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자 1 #
한편, 성 밖에선 페트릭이 굳은 얼굴로 외쳤다.
“기다려라.”
“하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어서!”
솔개부대의 장수 몇이 황자님께 가봐야 하는 것 아니냐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페트릭은 움직이지 않는다. 이곳에 와서 가장 먼저 받은 명령이,
-내가 지시할 때까지, 단 한걸음도 다가서지 마라.
이러했으니, 감히 누구 말씀이라고 어길까? 게다가 페트릭은 이미 지난 1년간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번의 말을 들어서 잘못된 일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을 말이다.
“걱정되는 마음 알지만, 기다려보세요. 게다가 저들은 황자님을 어쩌지 못할 겁니다.”
여자가 다가왔다. 우리아다.
“군사! 지금 저 안에 미친놈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시오? 그 놈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단 말이요! 악에 받친 놈들이 그런 걸 따져가면서 움직이겠느냐 이 말이오!”
장수 하나가 버럭 외쳤지만, 우리아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렇다곤 해도 우리가 발을 떼는 순간, 불난 집에 기름 붓는 꼴이 될 거예요. 자칫 저들에게 명분을 줄 수 있습니다.”
그랬다. 번 혼자라면 대놓고 공격할 놈들이 없겠지만, 혼전이 일어나면 또 모른다. 칼엔 눈이 없으니까.
“그리고.. 저분들도 성공한 것 같고요.”
우리아가 뒤쪽을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마녀와 성녀.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것 같지만, 이럴 때는 믿음직한 동료다.
“그분을 좀 더 믿어보세요.”
“하지만.. 끄응..”
페트릭과 우리아는 서로를 보며 눈을 맞추곤, 끄덕였다.
믿자. 지금은 그래야 할 때다.
모두가 알고 있다. 반군이 황자를 어쩌지 못하리라는 것은.
물론, 세상일이 다 그렇게 판에 박힌 듯 흘러가는 건 아니다. 지금 이 경우도 마찬가지.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느냔 말이다. 번이 마윈을 꺾고, 홀로 성안으로 들어갈 거라는 것을. 정말 심장이 덜컥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들은 믿고 기다린다.
번, 그가 명령할때까지.
밖이 초조한 이때, 안쪽에선.
-으으..
-머, 멈추시오!
-서라..!
반군이 번에게 외치며 초초해하고 있었다.
밖의 예상대로 포위는 했지만, 차마 번을 공격하진 못한다.
‘이래서 빽이 중요한 거라니까.’
번 역시 그들이 어떤 상황에 봉착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21세기에서도 버젓이 일어나던 일. 미국 기자 하나 죽었다고 중동을 초토화하고, 미국 마약단속국 요원 하나 죽었다고 콜롬비아 카르텔을 폭격해버렸었다. 그 후엔 미국인은 어디를 가나 불가침 대우를 받았는데, 아무리 개차반 같은 조직도 미국인은 쉽게 다루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마피아가 아무리 눈에 뵈는 게 없는 범죄자라 해도 경찰은 안 죽이는 것처럼, 그 후환을 뻔히 눈에 그릴 수 있는데, 함부로 행동하진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이처럼 모든 게 그랬다. 지금 상황도 마찬가지. 에비뉴가 뒤에 버티고 있는 이상 번은 자유롭다. 적어도 목숨은 보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맹수가 날뛰는데, 그 맹수를 죽일 수도 없는 상황이 오면 어떻게 될까?
“히이이익!”
“무, 물러서지 마라!”
이렇게 된다.
번은 사령관을 향해 똑바로 걸어갔다. 그러자 모세의 기적처럼 반군으로 막혔던 벽이 열린다.
“저분의 칼에 죽으면 저주받을 거야..”
“아까 봤잖아. 영혼조차 남기지 못하는 거.”
“으으.. 시, 싫어.”
신神이 버젓이 힘을 쓰는 세계다. 무속신앙이든, 토속신앙이든, 뭐든 이곳의 사람들은 이런 쪽으론 아주 민감했다. 쭈뼛쭈뼛 물러서는 그들의 얼굴엔 이미 번과 싸우려는 일말의 의지조차 들어있지 않았다. 어쩌다 보니 반군이 되어 여기까지 오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신을 부정하고 지옥의 구렁텅이로 떨어져 영원히 고통받길 바라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크크크..’
물론 번은 이런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으며, 충분히 이용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별 능력도 없는 허울만 좋고 겉모습뿐인 짝퉁 신창이니, 신검이니 하는 것들을 계속 보이는 거였고. 이런 단체전에선 흐름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이미 파악한 지 오래였다.
재미있지 않나? 스타워즈 영화에 나오는 광선검을 모양만 똑같이 만든 장난감으로 같은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게.
‘이게 바로 포스라는 거지. 크크크.’
진실과 거짓이 혼란스럽게 마구 엉키면,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된다.
-그건 또 뭐냐?
조용히 있는 가 싶던 악마가 또 껴든다.
‘몰라도 돼.’
뚜벅, 뚜벅.
번이 계단을 올랐다.
“······.”
사령관은 번을 노려보며 입을 꾸욱 다물고 섰다.
두 사람의 거리가 좁혀진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협상이라도 할라치면 뭘 요구해야 하지? 일단 시간을 달라 할까? 사령관의 눈이 복잡하게 흔들리는데, 번이 바짝 다가섰다.
이제 한 계단만 남겨놓은 상태.
“..나는..”
입을 떼려던 사령관. 그의 눈이 급격하게 뜨였다.
당연히 그는 번이 멈출 줄 알고, 대화를 시작하려 했다. 적당히 무게를 잡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는 지금 번이 어떤 메시지를 듣고 있는지 까맣고 모르고 있다.
「머리가 단단해집니다.」
그리고 이어진,
빠악-!
"크헉!"
사령관도 나름 한가락 하는 이였다. 하지만 이런 기습을 그 누가 피할 수 있을까? 아래에서부터 올라와 그대로 그의 안면을 들이받는 머리통은 너무도 강력했으며 코뼈를 완전히 부숴버렸다.
“으..윽..!”
뒤로 넘어가며 비틀거리는 그의 몸을 누군가 지탱해준다. 하지만 고맙다는 말은 못하겠다. 멱살을 움켜쥔 것이 번의 손이었으니까.
“······?”
상체가 끌려오며 그는 다시 보게 된다.
번의 머리통을.
빠악-!
“커헉!”
같은 부위에 두 번이나 들이 받친 사령관은 고통에 치를 떨면서, 번의 손을 뿌리치려 노력한다. 하지만 번이 괜히 대검을 들고 다니는 게 아니었다. 그게 다 근력 훈련이자, 평소에도 힘을 기르기 위한 훈련이었던 거다.
빠악-!
빡!
얼굴이 완전히 함몰되어, 피가 낭자한 사령관. 이제 그는 끄으으.. 신음을 흘리며 온몸을 뒤틀 뿐이었다.
“그, 그만.. 해..”
지휘관이 너무도 무력하게 무너지고 있음에도 이 순간, 누구도 움직일 수 없다.
"······."
번은 사령관을 내려보다, 주먹을 말아쥐고는 후욱! 찍어버린다.
쿠웅!
번의 주먹이 사령관의 얼굴을 때리고, 뒤통수는 거칠게 바닥에 찍혔다. 추욱, 늘어진 그의 몸을 무심히 바라보던 번. 스윽 일어나 몸을 펴고, 위를 올려본다. 성벽 위엔 아직도 반군 장수들이 늘어서 있었다.
“다음.”
번이 말했다.
그리고 이때, 모두는 알게 된다.
아직 저 황자의 싸움은 끝난 게 아니라고.
그가 아까 말했지 않은가?
여기 있는 전부와 싸우겠다고 말이다.
바르르.. 몸이 떨린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등골이 오싹하게 돋은 소름이 가시질 않았다.
단 한 사람. 아니, 저걸 사람이라 할 수 있나?
지위, 신분, 상황, 믿음, 처지, 분위기와 스스로의 무력을 완벽하게 이용하며 어슬렁거리는 포식자. 그 하나로 인해 모두가 떨고 있었다.
-캬캬캬! 이놈들 완전히 얼어버렸구나! 가자! 다 죽여버리자! 피가 모자라다!
악마의 흥분이 번의 가슴에도 그대로 전이된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의 머리는 더욱 차분해진다. 주변을 압도하고 있지만, 여긴 살얼음판과 같다. 쩌저적- 발밑이 갈라지는 순간, 추락해 차가운 물속으로 떨어져 다시는 올라오지 못할.
‘몇 놈만 더 잡자.’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
더 보여야 한다. 너희는 나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번이 야생에서 들개로 살 때도 이런 일이 있었다.
무리의 영역에 늙은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났는데, 놈은 그냥 지나치지 않고 자리를 잡아버렸다. 들개 우두머리는 깨달았다. 놈은 허약하고, 늙었다고. 떠나지 않는 게 아니라, 못하는 거라고.
그래서 싸웠다.
하지만 결과는 들개무리의 전멸.
호랑이는 늙어도 호랑이였고, 개는 개였다. 상황은 뒤바뀌었지만, 지금이 딱 그때의 분위기와 흡사하다.
이제 저들은 인식할 것이다.
저 자는 우리 따위가 어찌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어서 이 재앙이 지나가라고 빌면서.
“네가 하겠나?”
성벽을 완전히 올라간 번이 가장 가까운 사내에게 물었다.
"······!"
도리도리.
세차게 머리를 흔들며 뒤로 물러나는 사내를 보며 번은 성큼 걸었다. 그와 동시에 사내들은 후욱 물러났다.
“그럼 네가 하겠나?”
“아, 아닙니다..”
당황해서 우물쭈물하며 정신없이 뒷걸음치던 사내가 우당탕 넘어졌다.
그리고 이 순간,
번은 느낀다. 이겼다고.
“페트리이이이이익-!”
그의 목청에서 터진 고함이 사방으로 천둥처럼 터졌다.
오싸아아악-!
근처의 이들이 번의 목소리에 치를 떨고 있을 때,
-충!
저쪽에선 오매불망 기다리던 페트릭이 검을 잡고, 자세를 취했다.
“뭣들 하는가! 어서 죄인들을 진압하지 않고!”
지가 움직이지 말라 해놓고 이리 말한다. 하지만 뭔들 어떠한가?
승리했으면 그뿐인 것을!
-충! 솔개부대! 앞으로!
-충!
-충!
열 맞춰 기세 좋게 성문으로 다가오는 그들을 보며 성벽 위 반군 하나가 털썩 주저앉았다.
“다.. 끝났어..”
수천의 반군이 한 사람에게 제압되었다.
-우와아아아아아!
-황자님이 이겼다!
-황자님 최고!
죽음과도 같은 적막함만 감돌던 민가에서 아이들이 두 손을 번쩍 들고 뛰쳐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번은 그들을 보며 깨닫는다. 누군가의 결심, 혹은 행동이 수많은 이들의 삶에 이리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
.
.
번 황자의 솔개부대가 요세인에 주둔한 것도 어느새 이틀이 지났다.
“이것 좀, 꼭 전해주시우.”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파가 솔개부대원에게 주머니 하나를 내민다. 이것이 무엇인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당신 형편도 뻔하면서 아끼고 아껴두었던 곡식 몇 줌.
“예.”
요세인은 빠르게 회복하고 있었다.
반군에 잡혀있던 사람들은 이를 갈며 민병대를 조직해 번을 돕길 원했다. 얼마나 반군에게 당해왔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넓은 공터엔 줄에 결박당한 반군들이 콩나물처럼 빼곡하게 앉아 있었다. 반군의 숫자가 솔개부대의 열 배가 넘었지만, 그들은 대항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이미 눈동자엔 삶의 의지조차 잃어가고 있었다.
“그 황자님께서 이제 열두 살이 되었다지?”
“허미.. 참으로 잘 자라셨구먼그래.
“에비뉴의 후계자라더니, 확실히 남달르네. 그려. 나쁜놈의 자식인줄 알았더니..”
"예끼! 이사람아, 우릴 구해주신 은인한테 몬소리여!"
둘만 모이면 번 황자에 대한 얘기뿐이었다. 일검에 반군 백을 날려버렸다느니, 한칼에 적장을 썰어버렸다느니 하는 부풀어진 이야기가 전설처럼 요세인 밖으로 퍼져가고 있었는데, 그만큼 좋은 거다. 이들에게 번은 구세주나 다름없었으니까.
‘아! 좋아!’
종종걸음으로 바삐 움직이는 여인. 성녀 가루비다.
어떨 때는 참으로 이성적인 여자였지만, 간혹 그녀는 특유의 증세가 도지면 이렇게 한없이 팔랑거릴 때가 있는데, 오늘이 딱 그랬다.
‘세상은 아름다워! 예뻐!’
만나는 사람들 얼굴에도 행복이 가득하고, 피해도 거의 없이 반군을 이겼다. 이보다 더한 경사가 또 있을까? 삼삼오오 모여 번의 칭찬을 할 때면 그녀가 더 우쭐해졌다. 세속의 일희일비에 무관심해야 하는 그녀였지만, 가끔 이렇게 본분을 망각할 때가 있었다.
“히히히!”
산책 겸 주변을 한 바퀴 돌고, 영주 성으로 들어간 그녀.
“······.”
순식간에 그녀의 조증으로 들뜬 기분이 싸늘하게 잡쳐버렸다.
“이.. 씨..”
영주가 쓰던 의자에 앉아있는 사내. 번이 보인다. 요세인이 반군에게 점령당한 날 영주는 이미 살해되었는데, 그 빈 의자에 번이 영주대리로 앉아 있는 것이었다. 문제는 팔걸이에 엉덩이를 딱 붙이고, 요사스럽게 웃고 있는 한 여자랄까?
“호호호! 이대로 어둠의 마력을 쌓아가기만 하면 몇 해 지나지 않아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으실 거에요.”
“어느 정도를 말하는 거지?”
번은 이번 전투에서 부족함을 느꼈다. 남들은 대단하다며 엄지를 치켜세웠지만, 이건 순수하게 실력으로 이긴 것이 아니지 않나? 언제 어느 상황에서도 적을 무찌를 힘이 필요했다.
“인간 중엔 적수가 없을 정도로요!”
“으음..”
-저 여자의 말이 맞다. 지금처럼만 해. 어둠의 정수만 완성한다면 머지않아 넌 최강이 될 거다. 대신! 내게도 그만큼 상응하는 대가를 줘야겠지만. 캬캬캬!
악마까지 거들었지만, 번의 표정은 펴지지 않았다. 그의 눈이 막 들어온 가루비를 향한다.
“그걸론 부족해.”
“네?”
마녀 융이 고개를 갸웃했다.
“신神도 죽일 수 있을 정도가 돼야 한다.”
-캬캬캬! 이놈 보게? 그래! 신도 죽여버리자! 이놈 저놈 모조리 죽여버리는 거다!
그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래야 시궁창보다 더 거지 같던 삶을 따져 물을 수 있을 테니까.
흠칫.
번의 말에 가루비가 움찔했다.
“······.”
번이 팔을 들어 가루비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린다. 가까이 오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