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 사람 2 #
두 사람이 들어왔다.
대현자 오그마리온과 그의 딸 우리아다.
“······.”
자글자글한 눈주름을 잔뜩 만들며 나타난 오그마리온은 방안의 묘한 분위기를 감지하곤, 고개를 갸웃했다.
‘특이한.. 구성이구나.’
이미 번 황자가 벨버른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사람을 모으고 있다는 소문은 돌고 있었다. 그런데 페트릭은 그렇다 치고 저 여자들은..
‘마녀에 성녀라니..! 허허..!’
개와 고양이가 함께 있는 처지 아니겠는가?
“고맙습니다. 대현자님. 이리 걸음 하시다니 감격했습니다.”
번이 반기자, 오그마리온은 가볍게 웃으며 빈자리에 찾아 들어갔다.
“오랫만이예요. 황자님.”
우리아도 번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며 자연스레 앉는다. 푸근한 인상의 오그라미온이 자리하자, 동년배의 페트릭이 눈인사를 한다. 주위를 차분히 둘러본 오그마리온.
“내가 오늘 여기 온 것은 황자님의 청을 수락하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순식간에 싸늘함이 퍼져나간다.
“······.”
번의 얼굴 역시 딱딱히 굳어졌다.
하지만 아무도 입은 열지 않은 채, 촉각을 곤두세우고 지켜본다. 대현자의 합류는 그만큼 큰 무게를 가진 것이었기에.
“이번에 황자님의 경연을 지켜보며 저 또한 많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고작 열 살. 누구도 관심 없던 꼬마가 이젠 대 에비뉴의 기둥으로 당당하게 섰다. 그것도 혼자 온갖 역경을 이겨내며 오롯이 말이다.
“이젠 회피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그마리온의 표정을 보며 번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싸우시겠다는 것이군요.”
그가 어떤 선택을 한 것인지 눈치챈 것이다.
“제가 감히 어찌 폐하와 대립하겠습니까. 그저 소신을 지키겠다는 것이지요.”
오그마리온은 지금, 궁의 심장부로 들어가겠다는 것이다.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떠났던 그가 다시 가슴속 칼을 뽑아들고 당당하게 대청에 진격하려 한다.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저 또한 황자님 곁에서 도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더 늙기 전에 해내고 싶다. 이 육신이 노쇠하여 더는 말을 듣지 않기 전에 뛰고 싶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여겼습니다.”
궁은 지금 아비규환이나 다름없었다. 대외적으론 역모에 가담하여 2황비의 측근이 쓸려나갔다고 알려졌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지 않은가? 황제는 실망했고, 권력구도는 재편될 것이다. 이런 때는 반드시 비집고 들어갈 틈이 생기게 마련. 오그마리온은 그걸 놓치기 싫었다.
“으음..”
정확한 내용은 모르지만, 그가 어떤 마음을 품었는지 공감한 페트릭이 크게 끄덕였다. 그 역시 같은 마음으로 이 자리에 있는 것이었으니까.
“..하아.”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어찌 바짓가랑이를 붙잡을까?
번은 빙긋 웃으며 오그마리온의 손을 잡았다.
“과연 대현자님이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으십니다. 그 나이에도 이리 정정하시니, 진정 현명하시며 본받을만한 선택이십니다. 모두의 귀감이 되어 오랫동안 칭송받으실 결정을 용기내어 하셨군요.”
“허허..! 이 늙은이의 얼굴에 금칠하시는군요! 부끄럽습니다!”
오그마리온은 오늘부터 싸울 것이다. 자신의 세력을 만들고, 폭군과도 같은 황제를 견제하며 백성을 대변하는 목소리를 낼 것이다.
‘뭐, 이것도 나쁘진 않아.’
번은 냉정하게 판단했다.
오그마리온이 자신에게 보이는 호감은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 자가 벨버른에 함께 가는 것보단 여기서 힘을 키운 채 훗날 도움을 준다면 그것 또한 비장의 한수로 작용하지 않을까?
‘이게 바로 멀티 깐단 거지. 후후..’
-그게 무슨 말이냐?
악마가 물었지만, 번은 무시했다. 한때 유행했던 게임 용어까지 구구절절하게 설명할 친절함 따윈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황자님께서 친히 제게 청해주셨는데, 모른 척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라 여겨..”
오그마리온이 옆을 봤다.
다소곳하게 앉아있던 우리아가 일어났다.
“부족하나마 제 딸이 황자님을 돕는 것을 허락해주십사 간청하러 왔습니다.”
“아! 그런.. 간청이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번은 머리를 흔들며 감격한 듯 말했다.
“가르친다고 가르쳤는데, 아직 부족함이 많은 아이입니다. 괜히 황자님께 민폐를 끼치지나 않을까..”
“아닙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두 분의 위명에 따르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대현자 오그마리온의 수제자 우리아. 비록 수도의 황제나 집정관 정도의 권력은 없었지만, 그녀의 이름 또한 전국에 널리 퍼져 있었으며, 각 마탑에서도 인정하는 지식인이었다.
-허허.. 어째 네놈에겐 여자만 파리처럼 꼬이는구나.
악마가 혀를 찼다.
그러고 보니 그 말도 맞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벌써 여자가 셋이다. 보통의 남자라면 박수 치며 환영할 일이었지만, 번은 육체적 나이론 10살에 ‘암컷’에겐 종족 번식의 의무가 아닌 이상 관심조차 없었다. 심지어 껍데기는 그럴듯해도 마녀는 할멈이었고, 우리아는 혼기를 한참 놓친 아줌마다. 성녀 또한 자신을 신의 여자라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니는 여자였고 말이다. 굳이 번이 이 틈에서 작업 칠 생각을 할까?
‘우리아라.. 다소 대현자의 이름값엔 뒤질진 몰라도..’
물론, 이 사내는 다른 쪽으로 여인들에게 흑심을 품고 있었다.
번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그만큼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 호재로 작용할 수도 있지.’
요는 어떻게 써먹느냐에 달린 것 아니겠는가?
‘이 또한 나쁘지 않아. 내 지식을 의심받지 않게 풀어낼 창구로 활용할 수 있을 테니까.’
최근 번이 가장 답답하게 여긴 것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그의 머릿속엔 이 세계 사람들이 상상도 하지 못할 압도적이고 진보적인 지식이 무궁무진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을 하나씩 꺼낼 때마다 신이 알려주셨다! 악마가 속삭여 주었다! 둘러댈 순 없지 않겠는가? 그런 식으로 가면 타의에 의해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꼭두각시 정도로 비칠 염려가 있었다. 내 힘으로, 내 재능으로 당당하게 길을 뚫는 모습이 필요하다.
‘그게 저 여자의 이름을 팔면 가능하단 거지. 흐흐흐.’
게다가 우리아는 스캇과 묘한 관계다. 이미 과거를 눈치챈 번이었으니, 이 또한 어떻게 써먹을진 모르는 거다.
‘호박들이 줄줄이 넝굴채 굴러들어왔으니, 어디 이제 슬슬 죽을 쒀 볼까?’
번의 생각이 어떻든, 오그마리온은 신신당부를 한다.
“우리아, 황자님을 잘 모셔야 한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버지.”
우리아가 생긋 웃으며 번을 바라보았다.
“워낙 영민하신 분이라 제가 크게 도울 일도 없을 것 같은 걸요.”
번은 하하! 웃으며 그녀의 말을 받았다.
“가당치 않습니다. 아직 배워야 할 것이 산더미입니다. 한 말씀 한 말씀 뼈에 새겨듣겠습니다. 많은 지도편달 부탁합니다.”
그녀를 아바타로 써먹을 생각을 속으로 하는 와중에도 전혀 내색하지 않고 말은 참으로 잘하는 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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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들으셔야 합니다.”
한 여자가 의자에 앉아있다.
5월의 빨간 장미처럼 완숙한 중년의 그녀는 침착함 속에 이글이글 타오르는 열정을 담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경청하겠습니다.”
“말씀하세요. 어머니.”
형제는 그녀의 앞에 나란히 서서 기다렸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은 이미 여길 오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실란이 제거되었어요. 그렇게 나댔으니 언제고 일어날 일이었긴 했지만, 너무 빨랐습니다.”
2황비 실란. 그녀는 무쇠의 뿔 같았다. 세력을 넓히는 것에 거침이 없었고, 아들 카이사르의 이름을 드높이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했다. 그 과정에서 정적들에게 미운 짓도 많이 했고, 그만큼 적도 많았다.
“산에 군림하던 암호랑이가 사라졌어요.”
무주공산無主空山이라는 말이 있다. 주인이 없는 산이니 누구든 가질 수 있다는 뜻이 된다. 물론 암호랑이에 비유하긴 했지만, 2황비 실란은 그저 철없이 설쳐대던 방패수였을 뿐이라 생각한다. 전쟁의 선봉, 가장 앞서 달리다가 적의 마법과 화살에 노출되어 먼저 죽어 자빠지는 일회용 말이다.
“대신 다른 놈이 그 자리에 떡하니 앉지 않았습니까?”
카이사르가 죽고, 번이 후계자가 되었다. 모든 황자가 재능을 발산하며 대결하였지만, 결국 승리한 것은 열 살짜리 꼬맹이였다. 자존심도 상하고 폐하도 원망스럽지만, 이미 벌어진 일 주워담을 순 없는 거다. 그리고 정치란 게 꼭 능력 있는 자가 모든 걸 차지하게 두지도 않는다.
7황비.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시작이에요. 실망할 필요 없다는 얘깁니다.”
사람들은 황비들 사이의 권력구도에서 2황비가 최고였다고 여기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7황비가 능력이 없어서 빠져있었던 것이 아니다. 단지 때가 무르익을 때까지 주목받지 않고 기다렸을 뿐. 레인보우 립을 이용해 강력한 한방을 준비하던 것도 그녀였고, 하나도 아닌 두 아들을 이만큼 키우며 황제의 재목이 될 때까지 준비시킨 것도 그녀였다.
번이라는 놈이 갑자기 튀어나오지만 않았어도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2황비를 밀어내고 사교계의 여왕으로 군림할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고작 후계자로 책봉되었다고, 무엇이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당장 그가 벨버른에서 죽기라도 한다면 폐하께선 새로운 후계를 찾아야 하지 않겠어요?”
어미는 살모사 같은 여인이었다.
그 어미에 그 자식. 두 아들의 눈이 표독하게 빛났다.
“방법이 있겠습니까?”
큰아들이 묻자, 7황비는 묘하게 웃었다.
“기다리세요. 반드시 때가 옵니다. 이대로라면 너무 재미없지 않겠어요?”
호호호호! 그녀의 웃음소리에 묻힌 노크. 문을 열고 한 사내가 들어와 머리를 숙였다. 7황비의 수족이자, 모든 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자. 루퍼스다.
“어서 오세요. 루퍼스 경. 그래, 어찌 되었나요? 일은 차질없이 진행되고 있는 거겠지요?”
“이번엔 반드시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야 할 거예요.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써서 만든 기회에요. 이번 일도 엎어지면 우린 다 같이 죽는 거에요. 아시겠습니까?”
“여부가 있겠습니까. 다음 달까지 레인보우 립의 생산량이 목표치에 도달할 것입니다. 몇 번이나 검토하고 있으니, 염려 놓으셔도 됩니다.”
모두가 끝났다 생각하던 순간,
7황비의 무지개는 다시 피어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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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버른.
겨울은 에비뉴보다 따스하고, 곡창지대 역시 넓고 풍요롭다 알려져있던 곳. 그 때문에 한땐, 주변국에 거의 모든 곡식을 수출하는 부국으로 이름나기도 했던 땅地이다. 하지만 그것도 누가, 어떻게 가꾸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다. 지금은 그 이름값도 찾지 못했으니..
“보고하라.”
커다란 의자에 한 청년이 앉아 있었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얼굴은 참 앳되지만, 체구는 성인 남자에 근접할 정도로 컸고, 근육도 붙어야 할 곳에 야무지게 붙어 있었다. 벨버른에 온 지 고작 1년. 에비뉴에서 알면 까무러칠만한 일들이 여기 벨버른의 수도 보르탱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황자님을 따르지 않는 세력은 전부 색출했어요. 이제 남은 것은 반군의 중추가 되는 요세인 밖에 없습니다.”
보고를 하고 있는 여인. 대현자의 딸로 알려졌지만, 최근엔 ‘군사’라는 이름이 더 익숙한 그녀다. 1년 전, 벨버른 원정대란 팀을 꾸려 황국을 떠난 네 사람이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전과를 올리며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
“요세인이라. 쥐새끼들이 결국 한곳에 모였다는 거군?”
크크크! 웃는 사내.
그랬다. 그는 어느덧 열두 살이 된 번이었다.
“황자님, 그리 기뻐하실 일만은 아닙니다.”
전보다 십 년은 더 젊어진 것 같은 페트릭이 걱정스러운 듯한 얼굴로 말했다.
“문제라도 있나?”
번이 페트릭에게 고개를 돌리자, 사람들의 시선도 함께 돌아갔다.
“놈들이 그 지역 사람들을 인질로 잡고 있습니다. 반군을 일망타진할 기회이긴 하나, 무작정 밀고 들어갔을 때 무고한 백성들의 피해가 클 것입니다. 비루한 창이라도 하나씩 들려 방패로 쓰려 할 테니까요.”
페트릭의 말에 번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리곤 뭔가 생각하는 듯 하더니, 옆을 돌아본다.
“군사.”
“예, 황자님.”
우리아가 답했다.
“아버님께선 출정하셨는가?”
“사흘 전 마지막 소식이 왔으니, 지금쯤 군대를 이끌고 수도를 나서고 계실 것입니다.”
“그렇단 말이지..”
번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 짧은 사이에 사람이 어찌 이리도 자랄 수 있느냐고 기이하다 생각할 이들도 있겠지만,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니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시간을 두고 놈들의 피를 말려가며 협상을 유도하시는 것이 상책일 것 같습니다.”
페트릭이 말했지만, 번은 소년과 청년의 얼굴이 공존하는 그 특유의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협상은 없다.”
1년 전, 수도를 떠나올 때 아버지와 약속했다. 반드시 기간 안에 반군을 싹 잡아 죽이겠다고.
이제 시간이 없다.
번이 한쪽에 놓아둔 검집을 잡았다. 말 허리도 동강 낼 수 있는 두꺼운 검신을 가진 투핸드 소드다.
“융.”
그의 부름에 까만 망토를 두르고, 빗자루를 든 미녀가 뒤로 따라붙었다.
“가루비.”
새하얀 사제복을 입은 치마차림의 아름다운 여인이 고갤 숙이며 번의 뒤로 선다.
“가자. 우린 내일 요세인을 함락할 것이다.”
번의 말에 페트릭의 이마가 와락 구겨졌지만, 그 역시 급히 뒤를 따랐다.
-캬캬캬캬! 축제가 열린다! 드디어 그날이 왔구나!
번의 머릿속에서 악마의 흥겨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