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버프 1 #
.
목적지까지 이틀이라곤 하지만, 21세기 잘 닦인 도로를 생각하면 오산이다. 풀이란 놈이 어찌나 잘 자라는지 며칠만 지나도 사람 흔적을 완전히 지워버렸고, 밤에 잠깐 눈을 붙이는 것을 제외하면 계속 걸어야 했으니, 체력도 뚝뚝 떨어졌다.
군대를 다녀와 본 사람이라면 행군의 추억이 있을 것이다. 비록 그때처럼 무거운 군장은 없다 해도 그것보다 더 무서운 허기가 이들을 괴롭혔다.
“조금만 참자. 내일이면 먹을 걸 구할 수 있을 거야.”
“응, 언니. 난 괜찮아.”
안 괜찮은 거 다 안다. 아까부터 계속 꼬로록 소리가 나는 건 동생 배였으니까.
자매는 용감했다. 엄마도 죽고, 아빠도 죽었다. 하지만 당신들이 줄줄이 남기고 간 동생들을 먹이려면 그녀들이 나서는 수밖에 없었는데, 요세인에서 돈을 벌 수단이 마땅치 않았고, 이틀에 한 끼 먹는 것도 힘들었다.
“일찍 자자. 그게 좋겠어.”
찌르륵, 찌르륵.
풀벌레 소리만 들려오는 어두운 밤.
배만 부르면 하늘 가득한 별을 보며 낭만에 빠질 수 있을 테지만, 지금은 저 벌레라도 먹어볼까? 라는 생각밖에 안 든다. 이럴 땐, 빨리 자는 게 좋다. 수백 개의 모닥불이 주변에 피어있지만, 그 어디에서도 고기 굽는 냄새는 나지 않았다. 그나마 추위라도 피할 수 있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이리와.”
“아이, 싫어! 간지럽단 말이야!”
언니 손을 피해 돌아눕는 다루를 뒤에서 끌어안는 미루. 비쩍 마른 그녀들의 앙상한 발목이 모닥불 빛에 반질거렸다. 미루와 다루는 한날한시에 태어났지만, 30분 차이로 언니와 동생이 되었다. 쌍둥이라서 처음 만나는 사람이 보면 잘 구분하지 못했지만, 언니 미루가 좀 더 차분했고, 동생 다루는 활기차다.
“언니.”
“왜?”
“우리가.. 할 수 있을까?”
사냥이라 했다.
그것도 그 무서운 마굴 근처로 갈 꺼라고.
마굴魔窟.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 때부터 절대 그 근처엔 가지 말라고 소문난 곳. 왜 마굴이라 불리는지도 모른다. 가서 돌아온 사람이 없었으니까.
“이렇게 많은 사람이 가는데, 괜찮겠지.”
“그럴까?”
“그래.”
어중이 떠중이만 간다면 불안했겠지만, 오백 명이나 되는 강인한 남자들이 함께였다. 사실 그들만 믿고 따라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여자들이 사냥에 따라가 뭘 할까? 그저 사냥감을 옮기고, 가죽이나 벗기는 잡일이나 할 거다. 위험한 일은 시키지 않을 거라는 생각. 여기 따라온 대부분의 여자들은 그런 마음으로 따라 나선 걸거다.
“잘 돼서 우리 생일날 고깃국 먹었으면 좋겠다. 히이..”
며칠만 지나면 자매의 열여섯 번째 생일이었다. 보통 이 나이 때가 되면 시집갈 준비를 하곤 했는데, 둘은 엄두도 못 낸다. 돌봐야 하는 동생이 다섯이나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될 거야. 그러니까 자자.”
“응.”
언니는 동생의 머리를 뒤에서 쓸어주며 빙긋 웃었다. 그래도 이렇게 꿈이라도 꿀 수 있어서 좋다. 반군이 요세인에 들이닥쳤을 땐,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벌벌 떨어야 했으니까. 그들에게 잡힌 여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눈이 밤하늘을 향했다.
‘가이아님, 우릴 한 번만 도와주세요.’
반짝이는 별을 보던 그녀가 눈을 감는다.
찌르르, 찌르르르..
풀벌레 요란히 우는 소리. 저쪽 어딘가의 모닥불에서 사내들이 웃는 소리. 그런 것들을 자장가 삼아 자매는 잠을 청해본다.
“······.”
그런데 어느 순간.
저벅, 저벅.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지나가겠지.’
생각했다. 혹은 순찰을 도는 사내인가? 라고 여겼다. 하지만 여자는 직감이라는 게 있지 않나? 자매는 예뻤고, 어딜 가나 눈에 띄었다. 너무 비쩍 말라 툭 튀어나온 광대가 흠이었지만, 그것마저 젊음이라는 싱그러움이 감싸주었고, 큰 눈은 사내라면 빠져들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하나가 아니라 둘. 고작 하루였지만, 그녀들을 눈여겨보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부스럭.
누군가 모닥불 앞에 앉았다.
그녀들과의 거리는 고작 네 걸음 정도.
“요세인 여자들은 그렇게 정열적이라던데.”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루는 눈을 가늘게 떴다.
자는척하려고 숨소리는 최대한 숨긴다.
“어때? 사실이야?”
솔직하게 말해서 그녀는 지금 남자의 얼굴보다 그의 손에 들린 큼지막한 말린 고깃덩어리를 보고 있었다.
"······."
꿀꺽.
어른 손바닥 두 개만 한 그건 무슨 금덩이처럼 보일 지경이다.
꼬르르르륵.
다루의 배에서 나는 소리다. 동생도 아직 못 자고 있었나 보다.
사내는 이런 일이 아주 익숙한 듯 차분했고, 말에 거침이 없었다.
“쌍둥이는 처음이라서 말이지. 어때? 이거면 충분하지 않을까?”
"······!"
모닥불 주홍빛이 고깃덩이에 아른거리니, 더 먹음직스럽다. 몸이 절로 반응한다. 받아! 저거라면 남겨서 동생들도 갖다 줄 수 있어!
요세인에서 몸을 파는 건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아니, 오죽하면 남자가 없어 여자가 남아 돌 지경이었다.
하지만 자매는 아직 거기까진 추락하지 않았다. 동생들 보기 부끄럽단 생각에 악착같이 버티고 버텼다. 뭐, 그래도 알 건 다 안다.
‘참아.’
동생을 끌어안은 언니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이제까지 지켜온 처녀를 이런 길바닥에서, 저런 고깃덩이 하나에 팔순 없다. 그것도 자매가 동시에? 꿈 깨자. 이건 아닌 거다.
‘언니!’
동생의 몸이 움찔했다.
동생도 갈등하고 있나 보다.
‘아니야.’
이건 아니라고.
하루만 참자.
내일 마굴에 도착하면 사냥을 시작하지 않을까?
“가세요. 싫습니다.”
용기 내어 말했지만, 사내에겐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두 걸음 엉덩이를 그녀들에게 바짝 붙였다.
“흐읍..”
그녀가 급히 동생을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자세히 보라고. 아름답지 않나?”
사내는 고기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씨익 웃었다.
“충분히 남는 장사야. 안 그래? 이거 사슴이라고. 그것도 넓적다리. 적당히 부드럽고, 씹는 맛은 기기막히지!”
사내의 손이 스윽- 다루의 발목에 닿았다.
움찔!
“잠깐이면 돼.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다들 그러고 살아. 비싸게 굴 이유가 없다고.”
사내는 평생을 이러고 살아왔다.
여자는 그의 유일한 낙이었고, 이렇게 휘두를 수 있는 위치에서 흥정하는 것을 좋아했다.
“혹시 알아? 내가 계속 뒤를 봐줄지.”
그의 손이 다루의 종아리까지 올라왔다.
바르르..
몸을 떨었지만, 다루는 어찌 해야 할지 몰랐다. 당장 뿌리치고 싶은데, 묘하게 그의 말에 설득당하고 있다.
그때였다.
“싫다고 했잖아요!”
미루가 벌떡 상체를 일으키며 소리쳤다.
“아, 이거 왜 이래? 다 듣잖아!”
사내는 놀랐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움찔했다.
“언니.. 싸우지 마..”
다루도 몸을 일으키며 미루를 말렸다.
“가세요! 우린 안 해요!”
“쳇, 알았다고! 알았어! 그러니까 좀 닥쳐!”
더럽게 비싸게 구네. 중얼거리며 사내가 품에 고기를 넣었다. 그러면서 발끝으로 미루의 발목을 걷어찼다. 그저 화가 나서 그런 거다. 다치게 할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악-!”
사람의 몸은 어떨 땐 아주 강하지만, 어떨 땐 아주 작은 충격에도 큰 대미지를 입기도 했다. 지금 미루의 발목이 그러했다.
“..언니!”
발목을 부여잡고 웅크린 언니를 동생이 급히 살폈다.
“무슨 엄살은..”
사내는 침을 뱉으며 자리를 뜨려 했다. 아무래도 다른 여자를 찾아봐야 할 것 같다. 그래도 다행인 건 주변에 여자는 널리고 널렸다는 거? 오늘 밤은 어떻게든 하난 건지겠지. 생각한 그는 막 돌아서는데.
“······?”
뭔가가 그를 막아서고 있었다.
두 사람.
갑옷을 입은 노인이 그의 바로 앞에 있었고, 한 걸음 뒤엔 가벼운 차림의 청년이 무심한 눈으로 서 있다. 아니, 모두가 안다. 그가 아직 열두 살에 불과하다는 것을.
“뭐 하고 있었나?”
“화, 황자님..”
사내가 허둥대자, 노인의 손이 우악스럽게 그의 멱을 잡아챘다.
“물으시지 않느냐?”
페트릭이다.
“그, 그게..”
번은 고개를 돌려, 모닥불 가의 여자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다시 사내를 바라본다.
“내가 경고했을 텐데.”
번은 지원자의 대부분이 여자라는 것을 알고 난 뒤, 솔개부대에 말했다. 절대 건드리지 말라고.
“그, 그것이..”
사내의 변명은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번이 콧등을 찡긋하며 움직였다. 자박, 자박. 모닥불을 지나쳐 웅크리고 있는 미루에게 가서 몸을 숙였다.
“부러졌군.”
발목이란 게 예상하지 못한 각도로 뒤틀리면 쉽게 부러지기도 한다. 벌써 퉁퉁 부어오르는 걸 보면 걷지도 못할 거다.
“..으으, 흐으.. 끄윽, 끄으..”
미루는 고통에 신음하면서도 소리 내지 못했다. 황자님이시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것도 처음이었고, 서럽기도 했지만, 본능적으로 눈에 띌 행동을 하지 않는다. 귀족들이 평소 어떻게 사는지 잘 아니까. 벌레 취급당한 것이 어디 한두 번 이던가?
“······.”
번은 눈살을 찌푸리며 자매를 보았다.
자기들끼리 좋다고 붙어먹는 건 말리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눈감아주기 어렵다. 그가 의협심이 뛰어나거나 여성인권을 위해 목청 높여 부르짖는 운동가는 아니었지만, 누구보다 그녀들의 심정을 잘 이해할 수 있지 않나?
강자 앞에 약자.
“..아픈가?”
번이 미루에게 물었다.
“흐윽, 흐으윽..”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아프냐고 물었다.”
“..예. 흐으윽.”
“억울한가?”
“..네..”
번은 섬뜩하게 미소 지으며 상체를 숙였다. 그리곤 두 손으로 미루의 다친 발목을 잡았다.
“어엇?”
옆에 있던 다루가 깜짝 놀랐지만, 차마 황자를 뿌리칠 순 없다.
“그럼 싸워라.”
다루는 보았다. 말을 하는 황자님의 송곳니가 길고 날카롭게 자라 있다는 것을. 하지만 이내 착각이라 생각한다. 너무 배고프고 놀라, 헛것을 보았다고.
그런데 돌연, 번이 미루의 발목을 깨물었다.
“허업-!”
“아악!”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던 일!
송곳니가 파고든다.
「마비 독을 소량 배출합니다.」
번에겐 다양한 성분의 독이 있었다. 그 중에서 마취 역할을 해줄 수 있는 마비 독은 진통제 역할을 할 것이다.
「독기를 흡수합니다.」
「좋지 않은 기운을 흡수했습니다. 정화합니다.」
곪아 들어가는 세포들을 번이 흡수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레인보우 립 성분 2mg 투약했습니다.」
번이 흡수하여 새로운 성분으로 탈바꿈한 마약痲藥이 그녀의 몸으로 흘러들어 갔다.
피잉-!
“하악..!”
고통이 사라진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미친듯한 쾌락이 채웠다. 정신은 온전한데, 손끝 발끝이 바르르 떨리고 심장은 터질 것 같이 뛰었다.
“흐윽..!”
그녀의 몸이 활처럼 휘었다.
봉긋한 가슴이 하늘로 향하고, 허리는 들린다.
번은 일어섰다.
“어, 언니!”
동생이 언니의 몸을 잡고 흔들었지만, 번은 어느새 돌아서 있었다. 그가 품에서 단검 하나를 꺼내 자매 근처에 던졌다. 그러면서 페트릭을 본다.
“공평한 게 좋겠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빠각-!
페트릭의 발이 사내의 허벅지를 부숴버렸다.
“커헉..”
이런 소란이 일어났는데, 주변이 조용할 리 없다. 아니, 조용하다. 단지 수많은 눈이 모여 있을 뿐.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바닥을 구르고 있다. 한쪽은 고통에, 다른 한쪽은 기이한 열기에 휩싸인 채로.
모두의 귀에 번의 목소리가 울렸다.
“무언가를 쟁취하고 싶다면, 노력을 해야 한다. 지키고 싶은 것이 있다면 강해져야 하며 이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고자 한다면 싸워야 한다.”
“흐으으으..”
미루가 신음을 흘리며 비틀비틀 일어서고 있었다. 두 어깨는 축 늘어져 있었지만, 다친 발목은 단단하게 바닥을 디디고 있다.
“우리는 사냥을 왔다. 다른 생명을 빼앗고, 그 고기를 취하러 왔단 말이다. 우리 사냥감은 그냥 죽어줄까? 목 길게 빼고, 잘라주길 기다리고 있을까? 아니다.”
삶의 모든 순간은 투쟁이며 전투다.
단지 인간만이 그걸 모르고 살고 있을 뿐.
“흐으으..”
미루가 바닥의 단검을 집어 드는 걸 보며 번의 입가에 씨익 미소가 걸렸다.
“투정부릴 시간따윈 없다. 어리광부릴 여유조차 너희에겐 없다.”
그런 게 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테지.
“싸워라-!”
번의 음성이 천둥처럼 울렸다.
그리하여 너희가 원하는 것을 직접 손에 넣어라.
-캬캬캬캬! 약효 죽이는데? 저 눈빛 봐라!
악마의 말처럼 미루는 번들거리는 눈으로 아직도 넘어져 있는 사내를 향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