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좌의 게임-47화 (47/177)

# 통수 빡! #

피리 부는 사나이.

아니, 휘파람 부는 황자가 길을 나서기 시작했다. 그러자 집 밖에 대기하던 기사 열 명이 빠르게 따라붙었다. 그들의 은빛 갑옷이 번쩍번쩍하여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다. 하나하나가 일당백의 무력을 갖춘 숙련된 기사들. 번의 가슴이 든든해진다.

“어디로 향하십니까?”

기사 중 하나가 묻자, 번은 그저 웃었다. 그러면서 쌀자루를 손가락으로 쿡! 후볐다. 조로록 쌀알들이 바닥으로 톡톡 떨어진다. 사람들이 보기엔 그저 지린내 나는 포대로 여겨지겠지만, 이건 맹독을 품은 미끼이자, 먹이였다.

그것도 특정 동물에겐 절대 거부할 수 없는 마력을 지닌!

‘흐흐흐..’

번이 항상 수컷으로만 태어났던 것은 아니었다. 몇 번째였던가? 암컷 쥐로 태어났을 때 얻은 ‘암내 풍기기’는 수컷 쥐라면 거역할 수 없는 명령과도 같은 신호를 풍겼다. 그걸 쌀알들에 묻힌 것.

‘개똥도 쓸데가 있다더니.’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번이 거리를 걷기 시작하자, 슬슬 반응이 왔다.

킁킁!

사방에서 느껴지는 시선들.

사람의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작은 것들의 포악하고 음흉한 눈빛이 대부분이었다.

이미 황제가 선포한 쥐잡기 운동이 수도 전역에서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었는데, 아이들은 삼삼오오 몽둥이와 포대를 들고 용돈을 벌겠다며 사방을 들쑤시고 다녔고, 쥐들은 위기를 느꼈는지 더 깊숙이 숨어버렸다. 그런데 이게 웬걸?

-히이익?

-어머나!

-웬 쥐가 갑자기..?

인적이 드문 곳으로만 슬슬 다니는 쥐가 사방에서 튀어나왔다. 그것도 이런 대낮에 말이다.

휘이익~ 휘익~ 휘이익~

번의 휘파람소리가 경쾌하다. 기사들은 영문을 모르고 그저 황자가 기분이 좋으신가? 여기며 갸웃했지만, 쥐들에겐 이게,

「여긴 안전해!」

「맛있는 먹이다!」

「어디 듬직한 수컷 없나요? 나 지금 외로워요!」

따위로 다양하게 인식되며 전파되었다.

혼란스럽다. 이성적으로 생각할 여유가 없다. 더 미치겠는 건, 킁킁! 콧구멍으로 들어오는 강렬한 유혹의 냄새였다.

“으음?”

“쥐새끼가 왜..”

발치로 모이는 쥐를 본 기사가 얼굴을 찌푸리며 걷어차려는데,

“······?”

그럴 필요도 없었다.

쥐들은 바닥에 떨어진 쌀알을 잘근잘근 먹더니, 곧장 사지를 벌벌 떨면서 배를 까뒤집고 죽었다. 단 한 톨만으로 말이다.

“어? 어어?”

놀람은 이제부터였다.

경계심 많은 쥐. 한데 다른 쥐가 쌀알을 먹고 죽는 걸 보았으면서도 미친 듯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번은 킥킥 웃으며 계속해서 걸었다.

5마리, 10마리, 50마리, 100마리..

번을 따르는 쥐의 숫자는 더욱 많아졌고,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을 그저 머엉-. 이게 무슨 해괴한 일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것도 잠시. 주변에서 보고 있던 사람들은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은신처에서 튀어나온 쥐들이 쌀알을 먹고 길에 나와 죽었다는 건, 돈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과 같지 않은가? 이 쥐 한 마리에 1쿠퍼라 하지 않았나? 사람들은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갈팡질팡이었다.

그런데,

“가져가셔도 좋습니다!”

그걸 눈치챈 번이 쾌활하게 외쳤다.

휘이이~ 휘이~ 휘이이~

그리곤 휘파람을 이어간다.

-우와아아아! 황자님 최고!

-우헤헤헤! 다 내 꺼야!

-쥐다! 쥐! 엄청 많아!

사람들이 구름처럼 따르기 시작했다. 벌써 어디서 포대나 바구니를 구해와서는 죽은 쥐를 사정없이 쓸어담기 시작한다.

도시 안쪽으로 접어들자, 우르르 튀어나오는 쥐의 숫자는 더 많아졌다. 사방에서 달려드는 놈들의 머릿수를 가늠해보니 얼추 300마리가 넘는다. 살아있는 놈만 말이다.

“허..”

기사들은 번을 따르며 혀를 내둘렀다.

그들도 이미 번과 황제의 일을 전해 들었다. 그래서 번 황자가 도시의 쥐를 어떻게 잡을지 궁금했었는데, 이런 식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게 말이 되는건가? 황자가 흘리는 쌀알을 주워 먹은 쥐는 어김없이 죽어버리니 말이다.

‘좋구나!’

번은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물론 이 과정에서 사람들이 페스트 바이러스에 노출될 수도 있다. 하지만 어차피 잡아야 할 쥐고, 신전에서 도움을 준다 했으니 최대한 빨리 쥐의 숫자를 줄이는 것이 급선무.

“독을 쓰신 겁니까?”

옆에 있던 기사가 결국 질문을 한다. 그의 질문에 번이 흔쾌히 끄덕여 준다.

“비슷해요.”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더라도 답은 기꺼이. 기사들은 준귀족이나 다름없기에 친해져서 나쁠 게 없다. 번은 웃으며 발걸음을 더 가볍게 했다. 포대의 쌀이 줄어들수록 주변의 사람과 쥐는 더욱 많아지고 있었다. 이젠 1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뒤따르고 있었는데, 대부분은 아이들이었다. 마치 소독차를 따라 달리며 마냥 즐거워하듯 아주 신이 났다.

아이들에겐 이보다 즐거운 일이 어디있겠는가? 거짓말 조금 보태서 축제 같다.

‘수컷을 죄다 잡아 죽이는 것만으로도 큰 효과를 볼 수 있지.’

쥐의 임신 기간은 약 22일. 출산 후 2일 후면 또다시 교미하여 임신할 수 있으며, 한번에 6~10마리의 새끼를 낳는다. 생후 2달이면 생식이 가능하고, 이런 번식력 때문에 일 년에 최소 수십 마리에서 수백 마리까지 급속도로 번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수컷이 없다면?

21세기 한국에서 벌이던 길고양이 중성화 사업과 비슷한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쥐 입장에선 가정파탄범이 거리를 활보하며 씨를 말리고 있었지만, 대항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번 황자님이시다!

-뭘 하시는 거지? 저 사람들은 또 뭐고?

-퍼레이드야?

-번 황자님께선 악마에 씌웠다고 하지 않았던가?

수도의 중심.

황궁이 지척인 곳까지 번이 도달했다.

어느덧 포대의 쌀은 3분의 1 이하로 떨어져 있었는데, 온 도시의 쥐가 다 모여드는 것 같은 진풍경이 펼쳐졌다.

-에구머니나!

-왠 쥐가 이리많아! 이게 다 돈이야?

-우와! 내가 먼저 주워야지!

-무슨!

사람들은 악마 들린 번 황자에 대해 거부감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최근 번지기 시작한 질병의 원인이 번 황자 때문이라는 소문까지 겹쳐 눈초리가 좋지 않았던 상황.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런 것들은 싹 잊혀진다.

쥐 한 마리에 1쿠퍼.

그리 큰돈은 아닐지라도 돈은 돈이었고, 돈 앞에서 장사 없다는 말은 언제나 진리 아니던가? 번의 추락한 이미지도 같이 쾌속 회복중이었다.

“궁으로 향하시는 겁니까?”

번이 한쪽 길로 방향을 돌리자, 기사가 물었다.

“예.”

번이 쾌활하게 답한다.

이 난리가 났는데, 황궁으로 들어선다? 기사의 낯빛이 살짝 굳었지만, 번은 어느새 황궁앞으로 성큼 다가갔다. 그러더니 문을 지키는 경비 앞에 가서는 당당히 주머니의 패를 꺼냈다.

황제께서 직접 하사하진 패牌!

그걸 높이 들어 올리며 박력 있게 외친다.

“자네! 이름이 뭐지?”

처억!

놀란 경비가 자세를 바로 하며 우렁차게 대답했다.

“다마스입니다! 황자님!”

10살짜리 꼬마였지만, 이 순간은 거역할 수 없는 분위기를 풍기는 번이다.

“좋다! 다마스! 자넨 지금 바로 인근의 모든 병력을 끌어모아 나를 따르라!”

“······?”

경비들도,

“······?”

기사들도 눈에 물음표가 가득했지만, 번은 고함쳤다.

“당장 움직이지 못할까? 감히 황명을 거역할 셈이냐? 다-마스!”

“아, 아닙니다!”

엉덩이를 걷어차인 것처럼 황급히 움직이는 다마스.

궁에도 쥐는 있다. 이것들이 코를 벌름거리며 담벼락을 따라 번에게 모여들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걸 보면서도 차마 황궁엔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손가락만 빨고 있었다. 번의 행동에 주목하며 눈치만 보는 상황. 그러다 보니 기이한 대치상태가 이뤄져갔다. 그 와중에도 쥐는 점점 숫자를 늘려간다. 수십이 수백이 되고, 번을 따르던 사람들도 오백이 넘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그냥 따라오는 사람도 있었고, 슬쩍 궁 안쪽의 쥐를 잡아 바구니에 넣는 아낙도 있었다.

번을 둘러싼 쥐와 사람의 테두리.

그 중심에 선 번이 다른 경비들을 보며 다시 우렁차게 외친다.

“최소한의 병력만 남기고, 너희는 나를 따르라!”

“어, 어디로 향하시는 것입니까?”

차분하던 기사는 이제 없다. 번의 황당한 움직임에 휩쓸려 말까지 더듬었다. 설마 황궁으로 올 거란 생각은 못 했으니까.

“쥐 잡으러 갑니다.”

“······?”

쥐는 밖에도 많지 않은가?

기사는 당황스러울 뿐이지만, 번이 말한 쥐는 아주 큰 쥐였다.

‘이제 시작이다!’

대청에선 큰소리 떵떵 쳤지만, 상식적으로 수도의 쥐를 일주일 만에 어찌 다 잡나? 이건 쇼일 뿐이었다. 이목을 모으기 위한 여흥이랄까?

“어엇..? 여긴..”

뒤에서 황궁 경비대 소속의 40여 명이 우르르 뛰어오는 게 보였다. 번은 그들을 기다리는지 발걸음을 잠깐 멈췄다가 저쪽을 보며 씨익 웃었다. 그러면서 기사들에게 패를 보란 듯이 내민다.

“이제부터 여러분께선 나를 가로막는 모든 것을 부숴버리세요.”

“······?”

“······!”

쥐 사냥을 빙자한 번의 진정한 속셈이 누군가의 보금자리를 정조준했다.

“아시겠습니까? 그 누구도 예외로 두지 마시란 말입니다.”

번의 입가가 냉혹하게 뒤틀렸다.

.

.

“뭐라?”

황제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되물었다.

“번 황자가 병력을 이끌고, 2황비의 처소로 갔다고 합니다.”

“왜?”

집정관은 어깨를 으쓱했다.

“이유가 있겠지요.”

“황자가 무슨 힘이 있다고? 그게 가능해?”

“패牌를 내어주셨지 않습니까?”

“아아..”

그랬지. 그 패牌.

수도의 모든 병력을 사용할 수 있는 황궁의 절대권력 상징이며, 황제의 신물이다. 잘만 쓰면 무소불위無所不爲의 힘을 휘두를 수 있는! 물론, 어디까지나 잘만 쓰면 말이다.

“비간트 아니라면서?”

“18년 전 기록과 대조해본 결과, 절대 아니라는 판단입니다. 유사한 증세를 보이는 자가 있긴 하지만, 치사율이 높지 않습니다. 절로 호전되는 이들도 많고요. 비간트였다면 이미 수도 전역에 시체가 넘쳤어야 합니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집정관의 결과치는 언제나 정확하다.

“..하지만 이상하긴 합니다. 번 황자에 대한 소문도 그렇고, 역학조사 결과 병 자체도 기이하리만치 특정 구역에서 발생했으니까요. 보통은 전염병이란 게 빈민가나 시장 같은 곳에서 발병확률이 높지 않습니까?”

“그런데?”

“주택가였습니다. 그것도 중산층이 몰려있는 황궁 인접 지역에서요.”

“흐음..”

황제의 눈이 가늘어졌다.

고 영악한 녀석이 이걸 몰랐을까?

아무리 악마에 씌었다고 해도 번은 똑똑하다. 단순히 열 살짜리 꼬마라 생각하면 큰코 다친다. 이제까지도 그래 왔지 않은가? 경연 때도, 그 이전에 열 통의 편지 때도 말이다.

‘아니지. 어쩌면 이미 다 알고 있었을지도.’

확실히 난 놈은 난 놈이다. 닭 잡을 칼로 소를 잡고, 소 잡는 칼을 주면 호랑이를 잡을 거다. 지금도 마찬가지 아닌가? 패를 줬다고 모두가 이리 쓰진 못할 터.

“..혹시 그건가?”

황제의 눈이 과거의 어떤 시점을 응시했다.

전에 녀석이 쥐를 잡겠다고 호언장담하던 날, 따로 말을 하겠다던 번은 그 뒤 바로 편지를 써 올렸었다.

-..이런 무서운 질병이 갑자기 전파할 리 없습니다. 자연적인 현상이라면 어쩔 수 없는 거겠지만,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서면으로 받았던 글귀가 번의 목소리와 겹쳐지며 다시 황제에게 닿았다.

-..누군가 이 병을 어떤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퍼트렸다면 반드시 응징해야 하는 것이 옳다 생각합니다. 찾을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만약 그리된다면 제가 밝혀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땐, 녀석의 호기를 그저 지켜보자 하며 훑어보고 넘어갔는데,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니 아마 이것을 염두에 뒀던 모양이다.

‘녀석, 그렇게 참더니 결국 터진 건가?’

황제를 지켜보던 집정관이 다소 걱정된다는 듯 말한다.

“뭐가 어떻게 되었든, 자식이 부모를 공격하는 모양새는 그리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도 여기 황궁에서는 더더욱 말입니다.”

비록 같은 배에서 태어나진 않았지만, 카이사르와 번은 형제였다. 2황비 또한 큰 틀에서 보면 번의 어머니나 다름없단 거다. 그런데 병사를 이끌고 2황비의 처소로 갔다? 하릴없는 사람들이 질겅질겅 씹기 너무도 좋은 추문 아닌가? 심지어 최근 번에게 씌어진 소문들도 좋은 것들은 아니었고.

“그렇다곤 해도.. 그거라면 일이 달라지지.”

“네? 어떤 거 말씀이십니까?”

집정관이 묻자, 황제는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아니다. 일단, 사태를 주시하고, 혹시 충돌이 있을 시 제재하도록 해. 이 시점에 유혈사태가 일어나서 좋을 건 없으니까.”

“그리하겠습니다.”

“은사를 보내던가.”

“벌써 움직였을 겁니다.”

“하긴.”

황제가 피식 웃었다.

그보다,

“허..! 그놈 참.”

생각할수록 괴상하다.

휘파람을 불며 쥐를 모았다고? 그게 가능한 일인가? 확실히 악마 어쩌고 하더니, 요상한 힘을 손에 넣은 걸까?

뭐가 어찌 됐든,

‘녀석의 짐작대로 당신이 질병을 퍼트렸다면, 그건 가도 너무 간 거요. 실란.’

여인답지 않게 호승심도 강하고, 질투도 심하다는 것을 진즉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 백성을, 내가 품어야 할 사람들을 배신하는 일은 해서는 안 된다. 그것도 국모國母가.

“언제고..”

황제가 중얼거렸다.

“도려내야 할 종기였다고 해도..”

집정관은 묵묵히 황제의 말이 끝나길 기다렸다.

“고름이 철철 흘러넘칠 때까진 봐주려고 했거늘.”

잘 짜내면 새살이 돋을 테니까. 가족이란 게 그런 거니까.

“······.”

전장에선 피도 눈물도 없는 강심장의 군주라고 알려지긴 해도, 그 역시 누군가의 남편이자, 아버지다. 집정관은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사람은 변하지 않습니다. 폐하.”

수많은 전장을 누볐고, 만인지상의 삶을 살아보며 무수한 인간군상을 보았다. 간혹 겁쟁이가 용감한 장수로 성장하고, 비겁한 잡배가 멋진 관리가 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런 것은 수만에 하나 정도다. 대부분은 처음 가진 성정性情을 죽을 때까지 이어간다.

“알아. 알지. 아는데..”

안타깝다는 듯 입맛을 다신 황제. 더는 얘기할 기분이 아닌 듯하여 집정관이 꾸벅 머리를 숙이고 물러난다.

“상황이 끝나는 대로 보고드리겠습니다.”

황제는 대답없이 앉아있다.

입꼬리가 살짝 씰룩이고, 손가락이 의자의 팔걸이를 톡톡 두드렸다. 그가 이 순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진 집정관으로서도 알 방법은 없다. 다만, 오랜 경험으로 깨닫는다. 저분께서 저리 고민하실 땐, 반드시 어떤 큰일이 터지리라는 것을.

“폭풍이 몰려오려는가..”

집정관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발걸음을 서둘렀다. 골칫덩이 황자를 막아야 했으니까 말이다.

.

.

“이게 웬 사달입니까? 어머니..! 괜찮으십니까?”

두 무리가 대치하고 있다.

훈련장에 있다가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온 카이사르는 눈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네놈! 무슨 짓이냐?”

번이 오십의 병사도 모자라, 기사 열 명까지 대동하고 쳐들어왔다. 만약 2황비가 막아서지 않았다면 지금쯤 저들이 곳곳을 헤집고 있었으리라.

“물러서세요. 카이사르.”

2황비 실란은 근엄한 목소리로 아들을 타일렀다. 흉흉한 분위기였지만, 그녀는 기죽지 않았다. 꼿꼿한 허리는 당당했고, 부릅뜬 눈은 암사자 같았다.

“어머니..?”

“괜찮습니다. 카이사르. 제가 해결할 거에요. 나서지 마세요.”

아들은 곧 후계자가 될 귀한 몸이다. 이런 자리에 나설 필요도 없다.

“..그래요. 번 황자님.”

차분히 입을 뗀 실란. 그녀의 눈이 주변을 훑는다.

병사들의 발에 화단의 경계석이 쓰러지고, 꽃이 밟히고 있다. 그들의 거친 구둣발에 흙이 파이고, 질서는 파괴된다. 궁이 생긴 이래 단 한 번도 없었던 초유의 사태. 하지만 그녀는 허둥대지 않았다. 내 집 앞마당 아닌가? 그녀가 이곳의 주인이었다.

"지금 무얼 하자는 건가요?"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불청객을 우르르 끌고 들이닥친 주동자는 그 얄미운 얼굴을 빤히 들고 그녀와 대치했다.

“수색이 필요하다고요.”

번 또한 실란의 기세에 전혀 밀리지 않았다. 그의 눈은 확신으로 가득했고, 번뜩이는 붉은 눈동자는 소름이 절로일게 했다. 하지만 속으론 그 역시 사람인지라 재차 확인하게 된다.

‘틀림없지?’

-그래! 여기야! 이 근처에 저주의 근원지가 있다! 약하긴 해도 아직 느껴져!

악마의 말에 번이 씨익 웃었다.

그걸 본 실란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이 상황이 재미있나요?”

웃어? 지금? 웃음이 나와? 라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많다. 체면을 지켜야 했다.

- 크큭, 어지간해선 뚫기 힘들겠는데?

악마가 보기에도 실란은 독기가 철철 흘러넘쳤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했던가? 지금 그녀는 가장家長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여장부였다.

하지만 이 남자 또한 보통내기는 아니다.

“수도를 재앙에 빠뜨릴 수도 있는 무서운 비간트의 원천源泉이 이곳일 수도 있습니다.”

-아, 거참. 비간트 아니래도? 몇 번을 말해야 해? 그 병에 관해선 내가 전문가라니까?

악마의 목소리 따윈 가볍게 무시하는 번이다. 이 시점의 그에겐 질병이 뭐든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까.

‘증거만 잡으면 되는 거야.’

악마는 말했다. 여기에 저주의 근원이 있다고. 다시 말하면 그걸 찾을 수 있기만 하다면 수도에 벌어지는 흉흉한 모든 일을 덮어씌울 수 있다는 말과 같았다. 번의 메소드 연기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현재 진행형이었고, 적을 속이려면 나부터 속여야 하는 법이다. 진실은 언제나 승리자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 아니겠나?

“비간트라니! 그게 왜 나와 상관있다는 말입니까? 이해할 수도 없고, 무례합니다! 내, 이 일을 결코 가벼이 넘기지 않을 것입니다!”

"······."

표독스런 얼굴로 소리치는 실란을 보며 번이 입맛을 다셨다.

확실히 경비나 기사들은 그녀의 박력에 움츠러 들었다. 혐의가 있다곤 해도 고작 10살짜리 황자의 심증뿐인 거고, 감히 황제의 아내를 무력으로 어찌해볼 생각 따위는 해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었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만약 뒤졌는데,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 뒷감당은 어떡할까?

“······.”

“······.”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서로가 서로를 노려볼 때, 번은 귀를 쫑긋거리고 있었다.

사라락, 사라라락..

청각을 자극하는 소리. 개의 능력을 가진 번이 아니면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할 그런 은밀한 소음.

근처에 누군가 왔다.

‘오늘 반드시 끝장을 봐야 해.’

지금 못 털면 2황비가 저주의 증거를 모조리 파기해버릴 수도 있다. 쥐를 몰고 다닌 이벤트로 충분히 시선을 끌었으니, 축제의 마침표를 찍어줘야 그림이 되지 않겠나?

“썩 가세요! 당장-!”

부리부리하게 번을 노려보는 실란. 하지만 번은 담담한 표정으로 품에서 패를 꺼냈다.

“······.”

주변을 지그시 한번 노려보더니, 모두를 향해 외쳤다.

“..이 패는 대 에비뉴 황국의 지고하신 황제 폐하의 신물이며 이를 거역하는 자는 폐하의 황명을 거역하는 거로 간주합니다.”

“흥!”

하지만 실란이 코웃음을 쳤다.

패가 아무리 대단하다곤 하나, 세상일이 다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해봐라. 저들이 움직이나! 기사와 병사들을 보는 실란은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번. 그가 한 말은 실란이 들으라 한 것이 아니다.

“은사-!”

번이 고함치자, 모두의 눈에 물음표가 깃들었다.

“······?”

“······!”

은사라고?

번은 알고 있었다. 그 특수한 소리를 내는 사람은 수도에 단 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황명을 받으세요!”

번이 크게 외치자, 스스스스..

가을 낙엽이 바람에 몸서리치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스윽.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그림자들이 어리기 시작했다.

은사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가 직접 키운 직속 십위十衛가 함께다. 복면을 쓴 열 명의 십위十衛와 그 앞에 선 은사. 그들이 번을 노려보았다.

“아버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패는 당신의 뜻과 같다!라고 말입니다. 나 번 리갈 드 요르간드 바야흐, 명命합니다! 은사는 지금 즉시, 이곳을 샅샅이 수색하세요!”

황제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드러내며 어깨를 당당하게 펴고 명령하는 번의 모습은 실란은 물론이요, 모두를 움찔하게 했다. 그녀도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다. 기사나 병사 나부랭이라면 모를까, 은사는 그녀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거물 아닌가?

“······.”

은사가 번을 빤히 바라보다가 슬쩍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러더니 한쪽 무릎을 꿇고, 굵은 목소리로 답했다.

“존명尊命.”

그 즉시 은사의 뒤에 섰던 십위十衛가 새처럼 날아올라 저택을 향해 쏘아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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