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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좌의 게임-41화 (41/177)

# 다재다능 #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구나.

악마의 말에 번이 웃었다.

“알잖아?”

번은 느끼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건진 정확히 모르겠지만, 녀석과 어떤 부분을 공유하고 있다고 말이다. 수많은 환생을 거듭하며 예민해진 감각이 알려주고 있었다. 특정 능력을 쓸 때 반응하는 기관들. 뇌의 아주 깊숙한 어느 공간에 지금 이 녀석이 똬리를 틀고 있다고 말이다.

게다가 미지의 힘까지 함께다. 그걸 어떻게든 이용하고 싶은 번이다. 이건 마치 번이 기생충으로 살 때의 경험과 비슷했다. 물론, 지금은 그때와는 주객이 바뀌긴 했지만.

“내게 협조하지 않으면 좋은 꼴 못 볼 텐데? 들었잖아. 너 소멸 된다고.”

-웃기지 마라! 누가 소멸 된다는 거냐! 나를 그리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그건 사실이었다. 악마의 본체는 다른 세상에 있었으니까. 지금은 소환에 응해 정신의 일부만 넘어온 것일 뿐, 그것이 타격을 입는다 해도 죽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뭘 그렇게 성내고 그래? 그럴 수도 있다고 하잖냐. 나도 그런 끔찍한 일을 바라는 건 아니야. 세상에! 소멸이라니! 그거 너무 심한 거 아니냐?”

이 순간, 악마는 울컥했다.

번이 너무도 얄미웠기 때문이다.

-..이놈..

악마도 이미 알고 있었다. 이 번이라는 꼬마 황자가 보통 놈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일단 나이에 맞지 않는 차분함도 그렇지만, 아까 봤지 않은가? 황제 앞에서 뻔뻔하게 연기하는 모습을. 게다가 이놈은 악마를 몸속에 품고서도 전혀 당황하거나 겁내지 않고 있었다. 보통 강심장이 아니라는 거다. 성녀도 녀석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 같고.

“이왕 이렇게 된 마당에 서로 좋게좋게 돕고 살자고. 윈-윈 몰라? 윈윈.”

뭐 이런 새끼가 다 있나? 기막히다가도 녀석의 말을 듣다 보면 묘하게 설득도 된다. 이 놈은 악마보다 더 독한 혓바닥과 달콤한 언변을 가졌단 말인가?

“대충 너도 이제 알겠지? 지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말이야. 너에겐 두 가지 길이 있어. 반드시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지.”

듣지 않으려 해봐도 막을 방도가 없다. 게다가 반사적으로 나도 모르게 물어보게 된다.

-..두 가지라. 그게 뭐지?

“하나, 내가 너를 적으로 규정하고, 어떻게든 내 몸에서 뽑아내려고 노력한다. 뭐, 이건 어렵진 않을 거야. 아까 성녀 봤잖아. 그 유명한 분께서 최선을 다하겠다는데, 네가 버티겠냐?”

협박이다. 실실 웃고 있는 얼굴을 한 대 속 시원하게 패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녀석의 말이 허언이 아니란 것도 안다. 본체라면 모를까 정신의 일부만으로 상대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으니까. 그만큼 성녀란 존재는 거북하다.

-두 번째는?

“이미 답 나왔잖아. 날 돕는 거지. 그러면 나도 네가 곤란하지 않게 노력할 거고.”

번은 지금 악마와 거래를 하려는 거다. 육백 년 넘게 살며 인간이 먼저 이러는 경우는 처음 겪는 악마였기에 어이가 없다. 어이가.

-네놈.. 나와 거래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아느냐?

“내가 그것까지 알아야 하나? 서로 줄 거 주고, 받을 거 받자는 거지. 쿨거래 몰라?”

-모를 소리만 하는 구나..

번은 어차피 하루하루, 한순간 한순간을 죽기 살기로 달려왔다. 조금이라도 강해질 수 있다면 무엇이든 취했고, 내일의 금은보화보다는 오늘의 쌀 한 톨이 더 절실했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지금 번은 악마의 도움이라도 받아서 손톱만큼이라도 강해지길 원하고 있는 것이었다. 마냥 끌려다니지 않을 자신도 있었고.

아까 듣지 않았나? 신神이 지켜보고 있다고.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것은 사양이다. 최대한 많은 패를 확보해 두어야 한다. 남들이 모르면 모를수록 더 좋은.

-저당이 필요하다.

보통은 제물이나 거래하는 자의 육체, 혹은 영혼을 담보로 악마는 힘을 빌려준다. 그러나 번의 생각은 좀 달랐다.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본데. 이미 저당은 잡혔잖아?”

-..뭐라?

“너, 죽을 거야? 살 거야?”

번은 아주 직관적이고, 명백하게 계속해서 협박을 일관하고 있었다.

“하루 준다. 네가 어디서 왔는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승이 좋지 않겠냐? 똥 밭에 굴러도 말이야.”

.

.

번 황자가 악마에 씌었다는 소문이 퍼진 지도 어느덧 6개월이 지났다. 하지만 특별히 변한 것은 없었다. 다른 황자들도 각자 열심히 학습하고 있었고, 번 또한 그 이후 추문을 일으키진 않았으니까 말이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지만, 관심은 이내 멀어진다.

그렇게 소리소문없이 시간이 흘러갈 때쯤,

“다 되었나요? 융?”

2황비의 거처 지하실. 마녀 융이 솥에 가득 담겨 보글보글 끓고 있는 수상하고 걸쭉한 액체를 쑤고 있었다. 벌써 반년이나 되었는데, 융의 젊고 아름다운 모습이 적응되지 않는지 2황비는 다소 어색한 미소로 물었다.

“융?”

“..보채지 말라니까.”

융이 곤두선 목소리로 말했다.

찔끔한 표정으로 살짝 물러선 2황비. 그러나 그녀 역시 보통 여자는 아니었다.

“벌써 다섯 번째에요. 이번에도 안되면..”

처음 융이 찾아왔을 때, 2황비는 까무러칠 뻔했다. 자신의 비밀을 아는 유일한 두 사람 중 하나가 바로 이 마녀가 아닌가? 하지만 놀람도 잠시, 그 후로 융은 2황비와 의기투합해 여러 가지 시도하고 있었다. 주로 저주를 만들고, 번을 괴롭히는 일에 몰두했달까?

“다 됐다니까! 잠자코 있어. 끝나가니까.”

융은 정신을 집중하고 있다. 죽이라도 끓이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이 손동작 하나하나에 주술이 담긴다. 재료를 정확히 배합하고, 피와 땀과 정성을 들여야만 비로소 완성되는 주술.

살殺이다.

“휴우..”

30분쯤 지나자, 융이 이마에 땀을 닦으며 솥에서 물러났다. 그러자 2황비가 냉큼 그녀에게 다가간다.

“완성이에요?”

“그래. 그거 가져왔나?”

2황비가 끄덕이며 품에서 손수건 하나를 꺼냈다. 그것을 펼치자, 안에서 여러 가닥의 머리칼이 나왔다. 이런 주술에는 손톱, 머리칼, 입던 옷이나 베개 같은 것들이 중요한 재료가 된다.

“그놈 거에요.”

“확실하지?”

“몇 번이나 확인했어요.”

“좋아. 저번 같은 실수가 있어선 안 돼.”

마지막 재료까지 준비되었다.

이제 저주가 대상을 좇아갈 수 있는 매개체만 넣고, 주문만 외면 된다.

“이거면 확실히 그놈을 죽일 수 있겠죠?”

2황비가 신경질적으로 손톱을 물어뜯었다.

그녀는 아주 심각했다. 번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 그녀에게 번은 눈엣가시였다. 어찌 아니겠는가? 자식의 앞길을 막고, 치욕까지 맛보았으니 화가 날 대로 난 상태였다.

“그래, 그 녀석이 아직 악마를 몸에 담고 있다면 이걸 피할 수 없어. 게다가 이제까지 쌓은 저주가 중첩되어 주술을 더 증폭시킬 거야. 이건 신神도 피할 수 없다고.”

주문은 죽일 살殺이라는 섬뜩하고 거창한 이름을 가지고 있긴 해도 머리카락 몇 개 만으로 대상을 제거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런 게 있다면 군대가 왜 필요한가? 마녀부대만 양성해도 안방에서 적을 다 죽일 수 있을 것을.

하지만 지금같이 특수한 경우엔 좀 달랐다. 몸속에 악마가 들어찼다면 어둠의 힘을 증폭시켜 악마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을 것이다. 성녀가 계속 노력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렸지만, 어쩐 일인지 번 황자의 일은 차도가 없다 했다. 지금이라면 딱 안성맞춤이지 않겠나?

“그리 오래 악마를 품고 있었다면 이미 반쯤 폐인이 되었을 거야. 여기서 한 번만 더 자극하면 완전히 미쳐버릴지 모르지.”

“좋아요. 어서 해요. 어서!”

재촉하는 2황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콧등을 찡그린 융이었지만, 손수건의 머리칼을 솥에 털어 넣었다. 그녀도 빨리 마무리하고 다음으로 넘어가길 바랐으니까.

“..쏜다.”

융이 마지막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들의 의도대로 일이 흘러가진 않았다.

「저주를 흡수했습니다.」

「흡수한 저주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번은 정좌하고 앉아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악마가 빠르게 외쳤다.

-왔다!

‘나도 안다고!’

번은 공간을 뛰어넘어 자신에게 밀려드는 기운을 저장했다.

지난 6개월. 번은 무섭고도 놀랍게 성장했다. 몸이 자랐다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것.

-지금!

고오오오오오오-!

온몸으로 날아드는 살殺을 완벽하게 통제해 한곳으로 보내고 있었다.

-좋아! 손실 없이 다 흡수했다. 다음으로 넘어가!

게다가 이게 끝이 아니었다.

단순히 저주를 받아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활용해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는 일을 벌이고 있는 거다.

푸르르르륵! 프르륵!

번의 옷이 태풍을 만난 듯 펄럭였다. 그의 온몸에서 터지는 기氣가 주변을 몰아치고 있는 것이다.

-너무 빨라! 늦춰!

‘이크!’

물론 아직 완벽하진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실패할 생각도 없다.

콰아아아아아아..

머릿속에 떠도는 세 가지 기운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아직도 조금 부족해!’

번이 다급한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자 악마가 버럭 외쳤다.

-내 힘을 쏟을 테니, 정확한 타이밍에서 받아!

‘오케이!’

번의 뇌에선 지금, 태초의 혼돈과 같은 폭발이 일어나고 있었다.

모든 것을 녹여버릴 것 같이 도도하게 흐르는 신성력을 파괴와 부패腐敗로 대변되는 어둠의 힘이 따르고 있었다. 노도怒濤와 같은 이 줄기는 번의 모든 뇌세포를 타고 돌았는데, 이 두 가지만이 아니었다. 반짝반짝. 코타기나발루의 습지, 배를 따르는 수많은 반딧불처럼 두 기운을 따라 오색 마나가 뒤쫓는다.

번은 지금 오감을 완전히 차단한 채, 이 모습을 관조하고 있었다.

‘조금만..!’

해가 바뀌어 10살이 되었다. 이 무렵 아이들의 하루는 어른의 몇 배에 달하는 성장을 보인다곤 한다지만, 이런 것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었다. 더구나 마나는 번이 임의대로 조종할 수 없었다. 이 녀석들은 제 하고 싶은 대로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신성력이 우르르 이동하면 그걸 따르고, 어둠의 힘이 음습하게 깔리면 그걸 비추었다.

'조금만 더!'

전혀 상반된 두 가지 힘을 한 곳에 뭉쳐 새로운 시도를 하려는 번의 계획은 이제부터가 진짜였다.

이때, 하늘에서 새까만 우주가 무너지듯 어둠이 커튼 자락처럼 내려왔다. 그게 기존의 어둠과 혼합되며 더 강력한 줄기를 이루었고, 이쯤 되니 앞서 흐르던 신성력이 뒤를 쫓기는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됐다!’

-지금이다!

‘알아!’

정좌하고 앉은 번의 모습이 오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동그랗던 머리통이 길쭉하게 늘어지고,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보통 사람이라면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육체의 구조 자체를 바꿔버리며 세 가지 기운의 방향을 틀어버리려는 번!

고오오오오오-!

전두엽으로 향하던 신성력이 바뀐 뇌의 구조 탓에 정수리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충격이 있을 거다! 정신을 잃으면 안 돼!

이미 수많은 시뮬을 돌려왔다. 오늘을 위해 6개월을 준비했고, 비록 이론뿐이었지만 10% 이상의 성공률을 짐작했다. 다소 희박해 보이는 확률이라고 느낄 수도 있으나, 수백만분의 1 확률의 로또에도 희망을 거는 게 인간 아니던가? 포기하는 것보다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노력을 할 때, 기적은 일어난다.

‘고통쯤은..’

번의 어금니가 으득, 물렸다.

‘얼마든지 버틸 수 있다고!’

그가 이제까지 죽은 횟수가 몇 번이던가? 남들은 죽을 때의 고통 따윌 기억하지 못하지만, 번은 달랐다. 깔려 죽고, 잡혀먹히고, 씹히고, 사지가 찢겨나가는 그 모든 기억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다.

‘와라!!’

번의 이마엔 아직도 선명한 악마의 V자 상징이 자리 잡고 있었다. 6개월이나 지났지만 표식은 옅어지긴커녕 더욱 선명해졌고, 이젠 시중을 드는 하인조차 번의 방에 들이지 못하게 되었다. 이것 때문에 신년 행사에도 참여할 수 없었고, 악마에 잡아먹힌 황자라 낙인이 찍힌 것이다. 수도 밖 탑에 가둬야 한다는 소문도, 경연보다는 치료를 중점적으로 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돌았지만, 번은 그 모든 것을 참고 기다렸다.

바로 오늘을..!

스아아아아아아.. 아아악!

정수리로 향하는 길이 좁아졌는지 유속이 빨라질 때 나는 소리와 흡사한 기분이 들더니, 이윽고.

콰앙---!

머리를 망치로 세차게 후려 맞은 고통이 엄습했다. 그것도 바깥쪽이 아닌, 안쪽에서부터 말이다.

“크흡..!”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번이 신음을 터뜨렸다. 살짝 벌어진 입에선 피가 줄줄 흘렀고, 코와 눈에서도 진득하고 새빨갛게 맺혀갔다.

부들부들.

몸이 절로 떨렸다. 앉아 있기에도 버거운 상태.

-이겨내! 지금 포기하면 넌 살지도 죽지도 못하는 병신이 될 뿐이다!

악마의 말이 맞았다. 지금 번의 상태는 백치나 다름없었다. 뇌가 통째로 타버릴 듯한 쇼크를 받은 직후였고, 이대로 기운이 흩어지면 다시는 복구할 수 없을 것이다.

“..으으..!”

홍수가 밀려와 급히 둑을 만들 때 아무렇게나 쌓아 물길을 잘못 잡으면 오히려 더 안 좋은 결과를 낼 수도 있다. 물이 주택가를 덮칠 수도 있고, 다른 사람 밭으로 흘러갈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후처리가 중요하다.

“으으으으..! 으이이익!”

번의 입이 벌어지고, 고함이 터졌다.

“..가라..!”

정수리로 콰앙-! 솟구쳤던 신성력이 돌연 곤두박질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뒤를 어둠의 기운이 바짝 뒤따른다. 그리고 드디어 반짝반짝 맴돌던 오색五色마나가 정수리에 맺힌다. 아팠니? 우리가 도와줄게. 어루만지듯 녀석들의 일부가 번의 상처를 보듬었다.

-잘했어! 잘 참았다! 다음이다!

그러나 따스함이나 안락함을 느낄 여유 따윈 없다. 고삐가 풀린 황소처럼 질주하기 시작한 신성력은 화가 난 듯 더욱 속도를 높였고, 어둠의 힘은 사방을 할퀴며 신성력을 내몰았다. 지금까지 6개월간 번의 머릿속에 갇혀있던 힘이다. 이 힘들이 처음으로 범위를 넓힌 것이다!

‘모 아니면..’

번의 목구멍이 꿀꺽 넘어갔다. 침 대신 비릿한 피가 쑤욱 넘어간다. 오감을 차단했다 여겼는데, 이 맛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그만큼 긴장된 순간!

‘도다!’

죽음.

번에겐 늘 가까이에 있었던 단어. 하지만 이번만, 이번 딱 한 번만 빗겨 가 주어라.

콰아아아아아아!

기둥처럼 수직으로 하강하는 신성력을 어둠이 빙글빙글 돌며 감싸자, 드릴처럼 변했다. 그게 뇌의 가장 아래를 순식간에 돌파하며 척추를 타고 그대로 떨어졌다.

오싸아악-!

누군가 등에서부터 척추를 손에 쥐고 그대로 뽑아버린 것 같은 고통.

“꺼어어..”

「고통을 흡수합니다.」

「상처를 회복합니다.」

「머리가 단단해집니다.」

번의 여러 능력들이 위기에 대항코자 노력해보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척추를 타고 흘러내린 신성력이 엉덩이 끝 꼬리뼈까지 때리더니, 그 순간!

파파파파팟!

수만 갈래의 전신세맥全身細脈을 타고 흩어졌다.

“끄윽..!”

결국, 눈을 하얗게 까뒤집은 번이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쿠웅-!

뒤통수가 바닥에 세게 부딪혔다. 하지만 이런 고통쯤은 손톱의 때만도 못했다. 지금 번이 느끼는 아픔은 모든 세포가 전부 타들어 가는 것과 비슷했으니까.

-다 뚫었다! 거의 다 왔어! 5분만! 아니, 1분만 버텨!

“흐윽, 흐으윽, 흐으으..”

대답할 정신도 없었다.

그저 본능적으로 해야 할 일만 어떻게든 진행한다.

“크윽! 카-아악!”

여러 삶을 반복했지만, 이 정도의 고통은 처음이었기에 번은 몸을 뒤집으며 등을 새우처럼 웅크리고 참으려 노력했다. 이를 얼마나 세게 물었는지, 아니 잇몸이 허물어진 걸까? 우스스 이가 빠졌다. 머리카락도 가을 낙엽처럼 숨풍숨풍 떨어진다.

“카아아악..!”

-참아야 한다! 참아야 해!

저 남쪽 어느 해안가 절벽. 너무 흉측한 모습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산다는 마녀처럼,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골룸처럼 흉측하게 변해버린 번의 모습은 안타깝기만 하다. 그러나 이런 결과를 바란 것이 아니다.

「‘흡수’가 활성화됩니다.」

이건 단지 나비가 되기 위한 번데기의 과정일 뿐!

-다 왔어! 힘내! 번!

노력 한 줌과 의지 한 줌이 필요했다. 엄청난 고통과 충격속에서 그조차 힘든 것이 당연했지만, 번은 해낸다.

「필요한 성분을 흡수하여 육체를 재구성합니다.」

「육체에 녹아있던 광물이 반응합니다.」

「구성을 방해하는 모든 노폐물을 걸러냅니다.」

드디어!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따낸 달콤한 과실이 번의 몸 곳곳에서 열리기 시작했다.

사르르륵-

칼로 난도질한 것처럼 너덜너덜한 맥脈이 회복되기 시작한다. 마치 방사능에 피폭이라도 당했던 것처럼 무기력하던 세포들이 일제히 생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반짝, 반짝.

이 역할은 마나가 주로 담당했다.

지금 번의 몸을 하나의 지도처럼 펼쳐보면 수많은 빛무리가 전신에 퍼져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오색 빛 마나는 신성력과 어둠의 힘이 지난 길을 자연의 힘으로 수복했고, 신성력은 모든 세포 하나하나에 자리 잡았으며 어둠의 힘은 척추 깊은 곳에 그대로 남겨졌다.

아아아.. 보라.

번의 모습을..!

스스스스스..

고통으로 악귀처럼 일그러졌던 얼굴이 평온함을 되찾기 시작했다. 움푹움푹 파였던 머리칼이 새로 돋아났으며 까칠하던 피부가 백옥처럼 새살이 돋아났다. 이마에 있던 악마의 상징 V표식은 감쪽같이 갈무리되었고, 빨갛게 충혈되어 있던 눈동자도 제 빛깔을 찾았다.

“하아, 하아..”

-잘했다! 잘했어! 이 자식! 이걸 성공하다니! 너는 지금 역사상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낸 거라고!

반짝 눈을 뜬 번이 악마의 목소리를 들으며 멍하니 주변을 돌아보았다. 손을 들어 신기한 듯 바라본다. 그러다가 살짝 미간을 좁히곤, 옷을 다 벗어버렸다. 육체에서 모공으로 배출한 노폐물이 얼마나 많이 나왔는지 악취를 풍기며 씹던 껌처럼 여기저기 달라붙어 있었던 것이다.

‘된 건가?’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서서 눈을 깜빡이는 번. 마치 허공에 붕 떠 있는 기분이었다.

이때였다.

똑똑똑.

문을 노크하는 소리.

“······.”

번은 대답 대신 그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직 이 몸이 내 것이 아닌 기분과 함께 꼭 꿈을 꾸는 것 같은 몽롱함이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루비에요. 들어갈게요.

문이 열리고.

“······.”

“······?”

성녀가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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