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좌의 게임-68화 (68/177)

# 버프 2 #

“이, 이..! 썅년이!”

사내가 급히 몸을 움직이며 미루의 검을 피해냈다. 번은 그 모습을 보며 눈을 차갑게 빛냈다.

‘나약해.’

요세인 사람들은 지금 굶어 죽기 직전이다. 그런데도 정신상태가 썩어 문드러졌다.

야생에서 초식동물로 살아봤는가?

번은 사슴이었을 때, 어미의 배에서 태어나자마자 표범에게 물려가 먹힌 적도 있었다. 뿐인가? 원숭이였을 땐, 아직 꼬물거리며 엄마의 뱃속에서 태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거대한 뱀의 위장으로 통째로 넘어간 적도 있었다.

그런 경험을 해보면 알게 된다.

살기 위해 해야 할 것엔 한계가 없다는 것을.

빠악-!

사내의 팔꿈치가 미루의 얼굴을 쳤다.

“흐으으..!”

하지만 미루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지 바로 달려들며 검을 휘둘렀다. 물론 초보가 휘두르는 검이 위협적일 리 없다. 하지만 칼이 미친년 손에 들리면 겁먹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흐억, 저, 저리 가!”

이제 사내의 눈에 욕정은 없다. 분명 아까와 같은 여자였지만, 그녀는 이제 성욕을 받아주는 대상이 아니라 피와 살점을 갈구하는 포식자다.

-근데 약이 좀 적은 거 아니냐? 움직임이 둔한데?

‘아니, 처음이라 몸이 따라가질 못하는 거다.’

-그런가? 흐음, 그럴 수도 있겠네.

세상 모든 마약은 깊은 부작용을 남긴다. 하지만 번이 미루에게 투약한 약은 그런 게 없다. 번의 몸에서 정화되고, 재구성되어 그저 인간의 뇌에 한 부분만을 극대화 시킬 뿐이다. 공포를 죽이고, 흥분과 쾌락을 넣어준다. 그러면 사람은 자신감만 충만해져 두려울 게 없어진다.

광狂전사.

번이 지하실의 모든 약을 흡수했을 때, 번뜩 떠올린 또 하나의 무기였다.

그가 아무 대책 없이 마굴로 향했겠는가?

‘오히려 너무 많이 썼어. 양을 줄이는 편이 좋겠어.’

-왜?

‘이성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 같아.’

통제하지 못하는 병사는 맹수와 다를 게 없다.

“아, 아아아악!”

사내가 팔을 물어뜯기며 비명을 질렀다. 그 사이 미루의 팔은 아주 은밀하게 아래로 향했는데, 거짓말처럼 칼끝이 한 부분으로 빨려 들어갔다.

“커헉..!”

사타구니를 파고드는 섬뜩한 느낌에 사내가 자지러질 때,

“그만.”

번이 말했다.

페트릭이 순식간에 발끝으로 미루의 검을 쳐내며 그녀의 몸을 밀었다.

후욱-!

밀쳐진 그녀가 넘어질 듯 비틀거리다가 아슬아슬하게 중심을 잡았다.

번의 바로 옆이었다.

“…….”

번은 그녀의 앞에 섰다.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는 번의 시선에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하지만 피하거나 물러서진 않는다. 그저 흥분이 가시질 않는지 머리를 계속해서 좌우로 흔들어댔다.

“네 이름이 뭐지?”

번이 물었다.

“흐으으..”

“이름이 뭐냐 물었다.”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한다면 이건 실패다.

“..으으.. 미..루.”

그녀가 간신히 말하자, 번이 웃었다.

‘다행이군.’

“잘 싸웠다. 오늘의 경험은 네게 값진 선물이 될 것을 장담한다.”

번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고 돌아서서 말했다.

“이 용감한 전사에게 물과 음식을 내어주어라!”

-충!

근처에 있던 솔개부대가 바삐 움직였다.

“언니!”

동생이 언니에게 달려와 급히 껴안았다.

생전 처음 보는 무서운 모습의 언니지만, 그래도 그녀에겐 세상 하나뿐인 소중한 언니였다.

“으으으..”

미루가 신음하자, 번은 말했다.

“곧 깨어날 거다. 걱정하지 마라.”

약효는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언니.. 흐흐흑!”

번은 그녀들을 떠나 몇 걸음 앞으로 걸었다.

“흐으.. 으으.. 황자님..”

바닥에 누워 고통에 신음하는 사내.

“쯧. 치워라.”

번이 차갑게 말했다.

죽을죄까진 아니었으니, 이리 호되게 당했으면 정신 차리겠지.

솔개부대원이 사내를 들쳐메고 사라지자, 번도 현장을 떠났다.

-차라리 언데드를 연구하는 편이 더 좋지 않나? 먹이지 않아도 되고, 이런 골치 아픈 일도 없을 텐데?

악마는 많은 지식을 가졌다. 하지만 녀석은 '무엇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비칠진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도 과해.’

약은 용기와 잠재력을 끌어내지만, 분명 이것이 타인의 눈엔 좋지 않게 여겨질 것을 안다.

‘적절히 쓸 임계점을 찾아야겠지.’

약은 어디까지나 보조일 뿐. 결과적으론 본인이 강해져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는 번이었다.

아침이 밝았다.

어젯밤 소란이 모두에게 퍼졌지만, 크게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다시 행군은 시작되었고, 사람들은 지친 몸을 움직였다.

“괜찮아? 언니?”

“으응..”

“진짜?”

“그렇다니까.”

동생이 걱정했지만, 미루는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개운하다고 해야 하나? 이제까지 살아오며 쌓인 짜증이 한방에 다 날아간 것 같았다.

‘이상해..’

그녀는 마치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무기력하고 힘들었는데, 지금은 바람에 하늘거리는 잎사귀만 봐도 기분이 좋고, 하늘의 구름만 봐도 아름다워 감탄이 나온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기억은 생생했다. 황자님께서 발목을 치료했을 때,(그녀는 그렇게 여겼다.) 어떤 일이 벌어졌다. 분노가 치밀었고, 그 남자와 싸웠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젠 같은 상황이 오면 그리 나설 수 있을 것 같다는 거다.

그녀는 모르고 있었지만, 이 차이가 아주 중요했다. 1천 명이 모여 있을 때, 위기에 처한 사람을 인식하고 0.1초 사이에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고작 한둘이다. 그들이 고민 없이 반사적으로 누군가를 위해 물에 뛰어들고, 지하철 선로로 내려가는 것을 보며 사람들은 영웅이라 말한다.

“언니?”

동생이 갸웃하자, 미루는 환하게 웃으며 동생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발목도 아프지 않다. 사람들이 가져다준 음식으로 배도 채웠다. 비록 딱딱한 빵과 식어 빠진 수프였지만, 그녀들은 아주 맛있게 나눠 먹었다. 그녀가 싸워서 얻어낸 첫 번째 전리품, 아마 그녀는 영원히 오늘을 잊지 못할 것이다.

피식.

멀리서 그런 미루의 모습을 지켜보는 이가 있었으니, 번이었다. 그의 옆엔 마녀 융이 있었는데, 그녀가 말했다.

“모두가 그녀처럼 되진 않을 거예요.”

“알아.”

약이란 게 사람마다 흡수율도 다르고, 효과도 차이가 있을 거다.

“뭐, 그래도 다들 어느 정도 자극은 된 모양이에요.”

솔개부대는 나름대로 기강을 다잡는지 굳은 표정들이었고, 무엇보다 여자들의 눈빛이 변했다. 번이 간밤에 한 말들이 알려지며 그의 의지가 전해진 거다.

여자라고 봐주지 않는다.

얻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싸워서 가져라!

아직은 혼란스러워하는 이들도 제법 있었지만, 번은 시간이 해결하리라 믿었다. 이들이 요세인으로 돌아갈 때쯤엔 아주 많은 것들이 달라져 있을 것이니까.

“2mg을 기준으로 조금 낮추거나 늘려보도록 해.”

번의 말에 마녀가 싱긋 웃으며 끄덕였다.

“그럴게요.”

“사람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기록을 남겨두고.”

“염려 마세요.”

성녀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마녀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번은 주변 사람들의 성향과 재능을 철저하게 파악해 그에 맞는 일을 시키는 중이었다. 아직은 시작에 불과할지 모르겠지만, 이 시간들이 쌓이면 그땐.

‘철鐵의 군대를 넘어설 수 있을 거야.’

-캬캬캬! 빨리 가자! 다 왔다! 느껴진다! 어둠이! 더러움이! 음습함이!

요세인 근처 금지禁地 세 곳 중 마굴을 택한 것은 악마와 관련이 있었다. 에비뉴에선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고 보는 눈도 많았지만, 여기선 아니다. 할 수 있을 때, 최대한 특정 힘을 키워야만 했다.

“가자!”

번이 힘차게 외쳤다.

.

.

마굴魔窟.

이곳은 하나의 거대한 숲이었다. 하지만 으레 생각하는 싱그러운 초록빛 생명력 가득한 그런 것을 떠올리면 큰 착각이다. 30m, 40m씩 자라있는 앙상한 나무들은 어른의 허리두께 정도였는데, 그래서인지 바람에 심하게 기우뚱거렸고, 기둥엔 잔가지도 별로 없어 을씨년스럽다.

게다가 머리 부분은 울창하게 회색빛 잎이 브로콜리처럼 자라 사방으로 뻗었는데, 그 때문에 햇빛을 완전히 가려 바닥엔 잡초조차 잘 자라지 못했고, 언제나 질척질척 습했다. 얼핏보아도 곰팡이, 지네, 개미, 독개구리, 두꺼비, 박쥐 따위만 눈에 띌 뿐, 사슴은커녕 토끼조차 보이지 않았다.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온 사냥터라 하기엔, 너무도 척박한 환경. 사람들이 불안에 떨기 시작했다. 하지만 번은 흔들리지 않았다.

‘아직 멀었나?’

-거의 다 왔다!

악마가 길을 알려주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 이정표 따위도 없는 이 넓은 숲에서 길을 잃으면 공포에 미쳐버리거나 탈진해 죽으리라.

“유적이 이곳에 있는 것입니까?”

페트릭이 번의 옆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그래.”

페트릭에겐 이곳에 꼭 손에 넣어야 할 고대의 유물이 있다고 둘러댔다. 그 물건을 찾으려면 우선 유적부터 찾아야 한다고.

“알겠습니다.”

페트릭이 멀어진다. 병사들을 단속하러 가는 것이다.

우스스스스..

스산한 바람이 분다.

이런 기분 나쁜 숲은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에게 영향을 준다. 일반적으로 알파피넨α-pinene이나 베타피넨β-pinene, 피톤치드Phytoncide같은 효과를 여기서 기대하면 안 된다. 이 숲은 죽음과 가장 가깝게 닿아있을지도 몰랐으니까.

“흥~ 흥흥~”

물론 이걸 좋아하는 이도 있다.

콧노래를 흥얼대는 마녀 융과,

-좋구나! 좋아!

악마 따위 말이다.

“오오오!”

“저것인가?”

걷던 사람들이 하나둘 멈춰 서며 반응했다.

숲 한복판에 시커먼 아가리가 쩍 벌어져 있었다. 위로 삐죽 솟은 부분은 10미터가 훌쩍 넘었고, 아래로 뚫린 구멍은 지옥으로 통하는 지름길 같았다.

-느껴진다! 느껴져!

악마가 흥에 겨워 반응했다.

번도 묘하지만 어떤 간지러움을 엉덩이 뒤쪽 깊은 곳에서부터 느끼고 있었다.

“저게 마굴이에요.”

융이 말했다.

마녀들 사이에서도 전설처럼 전해지는 곳이다. 직접 와본 적은 없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이곳에 무언가 도사리고 있다는 소문은 익히 들어왔다.

“페트릭.”

번의 목소리에 뒤에서 페트릭이 급히 달려왔다.

“이 주변으로 병력을 배치하라.”

한땐 벨버른의 왕이었지만, 페트릭 역시 마굴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구글 지도나 로드뷰로 앉은 자리에서 모든 곳을 보는 21세기를 떠올리면 곤란하다. 이곳은 사람 잡아먹는 몬스터가 버젓이 돌아다니고, 악마가 기생하는 세계다.

“빨리빨리 움직여라!”

페트릭이 부대를 나눠 주변을 빼곡하게 감쌌다. 근처 나무를 베어 빛이 들게 하고, 장작으로 쓸 마른 것들도 모았다.

‘확실하지?’

-당연!

번은 악마와 이야기를 하다 정보를 듣고, 사람들을 모아 여기까지 왔다. 물론 개인적인 일도 있었지만, 요세인 사람들에겐 먹을 것이 가장 중요했다. 하지만 토끼, 말, 사슴, 소, 돼지. 그런 것들을 떠올려선 곤란하다.

‘좋아.’

사람들이 준비하는 것을 보던 번이 마녀를 보며 끄덕였다.

이때, 페트릭이 다가왔다.

“이제 무얼 하면 되는 것입니까?”

“저 안에서 튀어나오는 것을 잡아,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말리면 되는 거다.”

페트릭이 번의 말에 눈을 깜빡이며 마굴 입구를 바라보았다.

'저기서 튀어나온다고?'

무엇이?

설명을 요구하는 페트릭의 표정에 번이 갑옷의 이음새에 손가락을 넣었다.

철컥!

무거운 철판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 모습을 보며 페트릭이 속으로 안도한다. 또 어떤 돌발행동을 할까 맘졸이고 있었는데, 적어도 전투는 하지 않으려는 모양 아닌가?

하지만 페트릭의 생각은 틀렸다. 번이 갑옷을 벗은 이유는 더 잘 싸우기 위해서였다. 그 누구의 시선 따위도 없는 곳에서 이제까지 단 한 번도 드러내지 않았던 온전한 힘을!

“아주 바쁠 거야. 페트릭.”

그가 고개를 갸웃하는데, 번이 씨익 웃더니 마녀를 향해 눈짓했다. 그러곤 돌아선다.

“어? 어어?”

번이 걷고, 마녀가 뒤따른다.

마굴의 입구를 향해서 말이다!

순식간에 둘의 몸이 마굴 윗부분이 만든 그림자에 먹혔다.

“화, 황자님?”

너무 황당해서 페트릭이 손을 뻗는데, 움찔! 어두운 안쪽 한 곳에서 새빨간 두개의 빛이 넘실댔다.

그건 번의 두 눈이었다.

허공에 잔상을 만들 정도로 강렬한 그것은,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만큼 무서운 것이었다. 여기까지였다면 페트릭은 나섰을 것이다. 하지만,

차르르륵.

그는 보았다.

갑옷을 벗고, 가벼운 차림이 된 번. 그의 엉덩이 쪽에서 뻗어나온 뭔가가 살랑거리며 바닥을 쓸고 있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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