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속삭임 #
마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얼굴에 흙먼지가 잔뜩 묻은 중년의 사내와 함께다. 2황비 실란의 그림자로 불리는 사내, 주크버그였다.
“궁 밖 야산에 땅을 파고 숨어있었습니다.”
은사의 말에 황제가 입술을 뒤틀었다.
“죄가 없으면 그리 행동하지 않았을 터. 말해보라. 너희는 무엇이 두려워 도주했나?”
‘이런, 빌어먹을..’
마녀 융은 이리저리 눈알을 굴렸다.
이렇게 꼬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게다가 여기가 변방의 소국이었다면 어떻게든 수를 써서 빠져나가기라도 했겠건만, 이곳은 철鐵의 나라 에비뉴다. 기사의 수준은 말할 것도 없고, 저 십위十衛라는 복면 괴인들도 장난이 아니었다.
‘어쩌지? 어떻게 해야 하지?’
마녀란 직업군은 늘 위험을 달고 산다. 성기사나 사제들에게 잡히지 않아도 대부분의 사람은 마녀에게 돌을 던지니 말이다. 물론 그녀의 현재 외모가 아주 아름답고 젊은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이마저도 마녀란 프레임에 씌면 마이너스로 작용할 것이다. 누굴 홀릴 상황도 아니었고.
‘일단 돌아가는 상황을 보자. 실란 저 망할 년이 자기 혼자 살겠다고 무슨 소리를 지껄였는질 모르니까.’
융이 입을 꾸욱 다물고 고개를 떨구자, 황제가 은사를 본다.
“팔다리라도 뽑아야 할까?”
"……?"
움찔!
“손가락을 하나씩 잘라볼까?”
"……!"
흠칫!
지켜보는 모든 이들은 소름 돋았다.
태연하게 웃으며 말하는 황제의 저 말이 농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 쓸모없는 주둥이도 잘라버려야겠구나. 말을 하지 않을 거면 혀도 뽑아버리고. 그렇지? 은사?”
황제의 시선을 받은 은사가 묵묵히 허리춤에서 작은 주머니칼을 하나 꺼내 들었다.
이들은 정치가가 아니다. 이들을 위한 표현은 전장에서 피를 마시며 그 피로 목욕을 하는 거친 사내들이라 함이 가장 맞을 것이다. 더군다나 고문엔 이골이 난 맹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남자, 여자. 어느 쪽을 먼저 하오리까?”
은사의 손에 들린 칼날이 섬뜩하게 빛났다. 황제의 명만 떨어지면 그는 무심한 얼굴로 살점을 얇게 도려내기 시작할 거다. 아무렇지도 않게.
꿀꺽..!
그걸 느낀 마녀 융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잡혔을 때부터 이런 순간이 오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아니 이렇게나 빨리! 무력하게 고문당하는 걸 예상한 것은 아니었기에 공포는 배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황제가 말하는 동안 은사가 융의 앞으로 걸어갔다.
“황비는 네가 어떤 수작을 부렸는지 모른다 했다. 맞는가?”
융이 손을 떠는 것처럼 지금 실란도 어깨부터 시작해 전신이 떨리고 있었다. 말 한마디에 이제껏 노력해오던 모든 것이 날아가게 생긴 것이다.
“네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면 나는 너를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 발가벗긴 채 성벽에 걸어둘 것이다.”
황제의 말은 여기가 끝이었지만, '그리되면 오가는 이들이 하나씩 돌을 던질 거고, 그것에 맞아 죽거나 굶어 죽은 뒤 시체는 까마귀 밥이 될 것이다.'라며 절로 뒷이야기가 들리는 듯하다. 말은 이내 머릿속에 그려지고, 상상력까지 더해지니 그녀는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오래 살아온 마녀였지만, 그녀가 언제 타인에게 고통을 당해보았겠는가? 언제나 강자의 위치에서 살아왔다. 그렇기에 자신의 육체에 가해질 끔찍한 고통에 관해선 면역이 전혀 없었다.
“저, 저는..”
융이 드디어 목소리를 냈다.
“그..”
융이 뒤를 돌아보며 시선으로 실란을 찾는다. 방법은 두 가지. 모든 것을 실란에게 덮어씌우거나, 전부 거짓이라며 박박 우겨야 했다. 문제는 둘 다 통할 것 같지 않다는 거? 하지만 가만히 있다간 바로 죽게 생겼으니 다급해진다.
“황비는..”
그녀가 말을 하려는 찰나!
“죽여주십시오! 폐하!”
융의 옆에 꿇어앉아 있던 주크버그가 상체를 바닥에 붙이며 크게 외쳤다. 쿠웅-! 떨어진 이마에서 피마저 튈 정도.
“옳지! 네 입은 살아있구나. 그래, 어디 한번 말해보라. 이 추잡한 사건의 진상이 무어냐?”
꽈득, 이갈리는 소리와 함께 주크버그의 눈동자가 부리부리하게 빛났다. 어떤 각오를 마친 사내의 눈이다.
“다 소인의 욕심에서 비롯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입을 연 주크버그. 그의 이야기는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고, 신빙성 있게 시작되었다.
약 6개월 전, 마녀를 끌어들여 카이사르의 몸에 좋은 약을 만들라 지시했다. 2황비에겐 딱 이 정도로만 보고했고, 모두를 속였다. 2황비는 마녀인 줄도 몰랐다. 그저 실력 있는 마법사로 알고 있을 뿐. 하지만 주크버그는 마녀와 함께 저주를 만들어 경쟁자도 제거하려 했는데, 뜻대로 되질 않았다. 그래서 방법을 달리했다. 질병을 풀어 소문을 퍼트린 후,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게 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절대 비간트 같은 악독한 병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설사를 일으키고, 소화가 잘 안 되는 수준의 것이었습니다!”
주크버그의 하소연과 같은 마지막 말이 터지자, 대청은 탄식과 욕설이 난무했다.
-어찌 사람이 그런 파렴치한 짓을 한단 말이오!
-욕심에 눈이 멀었구만!
-저자를 당장 죽어야 합니다! 머리를 잘라내어 성벽에 걸어둬야 합니다!
황제가 손을 들었다.
“조용.”
황제는 세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실란과 마녀, 주크버그의 표정을 읽으려는 것이다.
그때였다.
“아니에요! 저는..!”
마녀가 뭐라 말을 하려 하자, 은사가 빠르게 그녀의 앞에 서서 거칠게 융의 가슴을 걷어찼다.
“꺄악-!”
뒤로 데굴데굴 굴러 나가떨어지는 융. 여자라 해서 사정을 봐주거나 하는 법은 없다. 그걸 본 실란의 얼굴에 핏기가 싹 사라졌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은사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댔다. 지껄이고 싶으면 차례가 돌아왔을 때 해라. 폐하께서 대화하시는데 훼방은 용서치 않을 것이다. 그런 기세가 철철 풍겼다.
“끄으윽.. 끄윽.”
갈비뼈에 금이 갔는지 융이 일어나지 못하고, 고통에 몸을 떨었다. 그런데도 신음마저 꾹꾹 참는다. 그만큼 은사란 사내가 너무도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그만.”
황제가 일어났다.
“예, 폐하.”
은사가 길을 터주자, 황제는 은사에게 손을 내민다.
곧, 그의 손에 칼이 쥐어졌다.
그걸 들고 천천히 걸어, 주크버그 앞에 선 황제.
“이 모든 일을 네놈 혼자 했다?”
“그..렇습니다.”
주크버그의 대답과 동시에 카이사르의 한숨이 들려왔다. 안도하는 표정이다. 어머니의 오랜 친구이자, 한 식구나 다름없던 그가 이런 일을 벌였다는 것이 어처구니없고 배신감이 들었지만, 그래도 누명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어딘가?
그것 보세요! 어머니는 죄가 없습니다! 선량한 사람을 이리 내몰아도 되는 것입니까? 라며 버럭버럭 외치고 싶은 그였지만, 조금 전 마녀가 은사의 발길질에 나가떨어진 걸 보곤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그 저주는 누굴 향했나?”
황제의 말에 주크버그는 침을 겨우 삼켰다.
“주로.. 번 황자였습니다.”
“어째서?”
“그가 경연에서 가장 유리하다 판단했습니다.”
“하-!”
황제가 헛웃음을 흘리며 저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번이 차분한 얼굴로 서 있었다.
고작 열 살짜리 꼬마 때문에 이런 일을 벌였다?
“더 할 말이 있느냐?”
황제의 살벌한 목소리에 주크버그는 마지막 순간이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실란의 하얗게 질린 얼굴이 보인다.
‘당신..’
그의 말은 당연히 거짓이었다. 외딴 숲에서 처음 마녀 융을 찾았을 때도, 마녀 융이 궁으로 찾아왔을 때도 그녀를 멀리 둬야 한다며 경계하던 것도 그였으며, 조잡한 약의 도움을 받아서 강해진들 무슨 소용이 있겠냐며 사사건건 방해하던 사람도 역시 그였다. 그런 그가 모든 책임을 짊어지고 떠나려 한다.
‘실란..’
두 사람은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았다.
‘나는 이렇게 가지만.. 당신은.. 부디.. 건강해야 하오.’
세상에 말 못할 비밀도 많이 공유했다. 그녀가 궁에 들어오기 전부터 둘의 관계는 이미 뗄 수 없었다.
야망이 있는 여자. 그런 여자를 물심양면物心兩面 보살핀 한 남자의 허무한 최후가 이렇게 다가왔다.
‘고마워요.. 주크버그..’
진실이 무엇이든 이젠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흉수라 자처한 자가 자백을 했으니 말이다. 마녀가 뭐라 지껄이든 그걸 믿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되었다. 이러면 된 것이다.'
차분하게 고개를 돌리는 주크버그.
“……?”
순간, 실란의 옆에 있던 카이사르는 갸웃했다. 자신을 바라보던 주크버그의 눈에 한줄기 눈물이 흐르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부디.. 오래오래 행복해라. 카이사르.. 내.. 아들아..’
주크버그는 입을 꾸욱 다물곤, 다시 고개를 돌렸다. 모든 걸 내려놓은 듯한 주크버그. 황제를 향해 답한다.
“없습니다. 죽여주십시오. 폐하. 신성한 경연을 어지럽힌 죄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자, 황제는 피식 웃으며 은사를 보았다.
“웃긴 놈이야. 그렇지 않나?”
제까짓 게 뭐라고.
스윽-.
칼을 쥔 황제의 손이 움직였다.
날카로운 빛은 금세 주크버그의 목에 닿았고, 순식간에 자석처럼 쑤욱 빨려 들어갔다. 황제는 사람을 어떻게 죽여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다. 목을 정통으로 뚫어버린 칼에 주크버그는 바르르 떨다가 옆으로 쓰러졌다. 그의 돌아간 머리, 빤히 응시한 눈이 카이사르에게 머물렀다.
‘카..이..사..르..’
주크버그의 안타까운 눈동자가 이내 생기를 잃었다.
사람이 죽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황제는 주크버그의 목에서 칼을 뽑아들고, 다시 걸었다.
“흐읍..”
실란은 피가 똑똑 떨어지는 칼을 들고 자신에게 걸어오는 황제를 보며 헛바람을 들이켰다. 오랜 시간 살을 맞댄 남편이었지만, 이 순간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으로 느껴졌다.
“…….”
실란의 앞에 선 황제가 은사에게 얼굴을 돌렸다. 그러자 은사가 널브러진 마녀의 머리채를 잡아 질질 끌고 왔다.
“히이익, 흐으으으윽..! 아, 아파!”
은사가 팔을 휘두르자, 실란의 옆으로 융이 볼품없이 나뒹굴었다. 굴욕적인 순간이었지만, 지금은 가슴의 고통 때문에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런 융의 몸을 황제의 그림자가 덮었다.
“자, 하려던 말을 해보아라.”
이제 융도 느낀다. 자신의 목숨 따윈 이곳에서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거란 것을. 특히 이 남자. 에비뉴의 황제는 소문으로 접한 것보다 훨씬 더 냉철한 사람이었다.
이 숨 막힐 듯 쥐어짜는 압박감. 근처에만 있어도 피부가 저릿해지는 살기와 제왕의 기세까지 황제는 겸비하고 있었다.
“없는가?”
그럼 죽어라, 라는 말이 떨어질 것 같아 융이 급히 입을 열었다.
“저, 저는 시키는 대로만 했을 뿐이에요. 저주가 누굴 향하는 것인지도 몰랐고요!”
이 상황에서 실란에게 죄를 덮어씌우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티격태격해봐야 마녀보다는 황비의 손을 들어줄 사람이 더 많을 것 같기도 했고.
“알았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거에요. 억울합니다! 저도 속은 거라고요!”
그녀는 빠르게 태세전환을 했다. 이미 죄를 다 시인하고 죽은 자가 있는데, 이 기회를 십분 살려야 하지 않겠는가? 융은 아주 능숙하게 연기했다. 긴 세월 살아오며 얻은 연륜으로 이 정도쯤은 쉽게 해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아름다운 얼굴을 이용할 줄 알았고, 눈물 젖은 눈동자는 결백을 호소했으며 여리고 가는 몸뚱이는 사내들에게 보호본능을 일으켰다. 물론, 이 남자는 예외였지만.
무심한 눈으로 융을 보던 황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이 말이 사실이오?”
실란 역시 융의 의도를 읽었다. 여기선 서로 돕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일단은 살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최근 주크버그가 자리를 비우는 시간이 많아 이상하다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절대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곤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폐하.”
알았다면 못하게 했을 것이다. 믿어달라. 실란의 눈은 그리 말하고 있었다.
“흠..”
황제의 결정만 남은 상황.
그런데 이때,
저편에 차분히 서 있던 번. 그의 머릿속엔 다급한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저 마녀를 어떻게든 살려! 우리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다! 어서!
악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