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위 2 #
-아, 악마다!
-황자님이 악마에..!
-꺄아아아악!
번의 모습에 모두가 간담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
부우우우우우우웅!
번의 오른손에 길쭉하고, 하얀빛이 어리기 시작했다. 너무도 시려, 바라보는 사람의 혼을 송두리째 빼앗을 것만 같은 새하얀빛!
-저, 저것은!
-이런..!
-오오오오오!
성급하게 외치던 사람들이 헙! 입을 다물 장면이 펼쳐졌다.
색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같은 빨강도 그 농도에 따라 수백, 수천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지금 번이 손에 든 빛은 단연 하얀색에 가장 잘 어울리는 빛이었으며,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순결을 넘어 성聖스러움에 가장 근접한 것이기도 했다.
“쳇..”
번은 제 손에 이 빛이 머문 걸 아주 불쾌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와 반대로 군중들 사이 열 맞춰 앉아 있던 각 신전의 사제들이 벌떡벌떡 일어나기 시작했다.
-시, 신창神槍!
-갓God 스피어다!
-신의 기운이 강림하셨다!
그들은 소름 돋은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성력에 민감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반응했지만, 신전과 전혀 관계없는 이들도 지금 이 순간! 알 수 있었다.
우우우우우우웅-!
번의 손에서 형체를 만들어간 빛무리. 순식간에 그것은 3미터 가까이 자라 창의 형태로 만들어지고, 그것을 본 이들은 눈 한번 깜빡일 수 없었다. 먼지 하나 섞이지 않은 것 같은 하얀 우유 빛깔의 그것은 너무나도 황홀했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여전히 번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아주 기괴하기만 하다.
“자격도 없는 주제에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내뱉는구나!”
번의 엄한 꾸짖음이 카이사르를 직격했다.
-좀 더 음험하게! 추악하게! 치가 떨리게!
악마가 번의 목소리를 지적했다.
-너무 착하다고! 너! 바이브레이션도 더 넣고!
‘미친.. 닥쳐! 좀!’
번은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었기에 악마를 무시하기로 했다. 이 중요한 순간에 응원은 못 할 망정 어쭙잖은 훈수는 사양이다.
“황자님..? 번, 황자님? 괜찮으십니까?”
집정관이 팔을 번쩍 들며 물었다.
저쪽에서 우르르 기사들과 팔라딘, 은사의 십위十衛까지 난입하려는 기색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말없이 집정관을 노려보는 번.
그 붉은 두 눈이 사람들을 훑었다.
이때, 군중 속에 섞여 있던 한 여자가 침을 꿀꺽 넘겼다.
“성녀님, 저..저..것이 신창이 확실합니까?”
말까지 더듬는 늙은 장로가 옆에서 눈을 비비며 묻는다.
“..맞아요. 그분의 힘입니다. 제 온몸이 반응하고 있어요.”
“오오..! 어찌 이런! 하지만 저 모습은 악마의 그것이 아닙니까? 어찌하여 상극이 한 사람에 안에 공존한단 말입니까?”
지금 이곳엔 수천의 사제와 팔라딘, 신전 관계자가 와 있었다. 모시는 신은 달라도 그들 모두가 안다. 번의 목소리가 뜻하는 것과 그의 손에 들린 성聖물이 뿜어내는 힘은 엄연히 다르다는 것을!
‘뭔가.. 이상한..’
가루비는 번을 빤히 바라보며 이마를 찌푸렸다.
한번 휘두름에 대지를 가르고, 폭풍을 부른다는 전戰신의 창. 그 어떤 악마라도 대항하지 못하며 전설에서만 존재하던 무기武器가 나타났다. 저 압도적 빛깔과 존재감. 고고하게 뻗은 형태와 그 안에 담은 성력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가루비는 입술을 깨물었다.
“혹시 신탁이 내려오진 않았습니까?”
장로가 묻는다. 하긴 신물이 모습을 드러낼 정도면 얼마든지 신께서 메시지를 내리실 수 있다. 저쪽의 각 신전 고위관계자들도 허둥대는 게 보이지 않나?
“아니요. 전혀요."
"그..그렇다는 건?"
"지켜보라는 뜻일 거예요.”
“하긴!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대충 둘러대지만, 가루비는 의심을 풀 수가 없었다.
‘너무.. 묘한데?’
이렇게 모두가 눈을 떼지 못하고 지켜보고 있을 때, 집정관은 갸웃하며 번과 대화를 시도한다.
“자격이라니? 무슨 자격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집정관의 질문에, 번뜩이는 눈동자와 함께 번의 창끝이 카이사르를 향한다.
“저놈의 몸에 황제의 피가 흐른다 생각하나? 답답한 놈들!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모몰트 새끼를 키우고 있구나!”
“······!”
“······?”
번의 고함에 모두가 입을 떡 벌렸다.
벌떡 황제조차 의자에서 일어났다. 물을 마시던 황비 하나가 켁켁 사레가 들려 기침을 했으며, 내가 지금 무슨 얘길 들은 거지? 어리둥절하게 옆 사람을 보는 이도 있다.
모몰트.
21세기 대한민국 사람들에겐 뻐꾸기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한 새다. 뻐꾸기 어미는 알을 다른 새의 둥지에 낳는데, 알이 부화하여 뻐꾸기 새끼가 태어나면 이놈은 본능적으로 다른 알을 다 밀어버린다. 둥지에서 떨어진 알은 깨지고 파괴되어 세상에 나와보지도 못하고 생을 마감하고, 이렇게 둥지를 독식한 뻐꾸기 새끼는 자신보다 한참이나 몸집이 작은 새어미에게 꼬박꼬박 먹이를 받아 처먹으며 자란다.
“끌끌.. 한심한 놈들.”
번의 입가가 기묘하게 뒤틀리며 웃어 재꼈다.
그런데 이때,
후아아아악-!
창에서 빛이 났다. 그리고 그 순간, 번이 충격을 받은 듯 비틀거렸다.
“으윽..!”
-오오오오!
-성력이 악마를..!
-아.. 신이시여!
몇 명의 사제가 외쳤다.
“이.. 빌어먹을 몸도 이젠 끝이군..”
칼칼한 목소리의 번이 아쉽다는 듯 말하며 인상을 찡그렸고, 창에서 뻗은 기운이 온몸을 하얗게 물들이고 있었다.
“······?”
가장 가까이에 있던 집정관은 답답할 뿐이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아니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하지만 파악할 새도 없이 순간, 번의 얼굴이 탁! 풀어졌다.
비틀!
빨갛던 눈은 본래대로 돌아왔고, 주변을 잠식하던 어둠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그의 손에 들려있던 창 또한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췄다.
“앗!”
집정관이 빠르게 달려 쓰러지는 번의 몸을 부축했다.
-우와아아아아! 신께서 악마를 물리치셨다!
-오오오! 신이시여!
-신께서 직접 강림하시어 번 황자님을 돌보신 건가?
본래 영화든 뭐든, 만든 사람이 어떤 의도를 넣었든 본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이냐가 중요한 거다.
-요 광대 놈! 아주 선수가 따로 없구나! 크크크! 저 얼빠진 얼굴들 좀 보라지!
악마의 들뜬 목소리를 들으며 번은 능력을 개방했다.
「육체가 가수면 상태로 접어듭니다.」
밀랍 개구리의 죽은 척 모드로 돌입한 번. 자신의 몸을 안고 있는 집정관의 표정을 보며 안도했다.
‘됐군.’
연극은 끝났다.
이제 관객의 평가만 기다릴 뿐. 주인공은 무대를 내려올 시간이 됐다.
“황자님..!”
물론 집정관은 자신의 품에서 의식을 잃은 번이 사실 말똥말똥한 의식으로 주변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것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여봐라! 어, 어서! 황자님을 모셔라! 어서!”
주변이 부산하게 변하자, 덩그러니 남겨진 카이사르만이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고 허망한 얼굴로 그렇게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
.
.
“모몰트라..”
황제의 최측근만 참석한 자리.
여느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공기가 무겁다.
“그..”
뭔가 말하려는 스캇을 향해 집정관이 눈을 부릅떴다.
‘닥쳐!’
“..쩝.”
조용히 물러서는 스캇.
경연은 끝났다. 군중은 시원섭섭하다는 얼굴로 돌아갔고, 각 신전은 발칵 뒤집혔다. 아마 황자가 깨어나면 신창에 관해 물으려는 신전 고위급 인사의 방문이 끊이지 않으리라.
-악마에 시달리던 번 황자께서 신의 도움으로 은총을 입으셨다!
-신의 점지를 받으신 번 황자야말로 후계에 어울리는 분이시다!
벌써부터 쫙쫙 퍼져나가는 소문은 수도를 뒤흔들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파티라도 열어야 할 황궁은 하녀들조차 숨소리도 내지 못한다.
“모몰트란 말이지?”
턱을 만지던 황제가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그러며 집정관을 본다.
“어떻게 생각하나?”
“······.”
꿀꺽, 침을 넘기며 황제를 보는 집정관. 무슨 말이 필요할까?
“죄송합니다.”
황제가 아비라면, 집정관은 어미였다. 바깥 일은 황제가 알아서 하지만, 내부단속은 모두 집정관이 처리해왔다. 그런데 황실의 혈통을 의심받는 일이 벌어졌으니, 집정관은 입이 열개라도 할말이 없었다. 악마의 수작이라 치부하기에는 너무 많은 이들이 들어버렸고, ‘의심’ 자체가 치욕이었다.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수습하겠습니다.”
핏줄을 증명하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중급 물의 정령을 이용해 피를 분석해도 되고, 마법 시약 따위를 써도 된다. 다만, 이제까지 그런 일을 하지 않았던 것은 그 누가 그따위 짓거릴 하겠냐는 근거 없는 믿음 때문이었으리라. 그래, 믿음. 그 믿음 때문에 한 여자가 철鐵의 황국의 위명에 먹칠을 하게 생겼다.
“자네가 죄송할 건 아니지.”
황제는 웃었다. 그런데 그 웃음을 누구도 따라 웃지 못했다.
“나를 능멸하고 붙어먹은 개 잡것들을 잡아 죽여야지. 그렇지 않나?”
전장에서도 저런 표정을 짓지 않으시는 분이다. 그런데 지금..
“······.”
“······.”
오싹하리만치 무섭다.
“모몰트라..”
황제는 큭큭, 웃다가 더 크게 웃었다.
“크하하하! 재미있어! 아주 재미있구나!”
미친 사람 같다.
“폐하..”
딘딘이 걱정된다는 듯 입을 열었다. 평소 잘 나서지 않는 그였기에 오히려 이런 자리에선 묵직하게 낄 수 있다.
“후우..”
황제는 웃음을 멈추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후련해서일까? 아니면 잊으려는 걸까? 그나마 조금 전보다 한결 부드러워진 표정이다.
“그 녀석, 지금 어디 있나?”
번 황자를 말씀하시는 것이리라.
“밖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집정관의 말에 황제가 끄덕였다.
“들어오라 해.”
“예.”
시비가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며 스캇이 불쑥 끼어들었다. 아까부터 입이 근질근질 참을 수가 없었나 보다.
“악마는 곧 처리 될 것입니다. 폐하.”
“······.”
황제가 물끄러미 스캇을 보았다.
“결코, 번 황자가 의도한 일이 아님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스캇은 걱정하고 있었다. 번이 훌륭하게 경연을 마치긴 했지만, 번 때문에 이런 사달이 일어난 것도 사실이었고, 근본적으로 파고 들어가다 보면 번에게 악마를 들러붙게 한 자신에게 모든 책임이 있다 느꼈다. 때문에 스캇은 어떤 사명감 비슷한 것을 느끼고 있달까?
“알아.”
“감사합니다. 폐하.”
짧은 대답이었지만, 스캇은 물러났다. 더 말해봐야 핑계로 들릴 테니까.
이 사이 번이 들어왔다.
“몸은 좀 어떠하냐?”
바로 묻는 황제의 말에 번이 다소곳하게 그의 앞에 서서 말했다.
“면목이 없습니다. 폐하.”
“네 잘못이 아니다.”
공과 사가 확실한 만큼 은원도 칼같이 여기는 황제였다. 혼나야 할 놈이 있다고, 상 받아야 할 사람까지 움츠릴 필요 있나?
“번 리갈 드 요르간드 바야흐.”
“예. 폐하.”
공손히 답하는 번을 뚫어져라 보던 황제. 그의 입이 열리고,
“널 내 뒤를 이을 후계자로 책봉한다.”
가뭄에 찌든 대지를 적시는 비는 언제나 느닷없이 닥친다.
“……!”
“……?”
측근조차 이렇게 갑작스레 선포할 줄 몰랐다는 듯 놀란 표정이었다.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하지만 번은 담담하게 머리를 숙였다. 속으론 심장이 미칠 듯이 뛰었지만, 내색하진 않는다. 이런 모습조차 황제를 흡족하게 함을 알기 때문이다.
“놀라지 않는구나?”
황제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놀랐습니다.”
“그래?”
“어찌.. 태평할 수 있겠습니까.”
번의 반응을 보며 재미있다는 듯 황제는 말했다.
“본래 후계 후보로 셋을 뽑으려 했다. 셋만 추려 한 오 년 더 굴리다가 하나를 선발하려 했지. 하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 보였다.”
꿀꺽, 번의 목구멍으로 침이 넘어갔다. 오 년이라니.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너는 내 기대 이상으로 잘해주었다. 아니,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었다고 봐야겠지.”
“과찬이십니다.”
“하지만 그걸론 안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