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판 #
미쳤다.
이 황자는 완전히 정신이 나간 것이 분명하다. 세상 물정을 얼마나 모르면 이리 거만한가. 온실도 그냥 온실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제, 야생의 잡초가 얼마나 질기고 쓰디쓴지 알게 될 거다.
“쓰읍..”
-낄낄낄..
-돌았구만!
-그래, 어디 해 보슈!
-다음은 내가 나가지! 음하하하하!
뒤에서 들려오는 야유에 마윈은 김이 팍 새는 기분이었다. 덕분에 조금 전 느낀 어떤 불길함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조심하셔야 할 거요.”
이 어린 황자가 에비뉴 수도에서 열린 경연 때 카이사르 황자의 불알을 깨버렸다든지, 신창을 소환했다든지 하는 얘기는 풍문으로 들었었다. 소문이란 게 열이면 하나를 믿어야 한다지만, 백번 양보해서 다 믿어줘도 결국 애들 장난이란 거다. 신창? 웃기는 소리. 그런 것이 있었다면, 반군이 아직 살아 있었겠나? 기본도 부족해서 급소나 공격해대는 철부지란 거겠지.
“선공을 양보할 테니, 어디 마음껏 해보시구려.”
"······."
비웃으며 말하는 마윈을 번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캬캬캬! 시작해볼까?
악마가 날뛰었다.
번도 이제 악마를 말리지 않는다. 쌍검을 든 저 사내. 딱 봐도 고수高手다. 하지만 놈은 얕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놈의 생에 가장 큰 후회이자, 미련으로 남을 것이다.
철컥.
번이 두 손으로 검을 쥐고 앞으로 나서자, 갑옷의 이음새가 비명을 지르며 움직였다.
네 걸음.
세 걸음.
후우우웅-!
번의 검이 휘둘러졌다.
보통 어린 검사들은 근력과 기술이 충분하지 않기에 이리 큰 대검은 쓰지 않는다. 게다가 검이란 무기가 본래 베고 찌르는 것인데, 이런 큰 것은 ‘부수는’ 것에 쓰임이 더 많다. 주로 기사들의 갑옷 따위를 말이다. 하지만 마윈은 경량 가죽 갑옷만 걸친 상태. 날랜 몸놀림이 장기인 사람이다.
‘역시 애송이!’
흥! 코웃음 치며 뒤로 스텝을 밟는 마윈.
그런데,
“어엇?”
충분히 피할 수 있을 만큼 간격을 벌렸다고 생각했건만, 허공을 격하고 날아오는 검이 기이한 각도로 뒤틀리더니 쑤욱 늘어나는 게 아닌가?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번의 팔이 어깨부터 길어진 거다. 고작 한 뼘 정도였지만, 손톱만큼의 틈이 생사를 가르는 실전에서 이 차이는 아주 크다.
“흐읍..!”
깡-!
양쪽에 잡은 검을 모아 번의 검을 쳐내며 옆으로 훌쩍 물러나는 마윈! 그의 얼굴에 낭패한 기색이 역력하다.
‘뭐야 대체? 팔을 굽폈다 편 건가?'
철퇴에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무슨 놈의 힘이..!’
머리가 순간적으로 피잉-! 현기증이 돌 정도였고, 손이 저릿저릿 쥔 검을 놓치지 않으려 애써야 했다.
더 생각할 시간따윈 없다.
“합!”
번이 기함성과 함께, 후욱- 돌아간 검을 다시 횡으로 그어 베며 마윈을 따라붙은 것이다.
“이크!”
땅에 발을 디디자마자, 다시 훌쩍 뛰는 마윈. 아슬아슬하게 그의 코끝을 스친 대검의 날에 앞 머리칼이 우수수 잘려나갔다.
“제법!”
하지만 여기까지다.
마윈은 이제 번을 얕보지 않는다. 두 눈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대검의 궤적을 훑고 있었고, 번의 다리와 발이 향하는 각도, 축으로 얼마의 힘을 쓰며 허리를 돌리는지까지 세세하게 살폈다. 오랜 전장의 경험이 그에겐 있었고, 두 손을 양쪽으로 펴며 공격을 준비했다.
-뭐 하는 거야! 날려버리라고!
-사정을 너무 봐주는 거 아니야?
-죽여버려! 마윈!
남들이 보기엔 애송이 황자가 가누지도 못하는 큰 검을 전력으로 휘두르며 마윈을 쫓는 것으로 보였다. 허우적거리는 그 폼에 실소를 흘리는 이들도 있었고, 여유롭게 슬쩍슬쩍 피하는 마윈이 한참 강자로 느껴졌다.
하지만 번은,
‘지금! 잡아!’
-캬캬캬캬! 알았다고!
악마에게 시작을 알렸다.
저 지평선에서 떠오르는 푸르스름한 햇살이 전설의 첫날을 깨우는 서막이라는 것을 아직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고 있을 때,
“······?”
마윈은 뭔가 아주 더럽고, 불쾌하며 소름 끼치는 것이 자신의 몸에 들러붙었다는 것을 느꼈다. 그건 아주 은밀했으며 형체가 없는 아지랑이 같은 것이어서 지켜보는 이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었다.
“······!”
씨익.
연달아 검을 휘두르는 번의 입가에 미소가 피었다.
고작 몇 년 페트릭에게 배운 검술로 실전에서 날고 기는 베테랑을 잡을 순 없다. 하지만 그에겐 다른 것들이 있지 않은가? 지금, 그의 머릿속에선 수많은 메시지가 죽죽 터지고 있었다.
「뼈의 강도가 최고조에 이르렀습니다.」
「축적한 아드레날린을 사용합니다.」
「몸놀림이 빨라집니다.」
「힘이 육체의 한계점에 도달합니다.」
몸의 모든 세포 하나하나가 의지를 감지하고, 전투에 나선다.
「머리가 단단해집니다.」
무수히 많은 삶에서 얻어진 다량의 능력들이 일제히 대가리를 쳐들었다.
후우우우웅-!
“허업..!”
한 뼘 정도 거리를 두고 번의 검을 피하며 돌던 마윈은 갑자기 성큼 검이 날아오자, 급히 허리를 빼며 반사적으로 팔을 휘둘렀다. 이렇게라도 위협하지 않으면 다음 날아올 공격을 피하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의 검 끝이 정확히 번의 어깨와 팔 갑옷 틈으로 파고 들어가고,
-안돼! 그만둬어어어어!
사령관이 성벽 위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만, 이미 늦었다.
‘씨발! 될 대로 돼라지!’
저쪽엔 성녀도 있다니, 뭐 어떻게든 치료하지 않겠나? 일단은 이 싸움을 끝내야 할 것 같았다. 생각보다 만만치 않지 않은가? 봐주면서 놀 거린 아닌 듯했다. 게다가 이 찝찝함. 어깨에 귀신 한 마리 올라타, 지근지근 밟고 있는 것 같지 않나? 생각 같아선 저 놈의 목을 뚫어버리고 싶었지만..
‘끝내자! 애송아!’
이만하면 많이 참은 거다.
아무래도 작고 가벼운 마윈의 검이 더 빨랐다. 번을 향해 호기롭게 날아간 검.
어깨가 다치면 검은 뚝! 멎을 거다. 고통도 고통이거니와, 신경 자체가 끊어져 힘이 전달되지 않는다. 많은 전투를 해본 그답게 이런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는듯하다.
그런데..
“······.”
“······?”
이 짧은 순간.
마주친 시선에서 마윈은 심장이 멎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몸은 어떤 명령을 받아들일 만큼의 여유가 없다. 그런데 머리는 경고한다.
그만해! 그만두라고!
그를 이제까지 살게 한 본능이자, 생물이 가진 위험신호가 말한다. 위험하니 멈추라고. 그러지 않으면 죽는다고!
그그그그극!
칼이 번의 어깨로 파고들었다.
뼈가 갈려 나가는 기괴하고 끔찍한 소음이 터졌다.
「고통을 차단합니다.」
「물의 기운이 출혈을 차단합니다.」
「오색 마나가 상처 부위의 치료를 시작합니다.」
「혈액이 독소를 체외로 배출합니다.」
하지만,
“······!”
마윈의 계산대로라면 멈춰야 했을 번의 검은 더욱 빨라졌다.
후우우웅-!
심지어 그 날에 아지랑이 같은 빛이 맺혔다.
이름난 검사들의 마나는 아니었다. 오러라고 불리는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어떤 것들에겐 아주 치명적이고 무서운 기운이 들러붙은 거다.
-캬캬캬캬! 이놈은 내 꺼다!
마기魔氣였다.
콰드드드드드득-!
대검이 마윈의 팔뚝을 갈랐다.
피부는 뭉개지듯 짓눌렸고, 이어서 살과 근육도 모자라 뼈까지 나무토막처럼 뚝 부러진다.
팔을 지난 대검은 더 나아간다.
몸통을 파고들어 갈비를 부수고, 장기를 자른다. 이윽고, 척추를 뚜욱! 가르고 지나, 반대편으로 튀어나왔을 때 덜렁거리는 나머지 팔 하나까지 잘라낸 뒤, 후욱-! 핏물을 하늘에 털며 궤적을 그렸다.
“······.”
투욱.
투우욱. 툭.
마윈의 동강 난 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 순간,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소 뒷걸음에 개구리 밟은 격으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마윈이 누군가? 아무리 방심했다고 쳐도 이게 말이 되는 결과인가?
“후우..”
휘둘렀던 검을 내리고, 한 손을 어깨에 가져가는 번. 아직도 꽂혀 있는 마윈의 검을 잡아 뽑았다.
쨍그랑.
바닥에 아무렇지 않게 던져버리며 성벽을 향해 가슴을 펴고 우렁차게 외치는 그의 모습에 모두가 꿈에서 화들짝 깨어난다.
“다음-!”
-우와아아아아아!
솔개부대 500인이 동시에 내지른 함성은 요세인 전역을 뒤흔들었다. 그들 역시 침착함을 가장하며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지만, 얼마나 가슴 졸였겠는가?
하지만 번은 이겼고, 언제나처럼 승리했다.
그런데 이때였다.
스스스스스스..
널브러진 마윈의 몸에 괴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어엇?
-저, 저거?
-히이익! 저게 뭐야!
몬스터 중에 스펙터라는 것이 있다. 사람의 정신을 갉아먹는 유령 같은 놈인데, 전장의 원혼이나 더러운 영혼의 찌꺼기 따위가 뭉쳐 만들어진 사념체다. 그러한 것이 지금 마윈의 몸에 달라붙어 있다.
-캬캬캬캬! 이 맛이다! 이거라고!
악마가 마윈의 몸뚱이를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다. 그 영혼까지 송두리째 빨아먹는 악마는 세상을 다 얻은 목소리로 즐거워한다. 반대로 그걸 지켜보는 사람들은 마윈의 몸이 빠르게 썩어가자, 침을 꿀꺽 넘기며 몸을 떨었다.
이때, 번의 대검에서 우윳빛 광채가 솟구쳤다.
“너희는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었다!”
-저건?
-소문이 사실이었단 말인가!
-신神이..!
눈부실 정도로 새하얀 대검은 떠오르는 햇살을 등지고, 모두의 눈에 똑똑히 각인되었다. 지금 번의 모습은 전설의 어떤 것들과 겹쳐 보였고, 그가 하는 말은 거부할 수 없는 신앙과도 같이 울려퍼졌다.
“내 검이 단죄할 것이다! 내 의지가 너희의 영혼조차 멸滅할 것이다!”
실제론 악마가 마윈을 잡아먹고 있었지만, 이 모습을 보고 있는 자들에겐 번이 신의 힘으로 심판을 내린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번에겐 성녀도 있다.
“아직 멀었나요?”
물론 그녀는 다른 일로 바빴지만 말이다.
“기다리라고요! 쫌!”
마녀가 바삐 인형을 주무르다가,
“됐어요!”
황급히 성녀의 품으로 넘겼다. 아슬아슬했다.
고오오오오-!
인형을 가슴에 꼭 끌어안고, 눈을 질끈 감은 성녀의 옷이 부풀기 시작했다. 머리칼이 사방으로 흩날리고, 주변의 흙먼지가 팍팍- 날아갔다.
“빛이여..!”
그녀의 입에서 놀라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세상에 없는듯한 그런 종류의.
“여기에 머물라!”
그리고 이어진.
요정의, 천사의, 어쩌면 그 이상으로 신성한 존재의 그것 같은 목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한 줄기 빛의 기둥이 번개처럼 떨어졌고, 그것은 정확히 인형을 때렸다.
푸르르르르..
인형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고통에 떨며 사지를 흔들었는데, 성녀는 그런 인형을 젖가슴 사이에 꽉 잡고 놓치지 않았다.
인형은 마녀가 만든 어둠의 산물이었다. 당연히 신성력은 인형에게 쥐약이나 천적 같은 것이었고, 주로 대상을 저주할 때 쓰는 매개로 만드는 이건 본뜬 누군가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이 경우엔 아주 기이하게 말이다.
스스스스스스-!
번의 어깨에 난 상처가 빠르게 아물었다.
눈처럼 하얀 것이 꽃가루처럼 번의 어깨로 스며들더니,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하게 복원한다. 데미지는 인형이 받고, 좋은 효과만 남아 번에게 흘러들었다.
「인형전이가 완료되었습니다.」
「상처가 완전히 아물었습니다.」
「감염된 세포를 모두 치유했습니다.」
「자상刺傷에서 철鐵과 한寒의 기운을 흡수했습니다.」
악마의 지식과 마녀의 솜씨, 성녀의 신성력이 만들어낸 기상천외한 작품이었다.
이름하여 번 전용 원격 메딕medic!
-이럴수가..!
-저, 저!
성벽 위의 반군이 경악했다.
이제 그들은 황제도 모자라, 신까지 등진 악의 무리로 전락해버리는 분위기 아닌가?
“다음!”
번이 다시 외쳤다.
흠칫! 움찔!
절로 조금씩 뒷걸음치는 사람들.
스스스스..
이제 마윈의 몸은 흙과 구분이 힘들 정도로 썩어 문드러졌고, 그 주변으론 바라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치밀 정도로 음험한 기운이 넘실댔다. 신에게 대항하다가 저주에 받아 육신조차 남기지 못하고 소멸하여버린 죄인의 모습. 딱 그렇게 보였다.
“너희가 오지 않겠다면.”
번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내가 가지.”
고작 한 사람.
수천이 번의 움직임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이 중 그 누구도 막아서지 못했으며, 입조차 벙끗하지 않았다.
번은 어느새 성문 앞까지 도달해있었다.
“열어라.”
묵직한 그 음성만 정적 속에 울렸다.
“······.”
“······.”
꿀꺽, 꿀꺽.
돋아난 소름은 가시질 않았고, 그 어떤 개입도 용납하지 않는 그의 영역 속에서 다시 울리는 목소리.
“열라 했다-!”
-아, 안돼!
성벽 위의 사령관이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그그그그그그그극!
육중한 성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슨 짓이야! 누구야?
-모르겠습니다! 멍청한 놈들이..!
-막아! 못 들어오게 하라고!
하지만 사령관이 성벽을 내려가 급하게 성문 쪽으로 향하는 계단에 섰을 땐, 이미 아래엔 수많은 반군 병사에게 둘러싸여 위를 올려보는 한 사람이 있었으니.
“······.”
“······.”
양 떼 사이에 호랑이가 뛰어들었다.
반군은 움찔움찔 무기조차 제대로 들지 못했고, 번은 당장에라도 발톱을 뽑아들 것처럼 어슬렁댔다.
“다음엔 네가 하겠나?”
번이 칼을 사령관에게 겨누며 비릿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