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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좌의 게임-57화 (57/177)

# 내 사람 2 #

달군 프라이팬에 쏟은 설탕처럼 순식간에 녹아 번의 손으로 흡수되기 시작하는 약!

“흐으.. 흐으..”

침이 절로 뚝뚝 떨어졌다.

동공은 확장하고, 핏줄이 지렁이처럼 꿈틀대며 피부 밖으로 용솟음쳤다.

-그만해! 미친 자식아!

악마의 목소리 따위는 언제든 한 귀로 흘려버릴 수 있는 번이었기에 계속해서 하던 일을 진행했다.

「내성이 올랐습니다.」

「아드레날린이 한계치까지 분출됩니다.」

‘조금만 더! 조금만..!’

「엔도르핀이 새로운 성분과 합성됩니다.」

“크윽..!”

번의 몸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괴로운지 몸이 베베 꼬인다. 그러면서 본능적으로 뼈는 흐물흐물해지고, 피부가 늘어졌다.

「머리가 단단해집니다.」

「골절을 예방하고자 육체를 조율합니다.」

흡사 뱀처럼 변한 번의 몸.

누가 이 광경을 보면 기절할 듯 놀랄 것이다.

-멈춰! 뇌가 녹아버릴지도 모른다고!

악마의 만류에도 번은 계속해서 강행했다.

지난 반년. 밤에 2시간 이상을 자본 적이 없었다. 고된 일과를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도 사람들의 눈을 피해 늘 이곳으로 와 단련했다. 그중 가장 주된 목적은 남아 있는 약을 모두 흡수하는 것이었고,

「이로운 오색 기운이 돕습니다.」

「성력이 해로운 기운을 밀어냅니다.」

「어둠이 고통을 반깁니다.」

몸속의 여러 기운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걸레처럼 늘어져 꾸물거리던 번.

그의 몸에서 어느 순간, 빛이 화악! 터져 나왔다.

-이런 독한 놈! 결국, 해내는구나!

빛은 한가지 색이 아니었다. 휘황찬란하다 말하는 것이 가장 잘 어울릴 것이다. 우윳빛 신성력과 대비되는 칠흑 같은 어둠, 그것들 주변으로 타악, 타악 번지는 오색 마나의 향연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아드레날린과 엔도르핀이 새로운 성분과 합성에 성공했습니다.」

‘됐어!’

번은 모든 고통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차단’ 능력을 얻었습니다. 이제 신경을 주관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몸은 한계가 정해져 있다. 주먹질에도, 달리기에도 하다못해 가만히 눈만 뜨고 있는 것에도 장시간 하면 잠을 자서 피로를 풀어야 하고, 몸속에 흐르는 독소를 정화해야 했다. 내부적으론 그렇다는 거고, 외부적으론 위험을 감지했을 때 그 신호를 뇌에 전달하는데, 그것이 바로 고통이다. 번은 지금 그 고통을 마음대로 차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참는 것과 느끼지 않는 것의 차이는 크다.

“흐으.. 흐으..”

번이 꿈틀거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아직도 뼈가 흐물흐물 녹은 것처럼 되어, 마치 커다란 진흙 괴물이 일어서는 것 같았다.

“이거 하나 얻길 생각보다 오래 걸렸어..”

약을 장복하면서 몸에 어떤 변화가 생기려 한다는 것은 진즉 눈치채고 있었다.

-이놈아! 이건 엄청난 거라고! 충분히 기뻐해도 좋은 일이야!

악마의 말마따나 대단한 능력인 건 맞다. 하지만 번은 아직도 배가 고프다. 채워지지 않는 공복감은 더 많은 것을 원하고 있었고, 주변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다 써먹었다는 것도 안다.

흐물흐물..

번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질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의 몸에 작은 돌기들이 아래쪽으로 툭툭 돋아나기 시작했다.

-너, 뭐하냐?

한 달이라 했다. 하고자 하는 일을 모두 이루려면 단 하루도 허비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꾸물꾸물..

번의 몸이 지네처럼 스르륵 한쪽으로 이동했다. 이건 마치 내장을 모두 뽑아낸 돼지 껍데기 덩어리가 바닥을 미끄러지는 것처럼 보였는데, 벽에 난 작은 구멍으로 쑤욱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와구와구.

그저 이동만 하는 것이 아니다. 뻥 뚫린 입으로 주섬주섬 흙을 먹고 있었다.

「2가지 광물을 흡수했습니다.」

「체력을 보충합니다.」

이 형태는 단순히 지렁이의 능력만 발휘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양하고 신비로운 여러 생물의 장점만 조합해 지금 번에게 꼭 필요한 모습으로 이동하고 있는 거다. 다소 보기 흉측하긴 하겠지만, 뭐 어떤가? 누구 보여주려고 만든 것도 아닌데.

꾸물꾸물.

번은 계속해서 움직였다. 이미 틈날 때마다 파놓은 통로는 지난번 도서관에서 빼낸 지하통로 지도와 맞물려 개미굴 같은 그만의 고속도로를 수도 지하에 잔뜩 깔아두고 있었다. 형체만 보면 느리게 생겼지만, 82개의 다리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였고, 떨어지는 체력은 흙을 먹으며 계속 보충해가니 장거리 이동에도 끄떡없었다.

-대 에비뉴의 후계자가 이런 꼴로 지하를 기어 다니는 걸 알면 사람들이 아주 까무러치겠구나!

악마의 말에 번이 큭큭큭 기괴한 목소리를 냈다. 자기가 생각해도 웃긴 거다.

진화進化.

꼴은 이래도 번은 그사이 이렇게 성장했다.

-근데 어디로 가는 거냐?

약을 온전히 흡수하는데 시간이 꽤 걸렸을 테니, 계산이 맞는다면 밤 11시쯤 되었을 거다. 유흥거리가 널린 21세기 한국과는 달리 여기 에비뉴는 특정 구역을 제외하면 해가 지면 모두 잠자리를 준비하기 시작한다. 그런고로 지금은 모두가 깊이 잠들었거나, 졸린 눈을 비벼가며 꿈을 청할 시간이리라.

꾸물꾸물..

번은 열심히 다리를 놀렸다.

-람보르로 가는 거냐? 아니.. 빈민가?

번은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향했다.

수도에서도 가장 빈곤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데들랑이었다.

.

.

.

사흘 후. 아침이 밝았다.

여느 날과 똑같이 하루를 시작하려는 인파로 거리는 활기를 띠었고, 모두가 각자의 생업전선으로 뛰어들었다.

그런데,

“어?”

“왜? 뭔데 그래?”

사람들의 발걸음이 어느 지점에서 멈춰섰다.

“이것 좀 봐.”

아직 물기 묻은 머리칼을 손으로 털어내며 중년 사내가 벽에 붙은 방榜을 보았다.

“흐미..”

"이게 무슨 소리여?"

황제의 직인이 찍힌 벽보는 모두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게 참말이여?”

“그래, 오늘 정오에 사형식을 거행한다는구먼.”

새벽녘, 수도 전역에 뿌려진 소식에 오전 내내 사람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 경연 때 번 황자님께서 말씀하셨던 그 일 때문인가?”

“쉿! 말조심하게! 아니라지 않나!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지 말게! 경을 치려구!”

카이사르 황자의 아비가 황제가 아니라는 소문은 철저하게 단속되고 있었다. 황실의 존엄을 해치는 유언비어를 퍼트리는 자는 반드시 색출해 엄하게 벌하겠다는 황명까지 내려진 상태.

“쯧쯧.. 기어코 이리되는구먼.”

“그러게 말이여. 2황비님이 그러실 줄이야.”

벽보엔 2황비 실란을 필두로 반역을 준비하던 조직이 일망타진 되었다는 말과 함께 이들을 공개 처형하여 다시는 이런 시도를 하는 이가 없도록 본보기를 보이겠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정오가 되었다.

어느덧 머리 위로 높게 해가 솟구쳤고, 광장엔 수많은 인파가 모여들었다.

“끌..”

황제는 의자에 깊이 몸을 기대앉아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볕 때문이 아니다.

“아직도 흔적을 못 잡았다고?”

은사와 집정관이 동시에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어찌나 감쪽같은지..”

수도 전역은 반역자들의 처형으로 난리가 났지만, 그 이면엔 아주 해괴한 일이 벌어져 황제의 심기를 어지럽혔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첫날은 그렇다고 쳐. 어제부턴 경비를 강화했잖나? 그런데도 당해?”

전에 역병이 돌기 시작할 때, 빈민가와 시장, 번화가처럼 인파가 많이 몰리는 곳에 물의 정령을 배치했던 일이 있었다. 경연이다 뭐다, 바쁘기도 했고, 멀리까지 물을 길으러 갈 필요가 없어진 백성들의 반응이 좋기도 해서 당분간 놔두었었는데, 며칠 전부터 그 물의 정령이 실종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랬다. 실종失踪.

그야말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골목마다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지만, 아무런 기척을 감지하지 못했습니다.”

“그럼 뭐? 하늘에서 뚝 떨어져 낚아채 갔다는 거야? 땅에서 솟았다는 거야?”

정령은 비싸다. 그렇기에 람보르의 노친네들이 과시나 사치품으로 사무실에 하나쯤 두고 싶어 할 정도였고, 전장이나 실생활에서도 유용한 쓰임이 있기에 활발하게 거래된다.

“십위十衛가 모든 도둑 길드와 음지에서 활동하는 용병들을 추적하고 있으니, 곧 행적이 밝혀질 것입니다.”

정령마다 고유의 색인索引을 지니고 있기에, 다른 나라로 빼돌리지 않는 한 암거래도 힘들다. 감히 누가 철鐵의 황국 정령을 건드릴 수 있었을까?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고작 이틀 만에 아홉 기가 당했습니다. 이런 일을 개인이 벌였을 리 없으니, 규모 있는 조직을 뒤지다 보면 반드시 꼬리가 밟힐 것입니다.”

“허..”

황제는 기막혀 혀를 찼다. 이런 일은 에비뉴 역사상 처음 있는 사건이었다. 대체 누가 정령을 훔쳐갔단 말인가? 득보다 실이 많을 것을. 차라리 돈을 훔쳐 떳떳하게 정령을 구입하는 것이 더 쉬운 일 아닌가?

“해괴한 지고..”

여하튼 은사가 본격적으로 나섰으니, 머잖아 해결될 일. 황제는 입맛을 다시며 옆을 보았다. 의자에 번이 배를 두드리며 앉아 있었다.

“점심 먹은 것이 아직 꺼지지 않았느냐?”

“예, 더부룩한 것이.. 그런 것 같습니다.”

-점심은 무슨! 정령을 아홉 마리나 처먹어서 그렇지!

악마의 말이 맞다.

「물水의 기운을 흡수합니다.」

「새로운 성분을 분석 중입니다.」

「물의 기운이 혈액을 정화합니다.」

「물의 기운이 독毒에 영향을 미칩니다.」

번은 지금 다른 쪽으로 아주 배가 불렀다.

수도에서 사라진 아홉 마리의 정령에 대해 황제가 얘기하는 사이에도 순진한 눈망울로 초롱초롱하게 앉아 아무것도 모른 척하고 있었다.

“황자는 몸 관리에 더 주의할 필요가 있다. 너는 이제 혼자의 몸이 아니다. 국가의 재산이며, 황국의 미래다. 만사에 조심 또 조심하여야 할 것이야.”

“그리하겠습니다. 심려 끼쳐 죄송할 따름입니다.”

“아니다. 한창 자랄 나이니, 곧 소화되겠지.”

번은 지금 황제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아직 공식적으로 후계자로 천명된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 이것만으로도 모여있는 사람들은 번의 올라간 위상을 실감한다. 물론 뱃속에 구렁이 대신, 정령을 아홉 마리나 넣고 있는 것을 까맣게 모르겠지만, 번은 진심으로 아무렇지 않았다.

‘뭐 어때?’

손톱만큼도 미안하지 않다.

그는 포식자다. 다른 동물의 먹잇감으로도 살아봤고, 여러 삶을 거치며 온갖 짐승은 다 먹어보았다고 할 수 있다. 정령? 인간과 비슷하다고 하여 착각하지 말자. 그것들은 그저 우리가 먹고 마시는 물과 같은 것이며, 자연의 일부다. 죄책감 따위를 느낄 대상이 아니라는 거다.

‘철수하기 전에 많이 챙겨둬야지.’

비간트가 아니라 판명되어 수도 전역에 배치되었던 정령이 다시 회수될 것이 분명하기에 그 전에 미리 손을 쓴 것이었다.

-오! 시작하려나 보다!

두웅-!

북이 울렸다.

잠깐 사이 저 아래 광장으로 내려간 집정관이 크게 외쳤다.

“죄인을 대령하라!”

그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차갑고 무거웠으며, 사람들은 이제 곧 벌어질 처형에 기대와 분노를 함께 느끼고 있었다.

-흐읍..

-세상에..

-저분이 2황비란 말인가?

-히익, 얘! 보지 마! 눈 감아!

광장엔 아이들까지 와 있었다. 애초에 19금이란 딱지 자체가 없는 세상이다. 그런데도 줄줄이 엮여 끌려 나오는 죄수들의 모습은 아낙들이 자식의 눈을 손으로 덮을 만큼 끔찍한 것이었다.

두 눈은 두꺼운 바늘을 이용해 꿰매 있었다. 굵은 실밥이 새빨간 피딱지에 흠뻑 젖어 거미줄처럼 내려앉았고, 온몸엔 채찍이 지나간 자국이 구불구불 선명하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였기에 그런 흉터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는데, 입엔 재갈이 물려 있었다.

「보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 너희가 하려 했던 불충을 지워지지 않는 고통으로 갚아라!」

황제가 얼마나 분노했는지는 그들의 몰골을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30여 명에 달하는 죄인들이 집정관 앞에 도열했다. 비틀거리는 그들은 걷는 것도 신기할 정도로 피폐해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황제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주변에 있는 몇 사람에게만 들릴 정도로만.

“개새끼가 늑대 행세를 하려 했으면 들키지나 말았어야지.”

2황비 실란을 똑바로 노려보는 그의 눈길 속엔 불꽃이 튀었다. 옆에 앉은 번은 한쪽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살을 맞대던 가족이었건만, 이리도 냉정해질 수 있다니, 이 황제란 사람은 정말..

“······.”

번이 가볍게 침을 삼키며 한 사람을 눈으로 좇았다.

2황비의 옆에 볼품없이 선 사내.

“카이사르도 처형하는 것입니까?”

그랬다.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번과 후계다툼을 벌이던 황자가 이젠 저곳에 있었다. 발가벗겨진 채 손에 아무것도 쥔 것 없는 채로.

“그리 부르지 마라. 신神이 분노하실 게다.”

황제가 으르렁댔다.

자식들의 이름을 대륙의 99신 이름을 따 지었다. 한데, 이젠 그조차 부끄러워 하늘도 올려보지 못하겠다.

-캬캬캬! 아주 꼴좋구나! 저놈 꼬락서니 좀 보라지!

악마는 아주 신이 났다.

-어라? 그러고 보니 너..

웃던 악마가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

-그 이름..?

번.

그 역시 신神의 이름을 쓰고 있지 않나?

‘뭐? 왜?’

-그래도 되는 거냐? 자비와 은혜를 관장하는 번 신神이 지켜보고 있을 텐데? 그가 널 보면 아주 많이 실망할걸?

‘크크크..’

번은 웃어버렸다.

‘어쩌라고?’

뭐 보태준 거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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