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궁즉탁鳥窮則啄 #
부하들이 2황비의 저택으로 가는 것을 보며 은사는 피식 웃었다.
‘하여간 대단한 꼬마라니까.’
조금 전 상황이 얼마나 웃긴가? 만약 그가 오지 않았다면? 혹은 패를 보고도 나타나지 않았다면?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야말로 헛소리만 한 셈이 되는 것이다.
‘천성이 도박꾼이야.’
카이사르와의 대련에서 이겼을 때부터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참으로 승부에 강한 녀석이다. 게다가 묘하게 끌린 달까? 물론 그러니 이렇게 응해준 것이지만.
“······.”
번을 바라보는 은사는 설마 자신의 기척을 듣고 알아차렸을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뭐, 뭣들 하는 것이냐! 막아라!”
실란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은사의 십위十衛는 놀랍도록 고수高手다. 저택에서 허드렛일이나 하던 사내들이 막을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러면 아니 되는 겁니다! 어린아이의 장난질에 넘어가실 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당장 멈춰주세요!”
실란이 은사를 향해 외쳤지만, 은사는 팔짱을 낀 채 머리를 흔들었다.
“아무것도 없다면 떳떳할 일입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은사의 말이 맞다. 켕기는 게 없다면 뭐가 두렵겠는가?
“······!”
하지만 실란의 얼굴엔 그런 떳떳함이 없었다.
‘뭔가 있군.’
은사는 쓰게 웃었다. 볕에 드러난 그 하얀 치아가 맹수의 송곳니처럼 보여 실란이 한걸음 물러났다.
“어머니! 폐하께 알리셔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당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너희들은 뭣들 하느냐! 어서 누구라도 가서 도움을 청하란 말이다!”
카이사르가 목에 핏줄을 세우며 고함쳤지만, 실란의 표정은 점점 더 어두워져만 갔다. 초조함이 입술에 묻어 쉴 새 없이 질겅질겅 씹혔고, 힘 잃은 눈동자는 태풍 앞 가랑잎처럼 흔들렸다.
“제가 가서 스승님이라도 모셔오겠습니다!”
은사를 막으려면 같은 급의 인사가 필요했다. 딘딘이라면 충분하리라. 하지만..
쉬익-!
그림자 하나가 은사 앞으로 떨어져 내렸고, 그의 입에선 절망적인 말이 흘러나왔다.
“수상한 것을 찾았습니다.”
은사가 눈을 가늘게 뜨고 실란을 힐끗 보았다. 부하에게 묻는다.
“그게 무어냐?”
“흑마법이 사용된 흔적과 그것을 위해 재료를 배합하는 솥이 있었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썼던 것 같습니다.”
“······.”
질끈 눈을 감는 실란.
그녀 옆의 카이사르는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다.
“모함이다! 모함이야! 그런 것이 이 집에 있을 리 없다!”
발광하는 카이사르를 무시하며 은사가 다시 묻는다.
“흉수는?”
“도주한 흔적이 있어 삼위三衛와 사위四衛가 추적 중입니다.”
은사가 서늘하게 웃으며 끄덕였다. 그 둘이라면 대륙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반드시 잡아오리라.
“증거를 확보하고, 현장을 보존하라.”
“충忠!”
사내가 다시 귀신처럼 사라지자, 은사는 실란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렇다는데? 어디 변명할 것이 있으면 해보라는 표정이었다.
“어머니! 왜 말씀이 없으십니까? 모함입니다! 이게 말이 되는 일입니까? 저 약삭빠른 놈이 꾸민 짓이 분명합니다!”
카이사르가 분통 터진다는 듯 소리쳤지만, 그녀의 머리는 다음을 점치고 있었다. 마녀 융이 잡히거나, 혹은 잡히지 않거나. 이것에 따라 변수가 너무 많았다. 그래서 말을 아껴야 한다. 지금 하는 말이 나중에 해악이 되어 돌아올 수도 있을 테니.
‘묵비권이라. 나쁘진 않은 선택이야.’
입을 꾸욱 다물고 자신을 노려보는 실란과 눈을 맞추던 번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계속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을 셈입니까? 증거가 발견되었다지 않습니까? 진정 그대들은 황명을 거역할 생각인 겁니까?”
기사들과 병사들이 번의 질책 어린 눈길에 그제서야 우르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걸 보던 은사는 실소했다. 이 어린 황자가 사람을 부리는 것을 좀 보라지. 대단하지 않은가? 5년만 지나도 어찌 클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시선을 느낀 번이 은사를 보며 빙긋 웃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리 큰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모두가 번에게 집중했다.
“새는 궁하면 아무거나 쫀다.”
카이사르의 고개가 갸우뚱했다.
“짐승은 궁하면 사람을 해치고.”
실란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인간은 궁하면 거짓말을 한다.”
공자의 말이다.
“흐음.”
은사는 번의 이 말을 2황비가 궁지에 몰려 아무 거짓말이나 할 것이니 그것에 대비하라는 뜻으로 여겼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죄가 있다면 밝혀질 것이고 없다면..”
뒷감당은 네가 해야 할 것이야. 라는 눈빛을 웃어넘기며 번은 끄덕였다.
‘없어도 만들면 되는 거지. 크크크!’
그러기 위해 이렇게까지 쇼를 하지 않았던가? 번은 이 기회를 빌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실란을 끝장내려 하고 있었다.
조궁즉탁. 새가 쫓기어 도망갈 곳을 잃으면 도리어 상대편을 주둥이로 쫀다는 뜻이었다. 비록 약한 자라 할지라도 궁지에 몰리면 강자에게 대항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인데, 쥐가 고양이를 문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지금 번의 상황과 딱 맞아드는 말이 아닌가?
그러게 왜 그리도 괴롭혔나? 인과응보라 하지 않았나? 결국, 이렇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것을 말이다.
“모시겠습니다.”
은사가 실란의 앞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번을 이글이글 불타는 눈동자로 바라보던 그녀는 결국, 체념하듯 고개를 떨구고야 말았다.
.
.
다음날 대청.
주요인사들이 모두 비상소집 되었다.
여기는 변호사, 판검사, 인권단체나 배심원 같은 것이 없는 사회다. 법이란 게 있긴 하지만, 판례에 따를 이유도, 필요도 없고 그때그때 판관의 기분에 따라 바뀌기도 했다. 물론 오늘 그 판관역을 맡은 이는 황제다. 뭐든 내키는 대로 할 수 있는 위치에 앉은 사람. 그래서 더 무섭다.
“폐하! 억울합니다! 이건 저놈의 모함이 분명합니다! 악마의 장난에 모두가 속고 있는 것입니다!”
실란과 나란히 무릎 꿇은 카이사르가 하소연을 시작했다. 두 사람은 고작 하루 만에 십 년씩은 늙어버린 것 같이 초췌했다. 보고만 있어도 불쌍하달까? 하지만 황제의 눈빛은 섬뜩하리만치 차갑다.
“황자는 말을 가려서 하라.”
모두가 있는 자리다. 체통을 지켜라. 멍청한 놈! 쯧, 혀를 차는 황제를 보며 실란의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 부자父子의 정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스캇.”
“예. 폐하.”
“보고하라.”
근엄한 음성에 스캇이 꾸벅 머릴 숙이곤 모두의 앞으로 나왔다. 최근 번의 일 때문에 체면을 구기긴 했어도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명실상부 에비뉴 최고의 마법사였다.
“지하실에서 발견된 솥과 주변을 분석한 결과, 사용이 금지된 소재가 쓰였음을 확인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갓 태어난 아이의 심장 말린 것, 어린 처녀의 자궁과 오래 묵힌 까마귀의 부리 같은 것들입니다.”
-으음..
-허어! 세상에나!
-이런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사람들은 경악했다. 이런 것이 있다는 것조차 처음 들어본 이도 있었고, 안다 해도 그런 것이 황궁에서 버젓이 쓰였다는 것 자체가 충격으로 다가온 것이다. 소란스러워진 장내. 하지만 황제가 손을 들자, 모두의 입이 일제히 다물린다.
“그것들은 어디에 쓰이는 물건인가?”
“특정 대상을 저주하거나 인간과 자연에 해를 끼치는 현상을 만들 때 쓰입니다. 제가 직접 현장으로 가서 확인한 결과, 최근 적어도 다섯 건 이상의 흑마법이 시도된 흔적이 있었으며 이것들은 초심자가 함부로 다루기 극히 어려운 주문들이었습니다.”
“모두가 이해할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말해보라.”
“기력을 쇠하게 하거나 정신을 혼란스럽게 하여 미치광이로 만드는 주문이었습니다. 어떤 것은 그 이상의 효과를 가지고 있을 것이며 또 어떤 것은..”
스캇이 실란을 힐끔 보곤, 말을 잇는다.
“병을 키우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잘한 질병을 안고 살아가는 것인데, 이 저주가 발현되면 감기는 폐렴으로 번지고, 상처는 곪아 터집니다.”
-이런..
-그럼 그 소문이 사실이었단 말입니까?
-정말로 2황비께서 역병을 퍼뜨렸다는 것입니까?
또다시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분노에 부들부들 주먹을 떠는 이, 경악에 입을 떠억 벌리는 이까지. 놀라움을 모두가 금치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스캇의 말은 대상만 바꾸면 누구라도 저주에 당할 수 있었다는 뜻으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황제조차도 말이다. 고귀함을 자랑하는 궁에서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지다니? 기막혀 혀를 내두를 수밖에.
황제는 다시 팔을 들었다.
금세 조용해지자, 스캇에게 묻는다.
“그것이 최근 수도에 일어난 일련의 사태와 관련이 있는 것이냐?”
“아닐 수도 있겠지만, 충분히 가능하기도 한 일입니다.”
스캇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카이사르가 벌떡 일어났다.
“거짓말입니다! 절대 있어선 안 될 일입니다! 억울합니다! 폐하!”
황제가 피식 웃었다.
“그래, 절대 있어선 안 될 일이다. 헌데 그 일이 벌어졌다.”
"······!"
카이사르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아버지의 얼굴이 이리도 무섭게 느껴진 것이 하루 이틀도 아니건만, 오늘은 살기마저 느껴진 것이다. 분명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바라볼 수조차 없을 만큼 매섭다.
“실란, 그대가 말해보구려. 이게 어찌 된 일이오?”
그녀는 어제부터 지금까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괜한 말이 독이 될까 피했던 것인데, 이젠 그러지도 못하겠다. 여기 분위기를 보면 당장에라도 돌이 날아올 것 같지 않나?
“우선..”
온종일 생각했던 말을 차분하게 내뱉기 시작하는 실란.
“욕심에 눈이 멀어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방식을 쓴 죄. 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어머니..!”
이미 결정적 증거들이 발각된 이상 최대한 진실에 거짓을 섞어야만 했다. 가만있으라는 듯 카이사르를 힐끔거린 그녀는 다시 황제를 똑바로 올려보았다.
“하지만 오해입니다. 제가 원한 것은 집중력을 높여주고, 원기회복을 도와 몸을 보신해주는 약이었습니다. 실제로 그것이 카이사르 황자에게 도움을 준 것도 사실이고요.”
집정관의 옆에서 딘딘이 끄덕였다.
‘과연, 최근 몰라보게 달라졌다 했더니, 그런 것이었군.’
번 황자에 대한 질투심이 좋은 활력소가 된 줄만 알았는데, 아니었다니 씁쓸하다.
“그, 그게 무슨..?”
카이사르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실란을 보았다. 설마 몇 달 전부터 아침마다 먹어오던 그 보약이?
“자식 사랑이 과하여 하지 말아야 할 일까지 한.. 다 이 못난 어미의 죄입니다. 카이사르 황자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부디 선처해주시길 바랍니다. 폐하.”
그녀는 모든 죄를 자식 사랑으로 덮으려 하고 있었다. 자식을 위해 그랬다며 말이다. 통하기만 한다면, 이 우매하고 가련한 여인을 끔찍하게 내치진 않을 거라는 것과 훗날 아들이 후계자가 되면 다시 광명을 찾을 수 있을 거란 계산까지 깔린 것이다.
훌쩍, 눈물까지 보이는 그녀. 그러나 황제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스캇.”
“예, 폐하.”
“흑마법이 사용되었다 했다. 그것이 확실한가?”
“그러합니다. 폐하.”
황제는 실란을 본다.
“이 일에 관해선 아는 것이 없소?”
“하늘에 맹세코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아마 그 사악한 마녀가 저를 속이고 어떤 일을 꾸미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모든 것을 마녀 융에게 덮어씌우기로 했다. 그게 아니면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으니까.
“모르는 일이다..?”
황제가 눈을 가늘게 뜨고 되묻자, 실란은 힘차게 끄덕였다. 딱 이 모습만 보면 참으로 가여운 아낙처럼 보였다.
-하긴, 황비께서 그런 악독한 일을 벌일 이유가 없지 않겠소?
-그렇소. 아귀가 맞지 않는 부분이 많소. 카이사르 황자께서 저리도 듬직하게 자라고 계시는데, 어이하여..
-보약을 쓴 것이 잘못은 아니지 않소이까? 그리 잔인한 재료가 들어갔다는 것을 모르고 복용했다면 죄를 묻긴 어려울 것이오.
어느새 실란의 편을 드는 사람이 하나둘씩 튀어나왔다. 이제까지 그녀가 사교계에서 뿌렸던 시간과 정성이 이렇게 도움의 손길로 돌아오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몰라도 너무 몰랐다.
“은사.”
황제와 이 사내들을 말이다.
“예, 폐하.”
은사가 앞으로 나오자, 황제가 말했다.
“그 마녀를 끌고 오라.”
황제의 말에 실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