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좌의 게임-50화 (50/177)

# 결전의 날 #

‘대체 왜 그러는 건데?’

-잔말 말고 들어! 너에게도 꼭 필요한 일이다! 황제가 저 마녀를 죽이게 둬선 안 돼!

번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다 된 밥에 재를 뿌려도 유분수지. 이게 뭐하자는 건가? 저 마녀를 왜 살려야 하는데?

번이 고민하는 사이, 황제가 말했다.

“판결하겠다.”

묵직한 그의 음성에 모두의 심장이 쫄깃해졌다.

“몰랐다곤 하나, 아랫사람의 죄 또한 윗사람의 잘못이다. 그것이 지도층이며 타인을 이끌어가는 자의 책임이다.”

꿀꺽, 실란의 목구멍에 침이 넘어갔다.

“모범을 보여야 함에도 고작 질투 때문에 해선 안 되는 추잡한 일을 한 주크버그. 사형.”

이미 죽은 사람이다. 그에 대한 판결보단 남은 사람들이 중요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곤 하나, 손바닥처럼 들여보았어야 할 곳에서 괴사가 진행되는 것을 방치한 2황비 실란.”

카이사르의 눈이 한껏 커졌다.

모두가 조마조마하게 황제의 입만을 바라본다.

“경연이 끝날 때까지 투옥한다. 그 누구도 만나지 말고, 누구도 청하지 말라. 그 시간 동안 반성하고 반성하여 모자란 부분은 채우고, 넘치는 것은 덜어내도록 하라.”

“아아..”

실란의 상체가 무너졌다.

“너, 너무 과한 처사이옵니다!”

카이사르가 벌떡 일어났다.

모른다 하지 않았나? 모든 것을 주크버그가 홀로 한 일이라 시인하지 않았나? 그런데 감옥에 가둔다고? 그 더럽고 불결한 곳에 어머니를?

카이사르가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 떨자, 황제가 옆을 본다.

“은사.”

“예, 폐하.”

“황자가 또 한 번 무례를 범할 시 다리를 부러뜨려라.”

“명 받들겠습니다.”

“흐읍..”

카이사르의 몸이 휘청거렸다.

황제의 저 말이 단순한 협박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경고한다. 황자는 체통을 지켜라.”

“소자.. 너무 억울하여.. 흐흐흑!”

결국, 카이사르도 무너지고 말았다.

이때, 사태를 지켜보던 융의 눈이 반짝였다.

'앗!'

이거 잘하면 살아날 수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그녀는 여기 에비뉴에서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저벅저벅, 황제가 융의 앞으로 섰다.

“너는 조잡한 재주로 에비뉴를 어지럽히고, 백성들을 괴롭혔다. 속았다곤 하나, 너 때문에 죄 없는 사람들 역시 아팠다. 그 책임을 가벼이 여길 수 없으니, 너 또한 중죄다.”

실낱같던 희망을 품던 융의 얼굴에 죽음의 공포가 일렁이고,

“해서, 사형에 처한다.”

황제의 폭탄 같은 선언이 떨어졌다.

"히익!"

쿠웅-!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을 맛본 융. 그녀는 입을 열어 뭐라도 말을 하려 했다. 그녀는 실란의 비밀을 알고 있지 않은가? 죽어도 이렇게 혼자 죽는다면 원통해서 눈도 못 감을 것 같다!

“히이이익! 자, 잠깐! 사, 살려..!”

그런데 이때!

“폐하-!”

앳된 목소리 하나가 대청을 울렸다.

막 융의 목에 칼을 꽂으려던 황제. 멈칫, 자세를 세우고, 뒤를 돌아보았다. 감히 황제가 움직이는데, 막아서는 간 큰 놈이 누구더냐? 아아, 한 놈 있던가?

넙죽 엎드린 작은 등이 보인다.

“황자는 할 말이 있는가?”

어찌 보면 이번 사건의 최대 피해자라고 볼 수 있는 게 바로 번이었다. 나선 것은 괘씸하나, 오늘 일에 한정해선 충분히 자격이 있기도 하다.

“소자,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하라.”

황제의 허락이 떨어지자, 번이 상체를 들고 또박또박 말을 시작했다.

“저 간교한 마녀가 죽을 죄를 지었긴 하나, 이대로 목을 친다면 그것은 그 누구에게도 이롭지 않을 것입니다.”

“이롭지 않다?”

“그러하옵니다. 차라리 마녀의 재주가 비상하니, 참회하는 마음으로 에비뉴에 도움이 되는 일을 시키는 것이 좋다 사료되옵니다.”

황제가 칼을 쥔 손으로 팔짱을 꼈다. 노예로 부리자?

“그러기엔 위험한 자다.”

“통제만 확실하다면 제어할 수 있다 생각됩니다.”

황제는 묘하게 웃으며 융을 돌아보았다. 이까짓게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는 표정이다. 아, 얼굴은 반반하니 사창가에 넣어버릴까? 아니지, 그러다 저주라도 뿌리면 사내들은 무슨 죄인가? 역시 죽이는 게 좋겠지.

'사, 살려줘!'

황제의 무서운 눈초리에 융은 벌벌 떨었지만, 죽다 살아난 그녀에게 번의 말은 천사의 그것처럼 울리고 있었다. 넌 살 수 있다고! 거기에 쐐기를 박듯 이어지는 번의 한마디.

“그리고.. 어쩌면 저자가 제 병을 치료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

황제가 번을 보았다.

번의 말은 계속된다.

“지난 반년, 많은 노력을 해왔지만 완치할 수 없었습니다. 신성력으로도 안되고, 이름난 명의도 고치지 못했습니다. 솔직하게 이 자릴 빌어 말씀드리자면, 소자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습니다.”

-잘한다! 잘해!

눈치 없는 악마가 경박하게 응원했지만, 번은 최대한 진지함을 유지하려 애쓰며 말을 이었다.

“세간에 도는 황자가 악마에 잡아먹혔다는 소문. 사실입니다. 부정할 수 없습니다. 제 안엔 아직도 악마가 존재하니까요. 저는 견딜 수 있습니다. 저 혼자만의 문제라면 얼마든지 이 시련을 넘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꿇어앉아 있던 번이 일어섰다.

“저는 황자입니다.”

모두의 시선이 번에게 모였다.

이 순간만큼은 황제의 기세도, 대청의 권위도 사라졌다. 오직 한 사람의 존재감이 전체를 장악한 채 넘실댔다. 심지어 자빠져 울고 있는 카이사르와 대조되며 번을 더 듬직하게 보이게 했다.

“저 때문에 대 에비뉴와 아버지께서 욕보이는 것은 견딜 수 없습니다.”

“흠.”

황제는 돌아서 번에게 다가갔다.

그가 면전에서 사라지자, 긴장이 풀린 융이 철퍼덕 주저앉았다.

“그 악마의 힘으로 이번 일도 알아냈더냐?”

황제의 질문에 번이 크게 끄덕였다.

“그러합니다.”

사실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긴 했다. 2황비의 처소에 마녀가 숨어 일을 획책하고 있는 것을 대체 번이 어찌 알았을까?

“어둠의 기운은 상통相通하는 것이 있어서인지, 더 큰 일이 벌어지기 전에 막을 수 있었습니다.”

설명하기 힘든 복잡한 일은 죄다 악마에게 떠넘겨버리는 번이었다.

“경연까지 반년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그때까지 악마를 몰아내지 못하고, 소자가 참가하게 된다면 지금보다 더욱 좋지 않은 추문이 따를 것입니다. 그것은 황실에도 악영향을 미치지 않겠습니까?”

황제는 번을 물끄러미 내려보다가, 툭 물었다.

“너는 그걸로 된 것이냐?”

“……?”

“저들은 너를 해하려 했다. 그런데도 너는 저자를 살려두길 원하는 것이냐?”

목소리는 번을 위하는 듯했지만, 황제의 눈은 사납다. 그 눈동자 깊은 곳에 ‘관찰’하려는 의도가 숨어있었다.

이건 시험이었다. 대답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평가될.

힐끔.

무의식중에 번과 2황비의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지금, 아까보다 더 하얗게 질려있었다.

‘안돼!’

마녀가 번의 손에 넘어가는 것만큼은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그녀는 너무 큰 비밀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지금 죽어주는 것이 가장 깔끔하지 않은가? 하지만 지금 2황비는 그 어떤 말도 꺼낼 입장은 아니었다.

-역시 저년, 켕기는 게 있나 본데?

악마의 말에 번이 속으로 코웃음 쳤다.

‘나도 알아.’

두근! 두근! 두근!

미친 듯이 뛰는 2황비의 심장 박동이 번의 예민한 청각에 그대로 잡히고 있었다.

‘몰랐다? 그건 말이 안 되지.’

고작 악마의 부탁 때문에 이런 위험을 자초하는 것은 아니었다. 주크버그는 2황비의 최측근이었으며 그런 자가 희생하면서까지 지키려 한 것이 반드시 있을 것이 분명했다. 또한, 황비가 원하는 그림은 제일 먼저 죽을 사람은 주크버그가 아니라 마녀였지 않았을까?

세상 모든 일엔 다 이유가 있고, 파고 파다 보면 속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결정적으로 지금 저 2황비의 얼굴이 뜻하는 것은 두려움 아닌가?

‘마녀가 아킬레스건일 수도 있다는 거야.’

2황비의 발목을 틀어쥐고 있으면 언제든 기회는 또 올 것이다.

“저는 전쟁터에서 태어나 한시도 멈추지 않고 싸우며 자랐습니다.”

비유였지만, 황제는 그럴듯한지 고개를 끄덕였다. 에비뉴에서 황자란 신분은 아주 고달팠을 것이다. 알력다툼에서 일어난 몇 가지 사건 또한 알고 있었고.

“저 또한 화가 나고, 분노하는 마음 없진 않지만, 이 삶에서 얻은 경험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어냐?”

고작 열 살짜리가 삶에 대해 운운하니, 그저 귀엽다. 그러나 번의 입에서 나온 말은 세월의 무게가 진득하게 달라붙어 있는 것이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은 친구가 될 수 있고. 내일 죽여야 할 사람도 잠시나마 도움이 되면 동석할 것입니다. 저는 그리할 것입니다.”

번은 그렇게 살아왔다.

개구리로 태어나 올빼미를 피해 다녀보기도 했고, 반대로 올빼미로 태어나 어미가 물어오는 개구리를 산채로 뜯어먹은 적도 있었다. 그런 경험들이 번을 감정보단 이성에 치우치게 한다.

“지금 죽인다고 해서 쌀 한 톨 얻는 것이 없다면, 시일을 조금 미루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입니다.”

“해충을 그대로 두면 다른 쌀을 갉을 수도 있다.”

마녀를 살려두면 무슨 해악을 끼칠지 모른다는 뜻이었다.

“항시 채찍을 허리에 두르고 있겠습니다. 잘 때도 칼을 손에서 놓지 않고 있겠습니다.”

언제든 죽여버릴 수 있도록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겠다는 번의 의지가 모두에게 절절하게 퍼져나갔다.

-황자께서 저리도 힘드셨던 게로군.

-그럴 만도 하지. 악마가 몸속에 있다잖나?

-그런데도 저 어린 나이에 버티시니, 참으로 강인하신 분이시네. 나였다면 미쳐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야.

번=악마라는 공식은 절대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황자의 신분이 아니었더라면 벌써 사람들의 돌에 맞아 죽거나 산채로 화형을 당했을 거다.

“쯧.”

황제는 안타깝다는 듯 번을 보다가 옆으로 얼굴을 돌렸다.

“스캇.”

“예, 폐하.”

“황자의 이야기가 해봄 직한 일인가?”

마녀를 이용해 치료하겠다니, 자칫 이전보다 더 좋지 않은 소문을 만들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스캇. 지은 죄가 있으니, 번의 손을 들어준다.

“뭐든 시도해보는 것은 좋다 생각합니다.”

“집정관.”

“예, 폐하.”

황제는 모두가 보란 듯이 목소리를 좀 더 키웠다.

“그대는 어찌 생각하는가?”

“동의하는 바입니다.”

황제가 끄덕이며 다른 이를 보았다.

“은사.”

“예, 폐하.”

“저자를 통제할 수 있는가?”

은사가 서늘하게 웃었다.

그 표정을 본 융이 바르르 몸을 떨 정도로 말이다.

“숨결 하나도 놓치지 않겠습니다. 만약 도주시도라도 하는 날엔..”

뒷말은 듣지 않아도 되었다. 그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두가 알 수 있었으니까.

“좋다!”

황제가 우렁차게 외치며 돌아섰다.

“황자는 들어라!”

“예!”

번이 대답하자, 황제는 근엄하고 명확하게 말했다.

“저자의 형 집행을 6개월간 보류한다! 그 사이 황자는 최대한 치료에 전념하도록 하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번을 바라보는 융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일단 목숨을 건진 건 좋은데, 무슨 속셈일까? 산전수전 다 겪은 그녀로서도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걸 지켜보던 실란. 고개 숙인 그녀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그런 그녀의 어깨를 카이사르가 품어주며 부른다.

“어머니..”

실란은 대답하지 못했다.

연달아 닥친 충격이 그녀의 혼을 쏙 빼놓았다.

“어머니.. 흑흑..!”

지독한 상실감에 치를 떠는 실란을 보며 카이사르가 어금니를 악물었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반년. 누군가에겐 그리 길지 않을지도, 또 누군가에겐 지독히도 긴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짧은 수명을 타고난 곤충과 수백 년 사는 거북이의 하루가 어찌 같겠느냐마는 이들처럼 치열하게 살아온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입자아아아앙!

두웅-! 둥!

집정관의 목소리를 시작으로 북이 울리고, 사람들의 함성이 쏟아졌다.

-우와아아아아!

-오늘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 줄 알았다!

-그러게 말야! 아우!! 내가 다 긴장될세!

-어! 나온다!!

황자들이 경연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콜로세움에 무대가 준비되었다. 드디어 마지막 경연이 시작된 것이다.

-카이사르! 카이사르!

-와! 카이사르 황자님의 표정이 장난이 아닌데?

-그러게.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

-훌쩍 자라신 거겠지. 훈련이 아주 혹독했다지 않나?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로 카이사르는 이전과는 무척 달라진 모습으로 나타났다. 비쩍 마른 몸과 핼쑥한 얼굴. 그 와중에 퀭한 눈은 소름 끼치도록 번들거렸다.

‘죽여버리겠다.’

반년 전, 그 사건이 있었던 후로 2황비는 완전히 의욕을 상실했다. 하루 한 끼 챙겨 먹는 것도 힘겨워했고, 그 자신감 넘치던 여장부의 모습도 온데간데없었다. 카이사르에게 어머니의 그런 모습은 낯설고, 의아했다. 감옥 따위는 당당하게 이겨내실 줄 알았기 때문이다.

주크버그의 배신과 죽음이 어머니에게 그리도 큰 상처였나?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었다. 어쨌든 반 년간 어머니의 웃음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들은 그 원흉으로 한 사람을 지목했다.

‘네놈 때문에! 어머니가! 어머니가..! 반드시 죽여버리겠어!’

그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저쪽에서 시선 하나가 마주했다.

-꺄아아아! 번 황자님!

-번! 번! 번!

-오늘도 멋진 모습 보여주세요!

카이사르만큼 관심을 한몸에 받고 있는 번이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카이사르의 눈빛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번. 이전보다 한층 여유롭고, 어른스러운 모습이었다. 대체 지난 반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크크크! 이 많은 사람들이 뒤집어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웃음이 멈추질 않는구나!

악마의 말에 번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