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 사람 #
-대 에비뉴의 국모國母이자, 지고하신 폐하의 비妃 신분을 망각하고, 권력과 욕심에 눈이 멀어 역모를 꾀한 죄!
집정관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그의 목소리는 듣는 이의 피부를 저릿하게 만들 정도다. 서릿발 같은 그 눈은 당장에라도 죄인의 몸을 능지처참할 것 같았고, 내가 저 자리에 서 있는 것도 아닌데, 괜히 찔끔 오금이 저렸다.
-황자 카이사르를 황좌에 앉히기 위해 작당 모의한 이들의 죄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것이며, 도의와 인의를 배신하고 국법을 어긴 것이니!
죄인들은 그저 부들부들 떨었다.
억울하다며 소리칠 수도 없다. 입에 재갈이 단단하게 물려 있었으니까.
-이들의 추악함을 대대손손 전하여 다시는 이런 발칙한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일벌백계한다!
스르릉. 스르릉.
거대한 도끼를 든 장신의 사내가 집정관의 근처로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이자로 말할 것 같으면 20년 경력의 이 분야 최고 전문가이자, 이제껏 단 한 번의 실수도 하지 않고 목을 끊어낸 베테랑이다.
-2황비 실란! 참수!
죄인의 몸을 고정하는 대臺 따위도 필요 없다. 후웅! 바람 소리에 실란의 가녀린 몸이 움찔했지만, 곧 이어진 섬뜩함이 너무도 쉽고 허무하게 그녀의 머리를 몸뚱이와 분리했다.
툭, 툭툭.
바닥을 데구르르 구르는 그녀의 머리통. 그러나 아직 형벌은 끝나지 않았다.
-그 더러운 몸뚱이를 조각내, 개의 먹이로 주어 영원토록 치욕하게 하라!
황제의 말은 기똥차게 잘 듣는 집정관이었다.
후우우우우웅-!
마나를 잔뜩 머금은 도끼가 실란의 몸을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초당 수십 번 휘둘러지는 도끼의 날은 머리 잃은 그녀의 몸이 바닥으로 쓰러지기 전에 토막 냈으며 군중은 이 잔인한 광경을 보며 점차 달아오른다.
-우우우우우우우!
-나쁜 년! 퉤!
-내게도 한 조각 주시오! 우리 집 개한테 먹이리다!
번은 이들을 보고 순수하다 했다. 그건 틀린 말이 아니다. 본래 순수할수록 더욱 잔인하고 직설적이니까. 어린 꼬마가 잠자리 날개를 또옥 또옥 끊어내는 것을 보았나? 혹은 아프리카 오지의 아이가 어른들 틈에서 담배를 태우는 것을 보았나? 그런 것들을 본 적이 있다면 지금 이 광경 또한 납득하리라. 이것은 21세기 대한민국 이전의 중세 사회에서도 분명히 일어났던 일이다.
‘가차 없군.’
번은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생각했다.
저리 허무하게 죽을 사람. 시체조차 온전히 보전하지 못하고 넝마처럼 변해버린 여자가 자신을 근 10년이나 괴롭혀왔다.
“······.”
묘하게 시원섭섭하기도 하고, 참 부질없단 생각도 든다. 그런 번의 표정을 읽었을까? 황제의 머리가 번을 향한다.
“과하다 생각하느냐?”
번이 머릴 흔들었다.
“아닙니다. 저들은.. 그럴만한 죄를 지었습니다.”
번이 입술을 깨물었다.
무슨 아침 막장 드라마도 아니고 남의 자식을 황자로 밀어 넣다니, 몇 번 죽어도 할 말 없는 일이었다.
“내가 가장 화나는 게 무엇인지 아느냐?”
“······?”
황제는 시선을 돌려 카이사르를 보았다.
-모든 내막을 알고 있었음에도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휘둘리고 가담한 죄! 카이사르! 참수!
집정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도끼가 카이사르의 목을 베었다.
투욱, 툭. 툭..
황제는 그 모습을 보며 비웃었다.
“능력도 없는 잡것들이 탐할 자리가 아니다.”
“······.”
황제는 이를 갈며 말을 질겅질겅 씹어 내뱉었다.
“이 황좌는 어중이떠중이가 앉아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번은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가 이 자리까지 오며 이룩한 것들에 대해 얼마나 큰 자부심과 가치를 두고 있는지를.
이제 번에게도 그만큼 엄격한 잣대를 요구할 것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아버지에겐 많은 자식이 있고, 앞으로도 계속 태어날 거다. 후계자가 되었다고 넋 놓고 앉아 있다간 언젠가 저 카이사르처럼 무력하게 머리가 잘려나갈 게 확실하다.
-길티기어 후작! 참수!
형장의 이슬은 계속해서 늘어갔다.
-아로 남작 참수!
저들은 모두 역모에 가담한 죄로 죽어간다.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승리자의 기록이 곧 역사가 되고, 지금처럼 죄명은 갖다 붙이기 나름이니까.
“그래..”
열 명쯤 목이 잘리자, 흥미가 떨어졌는지 황제가 번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네 번째 인물은 정했느냐?”
번은 가볍게 끄덕였다.
“네, 대현자를 청했습니다.”
“호오, 그가 응하더냐?”
흥미롭다는 듯 번을 바라보는 황제.
“오늘 밤까지 기별을 주기로 약조했습니다.”
번은 어제 오그마리온을 만나 도와 달라 부탁했다.
“그의 마음을 얻는다면 큰 세력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거다.”
황제의 말처럼 바로 이것 때문에 번도 대현자를 꼽았다. 전국 방방곡곡에 퍼져있는 추종자들이 대현자의 말이라면 속옷 바람으로 뛰쳐나와 거들 것이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이 그를 망설였던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이리도 강력한 황제마저 등지고 떠나 유배나 마찬가지인 고립된 생활을 하는 노인이다. 그 꼬장꼬장한 사람을 곁에 두어 얻는 것이 많을 것인가, 아니면 배제하고 쉽게 다룰 수 있는 다른 사람을 찾는 것이 옳을 것인가.
“잘 해보아라. 쉽진 않겠지만 말이야.”
황제는 뭘 떠올린 건지 큭큭 웃었다.
유능함을 알면서도 곁에 두지 못했던 인물. 과연 황자가 그를 거둘 수 있을까?
“현자께서 소자를 어여삐 여겨주시니,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아니지. 아니야. 그 변덕을 누가 알까?”
황제뿐만이 아니었다. 뒤에 서 있던 은사와 딘딘마저도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
번은 갸웃했지만, 되묻진 않았다. 어차피 자신이 넘어야 할 산이다.
“성녀는 내일 너에게로 갈 것이다.”
“아..!”
“그리 알 거라.”
“소자, 폐하의 은혜에 꼭 보답하겠습니다!”
황제가 신전에 어떤 압력을 넣었는진 모르겠으나, 이제 장기 말은 모두 갖춰졌다.
‘나 또한 넷으로 시작해 천하를 가질 것입니다! 당신처럼!’
번의 의지가 활활 불타올랐다.
그리고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누군가의 목은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
.
.
성녀.
“가루비에요.”
마녀.
“융입니다..”
전직 왕까지.
“페트릭이네.”
괴상망측한 조합의 사람이 한자리에 모였다.
번은 황궁에 기거할 수 있는 주거공간을 받았는데, 회의장이나 회식장소로 쓸 수 있는 넓은 식탁이 마련된 응접실까지 딸려있는 고급스러운 장소였다. 확실히 일반 황자가 아닌 후계자로 간택되자, 대우가 달라진 것이다.
힐끔.
페트릭이 성녀와 마녀를 훑어보곤, 번에게 다가왔다. 그러더니 두 손을 꼭 잡았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이리 약속을 지켜주시다니, 이제 저는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페트릭의 말투가 변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죽긴 왜 죽습니까? 앞으로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요. 끝까지 함께 가셔야지요.”
번이 미소 지었다.
벨버른.
페트릭에겐 뼈에 사무치는 이름이자, 모든 것이 담긴 고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죽어서도 못 갈 것 같던 그곳을 다시 밟게 되었으니 이 어찌 감격하지 않을까?
“앉으세요. 할 이야기가 많습니다.”
“예, 예. 그럼요.”
페트릭은 흐뭇하게 웃으며 번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둘과는 달리 저쪽에선 아주 냉랭한 한기가 풀풀 풍겨났다.
마녀와 성녀.
“······.”
“······.”
같은 공간에 있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는 그녀들이다. 그래서일까? 미치겠는지 둘 다 표정이 아주 말이 아니었다.
‘슬슬 터지겠는데?’
번은 속으로 웃으며 둘을 지켜보았다.
언젠가 부딪힐 거 미리미리 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좀 떨어지세요. 불쾌합니다. 숨도 못 쉴 만큼 견디기 힘들군요.”
“나도 마찬가지거든요? 답답해 질식하겠네요.”
성녀는 번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다. 무제한으로 신성력을 뽑아 먹을 수 있는 소위 ‘빨통’ 아닌가? 꿀이 뚝뚝 떨어지는 보물을 손에서 놓으면 바보다.
“당신이 왜 아직도 살아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제 반역자들과 함께 참수당했어야 하지 않았나요?”
“흥! 남 이사. 고귀하신 분께서 이렇게 관심 가져주시니 참으로 별꼴입니다!”
그와 같은 개념으로 마녀 또한 마찬가지다. 속성만 다를 뿐 번은 마녀에게서도 이것저것을 뽑아먹고 있었다. 훗날의 스팀팩을 위해 지금 반드시 얻어야 할 경험치와 마찬가지로 보면 되는데, 당연하게도 저 둘은 그런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이이익..!”
성녀가 벌떡 일어나려는 걸 번이 만류했다.
“시시콜콜한 감정싸움 하자고 모인 것이 아닙니다. 성녀님, 가져오셨습니까?”
번의 말에 성녀가 입을 꾸욱 다물고 마녀를 한번 노려보더니, 끄덕이며 옆의 상자를 가리켰다.
“벌써 3개째에요. 아무리 황명이 있었다지만, 신전에선 이번 일로 백 년간 과실을 얻을 수 없게 되었어요. 손실이 큽니다. 꼭 알아주셨으면 해요.”
가이아 신전의 보물이자, 신이 직접 심었다고 알려진 나무의 열매. 번은 이미 지난 반 년간 두 개를 혼자 꿀꺽했다. 그것도 모자라 남은 한 개까지 요구한 것이다.
“네, 그럼요. 압니다. 감사함을 꼭 잊지 않을 것입니다. 악마를 뽑아내면 가장 먼저 가이아 신전에 방문하겠습니다. 꼭 약조드리지요.”
“······.”
몇번이고 강조하는 번.
그의 말에 흡족한 듯 미소마저 띄우는 성녀다.
신창.
번이 경연 때 보인 그것으로 인해 각 신전은 지금까지도 난리였다. 매일같이 황궁으로 번을 접견하려는 고위 사제들이 줄을 이었고, 진실로 신창이 맞는지 확인하길 원했다.
전설 속에만 존재한다던 신의 무기武器. 당연히 그 사실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그래요. 꼭 지켜주셔야 해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번은 환하게 웃으며 성녀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크크크! 저 멍청한 계집이 또 당하는구나!
악마가 즐거운 듯 외쳤다.
아무래도 악마에겐 성녀 존재 자체가 고까울 수밖에 없었는데, 번이 그녀를 계속해서 이용하자, 속이 시원한 모양이다.
악마가 뭐라 떠들든 번은 온화한 얼굴로 재차 말했다.
“벨버른은 지금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다 합니다. 그곳의 백성들은 반군의 약탈과 범죄에 노출되어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텨내고 있습니다. 굶주린 아이들은 풀을 뜯어 먹고,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 나약한 자들을 공격해 사람까지 잡아먹는다는 소문이 돌 정도라고 하니.”
“허어..!”
번의 말을 듣던 페트릭이 탄식했다.
자신이 일군 왕국이 그 지경이 되었다는 것에 가슴이 미어지나 보다.
식인食人.
인간의 존엄성이 바닥까지 떨어지고, 이성이 마비되며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최소한의 끈마저 놓아버렸을 때 일어나는 현상.
“아아.. 어떻게 그런 일이..”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말에 성녀 또한 얼굴에 그늘이 졌다. 그녀는 천생 남을 도울 팔자를 타고난 사람이다. 누구보다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고, 위로하며 함께 슬퍼한다.
“지고하신 폐하의 황명이 있기도 했지만, 그것이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벨버른에 닥친 지옥을 끝내야만 합니다.”
번의 말에 페트릭이 부들부들 떨었다.
“도와주십시오! 황자님! 부디.. 그 가련한 사람들을..”
당장에라도 그 주름진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다.
“당연합니다!”
번은 경쾌하게 끄덕였다.
“제가 반드시 벨버른을 구할 것입니다!”
고작 열 살. 이 어린 황자가 무슨 힘이 있어 그 일을 해낼 수 있을까? 페트릭은 번의 말에 위안을 얻으면서도 한편으론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여러분의 절대적인 도움이 필요합니다.”
번이 이들을 고른 것에는 개인의 쓸모도 있었지만, 그들이 가진 각자의 세력 때문이었다.
성녀는 신전을 추종하는 신도들을 거느릴 수 있고, 마녀는 그녀대로 써먹을 수 있는 부류가 있다. 페트릭은 명분이 있으며,
‘늦는군.’
다른 한 사람 역시 마찬가지다.
‘오지 않으려나?’
번이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기자, 페트릭이 말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것입니다.”
성녀도 끄덕였다.
“저도 도울게요. 사람들이 그리 괴로워하는 것을 외면하면 안 돼요.”
의협심에 불타는 그들을 보며 마녀 융이 입술을 삐죽였다.
‘위선자들 같으니라고. 지금까지 따듯한 방에서 배불리 먹으며 잘만 지냈으면서 갑자기 돌변하는 걸 보라지. 흥!’
잔뜩 쏘아대고 싶은 걸 억지로 참는 표정.
그때였다.
똑똑.
누군가 문밖에 왔다.
‘왔군.’
번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