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작 #
페트릭의 미간이 움푹 구겨졌다.
번의 이마에서부터 뻗어 나와 머리 전체를 감싸는 노란빛 저 아지랑이는 분명...
‘성력 아닌가?’
이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믿음을 기반으로 신의 힘을 빌려 쓰는 사람들이 있다. 그 기운을 밖에서 끌어쓰면 사제나 수도사들이고, 안에 담아 신체를 단련하고 무기에 힘을 담아 쓰면 성기사나 팔라딘이라 칭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마나가 아닌 성력을 쓴다는 것. 당연히 그런 초인적 힘을 쓰기 위해서는 엄청난 수행과 믿음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데, 번 황자에겐 그런 것이 없지 않았는가?
게다가 두 가지 기운을 모두 쓸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아니, 애초에 그게 가능하긴 한 건가? 마나와 신성력이 한 몸에 있는 것이 말이다. 모르겠다. 그는 그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대체 어찌 이런..’
찡그린 얼굴을 풀지 못하고 페트릭은 기다렸다. 번이 명상을 마치고, 다시 눈을 뜰 때까지. 그의 머릿속은 아주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
페트릭과 눈이 마주친 번.
어느새 모든 기운들은 사라지고 평범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마나는.. 느껴지십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밖에서 볼 때, 분명 황자님께서는 마나를 가두는 데 성공하셨습니다. 아직 초기이니 더 정진하다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행이군요! 그런데..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페트릭의 굳은 얼굴을 눈치챈 번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는다.
“황자님. 저번에 신전에 가셨을 때, 어떤..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번이 성녀에게 치료를 받았다는 일은 람보르에까지 소문이 났었다.
“별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요?”
갸웃하는 페트릭을 보며 번이 빠르게 말을 잇는다.
“성녀님께서 치료를 하시다가 제가 여러 신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정작 마나는 느끼지 못하는데 말입니다.”
“성녀님께서요?”
“예.”
“신의 사랑이라.. 으음..”
페트릭이 턱을 매만지는 것을 보며 번은 빙긋 웃어 보이고는 벌떡 일어났다. 곤란한 질문이 계속될 것 같아 자릴 피하려는 거다. 물론 그의 동작은 아주 자연스러워서 페트릭은 눈치채지 못한 듯하다.
“내일 뵙겠습니다. 스승님.”
페트릭도 일어서며 끄덕였다.
“조금이지만 마나를 몸에 가두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 같으니 내일부터는 검술을 연습해도 될 것 같습니다. 마냥 쌓기보단 육체수련과 병행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될 겁니다.”
“그렇습니까?”
페트릭의 표정은 아직도 풀어지지 않았지만, 번은 그의 말에 크게 반긴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드디어 검술이구나 싶은 번은 연신 머리를 숙이곤, 깍듯이 인사를 하고 환하게 웃으며 나갔다. 페트릭은 번이 나간 자리를 한참 바라보며 섰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젠 이리도 걱정되는 거다. 친손주처럼, 어린 왕을 돌보는 선생처럼 말이다.
'내가 어쩌다..'
씁쓸한 웃음을 지었지만, 그의 얼굴은 점차 환하게 바뀌었다. 그러다가, 아차! 한 얼굴로 황급히 나간다. 번의 일을 알아보려면 아무래도 여러 사람을 만나보아야 할 것 같다. 도서관에도 가봐야 하고. 혹 마나와 성력이 몸 안에서 충돌하기라도 한다면 아주 곤란하다.
생각이 많아진 페트릭. 바빠지기 시작한다. 서두르지 않으면 내일까지 명확한 답을 구하지 못할지도 모르지 않나?
그가 그렇게 바삐 움직일 때, 번의 다른 스승 하나도 부산했다.
꽤 넓은 방. 원래 용도가 무엇이었는진 모르지만, 지금은 아주 음산하고 기괴했으며 신비로운 물건들로 가득하다. 바닥엔 오망성을 토대로 한 마법진이 빼곡하게 그려져 있었고, 모서리마다 제물로 쓸 닭, 토끼, 까마귀, 염소 같은 동물들이 사지를 결박당한 채 산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물건들이 단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던 스캇. 그의 몸이 움찔하며 한곳으로 머릴 돌렸다.
“인기척 좀 하라니까..”
“제자 왔습니다.”
“그 말을 하기 전에 발걸음이라도 내라 하지 않았습니까?”
번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대체했다.
“웃긴..”
스캇은 혀를 차며 다시 하던 일에 집중했다. 벌써 1달을 만지고 있는 주문이었다. 이걸 위해 많은 돈과 시간, 노력과 정성을 쏟았지만,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기도 했다.
“오늘은 완성이 되겠습니까?”
번이 조심스럽게 묻자, 스캇은 코웃음을 쳤다. 그리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한다.
“내가 그럴 거라 했으면 그런 겁니다.”
“예.”
“그따위 의심은 다른 사람한테나 하세요. 아시겠습니까?”
최근 며칠, 스캇은 더 날카로웠다. 아마도 이 마법주문이 막바지에 도달해서 일 것이다.
“멍하니 섰지 말고, 저기 꺼진 초에 불이라도 붙이세요.”
방엔 정확히 588개의 초가 있었는데, 이걸 유지하는 것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번은 초에 불을 붙이며 묻는다.
“이제 말씀해주실 때도 됐지 않습니까?”
“······.”
“우리가 소환하려는 것이 정확히 무엇입니까?”
“그걸 꼭 알아야 합니까? 당신은 마나만 얻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스캇이 째려보았지만, 번은 기죽지 않고 어깨를 으쓱했다. 지난 1달. 이미 스캇이란 남자에게 적응을 마친 번이었다.
“마나도 중요하지만, 영혼이라도 저당 잡히고 그러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하..!”
스캇이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그 쓸모없는 영혼을 누가 탐한답니까? 거래를 해도 내가 하는 겁니다.”
스캇의 눈이 미친놈처럼 번들거리자, 번은 입을 다물었다. 이 지경이 되면 상대를 하지 않는 편이 이롭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게 침묵 속에서 10분쯤 지났을까? 바닥의 그림을 손으로 문질러 닦으며 미세한 조정을 끝낸 스캇이 허리를 폈다. 그러더니 툭 내뱉는다.
“정령입니다.”
“네?”
저쪽에서 기울어진 촛불을 보고 있던 번의 고개가 돌아갔다.
“한번 말하면 좀 들으세요. 늘 집중하라고 몇 번을 말했습니까?”
언젠 안 알려줄 것 같더니, 이런 망할.. 울컥했지만, 번은 함박 웃었다.
“주의하겠습니다. 스승님.”
“그 스승이란 소리도 빼라고요!”
“네! 스캇!”
“크흠..!”
그는 마법진 중앙으로 걸어와 똑바로 서더니, 드디어 설명을 시작했다. 마나를 느끼지 못하는 번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이게 꼭 필요하다는 말만한지, 무려 1달. 입을 다물고 한마디도 해주지 않더니, 이제야 털어놓기 시작하는 것이다.
“정령은 마나의 결정체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 속성에 따라 분류되긴 하지만, 공통으로 그것들이 사용하는 힘의 원천이 마나라는 것은 같습니다.”
번은 진지한 얼굴로 경청했다.
번은 스캇의 모든 말을 머릿속에 담으려 노력했다. 그가 얘기하는 개념은 21세기 대한민국엔 없는 것이었으며, 단순한 지식이 아닌 그의 지혜와 경험이 녹아있는 것들이기 때문이었다.
‘보면 볼수록 이상한 사람이지만..’
스캇이 굉장한 천재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지금 이 마법진만 해도 그렇다. 제사상 하나 차리는 것도 복잡한데, 600개에 달하는 촛불을 정확한 위치에 놓고, 바닥엔 정밀한 기계의 설계도만큼 복잡한 마법진을 그려 넣었다. 그것도 아무것도 보지 않고서 말이다.
“그럼 우리는 그 여러 속성의 정령 중 하나를 소환하는 것입니까? 그것과 저의 반응을 보려고요?”
번의 말에 스캇의 눈이 가늘어졌다. 역시 하나를 배우면 둘을 아는 꼬마다.
“비슷하지만 다릅니다.”
“무엇이 비슷하고, 무엇이 다릅니까?”
또박또박 물어오는 게 간혹 재수 없단 생각은 들었지만, 스캇 역시 번에게 적응했다. 반사적으로 답을 해주는 자신을 느낀다.
“우리는 어둠의 정령을 소환할 겁니다. 하지만 그 녀석을 불러 반응을 보려는 것이 아니라..”
스캇이 말을 멈추고 왼쪽으로 허리를 굽혀 한쪽으로 쏠린 촛농의 방향 때문에 쓰러지려는 초를 바로 잡는다. 조금 전까지 대화하던 것을 잊었는지, 다시 정적이 흘렀다. 답답해진 번이 크흠! 헛기침하며 묻는다.
“왜 하필 어둠의 정령입니까?”
초를 멍하니 보던 스캇이 정신이 돌아온 듯 다시 번을 돌아보았다. 일렁이는 촛불에 번진 그의 얼굴이 흡사 공포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제가 다루기 가장 편하니까요.”
“아, 예..”
그가 그런 거면 그런 거다. 왜 그러냐고 시시콜콜 캐물었다간 무슨 소릴 들을지 몰랐기에 화제를 돌린다.
“반응을 보려는 게 아니라면 무엇을..”
물으려는데, 스캇이 번에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여기 앉으세요. 허리 쭉 펴고 내가 신호할 때까지 절대 눈을 뜨면 안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네? 바로 시작하시려고요?”
“왜요? 무서워요?”
“······.”
스캇은 불친절하다. 상대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느냐 따위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준비가 끝났으니, 행동한다. 시간 낭비 따윈 없었다.
“하급 어둠의 정령이나, 어둠의 파편이 나올 겁니다. 그게 여기 마법진 안을 떠돌아도 절대 일어서거나 큰 동작으로 움직이면 안 됩니다.”
“정령은 알겠는데, 파편은 뭐죠?”
“정령이 되지 못한 의식의 덩어리라 보면 됩니다. 그리 중요한 건 아니니 신경 쓰지 마세요.”
번의 자세를 직접 고쳐 잡아준 스캇이 마법진 밖으로 나갔다.
“크크크..!”
그러더니 갑자기 기분 좋은 듯 웃기 시작했다. 요 한 달간 그가 웃는 것을 본 적이 없었기에 번은 하마터면 눈을 뜰 뻔했다.
“가만히-!”
그걸 알고 스캇이 주의를 줬다. 그러더니 양손을 번쩍 들었다.
이제 그가 할 일은 다 했다. 마지막 주문으로 하급 어둠의 정령이나 불러내면 끝이다. 나머지는 저 녀석이 해야 할 일. 운이 좋다면 정령을 느낄 수 있을 것이고, 아니라면 지독한 악몽에 허우적댈 테지. 라고 여기는 그였다. 스캇의 배려는 딱 그 정도.
하지만 갑자기,
쿠웅-!
주먹만 한 정령 한 마리 불러내려던 스캇. 그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직..”
주문을 외지도 않았는데?
마법진이 발동했다.
그것도 주변 촛불을 모두 잡아먹을 정도로 거대한 암흑이..
-끄루루루룩! 꾸루룩!
닭이 죽었다.
-꾸어어억!
염소도 죽었다. 이어 까마귀도 파르르 떨다 대가리가 처박혔고, 개구리를 넣어둔 통도 요동치다 잠잠해졌다. 그렇게 모든 제물이 목숨 바쳐 의식을 거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제물.
번이 소름 돋아난 몸으로 가늘게 떨고 있었다. 느끼는 거다. 어떤 것이 주변에 바짝 다가와 있음을. 이건 마치 쥐로 살 때 고양이가 바로 뒤에 도사리고 있었을 때, 사슴으로 살다 나무 위에 표범이 노려보고 있었을 때와 비슷한 감정.
절대 포식자.
그것이 나타난 것이다.
“이럴 수..가..”
스캇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마법진 안쪽을 바라보았다. 이런 것은 그도 처음 보았다. 마법으로 부족해서 대륙의 모든 주술까지 심취한 그였지만, 소환술을 펼쳤을 때 이토록 강렬한 존재감을 풍기는 것이 나온 경우는 없었다. 아니, 애초에 술식이 다르다. 이 정도 녀석을 불러내려면 더 많은 피와 고급 제물이 필요하지 않은가!
“물러서라-!”
스캇이 고함을 치며 허공에 두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푸른 술식이 그려지며 그만의 마법이 준비된다.
“다가오는 자! 물러서라 경고했다!”
스캇의 옷이 펄럭였다.
양손은 시리도록 한기 맺힌 푸른 기운이 가득했고, 두 눈은 부리부리하게 충혈되었다.
“..?!”
고작 하급 정령 따위를 불러내는 주문. 그걸 외기도 전에 마법진이 반응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어둠의 저편에 있던 그것이 먼저.
스윽-
한 쌍의 눈동자가 번의 양옆으로 생겨났다.
‘이 정도 힘이면..’
적어도 상급 어둠의 정령? 혹은..
‘아니야. 그건 말이 안 돼.’
다른 가능성 하나를 떠올리던 스캇이 머리를 흔들었다. 하지만 그의 불길한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이 방을 잡아먹은 어둠은 녀석의 몸이다. 거대한 그게 공간을 통째로 삼킨 거다. 눈알 두 개가 번을 똑바로 향하며 노려보기 시작하자, 번의 악물린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재미..있는..놈..이구나..”
번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아주 낯선 것이었다. 제물을 통해 말을 전하는 현상.
빙의憑依.
에비뉴 역사상 가장 위험한 거래가 시작되었다.
.
.
.
“그렇군.”
커다란 황좌에 몸을 묻고 있는 이 남자. 오늘따라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꼭 어떤 일이 있었다기보단 무료해서, 따분해서 그렇다.
“그 일이 디딤돌이 되었으면 그걸로 된 거겠지.”
간단한 보고를 마친 딘딘은 별 말없이 끄덕였다. 그는 평소 말이 별로 없다. 그래서 과묵한 딘딘이라고 불리기까지 한다.
“나를 닮았으면 재능이 어딜 가진 않았을 거야. 편협한 성격이 문제긴 한데, 대차게 깨져봤으니 주제 파악을 했겠고.”
카이사르에 대해 그리 평가한 황제는 딘딘을 보며 넌지시 물었다.
“스캇, 그놈에 대해 아는 거 있나?”
“없습니다.”
“쯔읍.. 뭘 하길래 한 달이나 소식이 없어?”
“제가 가볼까요?”
“아니야. 때가 되면 알아서 오겠지.”
이런 적이 한두 번은 아니었으니. 녀석이 몰두할 땐 개가 다릴 물어도 반응이 없다는 것을 안다.
“황비는 좀 어때?”
“특별한 일은 없습니다.”
황제가 묘하게 웃었다. 그럴 여자가 아닌데? 라는 표정이다. 아들이 그렇게 개박살이 났는데, 가만히 있다고? 그 2황비가? 그게 더 이상하다. 사람은 그리 쉽게 변하는 게 아니니까.
“잘 지켜봐.”
“예.”
평소라면 황비들 사이의 암투는 눈감아 주었겠지만, 지금은 수도의 모든 이들이 지켜보는 경연 기간이다. 괜히 몰상식한 일이 일어나서 축제의 흥을 깨버리면 곤란했다.
“은사.”
그의 부름에 스윽, 그림자가 하나 일어섰다. 나타나서는 딘딘과 가볍게 눈을 맞추고 황제의 앞에 부복했다.
“그 녀석이 뭐래?”
은사는 집정관에게 다녀오는 길이다.
“그제와 같습니다. 제국을 치려면 적어도 3년 이상이 필요하답니다.”
황제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기다리던 크리스마스 선물을 빼앗긴 아이의 얼굴이랄까?
“1년으로 줄이라는 말은 전했고?”
“하긴 했습니다만, 그리 좋은 표정은 아니었습니다.”
“쓰읍..”
집정관이 옆에 있었다면,
-전쟁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출정이십니까! 벨버른의 잔당도 다 해결하지 못하지 않으셨습니까? 지금은 내실을 다지며 힘을 키울 때입니다! 지난 전쟁에서 다친 이들이 아직 회복하지도 못했다고요!
귀가 따갑게 잔소리를 늘어놓았겠지만, 황제는 삭신이 쑤셨다. 가만히 있으니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그는 전장에서 충전하고, 따스한 이불보다 황야의 거친 바람을 덮고 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두 왕국을 동시에 친 것이 화근이었나 봅니다.”
은사가 그리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이 맞다는 것도 안다.
전쟁이란 게 수도만 턴다고 끝나는 게 아니었다. 지방엔 수많은 귀족이 있었고, 그놈들이 항복하지 않고 버티면 장기전이 되어버린다. 새로운 국가를 세울 수도 있고, 숲으로 숨어들어 반군 따위를 조직할 수도 있었다.
지금 에비뉴의 군대 절반은 그런 잔당을 처리하느라 파견되어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새로 함락한 국가의 국경을 지키고 있었다. 결국, 따로 뺄 병력도 없다는 거다. 포로들은 사상 교육을 거쳐 수도방위군으로 넘기는 작업으로도 빠듯했고.
“어쩔 수 없었잖아. 사냥감이 앞에 있는데, 활을 쏘지 않고 배겨?”
“스캇이 들었다면 ‘훗날 주린 배를 위해 남겨 두는 것도 현명한 방법이었을 겁니다.’라고 했을 겁니다.”
“너는 스캇이 아니잖아. 그만둬.”
황제가 투덜거리자, 은사가 푸근하게 웃었다.
당장 전쟁터로 가고 싶은 마음은 알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제국은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니까. 객관적인 전력으로도 두 배가 넘었다. 이쪽이 열세란 거다.
그래서 경연을 준비했다. 황자들의 성취도 볼 겸 황제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 벌써 시들해지신 건가?
“그놈은 좀 어때?”
은사를 보며 묻는 황제.
“꽤 열심히 합니다만, 가능성은 그다지 없습니다.”
그는 7황비의 차남을 맡았다. 밖에 내놓으면 영재 소린 충분히 듣겠으나, 그 정도론 에비뉴를 이끌지 못할 것이다. 고작 기사나 마법사 따위를 키우려는 게 아니지 않나? 이건 왕王을 뽑는 자리니까.
“형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던데, 그걸 잘 자극해봐. 또 알아? 없던 힘이 깨어날지.”
은사가 씁쓸하게 웃었다.
“..”
전이었다면 모를까, 지금은 눈에 차지 않았다. 이미 그놈을 봐버려서 그렇다.
그 독기!
그 투지!
참으로 아쉽다. 자신에게 왔다면 그 어떤 강자도 죽일 수 있는 힘과 기술을 주었을 텐데.
그때였다.
-보고입니다!
갑자기 대청으로 누군가 들이닥쳤다. 기사 복장이 아니다. 수도를 지키는 군인도 아니었다.
“무슨 일이지?”
은사의 휘하에 있는 은밀한 정보조직원이었다. 그는 황제의 앞에 엎드리며 외쳤다.
“정식 절차를 밟지 않은 것을 용서하십시오!”
그만큼 다급한 사안이라는 거다. 지휘계통을 완전히 무시할 만큼.
“보고하라.”
황제의 지엄한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사내가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스캇 경이 대악마를 소환했습니다!”
황제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 이런 미친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