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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좌의 게임-34화 (34/177)

# 사랑과 저주 #

“효율이라.. 틀린 말은 아니지. 어쨌든 네가 이겼으니까.”

아무도 예상 못 했던 결과였다.

누군가 계란으로 바위를 깬다고 하면, 그것이 더 믿음이 갈 정도로 이번 대결은 불 보듯 뻔했다. 한데, 그게 뒤집혔다. 운도, 컨디션도, 배후도 없이 오로지 순수한 한 사람의 힘으로 말이다.

“패배자가 하는 말은 변명일 뿐이지. 모든 것은 승자의 입맛대로 쓰이는 것이다. 역사 또한 그러하고. 너는 지난 경연에서 짧지만 네 역사를 만들었다. 이건 칭찬받아 마땅하다.”

“감사합니다.”

황제는 아까보단 기분이 나아졌는지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물었다.

“그래, 세 번째 경연에 대해선 들었느냐?”

“예.”

마지막 경연은 학습學習이었다.

지난 경연에서 14황비의 아들이 대련 시작부터 완전히 얼어, 아무 짓도 못하고 떨어졌다. 번의 대결 직후였기에 더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놈, 운이 좋군.’

원래라면 카이사르가 떨어졌어야 마땅할 터인데, 등신 덕분에 구사일생했다.

본래 무대체질이 아닌 사람들도 있다. 싸움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그 또한 상대의 기에 완전히 눌려 움츠러 있었는데, 그건 그가 아무리 좋은 사람이고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 해도 군주의 재목은 아니라는 증거였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것이 모두에게 보일 정도였으니까. 기권하기 직전에 오줌까지 지렸다는 소문이 도는데, 더 말해 무얼 할까.

무튼, 그가 탈락하고, 이제 여섯이 남았다. 그리고 이번 경연으로 셋이 남아 최종 승부를 가리게 될 것이다.

“지난 경연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네게 한가지 포상을 내리려 한다.”

번의 눈이 반짝였다. 포상?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일단 넙죽 엎드렸다.

뭘 받든 그것은 반드시 도움이 될 것일 테니까.

“마지막 경연은 선택과 집중을 보는 무대다. 자신을 정확히 알고 내가 잘하는 것, 부족한 것에 대해 판단하며 그 부분을 아랫사람의 능력으로 채우는 것이 군주다.”

“옳은 말씀이옵니다.”

“앞으로 1년. 그 기간 안에 너희 모두는 배울 것이다. 그러나 한번 정한 선택을 되돌릴 순 없다. 목숨이 오가는 전선에서 판단을 물릴 순 없는 것이니까. 그런 상황이 오면 무조건 밀어붙여 승리를 따내야 하는 때도 있다. 이번 경연은 그런 것을 종합평가하는 자리일 것이다. 이해했느냐?”

“폐하의 큰 뜻을 어찌 감당하겠나이까.”

“웃기는 소리.”

황제가 끌끌 웃었다.

다른 놈이면 모르겠는데, 이 약삭빠른 놈이 빈말을 하니 기분이 묘하다.

“겸양은 필요 없다.”

“명심하겠습니다.”

“나는 내 뒤를 이을 사람을 원한다. 고작 핏줄이 이어졌다고 해서 아무에게나 자릴 넘겨줄 생각 따윈 없다.”

“당연하신 말씀이십니다.”

“이게 내 판단이고, 나는 내 선택에 후회를 남기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제까지 그리 살아왔다. 그래서 옳다 믿는다. 이 나라가 그걸 증명하고 있으니까.”

대단한 자신감!

정말 이 남자는 황제가 되기 위한 모든 조건을 갖췄다.

“······.”

황제의 말을 들으며 번은 군침을 넘겼다.

언젠간 저리되리라.

저 황좌에 앉아, 만인을 굽어보리라!

물론 그것도 이번 경연에서 이겨야 가능한 것이겠지만. 어쨌든 흐름은 좋다. 세 번째 경연. 그간 번이 그토록 원하고 원하던 기회가 온 것이다.

“스승은 누구라도 될 수 있으며, 지목된 스승은 정확히 1년 동안 모든 업무를 내려놓고, 황자가 원하는 모든 가르침을 내릴 것이다.”

스승! 배움!

비록 1년이라는 길지도, 짧지도 않은 애매한 기간이었지만, 그 어떤 보물보다 값진 시간이 될 터였다. 그래서 차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집정관까지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이건 엄청난 발언이었다.

수도를 넘어 황국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집정관조차 스승으로 삼는다? 그만큼 이번 경연의 후계양성이 큰 비중을 가졌다는 뜻이었다.

“단, 한 스승은 한 황자만 거둘 수 있다. 이건 스승 역시 최선을 다하겠다는 의미다.”

제자가 많으면 뒷배가 작용할 수도 있고, 손가락이 많으면 안 아픈 놈이 있기도 하다. 자식도 여럿이면 미운 놈, 고운 놈이 구분되지 않나?

‘꼭 황자만 평가하는 건 아니란 말이군.’

하지만 번은 한술 더 떠, 그 이면까지 보았다.

‘선택과 집중’은 황자를 가르치는 스승에게도 포함된다는 얘기였다.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 여기 이 앞에 있지 않나? 가장 강력한 포식자이자, 권력을 지닌 사람이.

“너에게 우선권을 주겠다. 지목하라. 그러면 그가 너의 스승이 되어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전수할 것이다.”

엄청난 특혜가 내려졌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다. 꼭 당장 큰 성장을 이루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연緣을 만들어놓으면 훗날 이로운 관계가 있을 것이다.

집정관과 1년을 동고동락한다? 그게 가능하다면 추후에 이 시간은 정치적으로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아니면 창의 귀신이라 불리는 딘딘에게 수학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제까지 알려진 바론, 그의 창술은 그 누구에게도 전파되지 않았으니까. 아주 유니크할 것이다.

하지만 경우의 수가 너무도 많았다. 누구라도 선택은 쉽지 않을 것이다.

“실례가 안 된다면 질문을 해도 괜찮겠습니까?”

“좋다.”

번은 더 확인해야 했다.

“제자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된다 하였는데, 가르침의 방식도 그러합니까? 합숙을 원할 수도 있고, 교육 장소나 시간 같은 것의 조율도..”

“그건 최대한 황자에게 배려할 것이다.”

“분야가 달라도 평가엔 공정하게 작용하는 것입니까?”

“그렇다. 학문, 정치, 인력관리, 검술, 하다못해 이름난 장인에게 전문기술을 배운다 하여도 상관없다.”

좋다. 이건 아주 좋다.

번은 주변을 스윽 둘러보았다. 아버지와 둘만 있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많은 호위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그 중엔 밖으로 정보를 흘리는 이도 반드시 존재할 것이고.

‘전쟁이 시작되겠구나.’

번은 결심한 듯 큰 동작으로 엎드렸다.

“한 분을 모셔야 한다면 저는.”

갑자기 엎드린 번을 갸웃하며 본 황제는 곧 들려온 말에 크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폐하를 스승님으로 청하겠습니다.”

“뭐..? 뭣? 크하하하하!”

이런 당돌한 놈을 봤나?

쿡쿡쿡..! 몸을 들썩이며 웃는 황제는 얼마나 황당했으면 자세까지 무너졌다.

그러다가..

“불가하다.”

황제가 웃으며 거부했다.

에비뉴의 누구라도 스승이 될 수 있지만, 황제는 예외였다.

“덕분에 다른 녀석들에게 말할 땐, 나를 포함 시키지 말라고 미리 언질 줄 수 있겠구나. 크크큭..”

황제는 후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이니 당연히 스승으로 모실 수 없다. 뭐, 번도 예상은 했기에 큰 실망은 하지 않았다. 그냥 한번 떠본 거다. 되면 좋고 아니면 눈도장 한 번 더 받고.

“시간이 필요하느냐?”

한차례 웃어 재껴서 그런지 황제의 목소리가 한결 더 부드러워졌다.

“아닙니다.”

이미 아까 스승이란 단어를 들었을 때부터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렸다.

답은 나왔지 않나?

“스캇 경으로 하겠습니다.”

“뭐..?”

번의 말에 황제의 눈이 커졌다.

예상 못 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번 경연 때 보지 않았는가? 다른 형제들에 비해 한참 떨어지는 무력을. 기지로 이겨내긴 했으나, 두 번은 없을 것이다. 과거 딘딘을 청했던 전례도 있었기에 황제는 번이 은사나 딘딘을 고를 것으로 생각했었다.

게다가,

‘그놈은..’

좀 문제가 된다.

아무리 자식을 강하게 키운다고 선언했다지만, 스캇이란 놈은 괴물이었다. 사람 새끼를 괴물과 함께 둘 순 없지 않나?

“이유를 물어도 되겠느냐?”

번은 흔쾌히 끄덕였다.

“저는 마나를 느끼지 못합니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었지만, 그럴듯하게 위장해야 했다.

“음..”

번이 그렇다는 건 워낙 유명한 얘기라 황제도 알고 있었다.

“철鐵의 군대 지장智將이자, 견문이 넓은 스캇 경이라면 제 문제를 충분히 해결해 줄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마나 때문이라면 좀 더 좋은 스승이 있을 것이다. 마탑의 탑주들도 있고.”

물론 전문적으로 배우고자 한다면 그편이 나을 수 있었다. 하지만 번은 알고 있다.

스캇 조지아 킹.

에비뉴가 황국으로 거듭나게 한 개국공신이자, 황제의 측근 중 가장 신비로운 인물.

“잘못된 선택은 시간을 낭비할 수도 있다.”

“저는 그리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번 경연의 룰은 한번 정한 선택을 되돌릴 순 없다는 것이다. 목숨이 오가는 전선에서 판단을 물릴 순 없는 것이니까.”

“그런 상황이 오면 무조건 밀어붙여 승리를 따내야 하는 때도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지금이 그때라고 생각합니다.”

조금 전 황제가 했던 말을 그대로 인용하는 번. 한 대 맞은 표정으로 황제는 또 웃는다. 오늘 하루 동안 쓸 웃음을 여기서 다 쓴 것 같다.

“좋다! 내가 그와 상의해보겠다. 네가 원한다면 그리하거라. 단! 선택에 대한 후회는 절대 없어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번의 행보는 또 한 번 황제의 호기심을 돋웠다.

“후회는 없을 것입니다.”

“나가보거라. 일이 진척되면 따로 기별이 갈 것이다.”

“예. 아버님. 다시 뵐 그 날까지 옥체보존하소서.”

오늘 처음으로 아버지라 부르는 번이었다. 물론 그 단어 하나까지도 계산된 느낌이 강했으나 황제는 그 모습을 고깝게 보지 않았다.

“똘똘한 놈이야..”

번이 나가자, 혼자 중얼걸리듯 말하는 황제.

“그렇지 않나?”

허공을 향해 툭 말을 던진다.

그러자 황제의 뒤편에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내며 입을 가리고 큭큭 웃고 있었다.

스캇이었다.

“너무 똘똘해서 오히려 위험이 느껴질 정돕니다. 마치 불길에 뛰어드는 나방 같달까요? 그게 장점이 될 수도 있지만, 분수를 모르면 날개가 타버려 병신이 되거나 숯덩이가 되어 죽는 겁니다.”

“너도 그래.”

“제가요..?”

“몰랐냐?”

스캇은 상처받은 표정으로 황제를 노려보다가 빙긋 웃었다.

“왜 말리지 않으셨습니까?”

“말렸잖아?”

“언제요?”

“아까 시간 낭비일 수도 있다고 했어.”

“그게.. 최선이십니까?”

황제는 스캇과 이런 만담을 나누는 걸 즐긴다. 모두가 격식을 차리지만, 이놈은 그렇지 않아 좋다.

“그럼 뭐가 더 필요해? 황제씩이나 돼서 그놈 바짓가랑이라도 잡을까? 아님, 니가 잡을래?”

“쩝..”

이미 내린 결정. 뒤엎을 순 없다는 것은 스캇도 이미 알고 있었다. 선택과 집중이란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 바로 이 분이시니까.

“잘 해봐. 성질 좀 죽이고. 그래도 딘딘이나 은사에겐 안 갔잖아. 은근히 좋지?”

“제가 왜 좋아해야 합니까?”

“아니야? 너 은근 바라는 눈치였잖아?”

“아닌데요.”

“진짜? 아니야?”

“······.”

스캇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사실 번이 탐나긴 했다. 그러나 녀석을 가르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오래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지켜보자고. 녀석이 선택한 길이니. 고작 아홉 살이다.”

“아홉 살이라 문제라곤 생각 안 하십니까?”

“보통내기는 아니니까.”

“하아..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그보다 신전 쪽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이번 경연 때 황자들을 치료해준 명목으로 슬쩍 한 다리 걸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번 황자 같은 경우 성녀가 직접 손까지 썼으니까요.”

“틈만 나면 비집고 들어오려고 수작질이군.”

황국을 세울 때, 황제는 측근을 모아 선언했었다. 내가 살아 있는 한 에비뉴에서 광신狂信은 볼 수 없을 것이라고. 그때부터 자연스럽게 신전은 멀어지고, 대장간이 가까워졌다.

황제는 백성들이 기도할 시간에 일을 하길 원했고, 헛된 믿음 대신 현실을 직시하길 바랬다. 그리고 그 바람은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당연하다는 듯 황제의 뜻대로 이룩되었고.

“좋은 기회니까요.”

철鐵의 군대가 괜히 나온 이름이겠는가? 가끔 필요할 때 정치적으로 써먹거나 병사의 사기를 증진하기 위해 갖다 쓰는 것 외엔 황제가 신의 이름을 빌리는 경우는 드물다.

“신전에 연락해. 닥치고 있으라고.”

“그들이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황제는 피식거렸다.

그가 뒤에 할 말은 이미 스캇도 짐작했다.

“그럼 부숴버려.”

황제는 사납다.

“예이-! 그렇게 합죠. 크크크!”

그리고 이 남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

.

.

세 번째 경연에 대한 소문이 퍼지고, 번이 스캇을 지목했다는 것이 알려졌다. 아들이 고자가 될 뻔한 일로 복수심에 불타던 2황비는 앞으로 1년은 수작을 부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화를 참지 못해 끙끙 앓아 누웠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이번 경연 시스템이 번을 지켜주는 꼴이 된 셈이었다.

황자들은 스승을 점지하기 시작했다.

우선 카이사르는 딘딘을 청했다. 좀 더 강한 정신력과 다시는 이번 경연과 같은 실수를 하지 않겠다는 의지와 함께 오래전 번이 딘딘에게 가르침을 받고 싶어 했다는 일까지 겹쳐 한 선택이었다. 7황비의 장자는 집정관을 택했고, 차남은 은사를 골랐다. 아무래도 황제의 측근에게 접근하려는 시도는 당연한 것이었다. 마탑주를 지목하거나 수도방위사령관을 청하는 이도 있었다.

“흐음..”

번은 자신만의 비밀 지하실에 있었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벽엔 황국의 중요 인물이 빼곡하게 기술되어 있었다. 딘딘, 은사, 집정관, 주요 황비들부터 람보르의 핵심인사까지. 이번에 여기에 한 사람이 추가되었다.

성녀.

“아쉽긴 하지만..”

이번에 그녀를 스승으로 청할 수도 있었다. 아버지라면 고리타분한 신전의 법칙 따위는 깨부술 수 있을 테니까. 이제까지 만난 사람 중에 유일하게 ‘마나’에 대한 단서를 가지고 있었던 여자. 하지만 그녀를 청하지 않은 이유 또한 그것이었다. 왠지 모르게 속을 들여 보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으니까 말이다.

“언젠가 기회가 있겠지.”

후계자만 되면 성녀는 얼마든지 접견할 수 있으리라. 그녀가 당장 수작을 부릴 것 같진 않으니 지금은 급한 일부터 해결해야 했다.

「스캇 조지아 킹.」

그의 이름 아래 써둔 글귀를 찬찬히 훑었다.

아버지와 측근은 유명하다. 그들이 언제부터 어떤 방식으로 황국을 이루고 전투를 벌였는지 도서관엔 많은 자료가 있었다. 물론 은사에 관해선 모호한 부분이 많긴 했지만, 스캇은 마음만 먹으면 발자취를 훑을 수 있었다.

“마법의 귀재.”

지금은 철의 군대를 이끄는 대장군 중 한 사람으로 알려졌지만, 스캇이란 이름이 처음 빛을 보기 시작한 것은 그가 일곱 살 때였다.

“하이보드 마탑 최연소 입학생.”

실제로 철의 군대 마법병단을 이끄는 사람도 스캇이다.

“대현자 오그마리온의 마지막 제자라..”

중얼거리던 번의 입가가 묘하게 뒤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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