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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좌의 게임-38화 (38/177)

# 동거 #

황당함이 놀람으로.

하지만 그게 다시 기쁨으로 변하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재미로 여기실 일이 아닙니다.”

“내가 뭘?”

그랬다. 황제는 지금 즐거워하고 있었다. 황제의 얼굴에서 그걸 발견한 은사가 머리를 흔들었다.

“직접 가실 필요도 없고요.”

황제는 아무데나 싸돌아 다닐 수 있는 직책이 아니다. 궁 밖 행차 한번에도 법도와 절차에 따라 일정을 잡아야 했고, 경호도 민감하게 다뤄야 한다. 심지어 요즘은 더 그렇다. 철의 군대에 망한 나라가 한둘인가? 원한을 품은 사람도 그만큼 많다는 얘기. 망국의 자객이 어디에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데, 가긴 어딜 가?

“나라의 대소사를 책임지는 막중한 자리에 있는 내가 여기 처박혀서 나 몰라라 할 수야 있나?”

“이제까진 그래 왔지 않습니까?”

“내가? 언제? 이거 서운하게 왜 이래?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다.”

뭐, 그렇다 해도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 아닌가?

은사를 싹 무시하고 제 할 말만 하는 황제. 하필 지금 이곳엔 황제가 이렇게 강짜를 부릴 때 말릴 사람이 없었다. 집정관과 스캇이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딘딘이나 은사는 황제에게 말로 이길 수 없다.

황제가 벌떡 일어나 걸었다. 그러더니,

“옷 벗어.”

소식을 가져온 사내 앞까지 다가가, 씨익 웃었다.

“제, 제 옷을 말입니까?”

당황한 사내가 손으로 옷깃을 여미며 뒤로 흠칫 상체를 물리자, 황제는 더 짓궂게 웃었다. 참으로 음흉한 미소를 보이는 황제.

“내가 직접 벗기리?”

“······.”

통제 불능이다. 황제가 한번 이렇게 막무가내로 밀어붙이기 시작하면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평소엔 타고 난 것처럼 군주에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가도 돌연 이렇게 철부지 애가 된다. 은사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때, 이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던 딘딘이 말했다.

“대악마라니.. 그런 것이 출현한 전례가 있었나?”

“없지.”

은사가 말을 받았다.

둘이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길 때, 황제는 여전히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사내의 앞에서 팔짱을 끼고는 옷을 벗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이 잔뜩 붉어진 채로 주섬주섬 끈을 풀어내는 사내는 아무리 지엄한 황제의 명이라도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차라리 죽으라 명령했다면 이보단 쉬울듯한데.. 오늘따라 꼬질꼬질한 속옷이 왜 이리도 부끄러울까.

“동작 봐라. 빨리 안 해?”

삐질,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힌다.

“이, 이것도 말입니까?”

속옷을 잡고 주저하던 사내에게 황제는 피식 웃어준다.

“그건 됐고.”

한시름 놓은 얼굴로 사내가 옷을 모조리 벗자, 그걸 빼앗아 걸치는 황제를 보며 딘딘은 한숨을 푹 쉬곤 은사에게 물었다.

“신전에 연락해볼까?”

“이미 와 있을 거다. 악마에 가장 민감한 녀석들이니까.”

“그도 그렇겠군.”

스캇이 아무리 미친놈이라도 아무 이유 없이 그런 짓을 벌일 녀석은 아니다.

“가지.”

두 사람 사이에 변복을 마친 황제가 섰다.

“······?”

은사가 황제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 나 이상하냐? 티 나?”

옷만 바꿔 입는다고 황제의 얼굴을 몰라보는 등신이 있을까?

“······.”

딴에도 켕기는지 머리를 손으로 부르르 헝크는 황제를 보며 딘딘이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이 정도면 됐지?”

물론 저 어디 변방 촌구석에서 농사짓고 사는 백성들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관리나 수도경비대의 눈을 피할 순 없을 거다. 당장 얼마 전만 해도 황자들의 경연을 참관하겠다며 콜로세움에 당당히 노출했지 않나? 그것도 몇 번이나 말이다.

“······.”

쓴 입맛을 다신 은사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품에서 복면 하나를 꺼내 건넸다. 하지만 황제. 그걸 받아 들며 머리에 뒤집어쓰면서도 고맙다는 말 대신,

“이제 너도 공범이다?”

“······.”

은사의 복장을 뒤집었다.

“가자! 늦겠다! 대악마라잖아!”

앞서 뛰기 시작하는 황제를 딘딘과 은사가 뒤쫓았다. 그러면서 은사, 외친다.

“대악마라고 해도 에비뉴 수도에서 활개를 치진 못할 겁니다. 곧 제압되겠죠.”

당연하다. 이곳은 철의 황국의 심장부 아닌가? 신전이 몇 개며 마탑의 마법사 수가 얼만 데, 악마 따위가 설치겠는가?

황제는 뒤를 돌아보며 쓰게 웃는다.

“내가 걱정하는 게 뭔지 알잖아.”

그렇다. 황제는 악마 따위에게 수도가 유린당하거나 하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극받기 전에 가야 한다고.”

사람들은 모른다.

스캇, 그 녀석이 어떤 힘을 지니고 있는지를.

.

.

.

‘여긴..?’

번은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었다. 분명히 눈은 뜨고 있는데, 한점 빛조차 없어 사물을 인식하지 못하는 거다.

-으음..

입을 열어 신음을 흘려보았다. 하지만 말하는 느낌은 있는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물속의 그 먹먹한 기분보다 훨씬 더 차단된. 마치 우주에 둥실 떠 있다면 이럴까?

다른 감각을 깨워보았다. 번에겐 일반인에겐 없는 특수한 능력들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오감이 완전히 차단된 건가?’

느껴지지 않았다. 박쥐의 초음파 같은 기술도, 개의 뛰어난 청력도 무용지물.

‘내가 이동된 건 아닐 거야.’

번은 침착했다. 그리고 하나씩 되짚어 보았다.

그의 장점은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추론을 한다는 것에 있다. 사람이 공포를 느끼는 것은 죽음에 대한 미지의 두려움이 있기 때문인데, 번은 이미 그런 것은 수없이 겪어봤으니 그가 느끼는 감정이라면 이번 생 더 오래 살지 못했다는 아쉬움 뿐이었다. 당연히 육체적으로 완벽한 죽음을 맞기 전까진 냉정해질 수 있었고, 지금 상황은 그가 판단할 땐 ‘위험’하지 않았다.

‘스캇이 정령을 불러낸다고 했어. 자신만만했던 그가 실패할 리 없으니 내가 최면 같은 것에 당한 건가?’

어둠의 정령이라 했다. 그렇다면 이건 정령의 농간이나 시험 같은 것일 수도 있었다. 정령은 묘한 기술을 쓰기도 한다는 걸 전에 고서에서도 보았다.

‘기이해. 중력도 느껴지지 않아.’

번은 팔을 들어 손으로 얼굴을 만져보려 했다. 하지만 그조차 안된다. 시간의 흐름도, 내가 어디에 있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정령이라..’

람보르의 물의 정령 따위는 많이 봤었다. 그 녀석을 보면서도 항상 신기했는데, 어둠의 정령이 이런 능력을 가졌다니 꽤 재미있지 않나?

‘이걸 흡수할 수도 있으려나?’

뭐든 좋은 건, 내 것으로 만들어 보려고 시도하는 번이다. 언젠가 기회만 되면 물의 정령에도 시도하려고 생각하고 있었고.

‘일단 해봐?’

이곳이 어떤 공간인진 모르고, 밖에서 스캇이 보고 있다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둘러댈 순 있을 거다.

‘어둠이라..’

있어서 나쁠 건 없겠지. 생각한 번이 속으로 웃었다. 뭐든 일단 먹고 보자는 동물의 근성이 발현된다. 이 또한 보통사람과 다른 점이었고, 그를 강하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누가 봤다면 아주 음흉하게 씨익 웃었다 느낄 정도로 준비를 마친 번이 정신을 집중했다.

‘우선 슬라임의 능력으로.’

번이 사물을 흡수하는 방식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 하나씩 실험을 해볼 생각이다. 어쨌든 여길 벗어나야 할 것 같았으니까. 박치기 따위로 나갈 수 있는 건 아니지 않겠는가?

스스스스스스..

사실 번은 지금 이곳을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었다. 밖엔 듬직한 스캇이 있었고, 하찮은 어둠의 정령 따위가 장난을 쳐봐야 그게 얼마나 대단하겠냐는, 딱 그 정도.

그러나.

스스스스..

「암력暗力을 흡수했습니다.」

「흡수된 암력이 저장됩니다.」

‘오..!’

된다, 기뻐할 뻔했던 번이 움찔했다.

「마魔기를 흡수했습니다.」

「사死기를 흡수했습니다.」

「탁濁기를 흡수했습니다.」

‘이건 또 뭐야..?’

각종 기운이 흘러들어왔다.

어찌된 일인가? 고작 어둠의 정령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 다양하고 막대한 ‘힘’은 뭐란 말인가? 이건 마치 여름날 홍수 같다. 번이 당황할 정도로 말이다.

「마기를 저장했습니다.」

「탁기를 저장했습니다.」

끊임없이 쭉쭉 들어왔다.

폭포수 아래 있는 기분. 부족한 부분이 채워지고 있는 듯 하다! 육체에 특정 영양소가 부족하면 나도 모르게 그것을 원하는 것처럼 말이다!

‘좋은데?’

무작정 쪽쪽 빨아먹었다.

무엇인지 알순 없지만, 기묘한 것은 이게 두렵진 않다는 거였다. 이제까지 강해지기 위해 흙도 주워 먹고, 여러 기운도 흡수하고, 마약도 먹어봤지만 지금처럼 강렬하게 밀고 들어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통제할 수 없을 정도.

그런데, 그때.

번뜩!

“······!”

저 앞에 한 쌍의 눈이 나타났다.

시뻘겋고 부리부리한 데다 좌우로 쫘악 찢어진, 사람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무언가!

“······?”

번은 그 눈을 바라보았다. 시력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 시선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말이다.

-묘한 놈이로구나.

웅웅-! 울리는 것처럼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불쾌하기 짝이 없었고, 듣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빠지는 소리. 딱히 목소리의 주인과 원한이 있지도 않지만, 너무나도 싫은. 누구라도 싫어할만한 거부감이 물씬 담겨 있었다.

‘놈인가?’

싫은 것, 무서운 것, 두려운 것, 더러운 것. 그런 것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듯한 기분. 쥐 사체에 들끓는 구더기를 빤히 보고 있는 듯한? 여하튼 유쾌한 것은 아니었다는 거다.

그래서 번은 말한다.

“여긴 어디냐?”

녀석이 알아들었는진 모르겠으나, 번은 의사 표현을 확실히 했다.

-지금 내 힘을 흡수하고 있는 것이냐?

소통이 되는 것 같다. 남의 것을 훔치다 걸린 듯 움찔했지만, 번은 기죽지 않으려고 담담함을 가장한다. 어머니가 입버릇처럼 말씀하지 않으셨나? 어깨 펴라고!

“날 가둔 건 너야. 그러니까 탈탈 털리기 싫으면 멈춰.”

-..요상하고 요상한 놈이로다.

“······.”

번의 긴장감은 고조된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번은 계속해서 여러 암흑 속성의 기운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뭐랄까, 이건 양을 조절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활짝 개방된 그의 의식 한 부분에 꾸역꾸역 밀려들었다.

‘뭔가 잘못된 건가?’

번은 직감적으로 이 무언가는 스캇이 불러낸다던 어둠의 정령이 아니란 것을 느꼈다. 그가 번을 위해 이 정도의 힘을 가진 것을 소환했을 리 없다 여겼기 때문이다. 이게 착각이 아니라면 말이다.

정보가 필요하다.

“넌 뭐지?”

이럴 땐 직설적인 것이 답.

-네가 원해 부른 존재겠지.

“내가 널 불렀다고?”

-그렇다.

“어둠의 정령인가?”

-그렇다고 볼 수도 있다.

일단은 같은 속성으로 먹고사니, 틀린 말은 아니다.

"너는 상급 정령인가?"

정령계가 있다는 것은 여러 서적을 통해 배워왔다. 정확히 기술된 것은 없었지만, 그런 세계가 따로 존재하고, 그곳에 정령들이 산다는 것을 말이다. 번의 사고는 꽤나 포괄적이다. 그는 이 시대에만 머무른게 아니라, 다른 세계의 21세기 지식과 여러 생을 살며 얻은 것들이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 그가 짧은 시간내 도출한 결론은 이놈이 뭔진 모르겠지만, 저급한 것은 아닐 것 같다는 거였다.

"..그쪽에서 힘깨나 쓰는 자인가?"

생명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나 다 똑같지 않겠나? 약한 놈이 있으면 센 놈도 있을 거고, 일하는 놈이 있으면 부리는 놈도 있을 터. 하급 물의 정령이 나사 몇 개 빠진 로봇과 비슷하다는 걸 람보르에서 질리도록 봐왔다. 그런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기운을 가득 담은 녀석. 게다가 이 녀석은 꽤 높은 지능까지 갖추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 아니다가 아닌, 그렇다고 볼 수도 있다고 돌려 말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하지만,

-······.

녀석은 대답이 없었다.

‘이놈이 특별한 목적이 있는 것 같진 않은데..’

스캇이 준비한 ‘소환’이라는 기술이 정확히 어떤 메커니즘으로 작동하는진 알 수 없다. 하지만 정령계란 곳에서 이쪽이 불러줄 때까지 대기표 뽑아들고 마냥 기다리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놈도 상황은 마찬가지가 아닐까?

‘뭐, 아니면 말고.’

일단은 여러모로 접근해보자.

“내가 불러서 왔다면.. 좋아. 본론으로 들어가지. 나는 마나를 느끼지 못해. 그래서 너를 청했다.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나?”

번이 말했지만, 다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2분 정도의 침묵이 이어졌지만, 번은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이윽고,

-착각하는 것 같구나. 나는 너의 질문에 답할 의무가 없다.

'이렇게 나오시겠다?'

번의 머릿속이 빠르게 굴러간다.

“그럼 가봐. 다른 놈 부르지.”

우선 강하게 나가자!

-······.

다시 이어진 침묵.

“내가 그리 한가한 사람이 아니거든? 볼일 없으면 가보래도?”

스캇에게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이 의식엔 어떤 조건이나 상호 간의 이익이 맞물려 있으니, 교섭이 가능한 걸 거다. 그렇다는 건 저놈도 원하는 게 있을 것이고, 서로 쥔 패는 비슷하지 않겠는가? 이런 경우, 아쉬운 놈이 먼저 패를 까는 법!

-오만한 놈이로다.

사실 악마는 매개체가 없으면 소환되지 않는다. 스캇이 전혀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정령 대신 악마가 비집고 튀어나왔다. 악마 역시 우연히 호기심에 응하긴 했으나, 어리둥절한 상태였다. 게다가 악마는 이런 부류의 인간을 처음 보았다. 공포에 절로 반응하는 것이 악마. 그런데 이놈은 인간이라면 손톱만큼이라도 가져야 할 두려움이 없었다. 인간의 나약한 정신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들쑤셔야 하는데, 틈이 없달까? 이것이 악마가 드문드문 침묵하는 이유였다. 뭔가 있는 놈 같긴 한데,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건방지기 짝이 없구나..!

악마는 오기가 생긴다. 고작 인간 따위에게 자존심을 굽히기도 싫다. 그래서 더 안쪽까지 접근해본다. 대체 이놈이 뭐기에 어둠을 흡수할 수 있는 걸까? 어떤 삶을 살았기에 겁을 먹지 않는가?

뱀 같은 혀끝을 놈의 정신에 찔러 넣어본다. 태초에 받았던 권능으로 그 안에서 엿보려 한다. 인간이라면 반드시 있을 약점. 후회, 미련, 안타까움, 지난 시간에 대한 좌절 같은 것들을..

-음?

파고들려던 그때.

쩌엉-!

뭔가가 반응했다.

그건 아주 시리도록 찬란하고, 고결하며 어둠과 상극인 기운이었다.

-크흑!

당황한 악마의 신음이 터졌다.

.

.

.

고오오오오오오..!

새벽녘 밤하늘 같은 새까만 어둠의 원통형 기둥이 하늘 끝까지 이어져 있었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삐죽 머릴 내밀고 구경하고 있었고, 그 오묘한 기운은 아주 멀리서도 선명하게 보였다.

난데없는 괴사. 소문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마왕이 강림하고 있다! 흑마법사가 악마를 불러낸 거다! 등등. 주변에 거주하는 사람 중엔 짐을 싸들고 도망치는 이도 생겨났다.

이때, 두 무리의 사람들이 현장에 도착했다.

-오오오! 사제님들이 오셨다!

-이젠 안심할 수 있겠어!

-가이아시여!

눈에 띄는 새하얀 복장의 사제들이 잔뜩 나타나자, 사람들은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상대적으로 사제들에게 밀려 관심을 받지 못한 은사와 딘딘, 그리고 이 남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변장한 황제다.

“저거 뭔데?”

황제가 말하자, 은사가 머릴 흔들었다. 그로서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물러서시오!

-여긴 우리가 해결하겠습니다!

사제들이 우렁찬 목소리로 외칠 때, 뒤쪽에서 말을 탄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수도 경비대와 신전 소속의 팔라딘 30여 명이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 기둥에서 아주 악독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이건 악마가 확실합니다!

-알겠습니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겠습니다!

기둥을 포위하듯 스캇의 저택을 빙 둘러 촘촘하게 늘어서기 시작하는 그들을 보면서 복면 사내는 팔짱을 꼈다.

“여기 일 끝나거든, 저놈 나한테 보내.”

은사가 갸웃하며 황제를 바라본다.

“누굴 말씀하시는..?”

“저놈 말이야. 저놈.”

황제의 시선 끝에 경비대장이 닿아있다.

“수도를 지키는 놈들이 팔라딘보다 굼뜨면 어쩌자는 거야? 뭐하다 이제 오는데? 심지어 우리가 더 빨랐잖아.”

뭐, 사정이 있었겠지요, 신전이 더 가깝기도 했고요. 라고 말해봐야 씨알도 안 먹힐 거다.

“그리.. 하겠습니다.”

황제는 끄덕이며 저편을 보았다. 사제들이 하늘에 양팔을 들고, 몸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대규모 주문을 펼치려는 것이다. 안에서 뭐가 툭 튀어나와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로 음침했으니까.

“스캇 녀석은 아직 저 안에 있는 건가?”

“그런 것 같습니다.”

“음..”

황제는 복면 위로 턱을 매만졌다.

"뭘 하길래, 빨리 해결을 못 해?"

그럴 녀석이 아닌데? 라는 표정이 숨겨져 있었다.

-물러서시오! 신성한 벽을 칠 것이오!

-좋지 않은 기운이 옮겨갈 수 있으니, 최대한 떨어지시오!

팔라딘들이 사람들에게 고함을 지를 때, 사제들의 영창소리가 더욱 고무되었다. 신을 향해 뭐라 뭐라 기도하는 것 같은데, 발음이 정확하지 않아 신도가 아니면 알아듣기 힘들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몰라, 일단 저쪽으로 가서 구경하자고. 위험하다지 않나.

-이렇게 많은 사제님들이 모여 있는 건 처음 보는구먼.

사람들이 눈을 끔뻑거리며 바라볼 때, 사제들은 성벽聖壁을 만들려고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고, 혼란스러운 와중에서도 수도 경비대와 팔라딘들은 최대한 주변을 통제하려고 애쓰는데..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쩌엉--!

어둠의 기둥이 터져버렸다.

순간, 사방으로 폭풍이 화악! 몰아쳤고,

-에구머니나!

-히이이익!

몸을 밀어내는 압력에 벌러덩 넘어지는 사람들 속에 황제가 팔짱 낀 자세를 유지하며 씨익 웃었다. 옷이 사정없이 펄럭였지만, 그의 몸을 흔들진 못했다.

‘역시.’

스캇이라면 뭔가 할 줄 알았다. 신전 놈들에게 힘을 빌리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제 놈이 저지른 일이니 제 놈이 수습해야 하지 않겠는가?

-아앗! 사람이다!

-저기 사람이 나와!

그러나 자욱한 먼지가 걷히고, 저택에서 뚜벅뚜벅 걸어 나오는 두 사람을 발견했을 때, 황제의 표정이 굳었다.

“······?”

번이 제 몸집보다 큰 스캇을 부축해서 밖으로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

가벼운 소름이 돋는다.

번의 표정을 보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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