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니까 제게 거세요 #
번이 2황비를 향해 투지를 불태우고 있을 그때, 오그마리온이 물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한번 봐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되다마다요. 대현자께서 봐주신다면 영광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만 한다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번은 시원하게 말하며 팔을 내밀었다. 하지만 속은 찔끔했다.
‘야! 혹시 모르니, 잘 숨어!’
-걱정 붙들어 매라, 이놈아! 인간 따위가 나를 알아볼 리 없으니!
번에겐 아직 악마가 필요했다.
털어먹을 밑천이 아직도 한가득했으니까.
“노력해보겠습니다.”
오그마리온이 번의 상태를 살피는 동안, 시선을 둘 곳이 없던 스캇이 무의식중에 누군가와 눈을 맞췄다.
“······.”
“······.”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여인. 우리아다.
한땐, 이 이름이 얼마나 사랑스러웠던가. 세월이 지나간 흔적은 남았지만, 아직도 그 얼굴과 그 목소리 그대로였다. 여전히 아름다웠고, 여전히..
"크흠."
사람이 숨길 수 없는 것이 재채기, 가난, 사랑이라 하지 않았나? 지나간 사랑도 사랑이다. 아니, 그래서 어쩌면 더 애달플지도 모르겠다.
“잠깐 저 좀 볼래요?”
우리아가 말했다.
예나 지금이나 직설적인 성격은 여전한가 보다.
“..그러지.”
스캇이 그녀를 따라나섰다.
봄이 만개한 정원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라. 지금 이 따스함을 눈에 한가득 넣는다 해도, 몇 달이 지나면 거짓말처럼 을씨년스러운 모습으로 변할 것이다. 화려하고 찬란하던 꽃이 언젠가는 시드는 것처럼.
그녀와의 관계 또한 그랬다. 사랑 대신 우정을 선택한 남자의 흔하디흔한 이야기.
“별일이 다 있네요. 그쵸?”
두 손을 모으고 앞서 걷던 우리아가 빙글 돌아서며 물었다.
“스승님께서 충분히 관심을 가질 사건이긴 하지.”
그게 아니라는 듯 여우처럼 코를 찡긋하는 그녀.
“우리가 이렇게 만난 것을 두고 한 말이에요.”
“아아..”
스캇이 입맛을 다시자, 우리아가 다시 돌아서며 말했다.
"문제가 많이 어려웠나 봐요? 평생 안 볼 것 같더니."
"······."
따끔거리는 것이 심장인 건지, 그녀의 눈총인지 헷갈리는 스캇이다.
“기쁜가요?”
그녀가 하늘을 올려보며 묻자, 스캇이 쓰게 웃었다.
“죄송할 따름이지.”
스캇의 말에 그녀가 쿡쿡거렸다.
“당신은 변한 게 하나도 없네요. 이번에도 틀렸어요. 나를 보니 기쁘냐는 거였는데.”
대현자의 제자답게 똑똑하고 명석한 스캇이었지만, 여자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배려를 할 줄 모른달까? 처음엔 그게 마냥 귀엽다 여겨졌지만, 시간이 갈수록 여자는 안다. 이게 얼마나 가혹한 형벌인지를.
늘 다른 곳만 바라보는 정인.
그런 사람에게 사랑을 갈구하는 여자. 서로 보는 곳이 다르니 엇갈릴 수밖에.
“······.”
둘 사이엔 좀 더 복잡하고 미묘한 것들이 얽혀있었지만, 스캇은 이제 잊으려 한다. 스승을 청한 것은 어디까지나 번을 위해서였으니까.
“이런 얘길 계속하려거든, 이만 돌아가겠어.”
스캇이 냉정하게 말하자, 우리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장난이에요. 장난. 벌써 십 년도 지난 이야기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라구요. 바보같이.”
그녀는 밝은 얼굴로 웃더니 물었다.
“황자님께선 어떤 분이세요? 오면서 들으니 소문이 아주 자자하시던데.”
갑작스러운 질문에 스캇이 갸웃했다.
마땅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으음..”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저 멀리 번과 오그마리온이 보였다.
'어떤 사람이라..'
사람을 말한 땐, 대개 짧게 정의할 수 있다. 이미지라는 게 있지 않나?
은사는 뱀 같고, 딘딘은 곰 같다. 집정관은 꼬리 여럿 달린 괴물이라 하면 딱 어울리고. 저기 오그마리온만 해도 대쪽같다 답할 수 있었다. 그럼 나는? 아마 야생마나 늑대 같지 않을까?
한데, 번은?
“으으음..”
어떨 땐 순박한 애 같으면서도 승부욕은 누구보다 강하다. 머리는 또 얼마나 잘 돌아가는지.. 게다가 쉬는 법이 없었다. 정신력은 웬만한 어른을 가지고 놀 정도로 셌고, 전사의 자질까지 타고 났다. 딱히 무어라 단정할 수 없다. 마치.. 수많은 동물이 합쳐진 느낌이랄까?
자기도 모르게 진실에 접근했던 스캇이었지만, 우리아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뭘 그렇게 고민하고 있어요? 가볍게 물어본걸.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시네요. 재미없게.”
“한마디로 말하자면..”
“······?”
“그저 응원하고 싶달까?”
더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보고 있으면 잘 됐으면 좋겠다. 그렇게 노력하는 걸 보고 있자면 뭐든 도와주고 싶고, 넘어지면 손 내밀고 싶어진다. 그런 사람이었다. 번 황자는.
이 또한 스캇이 정확하게 보고 있었다. 이제 막 알에서 깨어난 어린 새를 누가 방치하고 싶을까? 살아보겠다고 아등바등 허우적대는 어린 짐승을 누가 내칠까?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스캇은 번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듯하다.
“재미있네요. 자기밖에 모르는 당신이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다 있고.”
우리아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표정도 함께였다.
“..이만 가지. 끝난 모양이야.”
번 쪽에서 말소리가 들려오자, 스캇이 몸을 돌렸다.
오그마리온과 마주 보고 얘기를 나누고 있는 번. 묘한 표정의 오그마리온에게 다가가며 스캇이 묻는다.
“..황자님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아직은 알 수 없네. 좀 더 시간을 두고 여러 각도에서 접근해봐야겠어.”
“그렇겠지요.”
손목 한번 잡아서 해결될 일이었으면 자신의 선에서 처리되었을 거다.
“조금 불편하시더라도 부탁드리겠습니다.”
“허허.. 불편은 무슨, 오랜만에 숙제가 생겼군. 참, 그보다 아까 말한 병 말일세. 혹 알고 있는게 있으면 얘기해주게.”
“말씀드렸듯이 아직 정확히 밝혀진 건 없습니다. 그저 역병이라며 소문이 더 크게 번지고 있는 듯 한데..”
스캇이 번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아낀다. 하지만 번 역시 이미 염두에 두고 있던 바가 있기에 이야기에 껴들었다.
“사람들의 상태가 어떠했습니까?”
“18년 전 창궐했던 전염병과 아주 흡사한 증세였습니다. 설사와 구토를 반복하다 기력이 떨어져 죽어가는 아주 끔찍했던..”
오그마리온의 말에 번이 눈을 빛냈다.
“혹시.. 그 병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흉악하고 자비가 없다 하여 ‘비간트’라 불렸습니다. 부패와 병病의 악惡신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지요.”
번이 끄덕이며 곰곰이 생각했다.
속에 있는 악마 녀석이 찔끔한 느낌이 들었지만, 지금은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아무리 봐도 흑사병 같은데?’
오늘 아침 악마가 조언했었다. 2황비 쪽에서 무슨 저주를 걸었는지 정확히 알 순 없지만, 없던 병을 만들어낼 순 없는 거라고. 특히 지금처럼 병이 온 도시에 퍼져나가게 하는 건, 대악마도 쉽게 할 수 없는 일이라 했다.
‘잠재하고 있던 것을 증폭하는 건 가능하다 했으니, 이곳의 위생상태라면 얼마든지 확산할 수 있었을 거야.’
봄이 와서 기온이 올라가면, 음식물과 오물이 쉽게 썩는다. 게다가 하수 시설도 마땅치 않으니, 사람 똥과 가축 오물이 그대로 강에 버려질 테고, 아이들은 그 물에서 씻고 아낙은 물을 길을 것이다.
“혹시 아까 보셨다는 그 아이에게서 두통, 기침, 호흡장애, 반점, 가슴 통증, 근육통, 구역, 구토, 복통, 설사, 저혈압, 객담 같은 증세가 보였습니까?”
21세기 한국의 언어 전달에 있어 다소 의역이 필요했지만, 최대한 뜻을 전하려 노력하는 번이었다.
“전부 일치하진 않아도 상당 부분 비슷합니다.”
오그마리온이 약간 놀란 눈으로 번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이 어린 황자가 마치 명의名醫라도 되는 듯 말하지 않나?
‘페스트다..!’
번은 확신했다. 환생을 거듭하며 깨달은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사람 사는 곳이 어디든 다 비슷비슷하다는 것이었다. 물론 여기엔 마나가 있고, 요정도 있으며 몬스터도 날뛰지만, 고양이 감기에 사람이 안 걸리고, 사람 감기를 고양이가 옮지 않는 메커니즘은 같았다.
“으음..”
중세시대 열 명 중 다섯의 목숨을 앗아갔을 정도로 무서운 전염병. 그 치사율도 문제지만, 원인을 찾지 못한 것이 가장 큰 폐해였다. 아니면 다행이겠지만, 만약 페스트가 맞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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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수험생에게 TV란 죄악의 근원이나 다름없다. 사람이란 게 잠깐 휴식도 하면서 충전을 해야 하는데, 어떤 가정은 절대 그런 것은 용납하지 않는다.
-잠은 죽어서 원 없이 자면 돼!
-네가 그러고 있는 시간에 다른 애들은 한 문제라도 더 풀고 있다고!
명우네도 그랬다.
어머니는 늘 당신의 짧은 학력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고, 식후 30분의 짧은 쉼조차 고깝게 바라보셨다.
오늘도 마찬가지.
차마 깔깔 웃으며 보는 예능은 눈치 보여 틀어놓지 못하고, EBS에 채널을 맞춘 명우. 다행히도 강의가 아닌 다큐멘터리가 하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병은 쥐에 기생하는 벼룩에 의해 페스트균이 옮겨져 발생하는 급성 열성 전염병이며 폐렴과 패혈증을 동반하고..
딱히 흥미로운 것은 아니었으나 도피일까? 조금이라도 더 이렇게 가만히 있고 싶다는 반항일까? 명우는 멍하니 TV에 시선을 두었다.
-유럽 인구의 절반을 죽인 이 무서운 병도 이제는 인간에게 정복되어 과거의 유물로..
5분쯤 지났을까?
설거지를 마친 어머니가 거실로 나오셨다.
“그래서 한국대 가겠니?”
뾰족이 가시 박힌 어머니의 한마디. 그래, 한국대. 가고 싶다. 정말 미치도록 가고 싶었다. 하지만 안되는 건 안되는 거 아닌가? 객관적으로 in서울도 힘든 판국에 무슨 한국대를..
“얘 봐? 엄마 말 안 들려?”
“들려..”
“들었으면 대꾸를 해야지.”
명우는 입을 꾸욱 다물었다.
그의 시선은 이 순간을 벗어나려는 듯 TV에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하아..”
어머니가 명우 옆에 앉았다.
“다 너 잘되라고 하는 거야.”
이 말을 오백 번쯤 들었던 것 같다. 대체 넌 누굴 닮아서 이래? 라는 말과 쌍벽을 이룬다. 누구 닮긴. 자식 머리는 엄마 닮는다는 연구결과도 있다구요..
“소화 다 됐으면 이제 들어가! 시험 얼마 안 남았잖아.”
안다.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쯤은. 그런데 왜 가끔 그런 날 있지 않나? 정말 아주 잠깐만이라도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기 싫은 그런 순간. 명우에겐 지금이 그랬다. 어머니와 싸우고 싶었던 것도, 투정을 부리려던 것도 아니었는데 그저.. 지금처럼 재미없는 TV프로를 보며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있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엄마랑 말하기 싫어?”
“······.”
어머니도 힘드신 거 안다. 수험생 자녀를 둔 부모의 마음이 오죽할까? 하지만 어머니는 어딘가 뒤틀려있었다.
“무시하는 거야? 아주 지 아빠랑 똑같네! 정말! 하든 말든 니 마음대로 해!”
한국대를 나오신 아버지. 아들이 그 뒤를 이어 한국대에 붙으면 어머니는 아버지를 이긴다고 생각하시는 걸까? 모르겠다.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대학을 가는 건 나지, 어머니가 아니지 않은가? 언젠가부터 내 의지가 아닌 누군가의 인생을 대신 살아가는 것 같은 그런 기분. 그게 아마 이런 답답함을 만드는 것일 거다.
명우는 입을 꾸욱 다물고, TV만 보았다. 어머니가 씩씩 화를 참으시며 안방으로 들어가고, 거실엔 죽을 만큼 어색하고 무거운 공기만 남겨졌다.
“······.”
이러려고 했던 게 아니었는데.
마음이 심란하고 복잡할수록 명우의 의식은 도피처를 찾았다.
-..우리에겐 흑사병으로 익숙한 이 병의 이름은 페스트입니다.
여전히 재미없는 다큐가 흘러나오는 TV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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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머릿속 기억의 수납장 한켠에서 꺼내 재생한 동영상처럼 불현듯 떠오른 짧은 장면 하나. 그땐 왜 그랬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좀 더 잘 대처할 수 있었을 텐데..
“황자님?”
오그마리온의 얼굴이 번의 시야에 화악 들어왔다. 회상에서 깨어난 번이 급히 끄덕였다.
“..그랬군요. 제가 생각한 것보다 상황이 더 심각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요. 조속히 조처하지 않으면 상대적으로 어린아이들이나 노약자들부터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봐.’
-왜?
‘질병에 대해 잘 안다고 했지?’
-..기본은 알지.
‘지금 수도에 돌고 있는 이거. 쥐와 관련이 있나?’
-뭐, 그렇지.
악마의 반응을 보니 확실해졌다.
번이 벌떡 일어섰다. 그러면서 스캇을 돌아보며 말했다.
“폐하를 봬야겠습니다.”
번의 뜬금없는 이야기에 스캇의 얼굴이 구겨졌다. 폐하가 만나고 싶다고 아무 때나 만날 수 있는 그런 분인가?
하지만 이때, 번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지금 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