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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좌의 게임-29화 (29/177)

# 재능이란 #

“우선 경연에 앞서, 황제 폐하께서 당부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의례적인 일이었다. 물론 황제의 성격상 1시간씩 훈시를 늘어놓거나 하진 않는다. 그의 성정이 그러하니 에비뉴 모든 공무원도 과한 미사여구 따위는 생략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찬란하고 위대한 대 에비뉴 황국의 거룩한 존엄 어쩌고..’ 하는 것들 말이다.

“크흠, 당부까지야.”

집정관에게 손을 들어 보이며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기심 가득한 군중의 시선과 긴장 바짝한 황자들의 눈. 거기에 황비들의 조마조마한 심정까지 전해져온다. 그런 모든 것을 담담하게 가벼운 미소로 씹어 깨무는 이 남자.

“대련에 앞서, 몇 가지 일러둘 것이 있다.”

이 존재감은 쉽게 만들어진 것이 아닐 것이다.

“경청하겠나이다.”

모두가 일어나서 허리를 숙였다.

강요한 것이 아닌, 절로 복종하게 되는 위엄. 이것이 철鐵의 군대를 이끄는 군주의 진면목이었다.

“오늘 경연은 우물안 개구리를 뽑으려는 게 아니다. 개인의 무력이 얼마나 뛰어나는가는 병사 몇을 붙이면 쉽게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니.”

그랬다. 어쩌면 후계자를 뽑는 '대련'이라고 하는 이 시험은 애당초 어불성설이었다. 나이 차에, 체급도 각기 다른 황자들을 토너먼트 방식으로 가는게 가능하냐는 거다. 또한 사고라도 번져 팔다리라도 상하면 어찌할까? 눈 같은 곳이 다쳐 병신이 되면 후엔 어찌해야 할까. 고작 경연이 이 모든 위험을 감수할만한가 말이다.

“죽느냐 사느냐는 한순간이다.”

하지만 이 남잔 다르게 생각하고 있었다. 사지 하나 잘리는 것쯤은 그에게 늘 벌어지는 일상다반사였으니까.

“나는 수많은 전장을 다니며 깨달았다. 이기고 지는 갈림길에서 승부를 결정짓는 가장 큰 요인이 뭘까?하고 말이다. 싸움에 패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만큼 서로 노력하고 준비하지. 하지만 결국, 이기는 쪽은 하나. 그러하면 과연 승리엔 무엇이 필요한가?”

황제의 목소리는 독특했다. 버럭버럭 소리치는 것 같지도 않은데, 그의 목소리는 이 넓은 콜로세움의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갔다. 이것이 마나의 힘이었다. 이 모든 것은 자연에 포함되니, 마나는 바람을 타고 그저 흐르는 것이었다. 이치를 파악하고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그. 황제의 경지를 엿볼 수 있는 순간이었다.

“카이사르.”

-예! 폐하!

“너는 뭐라고 생각하느냐?”

갑작스러운 화살에 카이사르는 잠깐 당황했지만, 곧 우렁차게 대답했다.

-압도적인 힘이옵니다!

“양쪽의 힘이 같다면?”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입니다!

“······.”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다지 와 닿지도 않았는지 황제는 흐음, 가벼운 숨을 뿜더니 시선을 찬찬히 돌렸다. 아비의 호응이 없자, 아들의 눈매가 찌푸려졌다.

주욱 늘어선 일곱 황자. 모두가 그의 자식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그들을 일반적인 아비와 아들의 관계로 본다면 곤란하다. 그는 사자였으며, 저 녀석들은 절벽 아래로 내쳐진 새끼 맹수들이었다. 카이사르에서 떠난 눈길은 둘째를 지나, 넷째, 다시 넷째를 지나 계속 옆으로 떠나간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머무는 시선.

‘이놈이 계속 눈에 밟히는군.’

묘한 웃음을 참으며 황제는 말했다.

“번.”

-예! 폐하!

번은 마나를 사용할 수 없기에 목이 터질 것처럼 있는 힘을 다해 대답했다. 그 모습조차 기특해 보인다.

“네가 말해보라.”

황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번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을 쏟아냈다. 워낙 큰 소리로 말을 해야 했기에 한 글자 한 글자에 힘을 실었야 했지만, 또박또박 씹어뱉는 듯한 그의 독특한 음성이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라 했습니다! 두 세력의 힘이 비등하다면 적을 좀 더 잘 아는 쪽이 승리할 것이며, 그것으로 인한 자신감 또한 사기에 영향을 미치니, 단순히 하나를 얻는 것이 아닌 둘, 셋 이상의 이점을 포함할 것이옵니다!

이 역시 원하는 답은 아니었으나, 아주 기묘했다. 지피지기백전불태라? 참으로 좋은 말 아닌가? 뭐, 어느 책에서 읽은 것을 꺼내왔을 테지만, 참으로 공감 가는 말이었다. 그래서 더 들어본다.

“서로 알 수 없다, 가정한다면?”

-그렇다면 순수하게 100대 100의 무력이 충돌하게 될 것입니다. 지형적, 군세적, 지휘관의 능력 여부나 천재지변에 상관없이 맞붙게 된다면 남은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모두의 시선이 번에게 집중되었다. 궁금한 거다. 이 꼬마가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사기와 공포! 그것이 승리를 판가름할 것입니다!

워낙 거리가 멀어 다른 사람은 못 봤지만, 황제의 미간이 꿈틀하는 것을 번은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 빠르게 말을 잇는다.

-시장바닥 일대일 막싸움이라면 모를까, 군대는 보이지 않는 힘이 크게 작용하는 집단입니다. 쉬운 예로 대륙의 모든 적은 철鐵의 군대가 가진 용맹을 두려워하고 있을 것입니다. 싸우기도 전에 겁을 집어먹을 것이며, 그것이 그들의 다리를 굳게 하고 공포는 전염되어 타인에게 똑같은, 아니 더 극심한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이길 수 없어! 벨버른도 함락되었다잖아! 다음은 우리야!’ 이미 한번 파고든 의식은 절로 패배를 연상하게 할 것이며 이것은 향후 있을 전투에 판도를 엎을 강력한 동기가 될 수 있습니다.

확실히 난 놈이다. 정답의 유무를 떠나, 지금 이 자리의 수만 군중이 모두 저놈 하나의 얘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그 어떤 위엄도, 권력도 없는 주제에 말이다. 거기에 철鐵의 군대까지 교묘하게 섞어서 이야기하니, 녀석의 말을 부정하면 황국을 욕보이게 되는 기분까지 들게 했다.

‘영악한 놈이라..’

보면 볼수록 저 작은 머리통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들여보고 싶을 정도다.

“우리가 이번에 얻고자 했던 것을 정확히 짚어내고 있군요.”

귓속말처럼 낮은 음성이 황제의 귀를 간지른다. 돌아보니 스캇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쿡쿡 웃으며, 뱀처럼 눈을 뜨고 있었다.

그랬다. 번이 이야기한 것은 정확했다. 큰 손해를 입으면서 어떻게든 진격해 승리를 취하며 얻은 이득. 이번 원정이 길어진 이유였다.

“내 뒤에서 그렇게 웃지 말라니까. 재수 없다.”

“예이..”

“웃지 말라고.”

“예이..”

낮은 음성으로 으르렁대지만, 말해도 들어 처먹을 놈이 아니다. 황제는 머리를 가볍게 흔들며 다시 번에게 얼굴을 돌렸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그러하면 너는 그 사기를 이어가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번의 눈이 반짝였다. 대화라는 건, 하다보면 상대가 어떤 질문을 하길 기다리는 상황이 오게 된다. 내가 준비한 패가 반드시 통할 것을 아는데, 저쪽에서 포석을 깔아줘야 내놓을 수 있는. 조건 제한부 히든카드랄까?

그것이 지금 왔다.

-한 장수가 있었습니다.

번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는 용맹했고, 철저했으며 누구보다 부지런했고, 노력했습니다.

사람들은 번에게 집중했다.

9살짜리 아이가 콜로세움 중심에서 너무도 진지한 얼굴로 목이 터질 것 같이 외치는 모습은 가히 진풍경이었다.

-하지만 군주는 질투에 눈이 멀어 그를 시기했고, 그를 사지로 몰아 내세웠습니다. 이길 수 없는 전장, 그는 군주를 위해 알면서도 나섰습니다. 모두가 질 것이라 했습니다. 세상은 그가 이기지 못할 것이라 했습니다.

번은 잠시 말을 멈추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무려 만 명 이상이 모인 자리에서 이리도 고요함을 느낀다는 것은 쉽게 할 수 없는 경험이자 전율이 일어날 정도의 오싹함이었다.

-그러나 그는 승리했고, 그의 군사들은 사기충전하여 도망치는 적을 뒤쫓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가슴에 눈먼 화살이 날아 박혔고, 그의 심장은 뚫렸습니다. 결국, 그는 쓰러졌습니다.

번의 말투가 어찌나 안타까운지, 듣는 이의 한숨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군주가 죽으라 사지로 몰아넣은 장수.

“으음..”

이제까지 황제의 뒤에서 묵묵히 서 있던 무장武將 딘딘의 입에서도 가느다란 신음이 흘렀다. 그 마음이 공감되었으리라.

-부하의 품에 안겨 죽어가며 그는 말했습니다.

여기까지 조용히 듣던 황제는 돌연 물었다. 이건 그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가 뭐라 했느냐?”

번은 말을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아버지를 가만히 바라보면서 말이다.

“······.”

황제는 답답함을 느끼며 이마를 구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당돌한 놈이? 라는 표정으로 번을 노려보았다. 지지 않고, 눈을 맞추던 번. 드디어 입을 열었다.

-죽기 전, 장수는 말했습니다.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

가슴을 울리는 목소리로 번이 황제의.. 아니, 모두의 갈증을 풀어주었다. 조금만 늦었다면 답답하구나! 빨리 말해 보아라! 사방에서 이런 말이 터졌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죽었습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휘관이자, 무인의 마지막 유언이, 번의 입을 통해 이 세계에 나왔다.

“으음..”

황제. 그리고 그의 뒤에 선 스캇과 딘딘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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