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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좌의 게임-60화 (60/177)

# 남자 #

-황자님.

-황자님..

번이 복도로 나서자, 마주치는 사람들이 예의를 갖췄다. 고작 열두 살 아이라 하기엔 지나치게 존재감이 크다.

에비뉴를 떠난 지 내일로 1년째.

「육체가 전투에 최적화 중입니다.」

「근육이 적정 수치를 유지 중입니다.」

번은 요사이 육체를 크게 성장시켰는데, 형태변형을 이용해 골격과 체구를 키운 거다.

「심박이 정상 수치를 유지 중입니다.」

「아드레날린이 소량 분출되었습니다. 저장합니다. 언제든 다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비록 하루하루 세월과 시간을 쌓아 자연스럽게 자란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한 달에 7cm 정도를 키우며 전신을 고루 다듬으며 공을 들였기 때문에 쉽게 와르르 무너질 몸은 아니었다. 물론 이게 쉬운 일은 아니다. ‘변형’을 24시간 유지해야 하고, 원래 몸이 크는 것도 염두에 둬야 하기 때문에 끊임없는 조율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수련이라 여기고 받아들이는 번이다.

몸이 커서 좋은 점은 타인과 마주쳤을 때 꼬마라 무시당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도 있겠지만, 그따위 시선보다는 이렇게 큰 검을 질질 끌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것과 무력을 사용함에 있어 훨씬 유리한 위치에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황자님, 다시 생각해 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한 일이라 여겼는지 페트릭이 따라붙으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번은 단호했다.

“이미 정한 일이다. 페트릭.”

“으음.. 하지만..”

페트릭이 재차 제동을 걸려 하자, 그의 뒤에서 가느다란 손이 옷을 당겼다. 페트릭이 뒤를 돌아보자, 우리아가 얼굴을 흔들었다.

그만하라는 뜻이다.

“······.”

입을 꾸욱 다물고, 코로 숨을 후욱 쉬는 페트릭.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누구도 말리는 이가 없다. 하긴, 이제껏 번 황자가 보여준 기상천외한 일들을 보면 이번 일도 마냥 믿고 싶은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이번 일은 너무도 달랐다. 위험하다 생각이 드는 것이 기우이면 좋겠지만, 페트릭도 번을 아끼기에 말리는 것 아니겠는가? 혹시나 잘못되면 그 역시 세상을 다 잃은 것 같을 것이다.

마녀 융이 번에게 바짝 붙으며 말하는 걸 페트릭의 눈이 따라갔다.

“인형전이가 아직 완벽한 단계에 도달하지 못했어요.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인데, 절대 전투에 참여하시면 안 돼요. 아셨죠? 저번처럼 뛰쳐나가시면···.”

번은 그녀의 말에 웃음을 참으며 옆을 돌아보았다.

“알면서 왜 그래? 내가 빠지면 이길 수 없는 싸움이야.”

“하지만..”

그러다 죽어요! 라고 외치려다 번의 눈을 보며 애써 누른다.

“오늘을 위해 우린 1년 반을 준비했어.”

묵직한 번의 음성에 모두가 떠올린다.

원정대를 꾸리고 6개월간 궁에서 후계자 수업을 받으면서도 계속 번은 벨버른의 정세를 염탐하며 작전을 세웠었다. 그렇게 피나는 노력으로 준비한 그의 모든 지식과 인맥, 능력을 동원해 이곳으로 온 첫 달. 그는 불도저처럼 반군을 밀어붙이기 시작했고, 오늘 여기까지 도달한 것이다.

“길어야 한 달이면 놈들도 항복할 거에요. 그들은 지금 투정을 부리는 거라고요. 어차피 도망갈 곳도 없는 자들이에요.”

그래, 한 달. 이르면 보름. 적당한 먹이를 던져주며 놈들과 협상하면 바로 꼬리를 말 것이다. 그때가 되면 금은보화 따위도 필요 없을 테지.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그 구차한 목숨 조금이라도 연명해보려는 것이 될테니까.

그러나,

“내일을 넘기면 나는 패배자가 된다.”

아버지와의 약속이 있었다. 심지어 1년 안에 벨버른을 수복하겠다는 말 자체를 자신이 하지 않았던가? 내뱉은 말은 지켜야 한다. 이건 후계자가 된 이후 첫 번째 맡아 행하는 일이었고, 반드시 성공해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거야.”

궁을 뛰어다니던 작은 꼬마는 이제 없다. 번의 목소리는 위엄을 가득 품고 있었고, 그의 몸짓 하나하나에 주변 모든 이들이 절로 주목하게 된다.

이것이 제왕의 기도!

가장 강력한 포식자가 지닐 수 있는 맹수의 카리스마다.

번은 계속 걸었다. 옛 왕성의 터를 급히 개조해 쓰고 있어 여기저기 부서지고 흉물스러운 구조물들이 보였지만, 그래서 더 운치가 있다. 특히 오늘같이 흐린 날엔 더더욱 말이다.

‘피 보기 좋은 날이야.’

섬뜩하게 미소 짓는 번의 얼굴을 보던 성녀 가루비가 움찔했다.

-일도오오옹! 착검!

번이 건물 밖으로 나서자, 앞에 기다리고 있던 수많은 사내가 질서정연하게 칼을 오른손으로 쥐었다.

보라. 그들의 눈빛을.

절대적인 신뢰와 존경이 담겨야만 보일 수 있는, 장수라면 꿈에도 염원하게 되는 바로 그런 모습의 군대다.

페트릭이 성큼성큼 걸어 그들의 앞에 섰다.

정확히 500인人으로 구성된 번의 정예부대. 번은 이들에게 솔개란 이름을 직접 붙여주었다. 대부분이 무너진 옛 왕국에 충성하던 잔당들이었지만, 그래서 그들이 보이는 충성은 남다르다. 몰락한 곳에서 기다리다 희망을 찾은 이들이니까.

이들의 장將은 페트릭.

-부대! 차렷!

페트릭이 우렁차게 외쳤다.

-충!

-충!

솔개 부대가 검을 가슴께로 올려 두 손으로 잡았다. 그들의 시선은 칼끝처럼 날카로웠으며 무엇이든 뚫어버릴 수 있는 강렬함이 담겼다. 이제 번에게도 아버지의 철鐵의 군대처럼 자랑할 만한 사람이 생긴 것이다.

‘좋은 눈빛.’

번은 씨익 웃었다.

21세기 미국 해병대가 아무리 유능하다지만, 단 한 가지 만큼은 지금 이들에 비할 순 없을 것이다.

야성野性.

이들은 망국의 생존자이다. 전쟁통에서 숱하게 죽을 위기를 넘기며 살아남았고, 굶주림과 나라를 잃은 설움을 감당했다. 그것이 이들의 심장을 차갑게 만들고, 피부를 단단하게 벼렸다. 웬만한 외상은 코웃음 치며 날려버릴 수 있을 만큼 독기를 머금었단 거다.

“오늘 우리는 요세인을 칠 것이다.”

번의 말에도 그들은 동요하지 않는다. 이미 지난 1년간 번과 함께 수많은 불가능을 이겨왔던 경험이 있고, 믿음이 있었으니까.

“그놈들이 이제껏 어떤 만행을 저질렀는지 모두가 잘 알 것이다.”

궁지에 몰린 반군은 인간이라면 절대 할 수 없을 것 같은 일들도 서슴지 않고 벌여왔다.

“누군가의 누이를! 딸을! 어머니를 겁간하고 살해하며, 그 시체조차 안식하지 못하도록 길바닥에 방치했다.”

타인의 일이라 여기지 않는다. 희생자 모두 벨버른의 자식이며 우리의 형제다.

“나는 그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충!

-충!

발을 구르는 사내들을 보며 번은 끄덕였다. 더 무슨 말이 필요할까?

「주변의 투기를 흡수했습니다.」

「주변의 사기를 흡수했습니다.」

번이 흡족하게 끄덕이자, 페트릭이 다가와 말했다.

“오르시지요.”

한눈에 봐도 혈통 좋은 백마가 번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지.”

번이 말에 오르고, 뒤따라 군대가 움직이자 왕성 사람들이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배웅했다.

전승의 군대.

-와아아아아아!

-황자님! 그 악독한 놈들을 반드시 응징하세요!

-기도하겠습니다! 황자님!

이곳 벨버른에서 만큼은 철鐵의 군대 못지않은 명성을 휘날리고 있는 솔개들이 날개를 펴고 날아올랐다.

.

.

여덟 시간 후 황자의 전진 막사.

뿌연 수증기가 자욱하다.

촤악-!

손 바가지 가득 담은 뜨거운 물이 사내의 미끈한 몸에 뿌려졌다. 돼지고기를 넣으면 바로 푹 익어 버릴 것 같은 뜨거운 온도였지만, 사내의 얼굴은 변함이 없다.

「열기를 흡수했습니다.」

「물의 기운이 열기의 일부를 비축합니다.」

이 또한 수련의 일부였으니까 말이다.

번의 몸은 아름답다. 생활 습관이나 식습관에 의해 다듬어진 육체가 아니다. 철저하게 번의 의지와 노력의 산물이었으니까. 하체는 격한 움직임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두꺼웠고, 상체는 조각상을 보는 것처럼 완벽한 역삼각을 이루고 있다.

푸스스스..

번의 몸에서 열기가 피어올랐다.

펄펄 끓고 있는 솥에서 다시 한 바가지 물을 퍼서 몸에 끼얹는다. 누가 보면 미쳤다고 손가락질할 일이었지만, 물의 정령 아홉 마리를 흡수한 이후 번에겐 일상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때, 저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

누가 들어올지 알기에 번은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다.

사라라락.

옷을 벗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저.. 왔어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에서 묘한 열기가 느껴졌다.

-오! 좋구나! 크크크!

악마가 외쳤지만, 번의 눈엔 아무런 사심이 없다.

찰박, 찰박.

여인의 발밑 물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마녀 융이 알몸으로 번에게 다가왔다.

“준비는?”

“거의 다 했어요. 하지만 너무 서둘러서 완성도가 어떨진 미지수에요.”

융은 아름답다. 그 어떤 사내라도 지금 그녀의 모습을 보면 참을 수 없으리라.

“그렇다해도, 어쩔 수 없어.”

이 남자만 빼고.

“하아. 이렇게 도박을 즐기시다간 제 명에 못 사실 거에요.”

융이 번의 가슴에 손을 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흘에 한 번씩 그녀는 번에게서 기운을 흡수해야만 했다. 이러지 않으면 젊음을 유지할 수 없다.

“도박이라 해도 승률이 높다면 그건 해볼 만한 거야. 이것저것 재다간 뒤처질 뿐이니까.”

“하아..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하니까 문제죠.”

융이 말을 하는 사이, 번의 몸에서 어둠이 움직였다. 척수 깊은 곳에 꼭꼭 숨겨둔 그것은 사제 일백이 눈을 부라리는 와중에도 성녀의 검수를 통과했을 정도로 은밀하다.

물론 그건 전적으로,

-그냥 이참에 시원하게 한번 몸 좀 풀지? 너 내일 잘못되면 총각 딱지도 못 떼고 저승 가는 거 아니냐?

이놈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지만.

‘닥쳐!’

번도 남자다. 심지어 윤리나 사회, 도덕이란 개념 자체가 없는 동물의 삶을 오래도록 살았던 진짜 수컷이다. 융이 비록 그 속은 나이를 먹었다곤 해도 겉모습은 하룻밤 품기에 아무런 지장이 없다. 그러나 번은 이런 쪽으론 아예 관심조차 없었다. 훗날 자식이 필요한 상황이 오면 모를까, 그게 아닌 이상 쓸데없는 뒤끝을 남기긴 싫었다.

‘내가 예쁘지 않은가? 사내라면 환장할 텐데?’

상황이 이리되니 오히려 융이 안달이 난다. 그녀 또한 속은 어떨지 몰라도 겉은 아리따운 여인이었다. 사람이 참 이상한 게, 아닐 걸 알면서도 어떤 연기를 계속하다 보면 자연스레 착각하게 되는데, 융 역시 그런 것이 잠자고 있던 가슴속 깊은 어떤 것을 깨웠다.

‘정말 기이한 사람이야..’

주변 사람 중 그를 열두 살로 인식하는 이는 없다. 우선 이 몸만 보더라도 전설의 엘프가 울고 갈 정도로 아름답지 않은가. 여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쓰다듬고 싶은 탄탄한 몸과 모성본능을 절로 일으키는 앳된 얼굴은 마음의 빗장을 순식간에 해제해버린다.

‘치잇.’

번의 눈을 올려보던 융은 속으로 치를 떨었다. 더 예쁜 껍데기를 뒤집어써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스스스스스..

까만 아지랑이 같은 어둠의 기운이 번의 몸에서 나와 융의 전신에 파고들었다.

움찔! 움찔!

그녀의 몸이 바늘로 쿡쿡 찌른 듯 반응하기 시작한다. 어둠에 속한 그녀에게 악마의 순수한 기운은 쾌락과 함께 거부할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과도 같다.

“아..!”

그녀의 빨간 입술이 열리고, 비음이 터졌다. 번의 가슴에 손을 대고 기대 도톰한 허벅지를 부들부들 떨었다.

“하아, 하아..”

언제까지고 계속되었으면 하는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어느덧 싸늘한 목소리만이 그녀의 귓가에 감돌았다.

“볼일 끝났으면 가봐.”

무심하다 못해 돌덩어리를 보는 듯한 무미건조한 시선은 여인에게 그것만으로 상처가 된다.

“······.”

융이 눈을 가늘게 뜨고 번을 째려보곤, 서둘러 옷을 입고 휑 나가버렸다.

촤악- 촤악-

번은 다시 물을 끼얹는다.

내일, 최상의 육체를 갖춰야만 한다. 융의 말처럼 이건 일종의 도박이다. 그것도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절체 절명의. 단 하나의 무기라도 더 갖춰 놓아야 했다. 생사를 가르는 전투에서 이런 작은 차이가 승부를 가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물의 기운이 충분한 열기를 흡수했습니다.」

40여 분쯤 더 물을 끼얹던 번은 그제야 만족한 듯 바가지를 놓고 몸을 닦았다.

촤라락-

그가 막사의 천을 걷고 밖으로 나가자, 어느새 밤이 되어있다. 여기서 요세인까지는 반나절이면 닿는다. 이제 어둠이 걷히면, 세상은 빛 대신 피로 물들겠지. 생각한 번이 쓰게 웃자, 페트릭이 다가왔다. 계속 번이 나오길 기다린 모양이다.

“이제 말씀해주셔야겠습니다.”

그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왔다.

“대체 요세인을 어떻게 함락하시겠단 것입니까?”

달린 식구가 오백. 거기에 황자의 승리를 바라는 모든 벨버른의 백성까지 생각하면 절대 가벼이 여길 수 없는 전투임에도 페트릭은 아직도 듣지 못했다.

피식.

번이 밤하늘을 올려보며 페트릭의 어깨를 가볍게 손으로 잡았다.

“간단해.”

간단하다고? 충심 가득한 저 솔개 부대 병사들조차 얼굴에 근심을 비추는데?

“밖에서 깰 수 없을 땐.”

번의 이어지는 말에 페트릭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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