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맞장 2 #
“그, 그놈이 뭐?”
사령관이 머리를 홱! 돌렸다.
어찌나 놀랐는지 콧물이 튀길 정도다. 하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쓰는 사람은 없다. 그만큼 황당한 이야기가 들려왔으니까.
“황자가 병력을 이끌고, 직접 성 밖에 와 있습니다! 사령관님과의 면담을 요청하고 있는데, 그게.. 심상치가 않습니다!”
황자가 전투에 직접 나서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간, 두어 번 있었나? 뭐, 잡아도 골치 아픈 놈이라 이쪽에서도 원하는 바는 아니었다. 물론, 전쟁이란 게 어떻게 될지 한 치 앞도 모르는 일이기에 지휘관들은 멀찌감치 떨어져 지켜보거나 병사들만 보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직접 왔다?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으음.”
그들은 서둘러 성벽 위로 올라갔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사위는 어둡지만, 일렁이는 횃불과 혹시 모를 침입에 대비해 깔아둔 수정구 덕에 시야는 밝았다. 평소 사람들이 가장 많이 드나드는 북문 앞으로 황자의 오백 병사가 늘어서 있었는데, 그들 앞에 백마에 올라탄 남자가 눈에 띈다.
“저 덩치만 큰 애새끼가 뭘 믿고..”
사실이었다.
황자는 직접 이곳에 와 있었다.
“혹시 우리와 협상하려는 것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다. 여기 요세인은 고작 오백의 병력으로 어찌해 볼 수준이 아니었으니까. 사지 멀쩡한 반군의 숫자만 칠천 가까이 되고, 인질까지 무장시켜 써먹으면 가용할 수 있는 병력은 곱에 곱절로 늘어난다.
그때였다.
저 아래 황자의 목에서 벼락처럼 커다란 외침이 울렸다.
“들어라!”
고작 목소리일 뿐인데, 거기에서 뿜어지는 박력에 성벽 위의 사내들은 피부가 저리다.
“애새끼..”
“피는 못 속인다는 건가..”
저놈을 누가 열두 살로 보겠는가?
저건 괴물이다. 벌써 이럴 진데, 10년만 지나면 어찌 될까?
“너희는 대 에비뉴의 황실에 반기를 든 간악무도한 죄인이며! 지금 이 순간에도 지고하신 황제 폐하의 백성들을 인질로 잡고 흥정을 벌이는 죄를 범하고 있다!”
쩌렁쩌렁한 목소리는 성벽을 넘어, 안쪽까지 파고들었다. 집에서 벌벌 떨고 있는 사람들은 그 목소리를 희망 삼아 두 손을 꼬옥 부여잡고 있었는데, 이 무렵 해가 슬며시 떠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지난 1년간 계속해서 너희에게 투항을 권고했지만, 너희는 듣지 않았다!”
황자의 말이 계속될수록 분위기가 묘해지는 것을 느낀 참모진이 반군 사령관에게 말했다.
“듣고만 계실 겁니까? 저 망할 놈이 우리만 나쁜 놈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서 인정하면 우린 살길이 없습니다.”
사령관이 끄덕이며 버럭 외쳤다.
“내가 어찌 죄인이란 말이더냐! 나는 독립군이다! 이들 또한, 너희가 강제로 빼앗은 우리의 나라를 탈환하고자 모인 투사들이며 명예로운 전사다! 악독한 것은 너희가 아니더냐!”
그래, 그런 사명으로 여태껏 버티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번의 말에 대부분의 사람들의 얼굴엔 수치심이 피어올랐다.
“무엇이 명예고, 무엇이 투쟁이란 말이더냐! 너희의 칼에 죽어간 무고한 사람들은 무슨 죄더냐! 아녀자를 겁탈하고, 남의 곡식을 빼앗는 것이 자랑스러운 일이더냐!”
심지어 이들은 지금도 여기 요세인에서 그러고 있었다.
“…….”
사령관은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막을 수 없었다. 반군은 대부분 들개 같은 이들이었다. 이들은 군기만으론 통제할 수 있는 수준을 아득히 벗어났고, 원하는 것을 주지 않으면 아군도 물어뜯었다.
술, 여자, 쾌락.
대의를 위해 어쩔 수 없는 희생을 감수해야만 했다.
“허나!”
번이 말에서 내렸다.
“……!”
“……?”
반군도 놀랐지만, 페트릭 또한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화들짝 몸을 떨며 외쳤다.
“황자님!!”
번이 칼 한 자루 쥐고, 성벽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기 때문이었다. 조금만 더 가면 활이나 석궁의 사정권에 든다. 사정거리가 긴 관통 마법 같은 것들에도 노출될 것이다.
“아, 안됩니다! 황자님!”
페트릭이 급히 따르려 했지만, 번이 칼을 수평으로 들며 외쳤다.
“너희 역시 물러설 곳이 없다는 걸 안다. 죽으라 하면, 순순히 죽고자 하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특히, 이놈들처럼 모든 것을 다 잃은 놈들이라면 악에 받쳐 목이 잘릴 때까지 싸울 거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리 난폭한 일들을 해내지 못했을 테니까.
휘익-!
번이 옆으로 들었던 칼을 성벽 위로 치켜들었다.
“기회를 주겠다!”
그 칼끝이 정확하게 사령관의 심장을 겨눴다.
“나를 넘어서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이곳 요세인의 자치권을 주겠다!”
쿠웅-!
모두의 얼굴이 굳었다.
“저, 저게 무슨 말입니까?”
“뭘 하자는 거죠?”
“빠, 빨리 물어보십시오! 지금 협상을 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이때, 번은 미친 듯이 웃어 재끼는 악마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캬캬캬! 말은 잘하는구나! 공수표 팍팍 날려서 다 홀리게 만들어놓고, 나 몰라라 할거지?
악마를 무시하며 번은 진지하게 외쳤다.
“위대한 대 에비뉴 황제 폐하의 후계자인, 나 번 리갈 드 요르간드 바야흐의 이름을 걸고, 선언한다! 싸워라! 너희의 명예와 투지를 여기서 증명하라! 그리하여 나를 넘어서면 인정하겠다!”
에비뉴의 후계자라는 이름이 가지는 파급력은 대단하다. 특히 이제까지 번이 세운 혁혁한 공을 생각하면 고작 열두 살 꼬맹이가 내지르는 헛소리로 여겨지진 않는다.
반군 사령관은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자치권이라 함은 구체적으로 뭘 인정하겠다는 것인가?”
“말 그대로다! 이곳 요세인을 너희의 작은 국가로 인정하며 모든 경제활동과 군사행동을 허가하겠다!”
-크크크크! 낚이는구나! 낚여!
악마가 이리 즐거워하는 것엔 이유가 있었다. 번이 아무리 그들과 약속을 해봐야, 황제가 귓등으로나 들을까? 철없는 자식놈이 뭣 모르고 지껄인 헛소리 정도로 치부하고 으깨버릴 거다.
하지만 이들은 모른다.
번의 말이 천상에서 내려준 동아줄로 느껴질 것이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짐승들은 그것이 썩었는지, 단단한지 구별할 이성따윈 없다.
“…….”
사령관도 마찬가지였다.
“뭘.. 하자는 거지?”
“말 그대로다. 나와 싸워 이기면 된다. 단! 승부는 정정당당해야 하며, 일대일로 사내답게 행할 것이다!”
“흥! 저 늙은 페트릭을 믿고 그리 자신만만하다면, 큰코다칠 거다!”
반군은 번이 대리를 세울 거로 생각했다. 당연하지 않나? 그게 상식이었으니까.
하지만 사령관은 번의 얼굴을 보곤, 흠칫 굳었다. 그리고 그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나는 나를 믿을 뿐이다.”
가슴을 당당히 내밀고, 말하는 번.
“미친.. 꼬맹이가..”
“허어.. 허허..”
“대장전을 하자고? 지금 그 말인가?”
반군들이 웅성거렸다.
이건 듣고서도 믿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너무도 좋은 기회 아닌가!
“어릴 때 악마에 씌웠다는 소문이 있었다더니, 미쳐버렸군.”
“저리 사리분별을 못 해서야. 확실히 애는 애야.”
“이거, 잘하면 사령관께서 영주자리 하나 얻겠소?”
반군 장수들은 황야에서 거칠게 굴러먹으며 살아온 노련한 맹수들이다. 그들의 눈엔, 저 아래 겉멋만 잔뜩든 황자가 우스울 뿐이었다. 낄낄거리며 황자를 헐뜯는 그들을 보며 사령관은 침을 꿀꺽 넘겼다.
“그 말! 공증하실 수 있는가?”
“물론! 대 에비뉴의 후계자인 내가 이 많은 이들 앞에서 거짓말을 할까?”
뒤에 있던 페트릭이 손으로 이마를 감싸며 비틀거렸다.
“맙소사..”
수가 있다더니, 이런 짓을 벌일 줄이야!
오백 병사들의 뒤에 선 두 여인도 황당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그 중 하나는 이리될 줄 예상했는지, 코를 찡긋하며 웃었다. 그러면서도 뭔가를 계속 주무르고 있다.
“그거, 완성되었나요?”
옆에서 성녀가 근심 가득한 얼굴로 묻는다.
마녀 융이 열심히 다듬고 있는 것. 이것은 하나의 인형이었다. 30cm정도 크기의 이것은 번과 묘하게 닮은 것이었는데, 묘지의 사기 듬뿍 머금은 진흙을 기반으로 했고 겉에 두꺼비의 살점, 생닭의 피, 어린 뱀의 비늘 따위를 붙인 것이었다.
“당신만 입 다물면 될걸?”
아직도 둘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치잇..”
성녀가 마녀를 상큼하게 째려보면서도 참지 못하겠는지 되묻는다.
“확실해야 할 거예요. 황자님께서 다치시기라도 하면, 당신 역시 온전히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 거니까.”
“아아, 나야 이미 저분과 한몸이라고.”
묘한 뉘앙스에 성녀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그게 무슨 뜻이죠?”
“당신은 당신 그분이나 열심히 빨아. 남의 연애사에 간섭 말고.”
“뭐에요?”
마녀 융은 이제 안다. 꿈에서 본 그 무서운 사내가 바로 번이라는 것을. 그래서 노선을 확실하게 정했다. 대항하기보다는 들러붙자. 딱 봐도 크게 될 사람이고, 미래가 보였다는 것은 그때까진 적어도 죽진 않을 거란 뜻도 되니까. 게다가 최근엔 아주 매력적으로 자라기까지 하고 있지 않나?
“준비나 하세요. 남의 케이크에 침 질질 흘리지 말고.”
“이, 이 여자가 상스럽게!”
“어머나. 그걸 이제 아셨나? 헌데 어쩌나? 남자들은 그런 적극적인 여자의 치마폭을 더 좋아하는데! 당신은 그 고고한 치마 속에 평생 거미줄이나 치고 살겠지만!”
뭐가 어쩌고 어째? 어디에 뭘 쳐? 성녀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부들부들 떨며 폭발하려는데, 저쪽에서 번의 외침이 들렸다.
“너희가 사내라면 나오라! 증명하라!”
설마, 겁먹은 건 아니겠지? 비웃음을 물며 외치는 번의 모습은 너무도 당당하고 남자다웠다. 이쯤 되니 성벽 위에 어정쩡하게 선 반군들은 얼굴이 말이 아니다.
“저 새끼를 그냥..”
“합시다! 저리 하자는데, 뭘 꼬리 만 개새끼처럼 보고만 있는 겁니까?”
거친 남자들이 흥분해 날뛸 만큼 저 황실 도련님의 도발은 완벽했다. 그러나 사령관은 아직도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다.
‘황자를 죽일 순 없다. 저놈도 그걸 알고 저리 나서는 거겠지.’
저쪽은 그 머리 좋은 군사가 있다. 페트릭이 날뛰며 연기하고 있지만, 이제까지의 전투를 돌이켜보면 저것 또한 잘 짜여진 연극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당장 저놈을 죽여버립시다!"
"천둥벌거숭이 놈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기어오르는구나!"
"뜨거운 맛을 보여줍시다! 뭘 망설이는 겁니까?"
"으음..."
사령관이 뜸을 들이자, 옆에선 난리가 났다.
‘확실히 좋은 기회이긴 하지.’
사람들의 말이 맞긴하다. 이쪽에선 나쁠 것이 하나 없는 조건이었다.
문제라 한다면.
‘확실히 놈을 누를 수 있는 실력자가 필요해.’
자칫 놈이 크게 다치기라도 한다면 황제의 분노를 피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사령관은 옆을 돌아보았다.
“부탁해도 되겠나?”
마윈.
거칠긴 하지만, 그만큼 강한 사내.
“얼마든지.”
마윈은 즐거운 듯 웃으며 허리춤에서 두 개의 검을 꺼내 손에 들더니, 그대로 성벽을 뛰어내렸다.
벨버른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던 명문가의 서자였던 마윈. 비록 나라는 망했지만, 어려서부터 익힌 체계적인 학습과 핏줄을 타고 이어진 그의 재능은 지금에 이르러선 경험이 더해져 수준급 기사도 상대할 정도가 되었다.
“…….”
고지식한 아버지와 답답한 형 아래에서 숨죽이며 살 때보다 지금이 훨씬 즐거운 그. 게다가 에비뉴의 황자와 싸울 수 있다니. 이런 횡재를 또 언제 맛보겠는가?
“단판이오? 원한다면 삼세판 정돈 양보할 수 있소.”
마윈은 번과 열 걸음정도 떨어진 곳에 서서 물었다.
피식.
웃는 번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갸웃하는 마윈. 묘하게 분위기가 좋지 않다. 전장을 다니다 보면 완벽하게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 찝찝한, 그런 날이 있게 마련인데, 지금이 꼭 그랬다.
“너희 전부가 나와도 좋다.”
“……!”
“……?”
성벽 위 모두의 눈이 치켜떠진다.
뭐?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번이 그들을 올려보며 말했다.
“나는 너희 모두가 내 발아래 쓰러질 때까지 여기 서 있을 것이다.”
흠칫.
마윈의 등줄기에 소름이 스쳐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