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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좌의 게임-61화 (61/177)

# 맞장 1 #

“안에서 나오게 한다.”

번의 호기로운 말.

페트릭이 기가 찬듯 재차 묻는다.

“그것이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흥정을 할 거야.”

협상은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니, 그놈들이 말을 섞으려고나 할까?

“어려울 것입니다.”

“알아. 그래서 해야 한다는 거야. 내가, 직접!”

아버지는 아직도 간을 보고 계셨다. 당신이 직접 후계자로 책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태자太子라 부르지 않으셨다. 그게 뭘 의미하는 것일까? 아직 밥이 덜 되었단 거다.

'보여줘야 해.'

당신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아들을.

그 누구보다 압도적인 전과를 올려서!

번의 독기어린 표정을 본 페트릭은 하아-! 길게 한숨을 내쉬곤, 체념한 듯 물었다.

“구체적인 작전을 말씀해주십시오. 준비하겠습니다.”

반군 놈들을 어중이떠중이로 보다간 큰코다친다. 그놈들은 황폐한 망국에서도 세력을 구축해 버텨낸 놈들이며, 지난 1년간 번 황자에게 끈질기게 물어 뜯기면서도 살아남은 정예 중의 정예였다. 늑대라 해야 할까? 그것도 벼랑 끝에 아슬아슬하게 몰린, 그래서 더 포악하고 위험한 짐승들이었다.

“아니. 기다려.”

번은 짧게 말하곤, 입을 다물었다.

"후후후.."

아침이 오면 모두가 알게 될 것이다. 그전엔 누구도 모르는 편이 좋다. 미리 떠벌려봐야 찬성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테니까.

-캬캬캬캬! 드디어 피 맛을 듬뿍 보겠구나! 기다려진다! 기다려져!

아, 이놈만 빼고.

.

.

.

평야.

4만3천의 대군이 행군 중이었다. 에비뉴를 떠난 것도 열흘째. 꽤나 오랜 행군시간이었지만, 아직은 병사들의 사기도 좋고, 체력도 준수해서 발걸음이 가벼웠다.

이들은 그 유명한 철鐵의 군대다. 비록 걷다 지쳐 쓰러져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외마디 신음조차 내지 않을 것이다.

또각또각.

눈보다 하얀 건장한 수말 위에 탄 황제. 에비뉴에선 그 누구보다 고귀한 몸이었지만, 전장에 돌입하면 그는 그 어떤 허례허식도 용납하지 않았다. 병사들과 똑같이 먹고, 자고, 싸운다. 지금도 반나절 넘게 말 위에서 흔들리는 몸의 중심을 잡고 있었지만, 그의 표정엔 고단함이 없었다.

“스캇.”

“예이..”

그의 부름에 옆에서 말 한 마리가 바짝 다가왔다.

“그 녀석은 어찌 되었지?”

“아직 소식이 오지 않았습니다.”

황제가 쓰게 웃었다.

“기한을 지키려면 오늘쯤 기별이 와야 할 터인데?”

황제의 말에 스캇이 몸을 가볍게 떨었다. 감탄이나 존경이 아니라, 치가 떨려 그렇다.

“거, 며칠 늦는다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이만큼 벨버른을 평정한 것도 충분히 칭찬할만한 일입니다.”

그렇다. 처음 황자가 벨버른 원정대라는 웃기는 이름의 팀을 꾸려 에비뉴를 떠날 때까지만 해도 아무도 그에게 기대하는 이는 없었다. 그런데 그 이후 연일 날아오는 승전보는 수도의 온 백성에게 칭송받기 충분했고, 사기를 끌어 올렸으며 이젠 황제보다 번의 이름이 더 많이 떠돌 지경이 되었다.

백전백승百戰百勝!

과연 그 아비에 그 자식인지, 번의 군대는 그 몸집을 조금씩 불려가면서 단 한 번의 패배도 용납하지 않았다. 처음엔 열다섯으로, 그다음엔 오십으로, 후엔 백 이십으로 항상 더 많은 적을 상대하면서도 패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번이 전투에서 사용했던 전술을 따로 묶어 병사들에게 가르치자는 의견까지 나올 정도이니, 뭐라더라? 번 술術? 기막혀 말도 안 나온다.

“내 입으로 한 말이 아니야. 제 놈이 하겠다 했으니, 해야지.”

“아직 어립니다. 그 정도 치기는 웃어넘기셔도 괜찮지 않습니까?”

그것이 아비고, 부모의 역할일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 남자는 애초에 그런 부정 따윈 없는 듯하다.

“그보다 속도를 좀 더 높여야 하지 않겠나?”

황제가 저 앞으로 줄 맞춰 이동하는 병사들을 보며 스캇에게 말했다. 수만 단위가 동시에 행군할 땐, 앞에서 잠시라도 멈춰 서면 뒤가 한없이 늘어지게 된다. 그래서 앞쪽엔 체력이 좋고 경험이 많은 이들을 배치하고, 뒤엔 상대적으로  처지는 인력을 놓는다. 이게 작은 차이인 것 같아도 한 걸음이 쌓여 하루가 지체되고, 두 걸음이 쌓여 전투에서 패할 수도 있다. 싸움은 타이밍 아니겠는가?

“흐음.”

스캇이 하늘을 올려보았다. 그러더니 왼손을 들고 집중한다.

파스스스스..

그의 손에 냉기가 하얗게 맺힌다. 그것으로 그는 대기의 수분 농도와 습도를 측정한다. 비를 내리게 할 순 없지만, 언제 비가 올지는 대충 예상할 수 있다는 거다.

그가 손을 옆으로 탁탁 털며 마법을 해제했다.

“악천후를 대비해 아직은 체력을 비축하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뭐, 그렇다면야.”

황제는 말을 잘 듣는다. 물론 이런 쪽으로만 말이다. 전문가의 의견을 신봉하며 유능한 자를 곁에 두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그런 분께서 왜 아들내미한테는 질투를 하나.’

스캇이 보기엔 그랬다.

확실히 그렇다. 벨버른에서 번 황자의 승전보가 날아올 때마다 황제는 겉으론 웃으며 제법이야, 잘하고 있군. 칭찬하시면서도 초조함 때문에 다리가 덜덜 떨릴 정도로 안달이 난 사람처럼 보였다.

“하아..”

물론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간 난리가 날 거다.

“왜 한숨이야?”

“아닙니다. 대열 좀 점검하고 오겠습니다.”

신하가 군주에게 감히 상대하기 싫다는 표정으로 불경을 지으며 말을 몰아 떠나갔지만, 황제는 아는지 모르는지 피식 웃곤 저편 먼 산맥을 바라보았다. 이제 저것만 넘으면 후단이다.

후단 왕국.

800년이나 되는 긴 역사를 자랑하는 유서 깊은 나라였지만, 그리 강하지 않고 병력도 많지 않다. 이는 그들의 지리적 요건과 정치능력에 기인한 것인데, 강국의 옆에서 살아남는 법을 아주 잘 터득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제국 입장에서도 동남쪽의 남부 나라들과 국경을 바로 맞대지 않아 좋고, 적절한 관계만 유지하면 공물도 따박따박 바치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인구 60만 정도의 작은 나라. 그러나 후단의 뒤엔 제국이 있었다. 에비뉴의 시각으로 보자면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할 요충지이자, 중앙대륙으로의 첫발을 내딛는 관문이기도 했다.

“너무 오래 쉬었어.”

황제는 온몸이 근질거렸다. 이렇게 말을 타고 가는데도 피로보다는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하겠다. 후단만 먹으면 저 오스트롤랄 산맥에 가로막힌 대륙의 동남쪽과 중앙대륙의 교역창구를 손에 넣는 것이기에 경제적으로도 전보다 훨씬 윤택해질 것이다. 하지만 그딴 것쯤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 남잔 그저 싸우고 싶은 거다.

“너무 오래..”

쓰게 웃으며 높은 산맥을 바라보는 황제.

그의 앞엔 저 산처럼 높은 제국과 그 동맹국이 버티고 있었지만, 두려움 따윈 없었다. 무조건 넘을 것이다, 생각하는 그다. 그것이 그가 사는 이유이며, 삶의 원동력이었으니까.

그때였다.

“폐하!”

뒤에서 은사의 말이 접근했다.

“왔나?”

“네!”

은사가 손에 돌돌 말린 양피지 하나를 들고 있었다. 벨버른과 이곳까지의 거리를 생각해보면 지금 도착한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둘 중 하나일 터. 편지를 받은 황제는 묘하게 웃으며 끈을 풀었다. 촤르르륵, 풀어진 면엔 그리 많은 글자가 들어있진 않았다. 그저 첫 문장에 큼지막하게 자랑이라도 하듯 써진 글자에 시선이 간다.

승勝!

“큭큭큭, 녀석. 기어코 해내는군.”

유명한 장수들도 몇 해나 질질 끌던 벨버른의 반군을 완전히 정리했다는 뜻이다.

은사가 궁금한 듯 묻는다.

“어찌 이겼다고 합니까?”

이곳의 지휘관들은 모두가 궁금했다. 벨버른의 반군이 요세인으로 숨어들어 농성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많은 병력으로 공성을 펼치면 어렵지 않겠지만, 무고한 백성이 인질로 잡혀있고 번 황자에겐 그리 많은 병사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돌파구를 찾았을까?

“그 녀석답게.”

"아..!"

황제가 간단히 설명하자, 은사가 탄성을 내질렀다. 웬만해선 냉정을 잃지 않는 그도 놀란 것을 보면 참으로 무모하고 기상천외한 것일 게다.

은사는 크게 끄덕이며 말했다.

“과연 후계에 부끄럽지 않은 행보입니다. 이젠 태자라 부르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 누구도 뭐라 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 말에 황제의 눈썹이 꿈틀했다.

“······.”

너 요즘 많이 기어오른다? 라는 눈빛으로 빤히 은사를 바라보는 황제.

“아.. 죄송합니다. 주제넘었습니다.”

“생각은 내가 해. 판단도, 결정도 모두 내가 한다.”

“죄송합니다.”

은사는 입을 꾹 다물고, 머리를 깊이 숙이며 말을 돌렸다. 그런 은사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피식 웃으며 다시 몸을 돌리는 황제.

“태자라..”

크크크큭. 웃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누구 좋으라고? 이랴!”

황제가 말허리를 차며 버럭 외쳤다.

“속도를 높여라!”

병사들이 단체로 황제의 고함에 움찔하다, 대답한다.

-충!

-충!

저 앞에서 스캇이 탄 말이 황제를 향하는 걸 보면 그 표정 안 봐도 알 것 같지만, 황제는 시원하게 웃었다.

가자!

녀석에게 질 순 없지 않은가!

우리는 철鐵의 군대다!

.

.

.

에비뉴의 황제에게 서신이 가기 며칠 전.

요세인 성벽 안쪽에선 벨버른의 반군들이 심각한 얼굴로 장시간에 걸친 회의 중이었다.

“고작 열두 살짜리 꼬맹이에게 겁먹고 이게 뭐요? 그냥 싸웁시다! 그놈들 숫자도 많지 않다고 하지 않습니까!”

호전적인 사내들은 그리 외쳤지만, 이런 자들만 있었다면 지금까지 살아남지도 못했으리라.

“그 꼬마가 문제가 아닙니다. 어차피 그놈은 죽일 수도 없고, 인질로 쓸 수도 없는 빛 좋은 개살구에요.”

“어후! 그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 하나 때문에!”

“신은 뭘 하시나! 콱! 벼락이나 맞아 뒈졌으면 좋으련만!”

“그게 말이 되오? 옆에 성녀란 년이 착 달라붙어 있다더구먼!”

그랬다. 반군이 가장 골치 아프게 생각하는 건, 바로 황자의 존재 그자체였다. 지금은 그저 반군 나부랭이가 벨버른 백성이나 약탈하며 헤집고 다니니 에비뉴에서도 본격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지만, 황자라도 죽여봐라.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할까? 당장 철鐵의 군대가 벨버른으로 기수를 돌릴 거다. 한마디로 말해서 뒷배가 너무 좋단 거였다.

그렇다고 인질로 잡을 수도 없었다.

벨버른 사람은 안다. 에비뉴의 그 포악하고, 잔인무도한 황제를.

황자를 잡아, 그와 협상을 해? 미친 소리다.

“그럼 어쩌잔 말입니까? 놈들이 이미 지척에 와있다지 않습니까! 아침까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면 우린 아무 준비도 못 하고 적을 맞아야 하는 겁니다! 싸울지 말지는 짚고 넘어가야지요!”

그건 그렇다.

고작 500 남짓한 적이라도 놈들과 싸우려면 전술이 필요했다. 이쪽은 계속해서 인원이 소모되며 보충이 안 될 것이니, 장기전으로 돌입하면 반드시 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때, 저 구석 의자에 앉아 건들거리며 회의를 지켜보던 사내가 투욱 말했다.

“그럼 뭐합니까. 머릴 굴려봐야 저쪽 군사년한테 다 읽힐 것을. 그냥 싸우자고요. 그편이 더 승률이 높습니다. 우리가 언제 내일 생각하고 살았수? 오늘 빌어먹을 밥만 있음 됐지! 언제부터 이리 겁쟁이가 되셨나?”

호기롭게 큰소리친 마윈.

분위기 잡치는 말이었지만, 사내들은 그 말에 딴지를 걸지 않았다. 일단 그의 말도 사실이었기때문이었다. 저 에비뉴의 황자 옆엔 대가리가 어찌나 좋은지, 매번 신묘한 전술로 반군을 농락하는 군사라는 계집이 있었다. 벌써 1년이다. 이쪽에서 뭘 준비하든, 항상 그 이상을 가져와 물 먹이는 것이.

“그래서 어쩌자는 거요? 마윈. 그냥 이렇게 죽자고?”

마윈은 강자다. 객관적으로 봐도 반군 내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무력을 지닌. 그렇기에 그의 말은 절로 공신력을 가지는데, 그가 이리 나오면 다른 이들이 혼란스럽다.

“누가 죽자 했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니, 그냥 한번 부딪혀 보자는 거지.”

“그걸 말이라고..!”

그래서 어떻게 부딪힐 것인지 상의하자고 모여있는 거 아닌가! 좋은 의견이 없으면 잠자코 있을 것이지 왜 산통을 깨나?

평소 마윈을 고깝게 보고 있던 사내들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째려보기 시작하자, 분위기는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그때였다.

벌컥!

방으로 급히 한 사내가 뛰어들었다.

“사령관님!”

사내는 성벽에서부터 한달음에 뛰었는지 혀를 길게 빼물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무슨 일이기에 이리 급한가?

“화, 황자가..!”

“······?”

“······!”

동이 트기 직전, 날아온 소식.

“에비뉴의 황자가..!”

골칫덩어리 천둥벌거숭이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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