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장 비싼 것 #
.
“고맙습니다.”
황자의 말이다.
그것도 두 손을 꼭 맞잡고, 진심 어린 목소리와 함께 눈을 맞춘다.
“아, 아닙니다. 그저 보잘것없는..”
철로 만든 낡은 솥단지를 가져온 노인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이렇게 높으신 분께서 직접 감사하다 말하니,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제가 반드시 그리 만들겠습니다.”
번이 진심을 담아 말하자, 황송한 듯 머리를 조아리며 솥을 옆에 두고 뒤로 빠지는 노인.
-이런 건 좀 빼라. 그게 돈이 되겠냐? 다 낡아 빠졌는데. 버려!
악마가 비아냥거렸지만, 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중고나라라고 아는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아주 활발하게 움직이던 인터넷 시장. 누군가에겐 쓸모없는 고철도, 누군가에겐 꼭 필요한 것이 된다. 금, 은, 보석만이 아니다. 이런 것들이 에비뉴로 넘어가면 분명 곡식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교역을 아무나 할 순 없겠지만, 번은 가능할 것이라 믿었다.
번듯한 명함은 이럴 때 써먹으라고 있는 거니까!
“고맙습니다. 당신의 선의, 잊지 않겠습니다.”
어쨌든, 계속해서 이어지는 시민들을 향해 최선을 다해 마음을 표하는 번이었다.
물론, 이렇게 사서 고생하지 않아도 되는 방법도 있다. 병사들을 동원해 빼앗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러면 아버지와 뭐가 다른가? 이렇게 내가 조금 움직여 이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면 몇 번이든 하리라.
번은 계속해서 사람들을 직접 맞았다.
“당신의 이 한 걸음이 요세인을 살릴 것입니다.”
그저 형식적인 인사치레가 아니었다.
노인, 남자, 여자, 혹은 아이가 오더라도 그들 하나하나에 맞게 대우하고 인사했다.
-캬! 가식이 끝날 줄 모르는구나!
악마가 기막혀했지만, 이건 달랐다. 가식이 아니다. 번의 첫 번째 삶. 그곳에서는 모두가 이랬다. 무거운 짐을 들고 가는 할머니를 보면 거침없이 도와줄 정도로 친절했고,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려 했으며, 새벽에 길을 걸어도 아무 문제 없을 만큼 서로가 착했다. 이후 많은 삶을 거치며 생존을 위해 거칠어졌지만, 사람으로 살 때의 기억마저 잃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 사람.
열심히 공부하고, 예의 바르던 대한민국 고등학생 설명우. 번은 잠시 그때로 돌아간 듯했다.
이윽고 시간이 꽤 흘러 노을이 진다. 그런데 아까보다 줄은 더 길어졌다. 황자가 직접 손잡아주고, 따스하게 대한다는 소문이 앞선 사람들에 의해 퍼져나가자, 집구석에서 뭐라도 들고나온 이들, 반신반의하며 구경 온 이들까지 더 늘어난 것이다.
“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솔개부대 장수 하나가 다가와 물었지만, 번은 머리를 흔들었다.
“나를 보러 온 이들이다.”
아직 멀었다. 요세인 사람들은 마음에 벽을 치고 있다. 3만 명에 달하는 사람 중에 고작 수백 참여했다는 것은 그만큼 아직 자신의 입지가 좁다는 거다.
하지만 서운해할 필요 없다. 이해한다. 어찌 쉽게 믿겠는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믿고 찾아와준 이들을 배신하는 것과 같을 테니까.
철컥, 철컥.
지저분한 수염을 기른 사내가 번의 앞에 걸어왔다. 절뚝거리는 것이 왼쪽 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 것 같다.
“…….”
그는 입을 꾸욱 다물고, 철검 두 자루를 내밀었다.
“좋은 일에..”
써주시오, 라는 말은 다 잇지 못했다. 그는 스스로 생각해도 왜 여기 와 있는지 모르겠으니까. 시장에서 동료들이 말했던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이 황자가 전리품을 챙겨 떠나려 하는 수작일지도.
하지만..
“고맙습니다.”
이 얼굴을 보라. 그가 이런 일을 벌일 이유가 없지 않나? 고작 솥단지, 녹슨 철검 따위를 챙겨서 어디에 쓰겠나? 강국 에비뉴의 후계자가 말이다.
“그런데.. 이 검은 직접 쓰시던 것입니까?”
뒤에서 지켜보긴 했지만, 황자가 이리 예를 갖추니 받는 사람으로서 참으로 어색했다.
“그랬..었습니다..”
“헌데, 이걸 왜 내놓으십니까?”
“제겐.. 이제 지킬 것이 없습니다.”
허전함 가득한 그의 얼굴을 보며 번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가 느끼는 무력감, 번의 지난 삶들 속에서도 충분히 겪어왔던 것이다.
“후우..”
번은 눈을 뜨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더니 철검을 다시 사내에게 주었다.
“이건 받지 않겠습니다.”
“……?”
“곧 대규모 사냥이 조직될 것입니다. 그때 사용해 주세요.”
번은 요세인을 살리기 위한 방안을 여럿 마련해두고 있었다. 주변 황야엔 토끼조차 남지 않았다지만, 몬스터가 사는 위험한 지역이나 험준한 산엔 아직 구할 수 있는 것들이 있으리라.
“하지만..”
번의 손이 그의 어깨에 올라갔다.
“포기하긴 이르지 않습니까?”
번이 턱으로 저편을 가리켰다.
엄마를 따라온 여자아이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여길 바라보고 있다.
“지켜야 할 것들이 이렇게 많은데.”
“……?”
‘이 사람은..?’
사내는 복잡했다.
고작 열두 살이라 했다. 이 어린 황자는 대체 어떻게 자라왔기에 이리도..
“이름이 무엇입니까?”
“제, 제 이름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리켄스입니다.”
“좋습니다. 리켄스. 기다리겠습니다. 이르면 이틀 후, 사냥을 떠날 것입니다. 그때 다시 뵙겠습니다.”
어깨를 툭툭 치며 밀어내는 번.
리켄스는 얼떨떨한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이러려고 온 게 아닌데.. 사냥? 그런 귀찮은 일은 더이상 하고 싶지 않은데..
하지만 왜일까?
묘하게 그날이 기다려지는 것은.
“꼭 그날 같이 갑시다!”
손을 흔들며 웃는 황자의 얼굴을 그는 한동안 잊지 못할 것 같았다.
.
.
.
“뭘 하고 있다고?”
모닥불 타닥타닥 불씨 휘날리는 밤.
황제는 구운 토끼 다리를 거칠게 뜯다가 옆을 돌아보았다. 스캇이 재미있다는 듯 다시 말했다.
“요세인을 구휼救恤하고 있답니다.”
“그 녀석, 수도로 돌아가지 않았나?”
“그런 명을 내리신 적은 없지 않으셨습니까?”
황제는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토끼 다리를 내려놓았다. 반군을 진압했으면 당연히 황실로 복귀할 줄 알았다. 그런데, 뭐? 요세인을 어째?
“허..”
아니, 그게 가능하기나 한 건가? 집정관조차 벨버른의 가난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 하지 않았나? 그래서 적극적으로 반군을 진압하지 않았던 것도 있고 말이다.
“자세히 읊어봐.”
“그게 말입니다..”
스캇이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위대하신 대 에비뉴 황제 폐하의 후계자. 나, 번 리갈 드 요르간드 바야흐가 부탁합니다. 동봉한 물품은 벨버른 요세인의 팔라멜이라는 분이 소중히 간직하던..」
에비뉴 귀족들에게 편지와 함께 말이 도착했다. 수레는 보름이 걸리지만, 말은 빨랐다. 봇짐 한가득 양옆에 낀 말에선 온갖 잡동사니가 우르르 쏟아졌는데, 귀족들은 그걸 보며 하마터면 떡 벌린 턱이 빠질 뻔했다.
“그걸 샀다고?”
“별수 있겠습니까? 누구 부탁인데요. 그리 큰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잡동사니가 들어있던 봇짐엔 옥수수나 밀, 쌀이 실렸다. 그게 다시 벨버른을 향해 돌아갔고 말이다.
“허어..!”
황제는 기막혀 헛웃음만 흘렸다.
“듣자하니, 이건 시작에 불과하답니다. 신전에선 벨버른의 기아를 돕고자 모금 활동을 벌일 계획이라 하고, 대현자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습니다.”
“그놈 참!”
왜 시키지도 않은 일을!
황제가 잠시 뭔가 생각하는 듯 하더니, 툭 묻는다.
“왜 이러는데?”
“진짜 몰라서 물으십니까?”
“모르니까 묻지. 내가 한가해 보여?”
“…….”
스캇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인정받으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떤 분께서 거들떠보지도 않으시니까 말이죠.”
“내가?”
“…….”
이 양반이 정말 모르나?
스캇이 빤히 바라보자, 황제가 허! 생사람 잡지 말란 듯 어깨를 으쓱했다.
“자식은 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떻게든 칭찬받고 싶으니까요.”
“했어! 잘했다고 했잖아. 그래서 후계자로까지 책봉했고.”
“아.. 예..”
“나, 원, 참.”
황제가 기막히다는 듯 혀를 찼다. 뭘 더 어쩌라고?
그러다가 말한다.
“그래서? 그 녀석, 잘할 것 같아?”
“힘들지 않을까 합니다.”
“집정관은 뭐라는데?”
“같은 의견입니다. 벨버른은 에비뉴의 귀족들이 생색내기로 잠깐 돕는다고 일어설 수 있을 수준이 아닙니다. 게다가 그것도 한두 번이지, 편지도 곧 약발이 떨어지겠지요.”
“흐음.”
황제는 턱을 만지다가, 다시 토끼 다리를 들었다.
“해보라고 해.”
“네?”
갑자기 즐거워 보인다.
“깨져봐야지.”
“…….”
스캇이 이마를 찌푸리자, 황제는 들고 있던 토끼 다리를 스캇에게 내밀었다.
“먹을래?”
“..됐습니다.”
빈민 구제하겠다고 발 벗고 나서는 황자, 그런 황자를 두고 보며 어떠한 도움도 주지 않는 황제.
대체 누가 애인지 모르겠다.
“우린 전쟁 중이야. 이것만으로도 빠듯하다고. 집정관에게 전해. 어느 정돈 눈감아주지만, 선을 넘으면..”
황자도 알아야 한다. 에비뉴가 있어야 벨버른이 있는 거다. 전쟁에서 이겨야, 구휼이든 나발이든 하는 거다.
“아직 어려.”
황제는 토끼 살점을 이로 뜯으며 웃었다.
“뭣이 중한지 구분 못 하면 거기서 끝나는 거야.”
스캇은 한숨을 깊게 내쉬며 몸을 돌렸다.
확실히 황제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지금 토벌하려는 왕국은 시작에 불과하다. 에비뉴는 그 너머의 제국과 일전을 벌이려 하고 있었으니까. 이런 상황에서 벨버른에 도움을 줄 여유는 없다.
하지만 왜일까? 그런데도 황자의 소식이 궁금한 것은.
“아!”
스캇이 떠나려는데, 황제가 불렀다.
“네?”
“그래서? 그놈 지금 뭐 하고 있다는데?”
스캇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오직 그만 누릴 수 있는 호사이기도 하다.
“사냥 갔답니다.”
“뭐?”
고작 사냥으로 수만 명을 먹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런 거야? 스캇? 황제가 그런 눈빛으로 바라봤지만, 스캇 역시 대답할 수 없었다. 그는 사실을 말했을 뿐이었으니까.
.
.
.
요세인은 사지 멀쩡한 성인 남성이 거의 없었다. 에비뉴와의 전쟁과 반군의 약탈을 겪으며 싸울 수 있는 자원이 바닥을 친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살아있는 남자들까지 에비뉴의 황제가 모조리 끌고 가버렸으니, 남은 자들이라곤 애, 노인, 여자, 병자, 불구뿐이었다.
사정이 이러했으니 7천의 반군에게 도시가 그리 쉽게 함락된 것이었다. 반대로 말하면, 반군의 위협에서 벗어나도 전투력은 여전히 마이너스란 거다.
-아주 장관이구나! 장관이야! 캬캬캬!
요즘 들어, 악마가 계속 번의 심기를 건드렸다. 번이 승승장구할 땐 못하던 비아냥을 마음껏 해대는 느낌이다. 본래 악마란 족속이 이런 본성을 가졌다.
“…….”
번은 모인 사람들을 보았다.
500의 솔개부대를 제외하곤, 멀쩡한 사내가 없다. 약 1,200여 명의 사람이 모였는데, 딱 봐도 어느 전투에서 지고 돌아온 패잔병보다 더 쓸모없어 보였다.
하지만 번은 미소 지었다.
“리켄스.”
철검을 가지고 왔던 절름발이 사내. 그가 왔다. 그것도 동료로 보이는 몇 사람을 데리고서.
“황자님.”
리켄스와 옆의 사내들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다들 어디 하나씩 불편해 보였지만, 걷는 것엔 문제가 없었다.
번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솔개부대를 제외하면 700명 정도가 자발적으로 모였는데, 이들의 절반 이상이 여자였다. 그것도 대부분 옆집에 꼬마를 맡기고 온 엄마들이다. 검 한번 휘둘러보지 않았을, 언제나 사내들에게 겁탈당하고 휘둘리기만 했던 그녀들이 나선 거다.
“…….”
사실 번도 이런 광경을 예상한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못해도 좀 쓸만한 남자들이 이천 정도 오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었다.
-들판에서 쪼그리고, 야채나 캐면 딱이겠구나! 저 꼬라지들 좀 보라지! 크크크크!
악마가 비웃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번은 우렁차게 외쳤다.
“잘 오셨습니다! 여러분은 영웅입니다!”
여자면 뭐?
번은 암컷으로 여러 번 살아봤다. 자식으로 태어나 어미에게 늘 먹이를 받아먹으며 자랐었다. 사자도 암컷이 사냥하고, 거미, 개구리, 뱀, 사마귀 심지어 21세기 북한이나 이스라엘 여군도 아주 잘 싸운다.
‘차라리 잘 됐어.’
번의 눈빛이 달라졌다.
-뭐가 잘됐다는 거냐?
악마가 의아해했지만, 번은 투지를 불태웠다.
“악마를 물리치고, 마왕을 때려잡아야만 영웅이 아닙니다! 우리 아이들을 위해 용기 내어 이 자리에 선 여러분이 진정 용감한 것입니다!”
첫 단추가 중요한 거다.
아무도 오지 않았다면 절망했겠지만, 이 정도면 변화를 만들기에 충분한 숫자다. 누군가의 아버지, 누군가의 어머니, 우리의 아들이, 딸이. 심지어 누군가의 할머니까지 와 있다. 이들이 품고 있는 가슴속 작은 희망이 번져, 겉잡을 수 없이 터지는 그 날이 오면 세상은 알게 되리라.
‘진짜 비싼 게 뭔지.’
-뭐가? 그게 무슨 말인데?
번은 검을 번쩍 치켜들었다.
“갑시다! 가서 싸웁시다! 세상은 오늘의 우리를 기억할 겁니다!”
요세인 동남쪽 이틀 거리.
평소 사람은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않던 그곳으로 전사들이 떠난다. 아직은 누구도 이들을 그런 명예로운 이름으로 불러주지 않았지만.
-와아아아아아!
검 대신 호미가 더 어울리는 아낙도 있었지만.
-엄마가 꼭 해낼게!
손에 익지도 않은 반군에게 빼앗은 무기를 들고, 이들은 그렇게 걸었다.
마굴魔窟을 향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