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미있습니까? #
번이 막무가내였던 적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카이사르와의 대련도 그랬고, 그 후로도 좀 쉬라고 아무리 말해도 듣질 않았다. 차라리 열 살짜리 애가 마냥 칭얼거린다면 걷어차 버리기라도 하겠는데..
“······.”
스캇의 구겨진 이마가 펴지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번은 더 애절한 표정으로 스캇의 옷깃을 움켜쥐며 부른다.
“스승님!”
번이 스캇을 그리 부르자, 옆에 있던 오그마리온의 입가가 묘하게 움직였다. 제자가 어느덧 다른 이의 스승으로 불리고 있으니 격세지감을 느끼는 모양이다.
“하루에 수백, 어쩌면 수천 명의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습니다. 간과하실 일이 아닙니다.”
번의 무기가 어디 환생을 거듭하며 얻은 동물들의 본능뿐이겠는가? 거슬러 올라가 그 이전의 것. 가장 최초였던 기억이 어쩌면 제일 귀하고 값진 보물일지도 모른다.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스캇은 모르겠다. 번이 왜이러는지.
번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가 아랫입술을 꾸욱 깨물고 말했다.
“..단언컨대, 그저 기우로 끝날 일이라 해도 모자라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는 시도로 인하여 선량한 사람들의 목숨을 하나라도 구할 수 있다면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지 않습니까?”
물론 명우로써의 삶에서 의학적 지식이 전문적이지도 않았고, 수박 겉핥기 정도밖에 모를지라도 이 시대엔 없는 개념과 이론을 당연한 듯 배웠었다. 그리고 어쩌면 이건 기회다! 반격의 기회. 이용할 수 있다면 이용해야 하지 않겠나?
그리고 말을 하며 알았다. 일반적인 설득으론 스캇에게 통하지 않을 거라는 걸. 그래서 양념을 좀 치기로 했다.
“그리고.. 제 안의 뭔가가 반응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분이 나빴던 적은 처음이에요.”
“뭐가 느껴진다는 겁니까?”
역시나 스캇이 움찔! 반응했다.
보는 사람이 있어 격식을 차리고 있었지만, 그게 아니었다면 아마 번의 멱을 잡고 흔들며 물었을 거다. 악마가 뭔가를 알려주는 거냐? 라고 말이다.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경시하신다면 이 일을 두고두고 후회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런 일은 이제 그만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번의 말이 스캇의 심장을 후벼 팠다.
“이..”
영악한 놈..! 지은 죄가 있으니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이리 말하는 거다. 전후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스캇은 번에게 빚을 진 것만은 사실이니까.
“나도..”
게다가 옆에서 듣던 오그마리온이 거들기 시작한다.
“황자님의 말씀에 동의하네. 백성의 안위에 대한 일은 얼마든지 과해도 된다네. 그렇지 않은가?”
번이 목각인형처럼 끄덕였다.
둘이 아주 죽이 잘 맞는다. 스승은 이런 부분 때문에 황제 폐하와 틀어졌으면서 아직도 이런다.
“쓰읍..”
혀를 찬 스캇이 내키지 않는다는 듯 돌아섰지만, 그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번의 얼굴을 펴게 했다.
“너무 기대는 하지마세요. 오늘 폐하 일정은 빠듯하십니다.”
.
그러나,
대청에서 대신들과 정무를 보던 황제도 같은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으니,
“들라 하여라!”
만남은 바로 성사되었다.
-오그마리온님..
-대현자님.
나이 지긋한 사람들은 대청으로 들어서는 오그마리온을 향해 예를 갖췄다. 황제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옛 스승을 반겼다.
“강녕하신 것 같아 소신이 기쁩니다.”
“소신이라니요. 가당치 않습니다. 스승님.”
“어이쿠! 그 말씀은 거두어주십시오! 이 늙은이 제명에 못 죽습니다!”
너스레를 떨며 손사래를 치는 오그마리온의 모습에 모두가 흐뭇하게 미소를 짓는다.
사실 최근까지도 대현자를 궁으로 들여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 정도로 그는 아직 정정했으며 인망이 높았다. 그 자체만으로도 국정에 많은 도움이 될테니 말이다. 또한 그를 얻음으로써 전국 각지에 퍼져있는 수많은 지식인들의 호의도 함께 얻을 수 있으니, 여러모로 그는 필요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황제와 그리 썩 좋은 관계가 아니라는 게 문제.
“잘 오셨습니다.”
“이리 환대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물론, 지금처럼 공적인 자리에서는 아주 죽고 못 사는 거로 보인다.
“앉으시지요.”
호위가 가져다주는 빈 의자에 오그마리온과 번이 나란히 앉았다. 스캇은 어디 갔는지 보이질 않는다.
“수도에 나도는 질병에 관해 하실 말씀이 있다 들었습니다.”
-역시 대현자님이시다!
-오늘 도착하시곤, 그사이 벌써 파악하신 것인가?
-과연.. 신의神醫란 명성이 허언은 아니로다.
번은 다른 의미로 놀랐다.
저 아버지가 누군가에게 말을 높이는 걸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오그마리온은 머리를 숙이며 미소 지었다.
“말씀 낮추시지요. 소인이 불편합니다.”
옛 스승에 대한 배려는 여기까지. 황제 또한 흔쾌히 끄덕였다.
“대현자는 말해보라. 내 백성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황제의 말에 오그마리온은 바로 답하지 않고, 옆을 보았다. 번이 있다.
“말씀하시지요.”
판이 깔렸다.
황제가 흥미롭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황자가 답하려는가?”
번은 담담하게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보기 좋구나.”
그러고 보니, 번이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반 년 만이었다. 이제 그의 이마엔 악마의 상징이 없었고, 눈빛도 좋아 보였다.
“감사합니다. 모두 지고하신 폐하의 염려 덕분입니다.”
번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얼추 100명이 넘어가는 인사들이 모여있었다. 이들이 에비뉴를 이끌어가는 핵심이며 황실의 권력을 손에 움켜쥔 자들이다. 모두가 번을 바라 보는 자리. 황제가 손을 들어 좌중을 집중시킨다.
“그래, 여기까지 온 걸 보면 보통 일은 아닐 터. 소상히 말해보라.”
지금 번의 머리는 아주 팽팽 돌아갔다.
어쩌면 역병의 원인이 2황비의 수작이 아닐 수도 있다. 우연이 겹쳐 이렇게 된 것일지도 모르지 않나? 그리고 솔직하게 말해, 사람들이 죽어간다고 하늘이 무너지거나 하는 마음도 아니었다. 그에게 죽음이란, 다른 이들관 조금은 달랐으니까. 아파하는 선량한 아이들을 빤히 보고 있겠다는 얘긴 아니었지만, 어쨌든 선의善意가 주主는 아니라는 것이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이건 기회다! 이 자리에 있는 권력자들에게 눈도장을 확실히 찍을 절호의 찬스이며, 악마 어쩌고 나도는 소문을 반전할 수 있는 일거양득의, 아니, 경연까지 따져보면 덫 하나로 몇 마리 토끼를 잡는 셈인가?
물론 일이 잘 풀려야 하겠지만.
‘누가 차린 밥상인진 몰라도.’
엎으면 서운하잖아?
가볍게 걷던 번이 황제의 맞은편에 서서 차분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소자가 대현자님과 긴히 상의한 끝에 내린 결론은 지금 여기 수도에 창궐한 질병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증거도, 팩트도 없다. 나는 아는데, 이들은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하는 설득이 가장 어렵다. 하지만 번은 아주 자신있게 말한다.
“환자들은 과거 대재앙을 몰고 왔던 역병과 아주 유사한 증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아직은 그 수가 적어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지만, 순식간에 번질 것입니다. 그럼.. 그땐, 이미 늦습니다. 면역력이 약한 우리 아이들이 가장 먼저 노출될 것이며, 꿈도 이루지 못하고 안타깝게 쓰러져갈 것입니다.”
-비간트?
-서, 설마 그 저주받을 병이 다시 왔단 말인가?
-자네 아버님도 그때 그 병으로 돌아가시지 않았나?
18년 전 비간트가 돌았을 때, 기댈 곳 없던 백성들 사이엔 말도 안되는 치료들이 이어졌었다. 아비는 병에 걸린 아들을 오줌통에 담그고, 악마를 쫓겠다며 딸을 죽을 때까지 채찍으로 쳐대는 일까지. 더구나 의사라는 것들은 달군 쇠로 가래톳을 찌르거나 정맥을 째서 피를 뽑았다. 이런 엉터리 치료법이 다시 재현되지 말란 법은 없다. 신전? 있으면 뭘 하나. 어느 세상 어느 시대나 돈 없고, 배경없는 이들은 외면당할 뿐인 것을.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소란에 황제가 손을 든다.
“황자는 비약이 너무 심한 것이 아닌가?”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황실에서 이 질병을 비간트라 단정하면 당장 오늘 저녁부터 수도에선 대이동이 시작될 것이 분명했다. 아직도 18년 전 그 악몽을 고스란히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병에 옮지 않으려는 그들이 떠난다면 그것을 어떻게 막겠나? 그리고 그들이 떠난 텅 빈 도시는 또 어찌 될까?
“황자는 말을 함부로 해선 안 된다.”
지도자로서 무조건 막아야 하는 초유의 사태였다. 그래서인지 황제의 목소리가 아주 날카롭다.
“책임질 수 있는 말만 하라.”
-설마 비간트일려고?
-그때 신전에서 완전히 뿌리 뽑았다 하지 않았나?
-황자님께서 착각하신 것이겠지.
황제의 말과 함께 소란이 다시 일자,
쿠웅-!
번의 발이 굴렀다.
“책임질 것입니다.”
쿠웅--!
다시 발이 굴렀다. 그게 북소리처럼 모두의 심장을 때린다. 그리고 울려 퍼지는 번의 강력한 목소리.
“백성이 겪는 고초, 그걸 해결하라고 여기, 우리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
"······."
번의 결연한 표정에 모두가 놀라는 이때, 황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11년 전.
오그마리온과의 대화가 불현듯 떠오른 황제.
-전쟁은 백성을 더욱 힘들게 할 뿐입니다. 광활한 영토를 얻은 들, 민심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씀이십니까?
-스승님..! 나는 백성을 좀 더 풍요롭게 하고자 뜻을 품은 겁니다.
-아니지요. 남의 것을 빼앗는 행위론, 모두가 행복해 질 순 없는 겁니다. 그게 언제까지 갈 것 같습니까?
-답답합니다!
-그 답답함을 온 백성이 느끼고 있다곤, 생각 안 하십니까? 현실을 보세요. 전쟁 말고도 해결해야 할 일이 산더미입니다!
오그마리온이 했던 말이 겹쳐 들리며 황제의 뒤통수를 따끔하게 했다.
“책임이란 말은 그리 쉽게 내뱉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너는 진정 확신하느냐?”
그의 눈빛이 절로 사나워졌다.
제왕의 기세가 강렬하다. 하지만 번은 주눅이 들지않는다. 아니, 오히려 더 어깨를 펴고 보란 듯이 당당하게 외쳤다.
“만일 제 소견이 틀린 것이고, 그 사태에 대한 책임을 누군가 져야 한다면 제가 질 것입니다! 하지만!”
번의 눈동자가 이글이글 타올랐다.
“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태풍이 오기 전, 둑을 쌓는 사람을 바보라 하는 이는 없다. 흉년을 대비해 곡식을 저장하는 군주를 비난하는 이도 없다. 지금도 그러한 것 아니겠는가? 그래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시간 낭비는 아닐 것이라 봅니다. 이런 노력과 수행능력이 갖춰지면 추후에 비슷한 재앙이 닥쳤을 때 좀 더 수월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 또한 황실이 우리를 위해 이렇게 신경 쓰고 있구나! 여기게 될 것이고, 안전이 확보되면 그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열변을 토하는 번이다.
묵묵히 그의 이야기를 듣던 오그마리온이 크게 끄덕였다.
‘오..과연!’
견해가 달라, 수도를 등졌던 그였다. 민초를 위하고 백성을 먼저 살펴야 한다고 주장했던 그의 말을 거들어주는 이 하나 없었는데.
‘이분은?’
아까 봤을 때와는 또 다른 모습 아닌가?
하지만 이곳은 대 에비뉴의 황실이다. 늙은 여우와 젊은 호랑이, 뼛속까지 느물느물한 구렁이들이 산더미처럼 똬리를 틀고 있는 용담호혈龍潭虎穴! 과연, 이 어린 황자가 그들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인가? 지켜보는 오그마리온의 눈빛이 더욱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번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아직 초기이니, 빨리 대처한다면 병을 진압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해결 방법이라도 알고 있는 듯이 말하는구나?”
대신들이 황제와 번을 주시했다.
언제든 끼어들 타이밍을 재고 있는 자도 있었고, 흥미롭게 관전하는 이도 있었지만, 모두가 번의 편이 아니란 것은 확실했다.
“제게 시간을 주신다면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번의 말에 황제가 피식 웃었다. 그리곤 타이르듯 말했다.
“네 나이가 올해 몇이냐?”
“열 살 되었습니다.”
번의 대답에 기다렸다는 듯, 여기저기에서 키득키득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황제의 표정을 읽고 동조하는 사람들의 것이다.
“그 무렵엔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가늠하질 못하지. 작은 머리에서 쥐어짜 낸 판단이 옳다 믿고, 책 몇 권 본 것을 답이라 여긴다. 그것으로 어른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넘치기도 하고.”
그렇다. 번은 아직 열 살이었다. 고작 저 어린 것이 육칠십 먹은 대신들도 골머리를 앓는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호언장담하니, 어찌 우습지 아니할까?
그때였다.
앉아있던 오그마리온이 조용히 일어섰다.
“황자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보시고 판단하셔도 늦지 않다 생각합니다.”
적시적지適時適地에 번을 거드는 오그마리온. 번의 입지가 좁아지려는 찰나, 황제에게서 발언권을 빼앗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늙은 생강이..’
황제는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끄덕였다.
“좋다! 황자는 말해보라! 이 질병이 비간트라면 너는 어찌 해결할 것이냐?”
물론, 번이 짧은 다큐멘터리 하나 본 지식으로 페스트를 완벽하게 통제하고 치료할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겐 다른 것들이 있었다. 황자라는 지위가 있으며 이곳엔 정령과 신전이 존재하지 않은가?
“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우선, 사람들의 위생관리가 시급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깨끗한 물이 필요한데, 이는 이미 병에 걸려 탈수현상을 보이는 이들에게 생명줄과 같은 역할을 할 것입니다.”
딱히 항생제 같은 약이라고 할 것이 없는 시대. 마법 추출물이나 마녀들의 은밀한 약병이 존재하긴 해도 서민들이 가질 순 없는 것들이다.
“그래서 청하옵건대, 면역력이 약해진 환자들이 오염된 물을 마시고, 그 물로 환부를 씻어 2차 감염을 일으킬 여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황제까지 유심히 지켜볼 정도로 지금 이 순간 모두가 번의 이야기에 빨려 들어간다.
“수도에 있는 모든 물의 정령을 질병이 퍼지는 해당 지역에 보급하여 환자들이 손쉽게 깨끗한 물을 구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상·하수 시설이 열악한 이 시대에 세균이나 박테리아가 없는 가장 깨끗한 물은 오직 정령의 것밖에 없다.
“물이라.. 고작 그걸로 병이 해결되겠느냐?”
황제가 의심의 눈초리로 묻자, 번은 크게 머리를 흔들었다.
“이건 시작일 뿐입니다. 진정한 재앙의 씨앗은 다른 것이 품고 있습니다.”
번은 빠르게 기억을 더듬었다.
‘페스트는 전신성 출혈로 피부가 검게 되는 선페스트와 페스트균이 폐로 감염되어 발생하는 폐페스트가 있다고 했어. 아직 어떤 것인지 명확하지 않으니, 총체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병에 걸린 이들의 살이 검게 변해 흑사병으로 불렸던 거다.
“그것이 무어냐?”
숨소리조차 나지 않는 대청.
열 살 아이가 이런 장악력을 지녔다는 것이 참으로 놀랍다.
‘지금이 기로다.’
오그마리온은 침을 꿀꺽 삼켰다.
황자를 응원하고 싶다. 하지만 그 역시 궁금하다. 끔찍하고 무서운 역병을 이겨낼 묘수가 대체 무어란 말인가?
정적이 주변을 감싸고 한곳으로 몰리자, 번의 입이 열렸다.
“쥐입니다.”
“······.”
“······.”
모두의 입이 떡 벌어졌다.
“뭐라?”
황제가 기막혀 바로 물었다.
쥐? 고작 쥐라고? 따져 묻는 표정이었다.
도처에 널린 것이 바로 쥐다. 심지어 먹을 것이 없는 극빈층은 쥐를 잡아먹기도 한다. 근데 뭐?
“정확히 말하면 쥐에 기생하는 벼룩이란 놈이 원인입니다.”
공식은 간단하다. 쥐의 몸에 사는 벼룩이 페스트균을 품고 있고, 쥐가 많아질수록 사람들은 벼룩에 물릴 확률이 증가한다. 여기서 문제는 사람과 사람 사이로 전염되는 2차 감염인데, 기침을 해서 침이 튀거나 환자를 돌보다 고름에 노출되어 옮는다. 답은 나오지 않았나?
번이 확고하게 말했다.
“쥐를 전부 잡아 죽이고, 이미 병에 걸린 환자들을 격리치료 해야 합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껄껄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황제였다.
그를 시작으로 웃음은 무섭게 번져나갔다.
-뭐라고? 쥐?
-허허허..!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쥐라니!
-기가 막히는군!
뻔한 반응들. 충분히 예상했기에 번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기다렸다.
가소롭다는 듯 황제는 웃음기 머금고 번에게서 시선을 돌려 오그마리온을 보았다.
“대현자는 황자의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하나?”
오그마리온도 낭패한 얼굴이었다.
‘쥐라니..’
그 하찮고 저열한 생물이. 아니, 그것보다 더 보잘것없는 벼룩 따위가 비간트를 몰고 온다고? 차라리 신이 분노하여 징벌을 내렸다는 말이 더 설득력 있었을 것이다.
힐끔.
번을 바라본다.
"······."
그리고 이 짧은 순간, 오그마리온은 마음을 굳혔다.
한 배를 탄다.
왠지 모르겠지만, 그는 저 어린 황자의 편에 서고 싶었다.
“시도는 해봄 직하다, 생각합니다.”
-허어..!
-대현자께서 어찌!
-시도요? 무슨 시도? 모두가 비웃을 겁니다!
번에 이어, 오그마리온까지 따가운 눈총을 받기 시작했다.
“······.”
황제는 옛 스승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말없이 다시 번에게 눈길을 돌렸다.
부자父子가 마주 본다.
시끄럽던 사람들도 입을 다물었다.
‘이놈..’
강단을 좀 보게? 모두가 낄낄거리는데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다.
이건 두 가지 경우다.
미쳤거나, 자신의 답을 확신하거나.
“······.”
황자들 중에서도 관심 있게 지켜보던 아이다. 그간 기발한 모습을 여러 번 보여줘 똘똘하다 여겼고, 악마에 씌어 힘들 텐데도 내색 없이 꿋꿋하게 이겨내는 모습에 장하다 생각했지만, 오늘은 정도가 지나쳤다. 쥐와 벼룩? 웃기지도 않는다.
여기서 한번 자근자근 밟아줘야 할까? 아니면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 기특하다며 힘을 실어줘야 할까?
황제가 고민하는 데, 이제까지 있는 듯 없는 듯 잠자코 있던 한 사람이 나섰다.
“황자님께선 그러한 사실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집정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