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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좌의 게임-55화 (55/177)

# 싸움의 시작 #

“압도적이고, 절대적이어야 한다. 이 에비뉴의 황제란 자리는!”

“아..!”

“네가 내 뒤를 이어 황좌에 오를 때까지, 아니 마침내 이 자리에 앉아도 방심하지 마라. 누군가는 너를 물어뜯으려 할 것이며 언제나 네가 실수하기만을 바라고 있을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다.”

“······!”

“지켜볼 것이다.”

번의 입이 바짝 타들어 갔다.

호랑이 굴을 지나, 드디어 호랑이 아가리에 들어온 것이다.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

“또 명심하겠습니다.”

오라! 물러서지 않겠다! 황제가 아닌 신神이 싸우자 할지라도!

“좋은 눈빛이다. 모두의 기대를 무너뜨리지 않길 바란다.”

황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스캇이 박수를 쳤다.

짝짝짝!

은사도, 딘딘도, 집정관도 거들었다.

번은 꾸벅 머리를 숙이며 그들에게도 감사를 표하고, 다시 황제를 보았다.

“거기 앉거라.”

빈자리가 하나 있다.

“예.”

“너는 다음 달부터 국무에 참석할 것이다.”

빠르다.

빨라도 너무 빨랐다.

“이제 보통 사람과 똑같이 하루를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군주는 그에 맞는 것들을 익히고 배워야 한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쉽지 않을 것이다. 몇 번이고 포기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노력할 것입니다.”

“그래, 노력해야 할 거다. 열 배, 스무 배로. 온몸에서 땀이 아닌 피가 흐를 때까지 버텨내야 비로소 황좌에 어울리는 자격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후계자가 되었다고 해서 편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치열하고 혹독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이러다 뒤주에 갇히는 거 아닌지 모르겠군.’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며 번은 이 순간을 즐겼다.

황제의 눈높이가 저 하늘만큼 높을지언정 못 이겨낼까? 아니 더 높이 올라갈 것이다. 자신은 이 생에 아직 10살밖에 안되었다. 충분히 더 체득하고, 모을 시간이 있는 것이다. 앞으로 그가 가질 수 있는 것이 까마득히 멀리 있다 하더라도, 이제 본격적으로 그것들을 펼쳐내기 시작한다면 압도하고 절대적이 될 수 있으리라.

“정식으로 책봉하는 것은 한 달 뒤로 하겠다. 그사이 너는 최대한 빨리 그 악마를 뽑아낼 수 있도록 하라.”

“노력하겠습니다!”

번이 우렁차게 외치자, 황제는 스캇에게 시선을 돌렸다.

“스캇.”

“예.”

“한 달이다.”

아까는 분명 두 달 걸린다고 말씀을 올렸건만..

“그..”

“왜? 못해?”

“아, 아닙니다.”

역시 앙금이 남았어. 삐지신 거야. 입맛을 다시며 스캇이 고개를 푹 숙였다.

“황자의 책봉식이 거행되기 전에 모든 걸 마무리 해놓도록. 악마 들린 후계자란 오명은 벗어야 할 테니까.”

황제는 미소 지으며 집정관을 보았다.

따로 하실 말씀이라도? 집정관이 갸웃하는데,

“책봉식이 끝나면 올해가 가기 전에 영토를 넓힌다.”

“예, 예엣?”

집정관이 황당한 듯 되물었다.

“하지만 그건 적어도 2년은 더..”

황제는 웃고 있었지만, 자세히 보면 그건 호랑이가 으르렁거리는 것 같았다. 저걸 보고 달려들었다간 사정없이 물어뜯길 거다.

“에비뉴엔 이제 후계가 있다.”

“······?”

황제가 번을 보았다.

“나는 너에게 지금보다 더 큰 영토와 백성을 물려줄 것이다.”

번의 주먹이 꼬옥 쥐어졌다.

역시 이 사람의 그릇은..

“더 많은 금은보화와 곳간을 줄 것이다.”

“황공합니다. 폐하.”

번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황제는 씨익 웃는다.

“널 위해서가 아니다.”

“······!”

“너는 그저 내가 이룩한 금자탑을 지키는 개다.”

“으음..”

말이 심했는지, 스캇이 신음을 터뜨렸다. 기어오르지 못하게 군기 잡는 건 이해하겠는데, 후계자리까지 오른 황자에게 개라니.

“그렇게 살고 싶으냐?”

황제의 도발에도 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셋을 주시면 다섯으로 불리겠습니다. 열을 주시면 백으로 만들어보겠습니다. 개犬가 범으로 자랄 때까지 강녕하시어 많은 지도편달 부탁합니다!”

“원, 고 녀석 참..”

황제가 크게 웃었다.

“못 당하겠구나. 하하하!”

황제의 웃음소리에 딱딱하던 분위기가 스르륵 녹았다. 스캇도 하회탈처럼 웃기는 표정으로 흐뭇하게 번을 보았고, 은사나 딘딘도 미소 지었다. 하지만 집정관의 표정은 좋지 못하다.

“폐하, 재고하셔야 합니다. 아직 벨버른의 반군조차 진압하지 못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대군이 에비뉴를 비운다면 그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를 일입니다.”

“빈집털이라도 할 거란 건가?”

“충분히 가능한 이야깁니다.”

에비뉴는 황제의 절대권력에 의지해 버티는 나라다. 어느 나라든 간에 군주의 영향력이 크겠지만, 이곳은 특히나 더 심했다. 철鐵의 황국의 철鐵은 바로 그를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정했잖아.”

황제가 말하자 집정관이,

“예?”

라고 되물었다. 그러다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의 눈이 한곳을 향한다.

번에게로.

“서, 설마?”

어떤 불길한 상상을 해버린 집정관이 그걸 부정하려 급히 황제를 보았지만,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만 느낀다.

“설마는 무슨 설마? 아까 너희가 만장일치로 말했잖아. 저 녀석이 한 사람의 어른 몫은 톡톡히 해낼 거라고.”

“그건 그렇습니다만.. 경우가 다릅니다!”

“아니야. 같아.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거다. 황자는 들어라.”

앉아 있던 번이 벌떡 일어났다.

“예! 폐하!”

“너는 앞으로 겨울이 오기 전까지 국무를 배우라.”

물론 악마는 그 전에 뽑아내야 할 거다.

“그 후 봄이 오기 전에 나는 출정할 것이다. 너 역시 함께다.”

번의 눈이 급격하게 커졌다.

“전장으로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하지만 내가 있는 전장은 아니다.”

“..그러하면?”

“너는 내가 돌아오기 전까지 벨버른의 반란을 진압해라.”

황제의 말에 은사가 난입했다.

“폐하! 번 황자는 아직 열 살입니다!”

딘딘도 거든다.

“능력이 문제가 아니라 아랫것들이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통솔력과 경험을 차치하고서라도 사람이 죽고 다치는 것을 생생하게 목격해야 한다. 또한 내 지시 하나에 수만이 죽을 수도 있다. 그 무게를 어찌 열 살 아이가 감당하리오? 평소 황제가 하는 일에 딴지를 걸지 않는 두 사람도 이번엔 달랐다. 집정관의 분석처럼 어떻게든 전쟁은 2년 정도 늦춰야 했고, 황제를 궁에 잡아둬야 했다.

하지만 그들이 황제만 마크하고 있을 때, 정작 폭탄을 염두에 두지 않았으니.

“1년 안에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

“······!”

딘딘과 은사의 머리가 홱! 돌아가고,

“뭐.. 뭣?”

스캇이 황당해서 소리쳤다.

“끄응..”

집정관은 황제보다 한술 더 뜨는 황자를 보며 이젠 편두통이 치미는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1년이라? 너는 벨버른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아느냐?”

당연히 안다. 거기 왕이었던 사람을 검술 선생으로 모시고 있지 않은가?

“대신 두 가지 청이 있습니다.”

“두 가지면 된다?”

황제가 헛웃음을 흘렸다. 기라성같은 장수들도 진압하지 못해 끙끙 앓는 골칫거리를 뭐 어째?

사실 황제는 벨버른을 맡기며 번을 좀 굴릴 생각이었다. 영특하고 재능이 뛰어나나, 패배도 좀 해보고 사회의 쓴맛을 보면서 커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놈 봐라? 저 눈은 말하고 있지 않은가? 어디 한번 누가 이기나 해보자고 말이다.

“그렇습니다.”

“어디 한번 들어보지.”

번이 주변을 스윽 보았다. 그러면서 말한다.

“네 사람을 부릴 수 있는 권한을 주십시오.”

흠칫, 움찔, 흠칫..

은사, 딘딘, 집정관, 스캇이 동시에 놀랐다.

야! 우리는 안돼! 라고 스캇이 반사적으로 외치려는 찰나, 번의 말이 빨랐다.

“철저하게 제 명령에만 움직이며 제가 죽으라 하면 죽고, 살라 하면 어떻게든 살아나는 제 사람이 필요합니다.”

“..염두에 둔 자는 있고?”

번이 끄덕였다.

“람보르 소속의 페트릭입니다.”

번의 말에 묘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의아하다. 그래서 집정관이 나선다.

“그는 너무 나이가 많습니다.”

번이 빙긋 웃었다.

“그만큼의 연륜과 노련함이 있습니다. 또한, 그는 벨버른의 왕이었습니다. 반란을 진압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황제가 번의 말에 딴지를 걸었다.

“잘못 알고 있구나. 지금 벨버른의 반군은 전 왕과 척을 지던 이들이 뭉친 것이다. 충신이라 할 수 있는 자들은 전쟁에서 모두 죽었다. 그를 데려가는 것은 오히려 독이 될 것이다.”

황제의 말에도 번이 미소 지으며 담담하게 웃고 있자, 어깨를 으쓱한 황제가 묻는다.

“다음은 누구더냐?”

“가이아 신전의 성녀 가루비입니다.”

“······.”

황제가 잠시 말을 잃었다.

무엇보다 청한다고 신전에서 그녀를 내어줄지가 의문이다.

“이유가 있느냐?”

번은 대답 대신 오른손에 기운을 모았다.

“..으음.”

“성력이라..”

우윳빛 신성력이 공처럼 번의 손에 들렸다가 사라졌다.

“저는 더 강해지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모른다.

경연에서 번이 만들어낸 신창의 비밀을.

“또한, 그런 이유로 마녀 융도 휘하에 두고 싶습니다.”

“악마를 몰아내도 그자가 필요하다?”

“그자는 비록 악독한 죄를 범하긴 했으나, 충분히 쓸만한 지식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군주는 무릇 여러 분야에 정통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이번 일로 크게 배웠으니, 앞으론 흔들리는 일 없을 것입니다.”

번의 말에 황제가 혀를 찼다.

“쯧, 스승을 잘못 두었구나.”

스캇을 힐끔거리는 황제.

내가 뭘? 황당한 표정으로 두리번거리는 스캇이었다.

“한길만 파도 끝까지 도달하기 힘들 터인데.”

“아직 어떤 길이 제 것인지 확신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신중한 것도 좋다만, 너무 질질 끌면 시기를 놓칠 수도 있다.”

“명심하겠습니다.”

황제는 알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마지막은 누구더냐?”

“그것은 후에 말씀 올리겠습니다. 소자가 아직 그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또한 마음에 드는 대답이다.

아랫사람 하나 두는 것도 신중을 기한다는 뜻이 되니까.

“좋다!”

껄껄 웃으며 황제가 말했다.

“다른 하나의 청은 무엇이더냐?”

번은 아까보다 더 차분한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했다.

“소자는 아직 열 살이옵니다.”

“그건 모두가 안다.”

“예, 이것은 소자가 아직 배움을 얻을 시간이 많다는 것이니 장점이기도 하나, 그만큼 경험이 미천하다는 것과 진배없어 타인이 보기엔 큰 약점으로 여겨질 것이 분명합니다.”

“그럴 것이다. 허나 그걸 이겨내는 것도 네가 해야 할 일이다.”

“예. 그리할 것입니다. 하지만 대 에비뉴의 후계에 오른 황자가 무시당하고 업신여겨진다면 그것은 아니 될 것입니다. 해서.”

번은 한번 손에 쥔 것을 절대 놓지 않는 사내였다.

“전에 제게 하사하셨던 그 패를 계속 사용할 수 있게 허許해주십사 간청합니다.”

“허허허..”

황제가 또 웃는다.

오늘 아들놈 덕분에 여러 번 웃는다.

“절대 사리사욕을 위해 쓰지 않겠으며 폐하의 위명에 먹칠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번은 이미 패의 위력을 실감했다. 이건 조선시대 암행어사의 상징과도 마찬가지이며 왕권이 강한 이 세계에선 신물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네 녀석이 이젠 내 머리 위에 앉으려는 게로구나?”

황제가 눈을 가늘게 뜨고 번을 노려보았다. 심기가 거슬린 걸까? 번이 급히 머리를 숙일 때, 집정관이 말했다.

“무리한 청이긴 하나 권한을 축소한 비슷한 상징 하나쯤은 괜찮을 것 같습니다.”

타지로 가야 하는 황자다. 힘을 실어주는 것도 나쁘진 않을 터. 이미 말리기엔 늦었으니 좋은 결과가 있기만을 바라야 하는 처지 아닌가?

번은 묵묵히 기다렸다.

후계자? 허울뿐인 이름은 필요 없다. 이제까지 황자라고 뭐 대우받은 거 있나? 확실한 감투가 필요하다. 은사까진 아니어도 경비대쯤은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정도의!

“그렇다는데?”

황제는 은사를 보았다. 수도에서 일어나는 암투. 은밀하고 더러운 일. 혹은 각국의 정보나 요직 인사의 행동을 감시하는 일을 은사가 도맡는다. 만일 번이 새로운 권력을 쥐게 된다면 가장 먼저 그걸 주시하고 감시해야 할 사람이 바로 은사였다.

“불가합니다.”

은사의 답은 빨랐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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