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피지기 #
“황자님께서 아주 재미있는 말씀을 하시는군요.”
스캇의 음흉가득 속삭이는 말에 황제가 뒤를 살짝 돌아보았다.
“들어본 적 있는 이야긴가?”
“처음 듣습니다. 지어낸 얘길 수도 있겠죠.”
“흐음, 그럼 너는 저 녀석의 말이 누굴 향한 것 같으냐?”
장수가 죽으며 남겼다는 말은 아주 깊은 울림이 있었다. 그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도 알 것 같다.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 했다면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고, 아군에게 사실을 알리지 말라 했다면 그 전투의 사기를 위해 그랬을 것입니다. 어느 쪽이든 현명한 선택이라 생각합니다.”
“나 들으라고 한 것 같지?”
“또 누가 있겠습니까? 쿡쿡..”
스캇의 말에 황제가 끄덕였다.
그는 많은 죽음을 보아왔다. 그래서 알고 있다. 사람이 죽을 땐 한정된 시간 안에 할 수 있는 마지막 말을 하게 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건 대부분 풀지 못한 원한이나 남겨진 가족에 대한 걱정, 혹은 애틋한 사랑이 주를 이룬다. 그것도 아니라면 삶에 대한 미련이 그 자릴 대체하기도 하는데, 이 장수의 경우 오직 나라와 부하들의 걱정뿐이었다는 이야기 아니었겠는가?
“흠.”
황제는 다시 얼굴을 돌려 어린 아들을 보았다. 그러면서 묻는다.
“그 장수의 이름이 무엇이냐?”
번은 담담하게 답했다.
-워낙 낡은 고서古書에서 본 것이라 출처는 명확하지 않으나, 충무공忠武公이라 불렸다고 합니다.
“충무공이라..”
무력으로 충성을 다한다는 뜻인가?
황제는 크게 끄덕였다. 단순히 누군가 만들어낸 허구인지 고대 왕국의 역사인지는 모르겠지만, 과연 그런 시호를 받을만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녀석이 이런 말을 꺼낸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지난 경연 때부터 보여주고 있는 일관된 행동이나 말투를 보자면.
“너는 그러한 지휘관이 될 수 있겠느냐?”
-두 배로 부족하다면 세 배를, 세 배로 부족하다면 다섯 배를 할 것이옵니다!
황제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렸다. 저 녀석, 몇 년 전 독대에서 그가 한 말을 인용하고 있지 않나? 이 자리 누구도 모르는 그 대화를 말이다.
‘영리한 놈이야.’
뭐, 그게 싫다는 의미는 아니고.
“좋다! 내가 너희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이미 모두 다 나왔다. 이제 너희는 행동으로 증명하라! 이 자리의 모든 이들에게 보이라!”
황제의 명이 떨어지자, 집정관은 가벼이 허리를 숙여 보이고, 황자들을 향해 돌아섰다.
“경연을 시작하겠습니다!”
두웅-!
다시 북이 울리고,
-우와아아아아아!
-번! 번! 번! 번!
-카이사르! 카이사르!
군중이 열광했다. 그리고 아까보다 더 많은 이들이 번의 이름을 외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카이사르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대련 방식은 간단합니다. 여기 이름이 적힌 패가 있습니다.”
집정관은 점占통 같은 것을 들었다. 그 안에 얇은 막대가 7개 들어 있었는데, 아마도 거기에 황자들의 이름이 쓰여 있을 것이다. 이런 걸 한국에선 제비뽑기라 했다.
“자신의 이름을 뽑으면 부전승입니다. 모든 황자들은 단 한 번만 대련하게 되며 기량을 보일 수 있는 기회 또한 그 한번이 전부이니 최선을 다해주시길 바랍니다.”
방식은 간단했다. 상체와 낭심을 보호할 수 있는 방탄조끼 같은 경량 갑옷과 장갑이 전부. 무기도 없고, 격식도 없었다. 황자들이 긴장된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니, 어느새 무인들이 몇 가지 장비를 근처에 늘어놓고 있었다.
“준비를 마쳤다면 가장 어린 번 황자님부터 뽑아보실까요?”
집정관은 웃으며 통을 내민다.
번은 끄덕이며 손을 뻗었다.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이 경기, 이기고 지는 것이 다가 아니다. 어느 황자와 싸우게 될진 모르겠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닐 터.
‘운도 실력이라 이건가?’
달그락, 집정관이 통을 흔들고, 번의 손이 막대 하나를 뽑았다. 이왕이면 부전승이 가장 좋을 것이다. 다른 이의 경기를 보며 긴장을 풀 수도 있을 테고, 작전을 세울 시간도 주어질 것이니까. 하지만 일은 번의 기대완 전혀 다르게 흘러간다.
“오!”
집정관이 탄성을 지르며 크게 외쳤다.
“첫 경연으로 번 황자 대 카이사르 황자의 대련이 시작되겠습니다!”
-우와아아아아아!
관중의 우레와 같은 함성이 울렸다.
“······!”
가장 주목받는 두 사람의 싸움이 시작부터 벌어진 것이다.
‘제길.’
모두가 좋아하는데, 번은 속으로 욕을 했다. 하필 걸려도 이놈이 걸린단 말이냐. 객관적으로 알려진 바에 따르면 황자들 가운데 무력이 가장 뛰어난 자가 카이사르다.
“흐흐흐..”
저쪽에서 카이사르가 실실 웃기 시작했다. 번을 노려보는 얼굴이 십 년 묵은 체증이 훅 내려간 표정이었다.
“다른 황자님들께선 두 사람의 대련을 잘 봐두시고, 배울 점이 있다면 모두 학습하시길 바랍니다.”
시선이 느껴진다. 저 위에서 아버지 또한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음이.. 그 아래 어머니의 걱정스러운 얼굴도 보였다.
“대련에 임할 두 황자님은 앞으로!”
집정관이 심판을 보는 듯하다. 그리고 이때 희끗희끗한 그림자 하나가 집정관 옆에 느닷없이 나타났다.
‘은사.’
번은 그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집정관은 은사에게 가볍게 끄덕여 보이곤 말했다.
“혹시 모를 불상사를 방지하고자 대련엔 언제든 제삼자가 개입할 수 있음을 미리 공지합니다.”
제삼자란 은사를 뜻하는 것일 게다. 그가 심판인 동시에 큰 부상을 미연에 방지하는 수호자란 것.
‘그렇다면..’
번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
‘이거 꽤 할만하지 않나?’
이런 방지책까지 마련해준다면 이쪽에선 환영할만한 일이다. 어쨌든 죽진 않을 거란 뜻이니까.
번이 속으로 그리 생각할 때, 카이사르가 집정관에게 물었다.
“힘은 어느 정도나 씁니까?”
그가 그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이 시합. 누가 봐도 승부는 뻔했다. 보라, 마주 본 두 사람을. 카이사르는 이제 성인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다 자란 청년의 체형이었다. 그러나 번은 9살 꼬마. 이게 신성한 경연장이 아니었다면 애 괴롭히지 말라며 손가락질받아도 할 말 없는 상황아닌가?
“주어진 장비 내의 모든 것은 자율입니다.”
집정관인 은사를 힐끔 보았다. 그러자 은사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끄덕였다. 저 행동의 뜻은 늬들이 무슨 짓을 해도 내가 감당할 수 있다. 어디 마음껏 날뛰어봐라. 그래 봐야 내 손바닥 안일 테니,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급소를 공격해도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그 또한 자율적 판단에 맡깁니다.”
“쓰러진 사람을 공격하는 것도요?”
집정관은 대답 없이 빙긋 웃으며 끄덕일 뿐이었다. 더는 질문하지 말라는 분위기를 보이면서.
“······.”
카이사르는 이 정도면 만족했다는 듯 번을 보았다.
‘너는 오늘 죽었다.’
보는 눈도 많고, 은사가 있으니 실제로 죽이진 못하겠지만, 그와 비슷한 상태로 만들 순 있을 것이다. 사람이 무서운 점이 무엇인 줄 아는가? 몸이 멀쩡해도 정신이 나가면 폐인 되는 건 순식간이라는 것이다.
‘이 많은 사람 앞에서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해주지.’
수치와 공포.
두 가지를 적절히 사용해 평생 잊을 수 없는 악몽 같은 시간을 만들어주리라.
“흐흐흐..”
전부터 눈엣가시 같았던 놈. 별것도 없는 주제에 계속해서 주목을 받았던 재수 없는 자식. 하지만 그것도 오늘로 끝이었다.
“카이사르 황자님, 준비되셨습니까?”
집정관의 물음에 카이사르가 힘차게 답했다.
“예! 언제든지 가능합니다!”
집정관의 고개가 번에게 돌아갔다.
“번 황자님, 준비되셨습니까?”
이때, 집정관의 옆에 섰던 은사는 번의 눈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흠칫했다.
“······?”
체격이나 무력, 기세나 나이까지 어느 하나도 우세할 게 없는 저 작은 황자가 눈빛만큼은..
‘기이하군.’
저건 마치 전쟁터에서 굴러먹은 노련한 장수들이나 보일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뭐라고 하는 거지?’
번은 대답 대신 끄덕이며 작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게 은사의 귀에 들려온다.
-..생..즉..사..사..즉..생..
“······?”
은사의 미간이 좁혀졌다.
“제한시간은 10분! 기량을 마음껏 발휘해주십시오!”
집정관이 뒤로 물러나며 대련의 시작을 알렸다.
-우와아아아아아아!
-이겨라! 이겨라!
은사는 스윽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며 녀석의 중얼거림을 확인했다. 이런 중요한 순간에 자꾸 뭐라고 하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필사즉생必死則生 필생즉사必生則死..
죽고자 하면 반드시 살 것이오, 살고자 하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
기특한 생각이었다. 은사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어린 녀석 주제에 독기 봐라? 이런 마음가짐이라면 두려움은 충분히 몰아낼 수 있으리라! 그러나 번의 중얼거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일부당경一夫當逕 족구천부足懼千夫.
은사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이건..?’
죽기로 싸우고자 한다면, 한 사람이 지켜도 천 사람을 당해낸다는 뜻. 지난 전투에서 벨버른의 왕이 불타는 성에 홀로 서서 수만의 철鐵의 군대를 앞에 두고 외쳤던 말 아닌가?
‘이놈 봐라?’
은사는 점점 녀석에게 호기심이 가기 시작했다. 과연 저 녀석이, 그 마음가짐을 증명할 실력이 쥐뿔이라도 있을까?
이때였다.
돌연 중얼거림이 멈췄다.
꾹 다문 입은 절대 벌어질 것 같지 않았고, 두 눈은 벼락이 쳐도 꿈쩍하지 않을 기세다.
"후우.."
번이 심호흡을 크게 한번 내쉬더니, 왼팔을 뻗어 카이사르를 향했다. 그러더니 손바닥을 펼쳤다가 모아 접는다.
까딱, 까딱.
“······!”
고수가 하수에게 흔히 쓰는 도발이었다.
“이, 이노오오옴!”
생각지도 못했던 수작에 카이사르는 머릿속에서 뭔가가 투욱 끊어지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