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과 방패 1 #
-준비는 됐냐?
‘물론!’
이날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번의 시선이 군중을 훑었다.
마치 올림픽 결승전 무대에 올라있는 것 같다. 이 많은 이들의 함성과 응원이 오롯이 나를 향하는 기분.
「주변의 이로운 기운을 흡수합니다.」
나쁘지 않다.
「육체가 전투에 최적화됩니다.」
아니,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머리가 단단해집니다.」
새로 얻은 능력들도 문제없이 활성화되고 있었고, 전신에서 흐르는 활력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
-긴장하지 말고!
‘내가?’
-하긴, 크크크! 네놈이 떨 리 없지.
황자들이 자리를 잡는 사이, 집정관이 우렁차게 외쳤다.
“경연을 시작하기에 앞서, 지고하신 폐하의 말씀을 먼저 전하겠습니다!”
모두의 눈이 집정관을 향했다.
“오늘 경연을 마지막으로 위대한 대 에비뉴 황실의 대를 잇는 후계를 결정하게 될 것입니다!”
번의 눈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집정관의 말이 계속된다.
“지난 1년, 여러분이 고생한 노고를 잘 알고 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오늘, 이 자리에서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펼쳐 보이시길 바랍니다!”
집정관의 말을 끝으로 거대한 함성이 터졌다.
-우와아아아아아!
-번! 번! 번!
-카이사르! 카이사르!
의자에 앉아 팔짱을 낀 채 열띤 응원전을 바라보던 황제. 옆에서 스캇이 말했다.
“한 말씀 하시겠습니까?”
“아니. 고리타분하게 뭐하러. 저들 중에 내 말 따윌 듣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오늘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야. 녀석들이지.”
스캇이 웃음을 참았다. 보통의 높으신 양반들은 이런 자릴 빌어 어떻게든 생색을 내고 싶어 할 텐데, 황제는 그런 것이 없었다.
“그나저나 저 녀석, 악마를 거의 다 몰아냈다지?”
황제의 질문에 스캇이 환하게 웃으며 끄덕였다. 그의 얼굴은 십 년 묵은 때를 벗겨낸 듯 아주 밝았다.
“마녀가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 듣긴 했는데, 바빠서 흘렸어. 다시 말해봐. 뭘 어떻게 했다는 거야?”
저 아래에서 집정관이 세 번째 경연에 대한 룰을 설명하고 있었기에 잠시 짬이 난 틈을 타 황제가 물었다.
“악마가 제 생각보다 훨씬 고위급이었기에 그냥 쫓아내긴 버거웠습니다. 완전 한몸처럼 달라붙어 있었다고 해야 할까요?”
“그래서?”
“매개체가 필요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악마가 옮겨갈 새로운 몸이 필요했는데.”
“그게 마녀라는 거군?”
“그렇습니다.”
대외적으론 모두가 이리 알고 있었다. 오직 번만이 속사정을 들키지 않으려고 필사적이었을 뿐.
“마녀가 품은 속성이 악마와 잘 맞아 떨어져 이질감 없이 작업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남았는데?”
“두어 달이면 완전히 떼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거 참, 개똥도 약에 쓸데가 있다더니. 저 녀석 판단이 옳았어. 알아서 제 살길을 찾았군.”
황제는 턱을 만지며 쓰게 웃었다.
“다른 황자들이 저놈 반만 닮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자질이 뛰어난 황자는 많지 않습니까?”
“근성이 없잖아. 근성이.”
고작 열 살. 그러나 이제 황실에서 번을 그 나잇대로 인식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른 하나쯤은 가뿐히 가지고 놀 담력과 지능. 황제에게 직언할 정도로 넘치는 자신감과 자존감은 누구도 따라올 자가 없었던 것이다. 앞으로 녀석은 모든 것을 밑거름으로 더 성장할 테니, 쫓아나 가면 다행이지 않을까?
“뭐, 애석하게도 그렇긴 하군요.”
스캇은 입을 가리고 쿡쿡, 웃었다.
이미 번을 돕기로 한 그였다. 지난 반년,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 번을 가르쳤다.
‘물먹는 솜 같았지.’
어려서부터 영민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대하자 번은 그의 모든 가르침을 무섭게 빨아들였다. 가르치는 속도를 능가할 정도랄까? 하나를 알려주면 셋을 짐작하고, 다섯을 알려주면 열을 파악해 냈다. 이 모든 것을 치료와 병행하면서도 버텨냈다는 거다. 참으로 독한, 그만큼 자랑스러운 제자였다.
“슬슬 준비하지?”
황제의 말에 스캇이 웃으며 끄덕였다. 이제 내려가야 할 시간이다.
-우와아아아아아!
간단한 집정관의 설명이 끝나자, 함성이 다시 터져 나왔다.
3번째 경연 ‘학습.’
지난 1년간 스스로 지목한 스승에게 얼마나 잘 배웠는가 평가하는 자리이자, 일국의 군주로서 마땅한 자질을 지녔는지 모두에게 선 보이는 자리였다. 그리고 이건 비단 한 과목만 보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를 배운다면 둘도 가능하고, 셋도 문제가 없는 것처럼 군주는 만능이 되어야 하고, 차기 황국을 이끌 지도자가 얼마나 배울 자세가 되어 있는지를 보는 자리였던 것이다.
“모두 이해하셨습니까?”
집정관이 황자들을 보며 묻자, 긴장된 표정으로 황자들이 끄덕였다.
룰은 간단하다.
지난 1년을 전반적으로 종합해 스승이 점수를 매기고, 배운 것을 증명하면 된다. 이 과정에서 막힘이 없어야 할 것이며 스승 또한 최대한 객관적이어야 한다.
“대장군께서 포문을 열어주시지요.”
집정관의 말에 딘딘이 가볍게 미소 지으며 앞으로 나왔다.
어떤 녀석 덕분에 몇 해 전부터 대륙제일창이란 별명으로 불리고 있는 사내. 황제가 그리 놀릴 때마다 그 정돈 아니라며 머쓱해 했지만, 에비뉴에서 이 남자보다 창을 잘 다루는 사람은 없다는 것도 정설이었다.
“지난 1년.”
딘딘이 입을 열자, 군중이 고요해졌다.
“저는 카이사르 황자님을 맡아 가르쳤습니다. 과분한 자리였지만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했고, 카이사르 황자님 역시 잘 따라주었습니다.”
그사이 큰 사건이 터지긴 했지만, 그게 기폭제가 되어 카이사르를 더 몰아붙이는 계기가 되었다. 덕분에 카이사르는 마녀의 보약 없이도 이전보다 몇 배 빠르게 성장했으니, 전화위복이었달까?
“가르치는 입장에서 배우는 이가 노력하고, 성실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큼 기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이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카이사르는 딘딘을 보며 크게 끄덕였다.
“백 점 만점을 기준으로 잡았을 때, 제가 판단한 카이사르 황자님의 지난 1년은..”
황자들의 침이 꿀꺽 넘어갔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말이 있다지만, 적어도 황제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딘딘, 은사, 집정관 등이 감정에 휩쓸리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다. 그만큼 예상도 할 수 없는 순간. 딘딘의 입이 열리고,
“구십오입니다.”
모두가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오오오오!
-대장군께서 저렇게 높은 점수를?
-역시 카이사르 황자님이시군!
카이사르가 만족한 듯 꾸벅 머리를 숙였다.
이 경연은 두 가지로 평가를 받게 된다. 스승의 점수와 황제의 평가. 딘딘에게 구십오 점을 받았으니, 이제 황제께서 그에 근접한 평가를 해준다면 우승은 떼놓은 당상이리라.
“카이사르 황자께서 아주 높은 점수를 받았습니다! 그럼 이제 과연 그럴만한지 모두에게 보이시길 바랍니다!”
사실, 스승 처지에서도 함부로 점수를 매길 순 없었다. 과한 점수를 줬다가 자칫 그에 미치지 못한 실력을 황자가 드러내면 아주 곤란해지기 때문이었다. 이런데도 95점을 주었다는 것은 그만큼 카이사르가 잘 수행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카이사르가 창을 쥐고, 넓은 공간으로 걸어나갔다.
“제가 스승님께 배운 것은 풍운만리창 전반부입니다!”
카이사르는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외쳤다.
풍운만리창.
최근 딘딘이 직접 창안하고, 고안한 창술이며 창을 뻗으면 마치 바람과 구름처럼 그 기세가 널리 퍼진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바람이 불면 당하는 이는 인식하지도 못한 채 만신창이가 되어 쓰러지고, 구름이 빛을 가리면 그 아래 모두가 영향권에 드는! 그만큼 화려하고 현란한 기술이었고, 배우기 까다롭다는 뜻도 되는 기술이었다.
“차아-!”
카이사르의 창술이 시작되었다. 적을 두고 펼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활활 타올랐고, 박력 있었다. 그의 머릿속엔 오직 하나뿐.
‘내가 후계자가 되는 순간, 널 가장 먼저 죽일 것이다! 반드시-!’
아직도 투옥되어 있는 어머니. 그런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미친 듯이 창을 휘둘렀다. 분노는 피땀이 되었고, 원망은 나약한 정신을 굳건하게 잡아주었다. 잠은 점점 더 줄어만 갔고, 창을 휘두르다 쓰러져 곯아떨어진 적도 여러 번이었다. 이제 그 처절했던 시간의 보상을 받을 순간이 왔다.
-오오! 멋지다!
-대단하지 않은가?
-최고다! 최고!
약 15분간 진행된 카이사르의 창술은 모든 이의 혼을 쏙 빼놓기 충분했다. 절도가 있었으며 그 와중에 과하지도 않았고, 그러면서도 화려함이 묻어났다. 만약 적이 앞에 있었다면 수만번이라도 카이사르의 유려한 창에 찔려 죽었으리라.
“하아, 하아..”
끝났다. 카이사르는 숨을 몰아쉬며 창 촉을 아래로 내렸다.
짝짝짝-!
집정관의 박수가 터졌다.
딘딘을 오래 보아온 그였기에 카이사르의 성취가 다소 떨어진다고 하여도 이 정도 경지에 오르려면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딘딘 역시 만족한 듯 씨익 웃었다.
“과연! 명불허전입니다! 그간 카이사르 황자님께서 경연에 얼마나 진지하게 임하셨는지 아주 잘 보여주는 시간이었습니다!”
칭찬에 짜디 짠 집정관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끼지 않았다. 그의 말이 낯뜨겁지 않을 정도로 카이사르는 충분했던 것이다. 몇 년 더 매진한다면 스승에 비견되는 실력을 키울 수 있으리라 생각될 정도의 훌륭함을 그는 선보였다.
-오호라! 저놈 꽤 하는데? 독기가 아주 바짝 올랐어!
악마의 목소리를 들으며 번이 피식 웃었다. 카이사르가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이전 대련에선 허를 찔러 번이 승리를 따냈지만, 앞으로 그런 일은 쉽게 일어날 수 없음을 말이다. 더군다나 무武에 능했던 카이사르가 딘딘을 스승으로 청하며 자신이 가진 장점을 충분히 살려내었다. 자신에게 맞는, 자신을 위한 것을 제대로 활용한 것이다.
‘흥! 어떠냐? 이놈!’
자신감 넘치는 눈으로 노골적인 시선을 보내는 카이사르.
“훗.”
하지만 번은 가벼운 비웃음으로 불쾌한 시선을 떨쳐내며 저편을 보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카이사르 따윈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듯이 말이다.
‘이, 이 자식이!’
번의 반응을 보며 카이사르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대체 무슨 생각일까? 번은 전혀 긴장조차 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어떻게 보면 느긋하게까지 보일 정도.
-언제 터뜨릴 거냐?
악마가 물어왔다.
‘기다려. 밥은 충분히 익어야 맛있는 거야.’
-이런 독한 놈! 널 적으로 둔 저놈이 불쌍하다!
카이사르를 시작으로 다른 황자들의 무대가 이어졌다. 각자 자신이 모신 스승에게 배운 장기를 충분히 발휘하려 노력했고, 80에서 90점 사이의 점수를 기록했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점수를 능가하는 황자는 없었다. 예전부터 카이사르는 황자들 사이에서도 발군이라 할 수 있었는데, 이젠 그의 독기마저 더해지니 넘을 수 없는 벽이 되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인즉슨, 카이사르만 넘으면 이 경연에서 이길 수 있다는 말도 되지 않은가?
‘준비해.’
-이미 하고 있다! 이놈아!
이 무대의 피날레를 장식할 순간이 다가왔다. 쉼 없이 노력해서 달려왔지만, 떨리지 않는 것은 그만큼 흘린 땀 때문일 터.
“자! 이제 마지막 황자님이십니다! 모두 주목해주십시오! 총군사께서 평가하시겠습니다!”
-와아아아아
-번! 번! 번!
사람들이 열광하기 시작하고, 스캇이 번의 앞으로 걸어갔다.
“······.”
“······.”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고생 많았다.’
여러 사건을 거치며 스캇은 이제 번을 남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자식 같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먼 친척쯤 될까? 잘 됐으면 좋겠고, 바라는 것 없이 도와주고 싶었다.
‘모든 것이 다 스승님 덕분입니다.’
사제師弟는 그렇게 눈빛으로 대화한다. 하지만 경연은 경연! 사사로운 감정은 오히려 독이 될 것이다. 스캇은 최대한 냉정하게 자신이 본 번을 평가하려 한다.
그의 표정이 차갑고도 서늘하게 변했다.
꿀꺽-!
카이사르도, 다른 황자들도 스캇의 입을 주시했다. 이제 번의 차례만 끝나면, 길고 길었던 경연도 종지부를 찍고 후계자가 결정될 것이다.
“제가 평가한 점수부터 말씀드리고 시작하겠습니다.”
이때만큼은 번 역시 바짝 말라가는 입술에 침을 바르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