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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좌의 게임-65화 (65/177)

# 여자 2 #

“교단에 연락해서 사제들을 보내라고 해. 최대한 많이.”

“네?”

그게 무슨 뜬금없는 말이냐며 가루비가 되묻자, 번은 입술을 혀로 살짝 핥으며 말했다.

“당분간 폐하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요세인에 있을 거야. 봐서 알겠지만, 여긴 거지소굴이나 다름없다. 남는 시간에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나?”

“아..”

“굶주린 자들의 배를 채워주는 것엔, 믿음만큼 좋은 것도 없겠지.”

번은 아주 영리한 사람이다. 어떻게 이런 것들을 전부 계획하고 실행하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좋은 생각이에요.”

그때, 번의 뒤쪽에서 우리아가 나타나며 말했다.

“지금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니까요.”

“어떻게 됐지?”

번이 얼굴을 옆으로 돌리며 묻는다.

우리아는 번이 지시한 몇 가지 일 때문에 외부에 다녀오는 중이었다.

“죄인들을 수도로 압송하는 것은 문제가 없을 거예요. 오늘 저녁이면 병력이 도착한다고 하니까 그들에게 인계하면 돼요.”

칠천이나 되는 반군을 여기서 다 죽일 순 없었다. 그리한다면 악마는 좋아 죽겠지만,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를 일이다.

“모두 처형한다고 하나?”

“죄질이 나쁜 이들은 목을 베겠지만, 대부분 광산으로 노역을 보낼 생각인가 봐요.”

“그렇군, 그건 그쪽에서 알아서 할테고. 우선 여기 상황부터 보고해.”

번의 물음에 우리아는 근심 어린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생각보다 식량난이 심각한 수준이에요. 반군들이 뒤를 생각하지 않고 낭비한 통에 당장 아이들 먹일 옥수수조차 없어요. 고아도 넘쳐나고요.”

수도도 사정은 빤하다. 애초에 1년 전부터 벨버른은 기아에 시달리고 있었지 않나? 긴 내전으로 농사는커녕, 사냥감까지 씨가 말라버렸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어요.”

모두의 눈이 그녀를 향했다.

“황자님께서 남겠다고 하신 이후, 사람들이 기대를 품고 있다는 거죠.”

“내가 신神이라도 되는 줄 아나 보군?”

“저들은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그게 절망으로 바뀔 때, 더는 버틸 기력이 없어질 거에요.”

뭐, 어느 정돈 예상하고 요세인에 있겠다 한 것이었다. 지금 이 기세를 잘 이끌어 ‘나의 편’을 만들어야 하니까.

"······?"

그의 눈이 반짝이는 걸 보며, 우리아는 번이 참 이상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이런 최악의 상황을 마치 즐기는 것 같지 않나?

“에비뉴까지 정확히 거리가 얼마나 되지?”

“이동수단에 따라 다르겠지요.”

“짐을 가득 실은 수레라면?”

“빨라도 보름은 걸릴 거에요. 바퀴가 빠지지 않는다면요.”

이미 황제에겐 승전소식을 알렸다. 에비뉴에서도 지금쯤 알고 있을 거고.

‘아버지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으실 것이니.’

황제란 남자는 정복욕은 강해도 민심엔 그리 흥미가 없는 사람이었다. 확실히 싸움엔 유능하지만, 아주 중요한 것은 모르고 있다.

‘민심이 곧 천심.’

아버지를 꺾을 무기는 바로 이것으로 시작할 것이다. 그것이 번이 요세인에 남기로 한 결정적 이유이기도 하다. 사실 황궁으로 돌아가 봐야, 딱히 할 것도 없지 않나?

‘여기 사람만 내 것으로 만들어도 나라 하나一國다.’

아버지는 그저 과거에 점령한 땅덩어리쯤으로 여기고 있겠지만, 벨버른은 왕국이었고 여기 사는 사람들은 아직 그것을 잊지 못하고 있다.

‘내 나라.’

국경이나 병사도 필요 없다. 그 땅에 사는 이들이 받들고 모시면, 그가 주인이 되는 것. 민심은 그리 무서운 거다.

-요사스러운 놈! 참으로 마음에 드는구나! 크크크!

악마가 좋아 죽는다. 번이 행하려는 작전이 악마나 신이 하는 것과 무척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좋아. 보름.”

번이 우리아와 성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네? 뭘요?”

“······?”

두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자, 번이 씨익 웃었다.

“집정관에게 가서 말해. 내가 돈 좀 꿔달라 한다고.”

“······!”

우리아가 농담도 참 재미없게 한다며 웃어넘기려는데, 번이 재차 말했다.

“쉽진 않을 거야. 그러니 대현자께도 도와달라고 해.”

지난 시간, 대현자는 자신만의 세력을 황궁에 구축하고 있었다. 비록 전체로 보면 미약할지라도, 그들이 대의를 위한다며 한목소리를 낸다면 그것을 막을 순 없을 것이다.

“아무리 아버지라도 그건 불가능할 겁니다. 폐하께서 윤허하시지 않으면 절대 안 될테고요.”

“그러니까 되게 하라고. 폐하께선 아마.. 이런 일까진 신경 쓰지 않으실 거야. 여기 수만의 백성들이 당신만 기다리고 있을 거야. 당신한테 달렸다고.”

번이 우리아의 가녀린 어깨를 눈으로 훑었다.

“아이들의 목숨이. 그 애들 다 죽일 거야?”

“하아..”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매몰차게 거절할 수도 없다.

하지만 황궁에 가서 뭘 어쩌겠는가? 그들이 벨버른을 어찌 생각하는지 너무도 잘 알지 않나? 황제는 새로운 전쟁을 하러 떠났고, 집정관은 그저 시간이 필요한 촌구석 정도로 여기고 있을 것이다.

자생하도록 내버려 두는 거다. 지독히도 잔인하고 냉혹한 처사지만, 여러 점령지를 다스려야 하는 상국上國 입장에선 가장 좋은 수이기도 하다. 벨버른이 자립할 정도가 되면 그때 슬쩍 숟가락만 얹으면 되는 거니까. 게다가 벨버른만 돕는다? 그러면 같은 처지에 있는 다른 점령지들이 어떤 마음을 가질까?

‘그러라고 하는 거지.’

하지만 번은 이 불합리를 모두가 느끼게 하려는 것이었다. 서럽고 더러워서 주먹이라도 쥐라고 부추기는 거다.

이런 번의 속을 모르는 우리아는 두통이 일어나는지 이마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당신은 가서 벨버른 전역에 파견 올 사제들과 함께 돌아오고. 아, 빈손으로 오면 모두가 실망할 거야. 그래도 신의 사자들인데, 희망이 되어야 하지 않겠어?”

“..굶주림을 믿음으로 채우라 하지 않았나요?”

“그건 그거고. 당장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으면, 신이고 나발이고 자식까지 잡아먹는 거 알잖아? 모금이라도 해보라고. 에비뉴 수도엔 아직 넉넉한 사람들 많잖아?”

번은 지금 두 여자에게 돈을 벌어오라고 시킨 것이다.

“······.”

“······.”

뭐 이런 남자가 다 있나?

뻔뻔한 기둥서방이라도 되는 양 구는 번을 어처구니없어서 멍하니 바라보는데, 그가 턱을 까딱했다.

“뭐해? 움직여. 지금 이 시각에도 배고파 방바닥을 뒹굴고 있는 어린 애들을 생각하라고.”

두 여자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 나가자, 융이 입을 가리고 쿡쿡 웃었다. 그녀들이 당한 것이 재미있나 보다.

“너도 놀지 말고, 시킨 거나 알아봐.”

“네엡!”

장난스럽게 구는 그녀를 보며 번이 피식 웃었다.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야.”

어떻게 보면 지금 상황이 참 웃기긴 하다.

번은 타인이다. 남의 나라 사람이고, 심지어 적국이었던 에비뉴의 황자다. 그런데 자국의 민병대였던 반군은 사람들을 괴롭혔고, 오히려 전혀 관련 없는 이가 돕겠다 나서고 있으니, 이건 마치 일제강점기에 일본 황실 사람이 조선 백성을 돕는 수준의 황당한 일 아니겠나?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봐. 아이들이라도 먹여야 해.”

독립군이 민심을 잃으니, 백성은 다른 곳에 기댄다.

“네, 빨리 알아볼게요.”

융이 생긋 웃었다. 봄날 만개해 흐드러진 벚꽃처럼 사랑스럽다. 누가 그녀를 마녀로 여길까? 사내의 애간장 녹이는 이 미소를 보면 말이다. 하지만 번이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왜 이래? 할멈.”

".."

못 볼걸 봤다는 듯 쓰게 입맛을 다시는 번.

벌떡 일어났다.

‘무슨 수 없냐?’

악마에게라도 손을 벌려야 할 판이다.

-허! 지금 나한테 인간을 도울 방법을 묻는 거냐?

물론, 번은 그런 것을 가릴 사람이 아니었고.

‘당연하지. 너도 어차피 사람한테 기생해야 하는 팔자잖아. 돕고 살면 좋지. 숙주 죽여서 좋을 게 없잖아? 또 아냐? 사람들이 고맙다고 네 동상이라도 세워줄지.’

-숙주라니? 이, 이 자식이 지금 누굴 기생충 따위에 비교하는 거냐!

“크크큭!”

악마의 반응이 재미있는지 웃으며 밖으로 향하는 번의 뒷모습을 보며 융이 코를 찡긋했다.

“치잇..”

역시 쉽지 않은 남자다.

기필코 번을 꼬셔보겠다 다시 다짐하는 그녀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누가 그러지 않았던가!

.

이렇게 번의 여자들이 사방으로 나설 때, 요세인에선 묘한 기류가 하나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는 결국 떠날 겁니다. 우리만 바보 되겠지요.”

나흘 후 시장.

장사치들이 가판에 이것저것 올려두긴 했지만, 그리 쓸만한 것은 없다. 공산품의 가격은 폭락하고, 식료품의 가격은 천정부지. 이미 시장경제는 무너진 지 오래였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지 않소?”

요세인에 거주하는 이들 중 힘깨나 쓰는 이들이 모여있었다.

“그리고 자존심도 없소? 도움 좀 받았다고 그에게 꼬랑지를 살랑살랑 흔들어대는 꼴이라니!”

아직 애국심이 남은 자들, 에비뉴를 적국으로 생각하는 자들까지. 그런 사람들에게 번 황자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다른 것은 잠시 접어두고서라도 일단은 힘을 합쳐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중년의 사내 한 명이 손에 든 공문을 보며 말했다. 오늘 아침 번 황자가 요세인 전역에 뿌린 것이다.

「우리는 지금 심각한 위기에 봉착해 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 중요한지 판단하는 것이며 손에 든 금덩이보다 빵 하나가 더 소중하다. 해서 본 황자는..」

내용은 그리 길지 않았다.

굶어 죽어가는 요세인의 아이들을 위하여 뭐라도 해보자는 것이었다.

“수작을 부리는 게 확실합니다. 귀족 놈들이 다 그렇지 않습니까? 심지어 그는 황족이라고요!”

“피 흘리지 않고 전리품을 챙기려는 수작일지도 모르지.”

불신이 팽배한 와중에, 공문을 들고 있는 사내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렇다해도 믿을 건 이거밖에 없소. 나는 그가 재물에 눈이 멀어 홀로 요세인의 성문을 열었다 생각하지 않소.”

그는 일어섰다. 더 말해봐야 설득이 힘들 것 같아서다.

“허어..! 그러다 뒤통수 맞는 거요!”

“나는 동참하지 않을 겁니다!”

대부분의 사내들이 머리를 흔들었지만, 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방해나 하지 마시오. 나는 뭐라도 믿어봐야겠으니.”

사내들이 코웃음을 쳤다.

“흥! 누가 이딴 사기극을 믿을까!”

“어디 한번 마음대로 해보시구려!”

“우리가 말리지 않아도, 누가 나서겠소이까! 허허..!”

사내는 무리를 떠나 시장을 나섰다.

그의 손에 들린 공문의 하단엔 이렇게 쓰여 있다.

「..해서 금이나 은, 철이나 동을 모아 에비뉴와 교역을 통해 아이들을 먹일 곡식과 바꾸고자 한다. 재화가 아무리 많은 들, 미래가 없다면 무슨 소용인가? 금덩이가 있다 한들, 당장 내 아이 먹일 죽 한 그릇 없다면 그게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정확한 배분을 약속하진 못하지만, 약속한다. 아이들부터, 여자부터, 약자부터 공평하게 먹일 것이다. 요세인의 미래를 위해 투자하라. 선의와 인의를 기다리겠다.」

반군을 물리친 공로는 알지만, 적국이었던 곳의 황자가 이리 말해봐야 누가 듣겠는가?

“······.”

사내는 집으로 갔다. 이미 아내와 아이들은 모두 죽었다. 휑한 집엔 반기는 이 하나 없었다.

작은 방구석으로 가서 바닥에 깔아둔 나무판을 들췄다. 파놓은 구덩이에 철검 두 자루가 나란히 누워있다. 한때 용병으로 생활할 때 목숨처럼 아꼈던 물건이었지만, 이젠 손에서 놓았다. 아내와 아이들이 죽던 그 날, 그 역시 모든 의지를 잃었으니까.

철컥, 철컥.

검을 들고 집을 나섰다. 영주성으로 가는 그의 발걸음이 무겁다.

이게 돈이 되려나?

모르겠다. 그가 가진 건, 이게 전부였으니까.

터덜터덜 걷던 그.

“······?”

점차 그의 눈이 커진다.

“어? 어어어?”

골목을 돌아서자, 입에서 절로 탄성이 터졌다.

-밀지 마세요!

-아우! 이거 줄이 왜 이렇게 길어?

-그냥 여기 놓고 갈까?

-황자님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가야지!

-하긴!

백여 명의 사람들이 영주 성에서부터 길게 늘어서 있었다. 그들은 각자 소중하게 아끼던 물건들을 손에 들고 나왔는데, 누군가는 남편이 청혼할 때 준 금붙이를, 또 누군가는 대대로 이어진 가문의 보물을 가지고 나왔다.

“..이게..?”

그는 믿을 수가 없었다.

타인을 위해 선뜻 보물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았던 거다.

하지만,

-캬캬캬캬캬! 고작 이거냐?

누군가의 머릿속에 악마의 비웃음 소리가 들렸다.

악마는 모른다.

이 세계. 단 한 사람의 기억 속에만 있는 '금 모으기 운동'이 이렇게 재현되고 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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