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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좌의 게임-36화 (36/177)

# 보상 #

“정말.. 못 말리겠군요.”

졌다는 듯 쓰게 웃으며 머릴 흔드는 페트릭. 그를 보며 번은 씨익 웃었다.

망국의 왕이라지만, 그는 무사이자 전사였다. 번이 딘딘이나 은사를 고르지 않은 이유도 바로 이것이었다. 이들 사이에 강함의 차이는 있겠으나, 어차피 번이 보기엔 모두가 까마득히 높은 경지에 있었다. 일단 거기까지만 올라가는 것도 당장은 버거우니 기초부터 따라잡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페트릭 정도면 충분히 가능할거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앞으로 최선을 다하는 제자 되겠습니다. 스승님.”

이제 단추가 모두 채워졌다.

남은 것은 앞으로 1년을 알차게 보내는 것!

환하게 웃는 번을 보며 페트릭은 자기도 모르게 미소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어디 한번 꿔 보자.

그게 끔찍하고 허탈한 악몽일지, 유쾌하고 즐거운 길몽일진 모르겠지만!

늙은 그의 육신, 가슴 속 불길이 다시 치솟기 시작했다.

.

.

.

한편, 같은 시각.

다른 꿈을 꾸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생소한 장소, 어딘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풍경이 보이고 있었고, 그녀는 한 사내를 마주하고 있었다.

밀실密室.

아무리 떠올려봐도 이곳을 모른다. 실내인 것 같은데, 마녀는 바닥만 보고 있었다. 뱀 앞의 쥐새끼처럼 오들오들 떨면서.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그녀는 중얼거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맞은 편의 사내는 갑옷을 입고, 대검을 들었으며 투구를 썼다. 그런데 본래 은빛이어야 할 그것들은 온통 검붉었다. 아마 누군가의 피일 것이다. 저 색을 이루는 한 방울, 한 방울이 타인의 목숨이었다.

“융, 네년이 그 흉측한 매부리코로 숨 쉴 수 있는 마지막 날이 바로 오늘이다.”

사내의 목소리는 무척 젊었다.

하지만 애송이라고 흥! 코웃음을 치기엔 온몸이 느끼고 있었다.

공포를.

항거할 수 없는 굴복을.

볼품없이 늙은 마녀는 꿇어앉아 빌수 밖에 없었다. 손바닥이 닳아 없어질 정도로 싹싹 비비며 말이다. 얼마나 무서운지, 꿈이란 걸 알면서도 그녀는 계속 울었다.

“허나, 그 쓰레기 같은 목숨. 부지할 방법도 있긴 하지.”

“정말요? 알려주세요. 그게 뭐죠? 최선을 다할게요! 갓난아이의 심장을 원하나요? 아리따운 처녀의 자궁을 원하나요? 무엇이든 다 바치겠습니다!”

늙은 마녀는 비굴하게 빌었다.

정신없이 쏟아내는 말이 입을 통해 나오기는 한건지, 생각의 울림인지도 모른다.

철컥, 철컥. 사내가 다가온다.

그가 걸을 때마다 갑옷에서 소리가 났다. 이건 죽음을 알리는 종鐘. 사신邪神의 속삭임이었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사내가 그녀의 머리채를 확! 움켜쥐었다. 위로 훅! 들린 그녀. 그녀의 얼굴은 이미 눈물 콧물로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다.

“네가 추종하는 그 악마를 불러라.”

“······!”

늙은 마녀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 그건..”

이 자는 영웅이 아니다. 용사도 아니다. 그렇다고 마왕도 아니다. 악마의 종도 아니다. 그래, 악당惡黨이 어울렸다. 그러나 또 그렇게 치부하기에 이 자는, 너무도 압도적인 힘을 지녔다.

빌런villain이리라.

용사도 마왕도 아닌, 그 중간에 서 있는 자. 그 어떤 굴레도 없이 제멋대로 하고 싶은 대로 움직이는 자.

사내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왜? 못하겠나?”

늙은 마녀는 바들바들 떨었다.

이 남자가 왜 악마를 부르라는 건진, 이미 알고 있다. 그 목적을 알고 소환하면 어차피 자신도 감당할 수 없는 저주에 빠질 것이라는 것도. 죽어도 안식하지 못하고 악마의 손아귀에서 억겁의 고통을 받으리라.

“그럼 죽어라. 네년의 가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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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이이이익!”

융은 침대에서 튕기듯 벌떡 일어났다.

또 그 꿈이었다. 이 빌어먹을 꿈이 며칠째 반복되고 있었다.

딸꾹, 딸꾹..

얼마나 놀랐는지 거세게 뛰는 심장이 진정되질 않는다.

그녀는 아주 오래 살아왔다. 대충 200년은 가뿐히 넘었을 것이다. 그만큼 많은 경험이 있었고, 제물로 쓰는 처녀의 심장을 산채로 잡아뽑아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만큼 독한 여자였다. 70년만 살아도 웬만한 일은 허허 웃어넘기는데, 200년 세월이면 오죽할까?

그런데, 이 꿈.

이 꿈 하나로 이리도 떨고 있었다.

“왜..”

이런 일이?

융은 멍하니 앉아있다가 갑자기 허겁지겁 옷을 모조리 벗었다. 온몸에 진득한 피가 들러붙은 것 같은 기분. 그것이 피가 아닌 땀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불쾌함을 견딜 수가 없었다.

“뭔가 있어.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침을 꿀꺽 넘긴 그녀가 벽장으로 황급히 걸어갔다.

“무슨 일이 생겼어. 이대로 두면 그 일이 반드시 벌어져.”

그 생생한 공포가 각인처럼 지금도 남아있었다. 똥오줌을 지리지 않은 것만도 기적일 정도.

“그 남자..”

누굴까? 대체 언제를 엿본 걸까?

꿀꺽.

그녀는 마른 침을 삼킨다.

대악마를 모신 이후로 이따금 지금처럼 예지몽을 꿀 때가 있었지만, 이렇게 그녀의 삶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주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다시 침을 넘긴 그녀가 팔을 뻗어 벽장의 유리병 하나를 쥐었다.

“이대론 안 돼.”

그건 미래였다. 그렇다는 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는 뜻이 된다. 그놈이 태어나기 전에 어미를 죽여버릴 수도 있고, 아직 애라면 목을 비틀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뭔가 해야 했다. 알면서 당하는 건 미련한 거니까.

벌컥벌컥.

유리병의 녹색 액체를 모조리 비워버렸다. 맛은 고약했다. 당연하다. 싱싱한 처녀 100명을 희생해 만든 원념의 정수였으니, 고약할 수밖에. 그런데도 땀을 많이 흘려서 그런지 냉수를 들이켠 듯 갈증이 해소되는 시원한 기분이었다.

푸스스스스.

그녀의 몸에서 안개 같은 연기가 뿜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꼽등이처럼 굽었던 등이 펴져 간다. 쭈글쭈글하던 피부가 아이의 그것처럼 탱탱한 탄력을 되찾고, 검버섯 가득하던 낯은 매끈하게 변해갔다. 고작 그것뿐이 아니었다. 늘어졌던 가슴은 18세 소녀의 그것처럼 아름답게 변했고, 분홍빛 싱싱함이 도톰한 점을 찍었다. 푸석하던 머릿결은 암사자의 부드러운 털처럼 다시 자랐다.

“어디지?”

어느새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긴 흑발을 가진 미녀가 융을 대신해 있었다. 이제 처녀 100명의 젊음을 1,000일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마법이 풀리기 전에 놈을 찾아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걸 다시 만들어야 할 테니까.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노파의 모습으로 다니기엔 불편한 것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기본적으로 체력부터 말이다.

“어딜까.”

융이 벽장을 밀었다. 그러자 그 뒤로 작은 공간이 나타났다. 그곳엔 한 벌의 옷과 지팡이, 가방이 준비되어 있었다. 언제든 갖춰 입고 떠날 수 있게 미리 마련해둔 것들이었다. 언제 성기사나 현상금 사냥꾼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마녀의 삶이 늘 그렇듯.

서둘러 옷을 입고 모자까지 쓰니, 영락없는 마법사의 복장이었다.

“어디로 가야 할까..?”

무작정 길을 나서는 것은 성미에 맞지 않았지만, 불안에 떨며 여기 있다간 미쳐버릴 것 같았다. 정보가 필요하다. 그 투구와 갑옷. 흔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한 여자가 길을 나섰다.

그녀는 일단 가장 가까운 대도시로 간다. 정보를 수집하기엔 오가는 사람이 많을수록 좋았으니까. 마침 그곳에 아는 사람도 있고.

철鐵의 나라. 에비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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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은 지난 한 달간 아주 열심히 살았다. 노력이라는 것이 지극히 주관적인 척도겠지만, 번을 지켜보았다면 백이면 백 모두가 혀를 내둘렀을 것이다.

"벌써 나가는 거니? 아직 해도 뜨지 않았는데. 아침은 먹었고?"

이른 새벽부터 부산한 번의 소리에 깬 어머니도 졸음을 참고 억지로 일어나 번을 배웅했다. 아들이 그토록 처절하게 고생해서 따낸 일이니, 잡지도 말리지도 못했다. 그저 응원만 보낼뿐이지만, 가슴이 미어진다. 그것이 어미 아니던가.

"형님, 오늘도 몸 건강히 다녀오세요!"

그 뒤를 따라 헐레벌떡 나온 샨. 눈곱 달라붙은 눈을 비비적거리면서도 두 손 모아 꾸벅 인사한다.

샨은 형이 이토록 자랑스럽다. 꼬마 주제에 형 닮겠다며 제법 어른 흉내를 내는 것을 보면.

“어머니 말씀 잘 들어야 한다.”

피식, 웃어주며 녀석의 머리를 헝클었다. 그런 녀석의 큰 눈이 그렁그렁 강아지 같다.

어머니와 샨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면 동이 틀 무렵 람보르에 도착한다.

"허허..! 황자님은 정말.."

제일 먼저 반기는 요만. 그도 이제 머리만 흔들 뿐이었다. 하루 이틀 그러다 말겠거니 했는데, 한 달간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이슬을 밟는 번의 모습에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는 말했었다. 만약 번 황자님께서 후계자가 되지 못하시더라도 어느 자리에서나 빛을 볼 수 있으실 거라고. 그만큼 번의 부지런함은 이미 람보르에 소문이 좌악 퍼져있었다.

2층으로 올라간 번. 벌컥, 문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스승님!”

노인은 본래 별로 잠이 없었다. 요즘엔 더해 4시간 이상을 못 잤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이 이리도 즐거운지 그조차 예상하지 못했기에 새 인생을 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오늘은 어떤 것을 가르칠까? 무엇이 적당할까?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앉으십시오.”

무릇 육체를 수련하는 이는 하루가 시작하기 전인 이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하다. 밤새 달빛 받아 대지에 축적된 음기陰氣를 흡수하기도 좋고, 반대로 온종일 대기에 쌓인 탁기가 모두 가라앉아 깨끗한 상태의 공기를 마실 수 있기도 했다. 사내에겐 양기陽氣는 충분하니, 음양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라도 균형을 적절하게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이해하셨습니까?”

마주 앉은 노소老少는 아주 진지한 얼굴이었다.

“음기를 다른 방식으로 보충하는 것도 도움이 됩니까?”

“남도의 어느 주술사 집단에선 여인의 정기를 강제로 흡수하여 사내에게 필요한 음기를 취한다고 하고, 마녀들 또한 비슷한 방식으로 강해진다 하였습니다. 허나 그런 사이한 기술엔 한계가 있는 법입니다. 모래성도 허술하게 지으면 금세 무너지지 않습니까? 하지만 꾹꾹 눌러 기반을 확실히 다진다면 비바람에도 견딜 것입니다.”

이것은 번 또한 인정하는 바이다. 덧셈 뺄셈을 거치지 않고, 방정식이 되겠는가? 그러나 그건 지극히 일반적인 범주에서나 하는 얘기다. 번은 이미 각종 기운을 몸속에 품었지 않은가? 그것들을 사이하다 치부하기보다는 어떻게든 이용하여야 한다.

“황자님처럼 마나를 다루지 못하는 사람은 더욱 더 호흡법에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인간의 육체로 강해질 수 있는 것은 아주 뚜렷한 한계가 있다. 몸이 튼튼해 봐야 검에 베이고 찔리는 것은 똑같고, 힘이 장사라도 돌을 부수긴 힘들 것이다. 그러나 마나를 다루기 시작하면 얘기는 달라진다. 피부 겉에 얇게 둘러 보호막을 형성할 수도 있고, 돌이 아닌 산을 벨 수도 있다.

“그 문제는 조만간 해결될 겁니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지만, 세상일이란 건, 마음먹은 대로만 흘러가진 않습니다. 제가 여기 이러고 살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

씁쓸한 그의 표정을 읽으며 번은 군말 없이 끄덕였다. 더 말해 뭐하나. 결과로 보여주면 되는 것을.

간혹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있는데, 어떤 목표를 잡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매진할 때 주변에 떠벌리면 더 효과가 있는 줄 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다. ‘나 금연 할 거야!’, ‘내일부터 술을 마시지 않겠어!’ 호언장담하는 사람치고 성공하는 사람을 본 적 있던가? 게다가 왜 내일부터인가. 하려면 지금 당장! 이 되어야 하는 것을.

진정한 목표를 이루려면 말을 아껴야 한다. 그런 말을 할 시간에 꿈을 위해 한 걸음이라도 더 걸어야 한다. 침묵은 성공을 위한 달란트이자, 나를 뛰게 하는 원동력이다. 그걸 입 밖으로 뱉는 순간 왠지 모르게 꿈을 이룬 것 같은 기분이 들고, 노력은 게을러진다.

조곤조곤 말하는 페트릭을 보며 번이 크게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역시 남달라.’

번을 보며 미소 짓는 페트릭. 변명이나 칭얼대지 않는 번이 너무도 기특하다. 아니, 이 성격이 꼭 마음에 든달까? 나이를 떠나서 하루하루 시간이 지날수록 번이란 인간에게 점차 빠져드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준비되셨습니까?”

매일 아침 번이 오면 페트릭은 이렇게 10여 분 정도 가르침을 주며 명상을 준비할 시간을 가졌다. 사실 언제든 무아지경에 빠질 능력이 있는 번이었지만, 이 시간이 너무도 좋았다. 왕국 최고의 무장이자, 군주의 경험이 있는 자의 이야기를 어디 가서 듣겠는가? 그의 모든 말이 보물이고, 단어 하나하나가 몸에 좋은 약이될 것이라 믿었다. 간혹 입에 쓰다 해도 반드시 삼켜야 할 보약.

“예.”

“좋습니다. 지금처럼만 계속 노력한다면 반드시 결실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번이 정좌한 채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눈을 감았다.

번의 지금 수행법은 일반적으로 마나를 수행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벨버른 왕국에만 내려오는, 그것도 일부의 기사들만 쓰는 수련법을 번이 배우고 있던 것이다.

사실 이 방식은 아주 비효율적이고, 성취가 느린 방법이다. 지천에 널려있는 마나를 원하는 때 필요한 만큼 갖다 쓰면 되는 것을 굳이 몸속에 가둘 이윤 없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페트릭은 번에겐 이게 필요하다 판단했다.

“흐으으으읍.. 후우.. 흐으으으읍. 후우우우우.”

번이 몰입하자, 페트릭은 눈을 가늘게 뜨고 번의 상태를 살폈다. 이것은 가수면 상태와 비슷하다. 사람이 자고 싶다고 한순간에 자기가 쉽지 않듯 이 상태로 돌입하는 것도 정신적, 육체적으로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그런데 번은 고작 1달 만에 그걸 해냈다.

“흐으으읍.. 후우.. 흐으으읍. 후우우..”

번의 숨소리는 이제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고 느려졌다. 깨어있으되, 깨어있지 않은 형태로 주변을 관조하며 내 몸을 자연에 거부감 없도록 놓아버린다. 이리되면 마나는 인간의 육신을 저항 없이 넘나들며 살랑인다. 이때 들어온 마나를 가두는 것이 이 호흡법의 요체.

‘놀랍구나. 게르간도 2년이 걸렸거늘.’

벨버른의 기사단장 게르간.

그 지위가 말해주듯 왕국 제일 기사였던 그도 이 호흡법을 완전히 숙지해 마나를 강제로 가두는 것엔 부단한 노력이 필요했었다.

그런데..

“······!”

지금 번을 보라. 놀랍지 아니한가?

분명 번의 주변을 노닐던 것들이 실종되었다. 유사流砂에 빠진 것처럼 들어가면 나오지 못하고 있는 거다. 비록 이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양이 얼마 되지 않을지라도 이제 고작 아홉 살 아닌가?

‘내일쯤 본격적인 수련을 할 수 있겠어.’

한 걸음 한 걸음이 중요하다. 그것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잡는 것과 같으니까.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줄줄이 틀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혹시 모를 불상사를 방지하고자 번의 표정이나 몸의 변화를 유심히 살피던 페트릭. 어느 순간, 그의 눈이 한껏 떠졌다.

‘아니?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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