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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좌의 게임-56화 (56/177)

# 내 사람 1 #

“이번 경연을 훌륭하게 치러낸 포상으로 하나쯤은 특혜를 내리셔도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는 기억한다.

-은사! 황명을 받으세요!

2황비의 처소에서 당차게 외치던 번의 목소리를.

그때 잠깐이었지만, 전율까지 일지 않았었나? 아마 앞으로도 가진 걸 잘 이용하며 살 거다. 그 당돌함이 어디까지 갈지 지켜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모두가 너에게만큼은 아주 후하구나.”

황제가 웃으며 번에게 손짓했다. 가까이 오라는 뜻이다.

“그만큼 처신을 잘 해왔다는 것이겠지.”

“과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최선을 다해 보답할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어쩌면 말도 이리 예쁘게 할꼬? 이런 건 누군가에게 배워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타고나든지, 아니면 하루 24시간 매분 매초를 긴장한 채 완벽하게 살아야 했다. 어느 쪽이든 군주의 자질론 나쁘지 않을 터.

황제는 번이 가까이 오자, 자신의 목에서 휘장처럼 생긴 것을 풀어냈다.

“······.”

목걸이처럼 목에 두르는 형태의 것. 금으로 만들어져 있고, 독수리 문양이 새겨있었다.

“이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선대 왕께서 폐하께 하사하셨던 것으로 아옵니다.”

“그래, 내가 후계자가 되었을 때 받은 것이다. 그때 나도 네 또래쯤 되었었지.”

과거를 추억하듯 잠시 말을 끊었던 황제는 번에게 좀 더 손짓했다. 번이 좀 더 다가오자, 번의 목에 직접 휘장을 걸어준다. 나비넥타이처럼 목 바로 아래 달린 금빛 문장은 번이 어딜 가든 쉽게 눈에 띄리라.

“자치단체장(영주)이나 기관장을 제외한 모든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권한을 주겠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기존의 패보단 한 급 떨어지는 것이었지만, 이정도만 해도 후계자란 명함과 함께 쓰면 강력한 위력을 발휘할 것이다.

“준 귀족 신분의 기사도 포함하며 최대 일천까지 허許하겠노라.”

후계자가 많은 병력을 모은다는 것 자체가 반역이나 역모 같은 자칫 좋지 않은 소문을 만들 우려가 있기에 일천으로 제한한다. 그러나 번은 가벼운 소름이 돋았다. 기사를 포함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에비뉴의 강력한 무력을 고스란히 내 휘하에 둘 수 있다는 뜻 아니겠는가? 21세기로 따지자면 작은 연대급 부대를 하나 가진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것도 언제 어디서든 모을 수 있는 동원령의 권한을 말이다.

“이 은혜, 반드시 벨버른의 평화로 갚겠나이다.”

“그래, 잘 해보도록 해라. 신전엔 내, 따로 기별을 넣어두마. 그들이 어떻게 나올진 두고 봐야겠지만.”

번은 최대한 예를 갖추며 황제에게 인사한 뒤, 방에서 나갔다.

공치사는 끝났다.

훈훈하던 공기 역시 다시 무겁게 내려앉기 시작했고, 황제는 번이 나간 문가를 바라보며 집정관에게 말했다.

“저 녀석을 포함해 모든 황자와 공주의 씨를 추적해라.”

“하는 김에 전 황족을 대상으로 하겠습니다.”

“그것도 좋겠지. 궁에 숨어든 모든 모몰트를 색출해 사지를 찢고 태워버려라. 그에 관련된 잡것들까지 모조리!”

“그리하겠습니다.”

조금 전 웃어주던 아버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아주 차갑고, 섬뜩한 표정으로 집정관과 대화를 나누는 그의 모습을 보며 스캇이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피바람이 불겠구나.’

기사들이나 건장한 사내들과 놀아난 여인들이 꽤 있는 걸로 아는데, 오늘 밤부터 그들은 자신의 문란함이 찝찝하여 잠들지 못 할 것이다. 어쩌면 당장 오늘부터 야반도주하는 사람들이 대거 수도의 담을 넘을지도 모르겠고.

“스캇.”

황제의 갑작스러운 부름에 스캇이 생각에서 깨어났다.

“예..? 아, 예!”

“녀석이 배우고자 한다면 마법 몇 가지 더 전수해.”

“구체적으로 어떤 것 말씀이십니까?”

“일국의 후계자가 방패만 있어서 쓰겠나?”

우리는 철鐵의 군대다. 그에 걸맞은 공격력이 필요하지 않나?란 표정이었다.

“알겠습니다. 배우지 않는다고 떼를 써도 어떻게든 주입해놓겠습니다.”

“그 녀석이 그럴 리가?”

개똥도 나중에 써먹으려고 챙겨둘 녀석 아니던가?

“황실의 고귀한 핏줄을 음해하는 소문따윈 확실히 차단하고.”

“단속을 강화하겠습니다.”

“나라 밖으로 흘러나가 국격을 떨어뜨리는 가십도 차단해.”

“그리 이르겠습니다.”

“그리고..”

황제는 그렇게 몇 가지 더 세부적인 지시를 내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자.”

2황비. 이제 그년을 만나야겠다.

.

.

.

“후..”

집으로 돌아온 번은 십 년 감수한 표정으로 긴장을 풀었다. 이렇게 홀로 있을 때를 제외하면 늘 살얼음판을 디디며 걷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런 것, 나쁘지 않다. 살아있다는 기분이 드니까. 첫 번째 삶을 제외하곤 언제나 그렇게 살아왔지 않은가? 야생에서 천적들과 함께 어울리며 말이다.

-야, 이제 다 끝난 거냐?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기적이며 축복이란 걸 사람들이 알까?

-너 지금 나 무시하는 거냐? 어?

악마. 이젠 한몸처럼 되어버려 저 녀석이 진정 악마인지, 아니면 내 안의 또 다른 모습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생각하는 중이잖아. 눈치 좀 있어라.”

-허! 이제 써먹을 대로 다 써먹었다 이거냐? 나와의 약속! 잊지 말라고! 쪽쪽 빨아먹고 버리면 재미없을 줄 알아!

번은 쓰게 웃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그래, 이 녀석과도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기다려. 곧 네가 원하는 대로 할 거니까.”

-그래, 크크크! 그래야지!

“그러니까 좀 닥쳐. 생각 좀 하게.”

-이런 개차반 같은 자식이! 허허..! 세상 사람들이 네놈 본모습을 알아야 하는 건데!

번은 악마를 무시하고, 침대에 앉아 팔짱을 꼈다. 그간 너무 정신없이 많은 일을 치르다 보니, 차분하게 정리를 할 필요가 있었다.

‘벨버른이라. 나쁘지 않아.’

번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피어났다.

반군을 몰아내는 일. 얼핏 보면 몹시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번에겐 아주 다양하고 많은 지식이 있다. 그것도 이 시대에선 상상도 못 하는 아득히 진보한 세상의 것이.

‘2황비도 이제 말끔히 해결될 거고.’

이번 경연에서 번이 준비한 것은 단순히 1위를 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오랜 정적을 완벽하게 제거하는 것. 그것을 위해 연기도 했고, 거짓도 만들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웃긴다. 신창이라니.

“크흐흐..”

껍데기뿐인 그걸, 구경하던 사제들이 진짜로 만들어줬다. 번이 한 일이라곤, 몸속의 신성력을 밖으로 뽑아낸 것뿐. 물론 도서관에서 찾은 전설의 그것을 모방하여 사람들의 관심을 유도하고, 악마 들린 황자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일이었긴 해도, 이리 잘 먹힐 줄은 그 역시 예상하지 못했었다.

“확실히 여기 사람들은 순진하단 말이야.”

성벽에 범죄자를 매달아 놓고 죽을 때까지 돌을 던지거나, 마녀를 산채로 화형에 처하는 그런 단면을 보면 끔찍하고 잔인하지만, TV나 미디어가 없는 세상이라 그런지 누군가 대놓고 속이고자 마음만 먹는다면 그 연기를 가려낼 능력이 없었다. 그러니 2황비 그 여자가 태연하게 남의 자식을 황궁에서 키울 수 있었겠지만.

‘뭐 어찌 됐든.’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렸다. 이젠 내 사람을 만들어 세력을 구축할 때다.

황제가 강한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지녀서이기도 하지만, 강력하고 유능한 조력자가 있는 것도 크게 한몫한다 말할 수 있었다. 물론 당장에 딘딘만큼 굳세거나, 집정관처럼 사리에 밝은 사람을 구할 순 없을지라도 곁에 두고 키우면 된다. 번은 황제에게 없는 것들이 잔뜩 있지 않은가?

똑똑.

때마침 들려오는 노크.

“들어와.”

문을 열고, 아름다운 여자가 들어왔다. 다소 긴장한 표정이었고 내리깐 속눈썹은 매력적이었지만, 번에겐 그저 암컷.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성의 아름다움에 현혹되는 것은 내게 없는 그 어떤 것에 매혹되어 그런 것인데, 번은 이미 숱하게 암컷으로 살아봤기에 별거 없단 걸 너무도 잘 안다.

“부르셨다고 들었어요.”

저렇게 예쁜 얼굴로도 똥은 싸고, 방귀도 뀐다. 다 그런 거다. 환상을 걷어내면 이리도 편하다.

“그래. 앉아.”

융이 작은 의자를 가지고 번의 맞은편에 가까이 앉았다.

마녀.

죽을 날만 기다리던 시한부 인생. 하지만 그녀는 번에 의해 구사일생했고, 그 조건으로 이젠 목줄이 채워져 그 손잡이가 번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널 죽여 없애는 게 내겐 더 이득이었을 수도 있어. 알지?”

흠칫.

번의 말에 융이 몸을 떨었다. 참으로 안쓰럽고 보듬어주고 싶은 가녀린 모습. 고작 10살짜리의 협박이지만, 이제 안다. 이자의 이면이 얼마나 독한지를!

“그러니까 그 간당간당한 목숨 부지하고 싶으면 내 앞에선 추태 부리지 마. 할멈.”

“······.”

융은 억울한지 이마를 와락 구긴다.

그래도 꽤나 협력하지 않았나?

“말을 꼭 그렇게 해야겠어요?”

“우리 사이에 격식을 차릴 이유가 없지 않나?”

번은 마녀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외딴 숲 오두막에서 거미로 살았을 때, 번은 융을 분명히 보았다. 2황비와 주크버그가 찾아온 것도 말이다. 융의 모습이 그때완 달랐지만, 이 연결고리에서 쉽게 그들의 관계를 유추해낼 수 있었다. 짧은 생이었지만, 거기에 담긴 정보는 엄청난 것이었고, 번의 몸에 악마가 들어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부터 융도 협조했다. 성녀에게 신神이 절대적이라면 마녀에겐 악마가 신神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얼굴에서 예쁜 표정을 싹 걷어낸 융이 번을 보며 물었다.

“이제 저는 뭘 하면 되죠?”

“간단해. 한 달 후 내게서 악마를 완전히 뽑아냈다고 공언하면 돼.”

“들키면요?”

“그럴 리 없다는 거 알잖아?”

번은 가진 걸 빼앗길 생각이 없었다. 악마든 뭐든 간에 일단 내게 도움이 될 가능성이 0.1%만이라도 된다면 무조건 움켜쥐고 볼거다. 그러기 위해선 마녀 융의 지식과 신분이 필요했고, 남은 시간 동안 악마의 흔적을 아주 깊숙이 묻어버려야 했다.

“후..”

융은 머릴 흔들며 한숨을 쉬었다.

이 꼬마에게 휘둘리는 것도 이젠 이골이 났다. 10살짜리라 인식하는 순간 뒤통수를 맞는다. 대체 뭘 처먹고 자랐는지 뱃속엔 능구렁이가 수백 마리쯤 들어있는 것 같았다. 대화를 하다 보면 그 깊은 심계에 깜짝깜짝 놀라곤 하니, 기막힐 밖에.

하지만 어쩌랴. 살기 위해선 따를 수 밖에 없는데.

“알았어요. 당신이 알아서 하겠죠.”

이젠 드래곤이 어린 황자로 폴리모프 하고 있다고 해도 믿을 지경이다.

“그래, 너는 시키는 대로만 해. 그러면 산다. 오래오래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아야지?”

“어휴! 말을 해도..”

융은 삶에 대한 집착이 강한 여자였다.

늙으면 죽을 날만 기다린다고? 그건 몰라서 하는 말이다. 가진 게 많고, 미련을 많을수록 인간은 언제까지고 영원히 살고자 하는 생물이다.

“아! 그리고 벨버른에 대해 알아?”

“몇 번 가보긴 했어요.”

“잘됐군.”

번은 씨익 능글맞게 웃는다.

“자, 그럼 준비하는데 얼마나 걸리지?”

“내일이나 모레쯤 돼야 할 거예요.”

“내일 간다. 늦지 마.”

“······.”

갑이 너무 심하게 갑질을 하는 통에 철저한 을로 전락한 융. 그녀는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마녀는 한시도 쉬지 못하고 번을 위해 주문을 만들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알면 까무러칠 일이 이 집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대외적으론 번의 치료 목적으로 보였으니 누구도 간섭하는 이는 없다.

“노력해볼게요..”

"나가봐."

대답을 끝으로 일어나 막 문을 열고 나가려는 융의 뒷모습을 보며,

“이봐.”

번이 불렀다.

“네.”

“수작 부리지 마. 나는 다 보고 있으니까. 너는 악마를 속일 수 없다는 걸 명심해.”

“..알아요.”

마녀가 나가자, 번은 크크, 웃곤 침대 아래로 기어들어갔다.

한 달.

공식적으로 악마를 뽑아내고, 후계자가 되면 지금보다 개인적인 시간을 더 못 가질 것이 분명했다.

“······.”

그전에 밀린 일을 모두 끝내야만 했다.

“오늘부턴 투약을 두 배로 늘려야겠군.”

아직도 산더미처럼 쌓인 약 포대를 보며 번이 웃었다.

-야! 너 그러다 죽어!

지난 6개월. 번은 스캇의 크레이지 실드만 연습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다른 부분을 더욱 발전시키고, 성장시켰다. 물론 그것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악마가 유일하지만, 이 정도로 만족할 리 없는 번이었다.

“이 정도론 안 죽어.”

번이 하얀 가루를 한 움큼 손에 움켜쥐며 비릿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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