을 따라가라?’
-그래, 저놈들은 클로의 먹이다.
“아아아..”
이해했다.
‘천적이란 건가?’
-그놈들이 뭐든 다 잡아먹긴 해도, 다크 엘프의 고기 맛을 한번 보면 다른 건 찾지 않지. 궁금하면 너도 한번 먹어 보던가. 쟤 어때?
사람으로 치면 1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여자 다크 엘프를 보며 번이 머리를 흔들었다. 참 아슬아슬하게도 입었다. 보통 남자라면 침을 질질 흘렸을 정도로 예쁘기도 하고.
-맛있겠는데?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은 법이지. 크크크!
‘그건 사양하지.’
호랑이가 사람을 잡아먹기 시작하면 절대 그 맛을 못 잊어 식인食人호랑이가 된다고 한다. 클로인지 뭔지도 아마 그런 것 같다.
“황자님, 어떡하죠? 우릴 적대하고 있어요.”
융이 번의 뒤로 숨으며 중얼거렸다.
그러게.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쉽게 물러날 것 같진 않은데. 악마를 좋아하는 부류가 더 이상하겠지만, 이들의 적개심은 더 강해 보였다. 아마 어떤 사연이 있는 거겠지. 번이 고심하고 있을 때,
쿠웅!
지축이 흔들렸다.
흠칫! 흠칫! 흠칫!
엘프들이 일제히 활을 돌렸다.
우스스스..
나뭇잎 거칠게 흔들리는 소리.
뭔가 아주 불길한 게 다가오는 기분과 함께,
“클로!”
“클로다!”
“흩어져!”
엘프들이 얼른 움직이기 시작했다.
꼬마를 들쳐 안고, 재빨리 나무 위로 올라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보곤, 번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쿠웅-! 쿵!
이 정도 진동이 느껴질 정도면 클로라는 놈이 얼마나 육중하고, 큰지 예상이 된다.
‘저거.. 내가 이길 수 있는 거냐?’
대가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무 위로 나타난 거대한 늑대의 머리는 참으로 비현실적이었다. 무슨 티라노 사우르스를 마주친 기분!
-당연하지! 너에겐, 그게 있지 않냐? 저래 보여도 신성력엔 취약하니까!
‘무기로 쓸 정돈 안 되는데?’
신검이니, 신창이니 하는 것들은 그냥 모양만 흉내 낸 거였다. 몸속 기운을 밖으로 뽑아내 뭉친 정도였으니까.
-상관없다! 물리력은 필요 없어! 여기선 그 자체만으로 강력한 효과를 보일 거니까!
온통 어둠의 속성으로만 이루어진 세계. 그 때문에 이곳 생물들은 신성력에 면역력이 손톱만큼도 없다는 거였다.
“히이이익! 황자님! 우리도 피해야 할 것 같아요!”
나무를 헤치고 다가온 클로의 전신이 드러나자, 융이 기겁했다.
눈에 보인 클로는 닭처럼 두 발로 섰는데, 발가락에 돋은 발톱 하나하나가 무시무시했고, 궁둥이엔 뱀처럼 긴 꼬리가 도사렸다. 몸 전체를 가득 덮은 것이 깃털로 보이면서도 껍질처럼 단단해 보이니, 저게 대검으로 박히기나 할까 의심스러울 정도.
“크르르르르르..”
거기에 늑대 아가리에서 뚝뚝 떨어지는 침이라니. 키가 4미터에 몸길이 6미터짜리 이 괴물은 사냥에 최적화되어있는 특급맹수라 할 수 있었다.
“그렇단 말이지..”
“예! 어서요! 빨리요!”
번의 말을 오해한 융이 제자리 뛰기를 하고 있는데,
우우우우우웅-!
번의 손에서 우윳빛 창이 자라났다.
“······?”
도망가자니까! 뭐해? 설마 싸우려고? 융이 그런 눈빛으로 번을 바라볼 때,
쿠웅-!
클로가 바짝 접근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번과 융을 내려보며 그르르르륵, 끓는 소리를 목구멍에서 내는 괴물.
“화, 황자님!”
저 눈빛.
번은 클로의 번들거리는 눈을 보며 피식 미소 지었다.
'얕보고 있군.'
평소 다크 엘프를 잡아먹던 놈에게 이족보행을 하는 인간 형태 생물은 그저 맛좋은 사냥감에 불과한 것이었다. 번은 저 감정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태생이 포식자인 것들은 토끼나 쥐에게 위협을 느끼지 않으니까.
“크크크..”
번이 웃었다.
기괴하게 일그러지는 그의 입술을 보며 융이 움찔하는데,
“착각하고 있구나.”
번이 융의 몸을 뒤로 밀쳐내며 앞으로 성큼 나아갔다.
늑대 머리를 똑바로 올려보며 히죽이는 번. 그의 꼬리가 탁탁 바닥을 쳤다.
“사냥감은 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